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재 허백련(毅齊 許百鍊. 1891~1977) (근대 한국화가 6)
허백련(1891~1977)은 전남 진도 출생으로 1910년 일본 메이지대학 법과 3년을 마치고 그림 공부에 전념하여, 1920년 목포에서 첫 개인전을 열면서 화가가 되었고, 1935∼1937년 조선 미술 전람회에 계속 1등으로 입상하면서 유명해지기 시작하였다.
1953년 광주농업고등기술학교 교장이 되어 학생들을 가르치는 데 힘썼다. 그 뒤 국전 2회 때부터 13회 때까지 심사위원을 지냈고, 1958년 예술원 종신회원이 되었다. 시·글씨·그림에 뛰어난 능력을 가진 남종화(南宗畵)의 대가로 손꼽힌다.
종고조이신 소치는 세필을 싫어했으며 형상보다 뜻을 더 중요시한 반면 의재는 한국남종화의 대가로 화법은 소치에 그 뿌리가 있지만 그림보다 화찬을 더 중요시한 의재는 화찬을 정한 후 붓을 들었다 한다.
이것은 문인화의 시, 서, 화 3절 사상으로 시와 서를 우위에 놓기 때문이다. 특히 의재의 산수에서는 밋밋한 황토산이 자주 나타나는데 이것은 전라도 산의 진경을 그린 것으로 1951년 이후 더욱 강하게 나타난다.
그는 대한민국예술원상에 이어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수여되었으며 대표작으로 "계산청하(溪山靑夏" 등 유명한 수많은 작품들이 있다.
山水圖 額子, 紙本淡彩, 178× 97cm
1932년(壬申) 가을에 그린 대작으로 중봉(中峯)을 화면 중심에 근경·중경·원경을 계단식으로 그린 도식적인 작품이다. 소위 남종문인화풍(南宗文人畵風)으로 실경산수화보다 이상향(理想鄕)을 그린 관념(觀念)산수화이며 잘 그렸다고 한다.
의재는 산수화 외에 사군자화·화조화·기명절지화 (器皿折枝畵) 등도 잘 그렸고, 후진양성에도 심혈을 기울여 연진회(鍊眞會)를 발족시키는 등 호남화단의 영도자가 되었다.
계산청취(溪山淸趣)
산수도
연강첩장도동양화가 1932년. 지본수묵. 330 ×136 cm
월강 1940년. 수묵담채. 45 ×32.5cm
산수도 1970년. 지본담채. 138.5 ×68 cm.
추경산수
하경산수(夏景山水)
십곡산수병풍(十曲山水屛)
청풍명월(淸風明月)
국향도(菊香圖)
묵란도(墨蘭圖)
노포추용(老圃秋容)
연희춘풍
노포추용(老圃秋容)
매화도
월하단심
농경도(農耕圖)
의제가 무등산에 기거하다 타계까지 30여년간 춘설헌은 그의 작은 우주이자 화실로 시인 묵객들의 발길이 잦은 문화의 산실이었다. 의제가 남종화의 화풍을 전수하며 후학들을 길렀던 곳으로 사시사철 차 향이 계곡의 물소리와 함께 섞여 마르지 않는 곳이다.
의재는 이당 김은호를 비롯한 친구들이 서울에 올라와 조선미술관을 만들어 보자는 권유를 뿌리치고 연진회를 생명처럼 아꼈다. 그는 항상 "그림을 그리는데 서울과 시골이 따로 있는가. 중국에서도 남종화는 강남지방에서 꽃피우지 않았는가?"라고 강조하며 이 곳의 화가들에게 자신의 화법과 화론을 전수, 남종화의 일가를 이루었다.
의제는 산 기슭에 차나무를 가꾸어 가공한 차를 춘설차라 이름하였다. 의제는 주위사람들에게 늘 차의 생활화를 강조하며 차나무의 곧은 마음을 좋아했다. 그래서 자녀의 결혼식 폐백도 술 대신 녹차를 이용했다. 차나무는 옮기면 죽는다고 한다. 이처럼 결혼했으면 한 곳에 뿌리를 내리면 백년해로 하라는 뜻이다.
의재미술관 사이트 남농기념관 사이트
남농 허건은 전남 진도에서 출생하였으며 1927년 목포상업전수학원을 수료하였다. 1930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첫 입선하고,1944년 동 미술전람회에서 특선, 1951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추천작가. 1960년 동 미술전람회 심사위원으로 위촉되었다.
1976년 남농상(南農賞)을 제정하고 같은 해 대한민국 문예예술상을 수상하였다.1982년에는 대한민국 은관(銀冠) 문화훈장을 수상하고, 1983년 대한민국예술원 원로회원에 피선되었다.
