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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기 안테나「Yagi Antena」 비사
지금은 거의 기억하는 사람들도 점점 적어지는 듯하나, 예전에 이사할 때에는 필수적으로 누구 나가 지붕이나 옥상에 올라가 TV안테나 떼어내고, 붙이고 했던 적이 있었다. 한옥의 지붕은 기와로 되어 있어 기와를 깨드리고 했으며, 비가 오면 안방에 빗물이 새기도 해, 대야로 여기저기 받혀 두기도 했었던 기억이 있다.
이것은 八木, 宇田 안테나(Directive Short-Wave Antenna)를 사용한 파장 45센티 UHF송수신기이다. 1929년 약 20킬로의 송수신에 성공했다. 그리고 1930년 벨기에서 개최된 만국박람회에 출품했던 기념할만 한 장치임.
야기 히데즈구(八木秀次)는 1886년 오사카에서 태어나, 구 동경제국대학교 전기과를 졸업하고, 현 센다이(仙台) 동북대 공학부에서 강사로 근무했다. 혼다 코우지로우(本多 光次郞)로부터 그 재능을 인정받아 1913년부터 독일, 미국, 영국으로 유학을 허가받았다.
유학 중, 독일에서는 전기공학부의 발크하우젠으로부터 「전기진동」을 배우고, 영국에서는 플레밍에게 사사했다. 그는 「플레밍의 오른손, 왼손의 법칙」과 「이극진공관」의 발명으로 알려진 세계적인 과학자였다. 야기 히데즈구(八木秀次)씨는 이번 유학에서 무선통신과 진공관의 연구에 그의 생애를 걸기로 다짐했다. 귀국 후 1919년, 동북제국대학교에 신설된 공학부의 교수로 취임해, 전기에 관한 논문을 정력적으로 발표해, 그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더욱이, 센다이(仙台)의 자본가, 사이또우(齊藤 善右衛門)가 후원을 약속했으며, 이것을 받아들여 야기 히데즈구(八木秀次)는 초단파의 빔과 무선 조정의 연구에 전념했다. 그래서 1926년 야기(八木) 연구실에서 「야기 안테나」가 발명되었고, 야기(八木)는 곧 일본과 영국에 발명특허를 받았다.
「단파장 전파의 발생」과 「단파장에 의한 고유파장의 측정」이란 논문이며, 이 논문의 이론을 기초로 Yagi 안테나의 기본이 되는 「전파 지향방식」을 발명특허(特許 第69115號, 1926년)로 받았다. 현재 가정의 TV 수신 안테나, 공항의 레이다는 이 기술을 적용한 것이다.
이 안테나의 발명 동기는 3년 전에, 어느 학생이 졸업연구로, 파장측정기를 어느 조건에서 사용하면 수파기의 출력이 비정상으로 증가하는 현상을 우연히 관찰한 적이 있었다. 이 현상에 흥미를 가진 야기(八木)는 이론적인 예측을 주고, 강사인 우다 신따로우(宇田 新太郞)에게 그 이론적, 실험적 연구를 권했다. 우다(宇田)는 연구를 진행한 결과, 실험적 증거를 파악했다.
앞 열 중앙이 우다 신따로우(宇田 新太郞, 1896-1976) 박사
1928년 야기(八木)와 우다(宇田)는 공동의 이름으로 논문을 발표했으나, 특허는 야기(八木)의 단독으로 국내외에 출원한 관계로 「Yagi Antena」로 이름으로 세계에 알려지게 됐다.
TV수신용 Yagi-Uda Antenna. 상단은 VHF용, 하단은 UHF용
이 안테나를 간단히 설명하면, 일정 방향으로부터 오는 전파를 빠짐없이 수신한다든가, 반대로 일정방향으로 효율 높게 전파를 보내도록 금속의 막대기를 배치한 것이다. 즉, 레이더로서 활용이 가능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 야기(八木)들의 발명품은, 당시 일본에서 별로 평가를 받지 못했으나, 미국과 영국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았다. 특히 영국에서는 레이다의 개발에 공헌한 큰 원인이 되었다.
