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친구, 김홍
문기정 (동강대학교 유아교육과 교수 역임)
이른 아침 벨소리가 울린다. 어김없이 김홍 교수 다. 어제 있었던 일, 오늘 할 일, 그리고 못다 푼 문 제꺼리가 있으면 서슴없이 털어놓는다. 다른 분 이라면 성가시고 귀찮은 벨소리겠지만 내겐 반갑 고 사랑스럽다. 30년 지기이지만 우리가 이런 사이가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정년퇴임 후 네 사람이 정담을 나누며 산야를 산책하는 모임을 만들었다. ‘소요정담’이라 이름 했다. 만날 때마다 호칭이 거북하여 아호를 부르기로 했는데, 마침 김 교수는 아호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산책 중 내게 어떤 아호가 좋겠느냐고 묻기에 “김홍 교수, 언젠가 왕인유적지 천인천자 새기기, 김홍님이 새긴 못지(池) 따라 ‘뜰못’ 이라면 어떨까?” 했더니 그는 박장하며 좋아했다.
몇 년 전 영암 왕인 축제를 구경하다가 영암인물 1,000사람이 천자문을 한 글자씩 써서 걸어두었는데 김 교수는 못지(池) 자를 새겨 놓았다. 그 의미야 따로 있겠지만 ‘못지’를 택한 걸 보면 그의 잔잔하고 차분한 마음을 읽을 수 있어 좋았다. 소요정담 길엔 늘 남정네 네 사람이다. 뜰못(김홍)이 기둥 되고, 남곡이 받침 되고, 지석(김신운)이 빛을 내고, 해안(김충곤)이 채색하고, 지인들이 응원하면, 아름다운 글, 멋진 영상, 찬란한 그림, 짜릿한 우정이 늘 우리들 곁에 와 있다. 이렇다 보니 격의 없는 사이가 된 것이다.
소년 시절의 김홍 교수는 선비 할아버님의 교훈을 그대로 받아들인 듯싶다. 할아버님은 대 문장가에 서예 대가이셨으며 큰 손주 김 교수를 유달리 사랑하셨단다. 항상 홍익인간을 좌우명으로 삼고 손주의 이름조차 홍(弘)이라 하셨다.
“너의 이름 홍(弘)은 대한민국의 건국이념과 교육이념인 <홍익인간>의 정신이 들어있는 큰 이름이다. 그러니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할아버님은 당신의 서예 대작들을 모두 소각시키고 자신을 낮추며 세상을 뜨신 분이다. 기구한 운명은 6,25사변 중에 부친을 잃고 26세 홀어머니의 보살핌 속에서 자라게 된다.
그는 뒷동산 범 바위에 올라 월출산을 바라보며 호연지기를 폈다. 영암에서 태어나 초, 중, 고를 고향에서 수학하고 대학에 진학하고서야 광주에 진출한 영암 토박이다.
그의 체구는 우람하다. 어렸을 때 다진 월출산 기찬 체력과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체형을 지금껏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뭇사람을 금방 제압해버리는 강단은 그의 체구와 잘 어울리는 우레 같은 목소리가 한 몫을 더한다. 이 목소리 때문에 오해를 사는 일도 있다지만 나는 그의 우렁찬 포효가 늘 듬직한 것이다. 세상을 바로 보는 눈은 기자 생활을 동경하던 때부터였을 것이다. 교사로 사회에 첫발을 내딛었던 분이 갑자기 신문사로 방향을 전환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을 터이나 과감하게 진로를 바꾸어 사회의 公器로 나선다.
그의 진로는 다양했다. 대(大) 학원의 기획을 맡기도 하고 대학의 중심축이 되기도 하고, 그런 와중에 경영학 박사가 된다. 대학에 재직하는 동안에도 그의 눈길은 세상 속에 쏠려 있었다. 수백 편의 칼럼을 통하여 정화된 사회를 염원하였고 후진국 원주민과 소통하면서 우리의 문화를 전수했다.
우리는 김 교수를 ‘늦깎이 슈퍼맨’이라고 놀려댄다. 최근에는 문인으로 등단하여 문학 활동을 할 뿐만 아니라 문학회를 이끌고 있다. 최선을 다하는 그의 모습이 아름답다. 나이 90에 후회하지 않을 삶이다.
