사랑이란 얼마나 난감한가? 연약해서 꽉 쥘 수도 없고 풀어 두자니 빠져나갈 구멍이 너무 많아 두 사람이 지키기란 거의 불가능한 것이 아닐까. 더구나 시간이라는 저항에 끊임없이 마모된다면 더욱 말이다. 여기 한 여자와 한 남자가 있다. 이 작품은 28년 동안 감옥에 있었던 남자와 그를 16년 동안 기다렸던 여자의 이야기이다. 남자에겐 28년 동안, 여자에겐 16년 동안, 현재라는 하나의 시간이 계속되었을 것이다. 한 줄에 꿰어지는 목걸이처럼, 연못에 떨어지는 빗방울처럼 하루하루가 어디로도 사라지지 않고 치밀하게 몸 안에 재였을 것이다. (그렇게 만난 이들이니 당연하게도) 제대로 눈을 마주치는 것조차 어색한 두 사람, 어렵사리 선문답같은 이야기만 나누고 마는 것으로 극은 시작된다. 대체 그들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젊은 시절 미국을 상대로 한 오키나와 탈환 투쟁시위에 참가한 이유로 교도소에 수감된 후 28년을 보낸 남자가 있다. 그리고 정치적인 신념을 위해 그의 석방을 돕던 여자는 16년전 그와 옥중결혼을 한다. 극의 현재는 갑작스레 재심에서 감형 판결을 받고 풀려난 남자가 여자의 집으로 들어온 시점에서 시작된다. 결혼 16년만에 처음으로 단 둘이 있게 된 남자와 여자가 관계를 맺어 가는 이야기이다. 미국을 상대로한 일본의 투쟁이라는 정치적인 이유가 극의 저변에 깔려 있지만, 이념과 정치적인 정당성의 여부보다는 남자와 여자의 심리적인 흐름에 극은 직접적으로 시선을 두고 있다. 사회적인 정의를 바라보기 위해서, 개인의 삶을 조명하는 것이다.
사카테 요지가 워낙 사회적이고 투쟁적인 작가이기도 하고, 극의 시대적 배경 또한 그래서 작품이 어렵진 않을까, 지루하진 않을까 우려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극은 무겁지 않았고 그래서인지 생각보다는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물론 이념과 투쟁을 담은 사회성 짙은 대사들은 (직접적으로 그런 시대를 통과하지 않은 내가 보기엔) 그 특유의 불편함과 이물감이 느껴질 수밖에 없다. 반미 감정이나 사회적 대의를 위해서 개인이 희생하는 일을 과거에만 국한된 것으로 치부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동시대의 문제로 부각시키기엔 감정적으로 다가가기가 쉽지 않은 것도 사실이니깐 말이다.
사실 내용적 측면에 대한 관객으로서의 집착에서 벗어나면, 극은 조금 더 잘 보인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이 작품을 보면서 대사의 의미를 짚어내어 가면서 머릿속에 담으려고 하지 않고, 적당히 뭉텅 뭉텅 날려가면서 봤다. (표현이 그다지 적합한 거 같지는 않아서 살짝 보태자면, 대사의 사실성과 함의에 주의를 기울이려고 하기보다는 대사가 보여주려는 직접적인 감정에 관심을 두었다는 말이다.)그 이유는 물론, 감춰진 사회 이면의 문제에 대해 예리하게 통찰할 수 있는 능력도 없거니와, 그런 식으로 분석할 내공도 딸리는 까닭이다. 다행히도 극은 대체로 사회적인 의미를 강조하기보다는 가볍게 풀어서 진실의 이면에 다가가려고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심각한 장면을 예상한 관객에게 사소한 것으로의 관심전환에서 비롯되는 웃음을 야기 시키는 대목도 꽤 있어서, 자칫 단조로운 동선과 쉴틈없이 쏟아지는 대사들 때문에 지루해질 수도 있던 극을 적절하게 이완시켜 주었다.