그의 공헌에 대한 에피소드를 소개하고자 한다.
1941년에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개시, 싱가포르를 공략했을 때, 영국의 레이더 2대와 레이더 병이었던 레만 하사관의 노트를 발견했다. 이 노트에는 레이더의 성능과 취급 설명서가 자세히 쓰여 있었다.
당시, 레이더는 개발, 실용화 된지 얼마 되지 않아, 각국은 고성능 레이더의 성능 향상에 전력투구할 때여서, 이 노트는 즉시 복사되어, 육해공군 등의 관계기관으로 배부되었다. 내용을 해독 중, 문장 속에 「YAGI」란 단어가 나와, 사전을 찾아 보아도 그 뜻을 알 수 없어, 레만 하사관의 레이다 병을 직접 신문하기로 하였다. 이때 레만 하사관은 놀라운 표정으로, 「정말로 모르느냐? 이것은 이 안테나를 발명한 일본인의 이름이다.」 라고 대답했다.
일본에서 태어난 하이테크 기술이 세계 기술개발의 최첨단을 달리는 것을, 정작 일본 자신들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였던 것이다. 커다란 실수였다.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군은 레이더의 개발에 뒤떨어져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 「YAGI」안테나의 존재를 모른 체...
이 신문 결과에 놀란 일본군은, 사건의 중대성을 인식, 급거 「Yagi Antena」의 개발에 착수했다. 그러나 때는 너무나 늦어 완성한 것은 1945년이 되어서였다. Yagi-Uda antenna
전쟁에는 아무런 도움이 못 된 체 패전을 맞이했다. 물론 개발자인 야기(八木)씨는, 사전에 군부에 출두해 정보기구의 중요성과 안테나에 관해 진언했었다.
그러나 당시의 군부는 정보기기의 중요성을 그다지 인식하지 못했다. 적국이 「Yagi Antena」의 진가를 알아보고 실전에 사용한 이후에야 겨우 알아보았던 것이다.
일본의 2차대전 패전 이유는 「물량의 차이」인 동시에, 미국의 「국력의 차이」가 원인으로 작용했다고 분석되기가 쉽다. 분명히 제1의 원인은 거기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보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한 차이에서 왔다는 것도 부정할 수는 없다. 「야간, 적의 비행기나 군함을 발견하는데, 어두운 밤중에도 눈이 잘 보이는 병사에게 쌍안경으로 감시시키고, 시력에 도움이 된다는 비타민 A가 풍부한 당근을 많이 먹였다.」고 하는 태도였다.
제2차 세계대전 때의 독일에서 개발한 쌍발 프로펠라 전투기. Bf 110(Messerschmitt AG, 독일 항공기 회사)에 「Yagi-Uda Antena」의 레이더를 장착한 모습.
미군도 이때 「Yagi Antena」의 장비를 개발해, 공격하는 일본의 비행기를 300킬로 전방에서 레이더로 포착해 격추했으며, 또 암호해독에도 뒤져서, 적에게 암호가 누설된 미드웨이 해전에서 패하고, 야마모또 이소로쿠(山本五十六) 연합함대 사령관의 탐승기가 매복당해 격추 당하기도 했다. 기술이나 정보를 경시한 것이 패전으로 이어져, 많은 인원을 잃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이때 일본의 국내에서는 「Yagi Antena」를 장비한 미군에 의해 참패한 원인이 야기(八木)에게 향해졌으며, 발명자 야기 히데즈구(八木秀次)는 적지 않은 냉대는 받았었다. 비싼 수업료를 지불한 전후, 평화 국이 된 일본은 기술입국으로 발전해 가게 됐다. 그리고 기술입국의 원류가 된 하나가 「야기, 우다 안테나」이다.