남농 탄생 100주년 기념전시회에서 남농 작 '취우후(驟雨後)'
남농은 조선 후기 소치(小癡) 허유(許維)를 할아버지, 미산(米山) 허영(許瀅)을 아버지로 하는 3대째의 화맥을 이어온 조선 후기에서 근대와 현대에 이르는 남종화 역사의 산 증인이라고 할 수 있다
운림산방화맥도(雲林山房畵脈圖)
운림산방 전경
소치 200년 운림 이만리’전
조선 남종문인화의 거장인 소치 허련과 5대에 이르는 후손의 화맥을 한눈에 보는 자리. 총 100여 점의 작품이 2008년 12월 27일부터 2009년 2월 1일까지 서울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서 열렸다
1. 소치 허련, ‘묵매도’, 종이에 먹, 50x183㎝
남종화는 문인정신을 수묵담채 작품으로 중국 명나라 부터 원 말기를 전성기로 본다. 소치라는 호는 원 말 4대화가로 꼽히던 황공망(黃公望 1269~1354)의 호가 대치(大痴)인 것에서 따왔다. ‘묵매도’는 줄기는 거칠고 강렬한 필치로 꽃잎은 경쾌하게 묘사해 대비를 이룬 작품으로 소치는 헌종 앞에서 그림을 그린 최초의 화가이다.
2. 미산 허형, ‘산수도 12곡 병풍’ 부분, 비단에 수묵담채, 74x32㎝
화업을 이을 것으로 기대했던 큰아들이 요절하자 소치는 안타까워했다. 넷째 아들 허형은 풍채가 없어 머슴처럼 일만하며 살았는데 어느 날 그의 재주를 발견하고 큰아들에게 줬던 미산이라는 아호를 이어받았으며 가세가 어려워 다작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3. 의재 허백련, ‘산수도’, 종이에 수묵담채, 63.5x65.2㎝
소치의 방손으로 1914년부터 운림산방에서 미산과 무정 정만조에게 그림과 한학을 공부했다. 일본 남화의 대가 고무로 스이운(小室翠雲)을 만나 본격 정진했다. 의재는 고법 연마를 통해 시서화 일체를 근간으로 남종화의 근대화를 구축한 인물로 산수도’는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이며 독수리를 잘 그리기로도 유명하다.
4. 임인 허림, ‘화조도 10곡 병풍’ 부분, 비단에 채색, 103.5x32.2㎝
미산의 다섯째 아들로 18세부터 23세까지 연 6회에 걸쳐 선전(鮮展)에 입선했다. 일본 가와바다화(川端畵)학교에서 채색 중심의 감각적 일본화풍을 익혔다. 41년과 42년 문부성 전람회에서 입선하는 재주를 보였지만 과로로 25세에 요절하였다. ‘화조도 10곡 병풍’은 20대 젊은이가 그린 것이라고는 보기 힘들 정도로 천재성이 엿보인다.
5. 남농 허건, ‘서귀포 풍경’, 종이에 수묵담채, 60x240㎝
가난하여 중학교에 입학하지 못한 남농은 소치와 미산의 그림을 연구하며 실경사생에 몰두하여 1944년 마지막 선전에서 최고상인 조선총독상을 받았다. 56년 목포 유달산 아래 정착후 국전 초대작가, 예술원 원로회원 등을 지내며 갈필산수에 매진했다. 1981년 수석 2000여점과 그림을 목포시에 기증한 데 이어 82년에는 운림산방을 복원했다.
그림뿐 아니라 손재주도 뛰어나 의족을 직접 만들어 사용할 정도였다. ‘서귀포 풍경’은 보통 산수화에서 보기 힘든 바닷가 풍경으로 찐득찐득한 펄의 느낌이 살아 있다.
6. 임전 허문, ‘산수도’, 종이에 수묵, 44x176㎝
임전 허문은 아버지 임인의 요절로 일곱 살 때부터 백부인 남농 밑에서 자랐다. 전래 남종화법을 중심으로 하면서도 독특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안개화가’라는 별명답게 ‘운무산수’를 그리고 있다.
7. 허진 ‘유목동물+인간 2007-20’, 한지에 수묵채색, 120x162㎝
현실 사회의 부조리와 탐욕·혼란을 현대적 수묵채색 필법으로 그리고 있다. ‘유목동물+인간’ 연작은 아프리카 초원을 돌아다니며 자유롭게 사는 맹수를 통해 원시적 야성과 자유를 추구하는 작품이다. 그의 작품에서 인간은 중심이 아닌 주변적 인물이며 현재 운림산방 방장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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