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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로왕(首露王)의 탄생과 치적에 대하여는 '삼국유사'에 실린 '가락국기(駕洛國記)'에 전하는데, 이 기록은 신화적 내용이어서 사실로 보기는 어렵다. 그런데 이 신화(神話)는 구조상으로 볼 때, 신성한 왕권의 내력을 풀이한 천강난생(天降卵生) 신화로서 한국 고대국가(古代國家) 성립기에 흔히 보이는 건국 시조(始祖) 신화와 궤를 같이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학자들은 황금빛 천강(天降) 등으로 상징되는 북방(北方)으로부터 이주(移住)해 온 집단이 낙동강 하구 유역의 토착 선주민들과 결합해 초기 국가를 형성했던 사실을 반영하는 것으로 풀이한다.
또한 이 신화에서 3월에 목욕재계하고 잡스러움을 떨쳐버리는 발계 의식을 거행한 뒤, 구지봉(龜旨峰)과 같은 성스러운 곳에 모여 하늘에 제사하고 춤과 노래로 의식을 베풀어 한 해의 풍요와 안녕을 기원하며, 그 곳에서 집단의 수장(首長)을 선출하고, 이 때 뽑힌 수장(首長)은 하늘로부터 권위를 부여받는 것으로 여겼던, 국가체 형성 이전 단계의 소박한 사회풍속과 정치 운영의 일면을 찾아 볼 수 있다.
수로왕(首露王)이란, 곧 이러한 단계에서 김해(金海) 지역에 존재했음직한 수장(首長)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수로왕은 금관가야가 신라에 합병된 후에도 가야(伽倻)의 시조(始祖)로서 계속 봉사(奉嗣)되었다. 문무왕(文武王)은 수로왕의 위전(位田)을 설치해 후손들에게 능묘의 제례를 계속하게 했으며, 그것은 고려시대에 와서도 지속되었다. 최치원(崔致遠)의 '석이정전(釋利貞傳)'에서는 금관가야의 시조(始祖)를 '뇌질청예(惱窒靑裔)라고 해 서로 비교가 된다.
가락국기 駕洛國記
가락국기(駕洛國記)는 고려 문종(文宗) 때 편찬된 가락국(駕洛國)에 대한 역사서이다. 완전한 내용은 전하지 않으며 '삼국유사' 기이편(紀異篇)에 간략하게 초록(抄錄)하여 전하고 있다. 삼국유사에 수록된 '가락국기'의 주(註)에는 정확한 저자의 이름이 나와 있지 않으며. 다만 금관주지사 (金官州知事 .... 현재의 김해) 문인(文人)이 편찬하였다고만 밝히고 있다. 김해김씨 종문에서는 이 문인(文人)이 김해김씨 출신인 김양감(金良鑑)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다만 1075~1084년간에 금관주지사를 지낸 인물이 가락국의 옛땅인 금관주(金官州 ..지금의 김해)의 역사서로서 '가락국기'를 편찬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 내용은 수로왕(首露王)의 건국설화, 허황후(許皇后)와의 혼인설화 및 수로왕릉의 보존에 관련된 신이사례(神異事例)와 신라에 합병된 이후부터 고려왕조에 이르기까지의 김해지방의 연혁 등이며, 제2대 거등왕(居登王)부터 마지막 구형왕(仇衡王)까지의 왕력(王曆)이 실려 있다. 일연(一然)스님이 초록한 이 '가락국기'가 원래의 '가락국기'에서 수로왕에 대한 설화를 중심으로 편찬한 것인지, 아니면 신이(神異)를 중심으로 기록한 일연(一然)의 사료 선택에 의한 것인지 확인할 수는 없다. 또이 책을 편찬하게된 역사적 배경과 사료로 이용된 문헌 등도 분명하지 않다.