八木/宇田씨에게 안테나의 연구에 대한 공로로, IEEE(미국전기전자학회)는 동북 대학교 교내에 기념비를 세웠다.
이런 일화가 있다. Yagi 안테나의 특허를 정부가 소멸시켜 버려, 또 외국 특허보유의 재정지원도 하지 않은 체, 푸대접으로 일관한 이유로 일본의 안테나 특허가 소멸해 버렸다.
그런데 전후 얼마 지나지 않아 TV가 전세계에 보급했을 때, Yagi 안테나도 동시에 급속히 보급되었다. 왜냐하면, VHF TV의 전파를 수신하려면 Yagi 안테나 이외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이때 이 특허관리를 제대로 하여 일본이 계속 확보하고 있었다면 틀림없이 Yagi 안테나에서 막대한 특허료 수입이 발생했을 것이다.
야기(八木)의 공적에는 안테나 이외(以外)에, 가정에서 사용하는 전자레인지로 사용하는 마이크로파를 발생하는 「마그네트론」(magnetron)의 연구도 있다. 그 자신의 최대의 업적이라 공언한 것은, 나중에 오사카 제국대학의 조교 시절, 강사였던 유가와 히데키(湯川秀樹)의 「중간자론, 中間子論」을 이해시켜, 이것을 공표시킨 일이었다. 즉, 1949년11월4일, 일본 최초의 노벨상인 노벨 물리학상을 받게 한 일등 공신인 셈이다.
야기 히데즈구(八木秀次)는 1942년에 동경 공업대학교 학장으로 취임, 1944년에는 내각 기술원 총재에 취임했다. 그리고, 1946년에 오사카 제국대학 총장에 취임했으나, GHQ의 공직 추방자 지정을 받아 사직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일본 아마추어 무선회장에 취임했다. GHQ는 병기와 같은 기술개발을 금지하고 있었으며, 항공기 개발도 금지했다. 레이더의 안테나의 세계적인 발명가 야기 히데즈구(八木秀次)씨가 공직에서 또 다른 연구를 할까 보아 그것을 저지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일본정부는, 야기 히데즈구(八木秀次)씨의 공적에 대해, 1956년에는 문화훈장(文化勳章)을, 1976년에는 훈1등 욱일대원장(勳一等旭日大授章)을 수여하여 그의 공로를 치하했다. 문화훈장이 결정되자 야기씨는 과거의 아픔이 되살아난듯 「옛날에는 공직 부적격자로서 추방하더니, 지금은 훈장을 준다고 한다. 국가란 알 수 없는 일을 하고 있다.」며 시큰둥하였다.
[야기(YAGI)씨의 약력]
* 1952년, 八木 안테나 주식회사 발족.
※ 자료출처 : http://kr.blog.yahoo.com/wsshimtw/51.html
- 원본자료출처 -
* 「교과서가 안 가르치는 역사 」, 1996 발행 일본 "産經新聞".
만세 (2009.02.26, 09:39) : 창의적인 일 벌리고 욕먹는 게 한국인데 누가 연구를 하겠습니까?
keykey718 (2009.02.26, 12:10) : 우리나라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지요. 지금 우리가 마시는 우유나 쥬스는 젖지 않는 종이팩에 담겨있죠. 그걸 발명한 게 한국인인데 그분이 대기업을 돌면서 자신의 특허를 사달라고 사정했는데 모든 곳에서 문전박대를 받았지죠. 근데 어떤 외국회사가 그 기술을 사주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종이팩이 국내에서 선보였을 때 우리의 기업들은 발명자가 원했던 액수보다 훨씬 많은 로열티를 외국회사에 물어야 했읍니다.
keykey718 (2009.02.26, 12:22) : 그런데 가만히 보면 일본에는 대단한 인물이 많았던 것 같애요. 우리에게 제대로 소개가 안되어서 그렇지... 중요한 것은 위의 야기에 필적하는 능가하는 인물이 나와야 한다는 거지요.