실제 주인공 남자는 일본에서 아직도 무기수로 감옥에 복역 중이고, 그와 옥중 결혼한 여자는 여전히 남자의 구명운동을 펼치고 있다고 한다. 아마도 그(를 비롯해서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의 마음 한 가운데는 텅 비어 있을 것이다. 아무리해도 그 텅빈 부분은 채워지지 않을 것이고. 아무리 해도. 라는 건 너무 슬픈 말이다. 한 개인의 삶에 사회가 책임져야 할 깊은 상흔을 남긴 것에 대한 분노는 현재 진형이라는 말이다. 우리의 과거사이자 그가 살았던 모순의 시대에 대한 그것은,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공감되긴 힘들겠지만 한번 돌아볼 필요는 있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그게 이 작품을 올리는 의미가 될 것이고 말이다. 그러니까 현실적으로 그가 겪은 상흔은 아직 치유되지 않았다. 하지만 작가는 개인의 삶을 통해 사회의 모순을 완곡하게 드러내면서, 그 개인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고 싶었던 것 같다.
언제까지나 절벽처럼 활짝 벌어져있을 것 같았던 검붉은 상처도 메워져 그 위로 발이 딛어질 것이다. 결빙되었던 피는 따스하게 흐르고 그의 동창도 어느 사이 아물게 될 것이다. 여자와 남자의 사랑은 그런 치유의 시간인 것이다. 감옥에서는 맘대로 불을 끌수도 없다고 한다. 수감된 이들은 누군가에게 항상 감시를 받는 존재라는 말일 것이다. 그속에선 누구든지 이름이 아니라 수감번호로만 존재하는 것처럼, 스스로의 존재성을 찾는 것이 의미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타자의 시선을 통해서만 존재하던 자가 오직 스스로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시간은 쉽지 않다. 남자는 자꾸 숨으려고 하고, 피하려고 하고 혼자 있으려고 한다. 여자는 그런 그를 이해하다가도 어느 순간엔 언성을 높이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여자는 남자의 존재 자체에 필연성과 자긍심을 부여해 줄 것이다. 그리고 그제서야 흩어지는 구슬처럼 하루와 하루가 망각속으로 지워지던 남자의 날들이 멈추게 될 것이다.
김광보 연출의 말대로, 쉽지 않은 시대를 통과해온 남자의 상처에 새살이 돋을 수 있도록 도와준 건 여자의 사랑이다. 그리고 역시 감옥에서 그를 보살피며 치열하게 살아온 여자가 남자를 보듬을 수 있었던 것 또한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가테 요지는 일본에서 공연 되었을 당시에, 반미문제 같은 내제된 사회문제보다는 단순한 사랑이야기로 보는 시각이 더 많아 아쉬워했다고 한다. 물론 이 작품을 '단순한 사랑이야기'로 치부해서는 곤란하다. 그렇지만 여자와 남자의 사랑이 극의 중심에 있어서 이 모든 힘든 시간을 겪어낸 이들의 상처를 치유해내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들의 만남과 관계에서 비롯된 심리적인 긴장감이 극의 저변에 깔린 사회적인 이념에 대해서 충분히 설명해주는 것이고, 나는 이 작품이 그런 역설적인 방식으로 읽혀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첫댓글 refration님, 요새 혹시 김광보 연출을 도와서 일하고 계신 것은 아닌지요? 많이 바쁜가요? 오랜만에 와서 정말 반갑습니다... 개인적으로 집을 화정에서 대화로 이사하고, 할 일없이 바쁘다가 새해를 벌써 2 달이나 까묵었답니다 ㅋㅋ 묵직한 주제로 중장년층을 다시 대학로로 데려오고 싶어하는 연출가의 뜻대로 올 해는 연극을 사랑하는 마음이, 적어도 한국적 뮤지컬 속에 뿌리가 어디 있는지 살펴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