신라 말기에 가야계(伽倻系)의 신김씨(新金氏)는 김유신(金臾信)의 4대손 김암(金巖)이 육두품이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사회적 지위가 낮아지고 점차로 소외(疎外)되었다. 따라서 불만을 품고 있던 가야계 김씨 (伽倻系 金氏)들이 새로이 고려 왕조가 일어서고 사회가 안정되자, 옛날의 영화를 과시하고자 편찬하였다고 추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가락국기는 가야의 역사에 대한 문헌 사료가 거의 사라진 오늘날 남아있는 유일(唯一)한 문헌 사료라고 할 수 있다. 중국 사료인 '삼국지'의 한전(韓傳) 및 변진전(弁辰傳), 후한서(後漢書)의 한전(韓傳) 등과 더불어 가야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구지봉 龜旨峰
사적 제429호로 지정되어 있다. 가야(伽倻)의 시조(始祖) 수로왕(首露王)이 탄강(誕降)하였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원래는 거북 머리 모양을 닮았다고 하여 구수봉(龜首峰)이라 하였는데, 지금 수로왕비릉(首露王妃陵)이 있는 평탄한 위치가 거북의 몸체이고, 서쪽으로 쭉 내민 봉우리의 형상이 거북의 머리 모양 같다고 하여 이같은 이름이 붙었다. 구지봉은 경상남도 김해시 구산동에 있는 산으로, 높이 200m이다. 봉(峰)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낮은 소나무 동산에 불과하지만, 가야(伽倻)의 건국설화 (伽倻의 建國說話)로 인하여 구지봉은 역사적인 봉우리로 자리잡고 있으며, 국문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구지가(龜旨歌)의 산실(産室)인 만큼 널리 알려져 있다.
신라 때인 42년(유리왕 19), 하늘에서 황금알이 내려와 수로왕(首露王)이 탄생하였고, 아도간(我刀干), 여도간(汝刀干) 등 구간(九干 .. 부족의 추장)과 백성들의 추대로 왕이 되었다는 가야(伽倻)의 건국신화(建國神話)를 간직한 곳이다. 또한 구간(九干)과 백성들이 수로왕을 맞이하기 위하여 이곳에서 춤을 추면서 불렀다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사시(敍事詩) ' 구지가(龜旨歌) '로도 유명한 곳이다.
구지가 龜旨歌
삼국유사 '가락국기' 편의 기록에 의하면 서기 42년 김수로왕(金首露王)이 하늘에서 탄강(誕降)하였고, 아도간, 유천간 등 구간(九干 .. 추장)과 백성들의 추대에 의하여 가락국의 왕이 되었다는 가야(伽倻)의 건국설화를 간직한 곳이다. 또한 구지봉(龜旨峰)에서 구간(九干)과 백성들이 수로왕을 맞이하기 위하여 춤을 추며 불렀다는 구지가(龜旨歌)는 우리나라 최초(最初)의 서사시(敍事詩)로 고대 국문학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또한 정상부에는 B.C 4세기 경 남방식 지석묘(支石墓)가 있어 그 역사성을 나타내고 있으며, 지석묘 상석에는 '구지봉석'이라고 새겨져 있는데, '한석봉(韓石峯)'의 글씨로 전해져 오고 있다.
42년, 김해에서 일어났던 일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아직 나라의 이름도 없고 군신(君臣)의 칭호도 없었다. 다만 구간(九干 .. 가락국 아홉 마을의 추장)이 있어 이들이 추장이 되어 백성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 북쪽에 있는 구지봉(龜旨峰)에서 마치 누군가가 부르는 듯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마을 사람 3백여 명이 그 곳에 모이니 사람의 소리가 나는 것 같은데 그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또 다시 신비한 소리만 들리는데, '여기에 사람이 있느냐 ?' '우리들이 여기 있습니다' ' 내가 와 있는 곳은 어디냐 ?' '여기는 구지봉입니다 '
다시 말하기를 ' 하늘이 내게 명하시기를 이곳에 나라를 세우고 너희들의 임금이 되라 하시어 여기에 온 것이니 너희는 이 봉우리의 흙을 파면서 구지가(龜旨歌)를 부르며 춤을 춰라. 그러면 곧 하늘로 부터 대왕을 맞게 될 것이니, 너희들은 매우 기뻐하며 즐거워 하게 될 것이다 ' 그 말에 따라 구간(九干)들과 사람들이 모두 함께 기뻐하며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구하구하 龜何龜何 거북아 거북아
수기현야 首其現也 머리를 내어라
약불현야 若不現也 내놓지 않으면
번작이끽야 燔灼而喫也 구어서 먹으리
얼마 후 보랏빛 줄이 하늘에서 내려와 땅에 닿았다. 줄 끝을 살펴보니 붉은 보자기에 금합자(金盒子)가 싸여 있었다. 그것을 열어 보니 해처럼 둥근 황금알 여섯 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것을 그대로 두었다가 이튿날 새벽에 다시 열어보니 황금알 여섯 개가 여섯 동자(童子)로 나타났다. 그들은 나날이 성장해 10여 일이 지나자 키가 9척(尺)이나 되었다. 그들은 모두 용모가 빼어났으며, 그 달 보름달에 즉위하였는데, 세상에 처음 나왔다고 하여 왕의 이름을 ' 수로(首露) '라 하고, 나라를 '대가락(大駕洛)' 또는 '가야국(伽倻國)'이라고 불렀다. 나머지 다섯 알에서 태어난 아이도 각각 다섯 가야(伽倻)의 왕이 되었다. 이렇게 여섯 사람은 각각 가야(伽倻)의 王이 되었다. 이때가 A.D 42년이었다.