우리가 그를 슈퍼맨이라고 이름붙인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글 쓰는 일과 더불어 하는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영암군 노인대학장(현재), 시니어통/리봄 칼럼위원(현재), 남도문학회 회장(현재), 사) 한국문인협회 전남지회 회원(현재), 계간 웹북(시 산문) 고문(현재), 광주학생운동 기념 사업회 이사(현재), 민주평화통일 자문회의 제15기 자문위원(현재), 호남매일신문 편집 논설위원장, 문화경제신문(인터넷) 논설위원, 사)홍길동 문화체육진흥회 자문위원, 한국 경영지도사협회 회원(경영지도사,) 전남문학 신인 작가회 회장, 영암 월출 교직회 부회장, 광주YWCA 소비자고발센터 자문위원, 전라남도 여성회관 순회강사, 영암군 노인 회관 순회강연, 영암신문 낭주골 칼럼 집필 등등.
나는 뜰못님의 감성에 반한 사람이다. 그는 강인한 듯하나 여리고, 사고는 차가우나 가슴이 뜨겁다. 그래서 눈물이 많다. 그의 수필 등단 소재였던 비단잉어 ‘군하미’이야기만 해도 그렇다.
지난여름 오후 4시쯤 군하미가 질식하여 숨을 가두려고 한다. 아가미와 입만 조금씩 움직일 뿐 거대한 몸집은 배를 위로하고 둥둥 떠 있었다. 그는 물을 갈아 주면서 맘 속으로 기도했다.
'하나님! 요즘 물갈이를 제대로 못해 이렇게 죽어간 '군하미'를 살려 주십시오. 모든 것이 제 탓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임종을 지켜보게 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30-40분이 지나갈 무렵 기적이 일어났다. 군하미가 흐느적흐느적 헤엄을 치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군하미에게 뽀뽀를 해 주었다. 그는 아직도 어린 시절의 감성을 안고 산다.
떠돌이 개 ‘별이’ 이야기는 또 어떤가. 떠돌이 개가 시골집 마루 밑에다 새끼를 낳아 기르고 있는 모습이 안타까워 4-5일 간격으로 관리를 해 온 지 어느새 3년째 접어들었다. 이젠 그들과 정이 들어 어미 개를 '별'이라 이름 지어 부르고 있다. 앞으로 기하급수적으로 별이네 식구들이 늘어날 전망인데, 이 일을 어쩌면 좋을 것인가 목하 고민 중이다.
김 교수의 글을 신문에서 스크랩한 나의 절친 수채화가 김기수 화백.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칼럼이었다. 칠레 코피아포의 산호세 광산에 매몰된 33명의 광부들이 68일간 622m 지하 캄캄한 갱 속에 갇혀있다 한 사람씩 '희망 캡슐'을 타고 생환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인간의 능력의 한계와 '지옥과 천국'에 대하여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는 글이었는데, 광부들이 보여준 리더십과 동지애, 종교인이 갖는 힘의 원천을 요한계시록 21장 1-2절에서 되뇌이는 예리함에 반했던 것이다.
두 분은 아직도 면식이 없는 사이다. 스크랩 소식을 전해 들은 김 교수도 가만히 있질 못했다. 바로 전화를 걸어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가 싶더니 ‘형님, 동생’으로 진행된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과 글 쓰는 사람은 이렇게 쉽게 교감하는가.
김 교수가 영암노인대학장이 되었다는 말을 전해 들은 김 화백은 곱게 그려 간직한 동해안의 풍경수채화를 내게 내밀며 김 학장실에 걸어두란다. 다만 전화로 인사를 나눌 뿐이었는데.
김 교수를 이렇게 표현하면 만의 하나라도 적절한 표현일지 모른다.
-홀 어머님 봉양, 아내 사랑이 남다른 사람이다.
-사람을 좋아하고 가슴으로 챙겨주는 눈물 많은 사람이다.
-불의에 저항하고 정의에 투철하며 보편적인 사고로 정도를 쫓는 사람이다.
-자신을 낮추고 대의를 높이며, 자기 몫에 연연하지 않고 모든 이를 위하여 봉사하고 지원하는 사람이다.
-최근에 안 것이지만, 나이가 많아져도 더 배우며 더 젊어져 가는 사람이다.
(2011. 8.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