원자력발전기 (2009.02.26, 13:29) : 한국 교육에서는 창의적인 생각, 아이디어가 나올리가 없지요. 이런 일방적, 억압적인 교육제도에서 무슨 창의력이 나오겠습니까? 한국 교육은 영재를 키우는 교육이 아닌, 일이나 열심히 처하는 노동자나 키우는 교육입니다.
원자력발전기 2009.02.26, 13:33 이렇게 창의적인 사고의 자유를 억압하는 한국에서 그러면 외국에서라도 영재, 또는 창의적인 인간을 받으면 되는데 그것도 안합니다. keykey718님의 예에 하나 더 추가 할게요. NASA에서 위성을 고치는 한국인이 있었습니다. 아시다시피 미국인은 젓가락을 사용하지 않고, 한국인은 사용합니다. 하지만 그 일이 정교한 손을 요구하기 때문에 젓가락에 익숙해있는 한국인이 일을 맡은 거지요.
원자력발전기 (2009.02.26, 13:34) : 하지만 NASA의 일을 그만두고 그 사람이 한국에 오자, 정부는 그 사람이 NASA에서 번 돈을 가져갔습니다. 그 분은 항의했지만 한국 정부는 무시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지금 일본에서 일하고 계십니다.
원자력발전기 (2009.02.26, 13:36) : 이렇듯, 창의력 사고를 지닌 사람을 키우지도 않고, 그렇다고 받아 들이지도 않는 한국... 21세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미 있고, 다른 사람들도 알고 있는 '지식' 이 아닌, 자신만이 만들 수 있는 '지혜'(창의력)라는 교훈을 한국은 모르고 있습니다. 아인슈타인도 '현대의 억압적인 교육이 학생들의 호기심과 창의력을 죽이지 않은 것만해도 기적이 아닐 수 없다.' 라고 말했습니다.
원자력발전기 (2009.02.26, 13:40) : 열심히 일해서 번 돈보다 남들이 모르는 나만의 아이디어로 창출하는 부가 435배나 되는 세상입니다. 물론 물건 무게 기준당 벌 수 있는 돈 기준으로 했습니다만... 한국 정부가 진정으로 경제적 부를 원한다면 이런 '창의력 죽이기' 교육부터 버려야 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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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역사의 아이러니 옛일본육군성에서 야기씨가 제안했던 고성능 안테나 관심가지고 실전배치 했더라면 세계역사가 바뀔뻔도 했었죠 결국 야기씨는 그 기술 모국에서 인정을 못봤자 2차 세계대전이전에
미국으로 건너가 그 기술로 군사용 야기안테나 만들어 조국패망의 선도적 역활 하였죠..
제가 토호쿠대학원을 졸업했는데요, 저위 사진에 보이는 기념비에서 한 100미터쯤에 대학 클럽 무선국이 있습니다. 그 대학의 무선부가 일본 아마추어무선 클럽국 제1호이죠. 콜사인은 JA7YAA. 제가 회원이었을 때도 학생 회원수가 대학대학원을 합쳐 10명이 안되었습니다. 그래도 해마다 컨테스트에 상위에 랭크되는 것은 치밀하게 준비하고 역할분담을 하여 각자 책임을 다하며 안테나 설비가 좋기 때문입니다. 7메가 이상은 모두 단축없이 야기안테나를 쓰며 30미터급 타워가 4개나 되는 등 굉장했죠. 7개 밴드별로 각각 리그가 있고 리니어앰프가 달렸으니 왼만한 방송국보담 크다는 우스개소리가 있었습니다.
역쉬~~ 빨간돼지님은 우리카페의 보배.
빨간돼지님께서 '네이티브 스피커'(일본말로 몰라서...)처럼 니혼고를 하시는 이유가 있었군요! ㅎㅎ
과학자의 발명품이 무선의 역사를 바꾸어 놓았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