이 같은 장면에서 고대사회에서 왕을 맞이하는 전형적인 요소가 다 갖추어져 있다. 일종의 민간신앙적인 의식의 형태인데, 천명(天命)사상과 노동과 협업이 어우러진 참으로 장엄한 광경이다. 수로왕의 탄생은 알의 형상이라는 점에서 박혁거세나 주몽과 같지만, 한꺼번에 여섯 개의 알이 나타나고 그들이 여섯 가야(伽倻)의 왕이 되었다는 점에서는 다르다. 이는 아마도 일국(一國) 체제의 강력한 왕권이 아닌, 가야가 연합체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나라이었음을 말하는 것 같다.
구지봉 고인돌
구지봉(龜旨峰)의 정상부에는 기원전 4세기경의 것으로 보이는 남방식 고인돌이 있다. 고인돌은 5~6개의 짧은 받침돌 위에 지름 2.5m 정도되는 덮개돌이 덮여 있고, 그 위에 한호(韓濩 .. 한석봉)가 쓴 것이라고 전해지는 '구지봉석(龜旨峰石)'이라는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다.
보통 고인돌이라고 부르고 있는 지석묘(支石墓)가 구지봉 정상에 있다. 괸돌은 크게 나누어 지상에 4면을 판석으로 막아 묘실(墓室)을 설치한 뒤 그 위에 상석을 올린 형식과, 지하에 묘실을 만들어 그 위에 상석을 놓고 돌을 괴는 형식으로 구분된다.
금관가야 金官伽倻
금관가야는 6가야 (六伽倻)의 하나로, 기원 전후부터 532년까지 경상남도 김해(金海)를 중심으로 존속하였다. 금관가야라는 이름은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오가야조(五伽倻條)'에 인용된 '본조사략(本朝史略)'을 통해 알려졌다. 가락국(伽落國. 駕洛國)이라고도 했으며, 초기에는 여러 가야 중 맹주국의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대가야(大伽倻) 또는 본가야(本伽倻)라고도 불렀다. 또 지리적으로 남쪽에 있었기 때문에 남가야(南伽倻)라고도 하였다.
금관가야라는 이름이 언제부터 쓰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지리지(地理志)에 따르면, 김해소경조(金海小京條)에 ' 제10대 구해왕(仇亥王)에 이르러 신라에 항복했으므로 그 땅을 금관군(金官郡)으로 삼았다 '라고 하였다. 금관가야는 본래 구야(狗邪), 가락(伽落. 駕洛) 가야라고 불렀던 것으로, 뒤에 6가야의 하나로 '금관가야'라 이름지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금관가야는 낙동강 하류의 삼각주 지역에 자리잡아 농업이 발달하고, 또 남쪽으로는 바다와 접해 있어 낙동강과 아울러 수운(水運)의 편리함을 이용해 경제적, 문화적 발전에 유리하였다. 그리하여 초기에는 여러 가야의 맹주국이 되어 대가야(大伽倻)라고 불렸던 것이다. '가락국기'에는 제2대 거등왕(居登王)부터 제10대 구형왕(仇衡王)까지 역대 임금의 이름이 열거되어 있으나, 금관가야의 역사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다. 다만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따르면, 532년(법흥왕 19)에 마지막 왕 구해(仇亥)는 신라에 나라를 바친 뒤 높은 벼슬을 받고, 본국을 식읍(食邑)으로 받았다고 한다.
후에 아들 무력(武力)은 신라와 백제의 싸움에서 큰 공을 세웠으며, 뒤에 신주도(新州道) 행군총관(行軍摠官)이 되었다. 무력(武力)은 이러한 공로로 각간의 자리까지 올랐는데, 이 사람이 바로 김유신(金臾信)의 할아버지이다. 금관가야는 532년에 신라에 멸망하였는데, 멸망 연대는 '일본서기(日本書紀)'의 기록에 따르면 532년보다 약간 앞선 때인 듯하다. 532년 금관가야(金官伽倻)가 신라(新羅)에 편입된 후 김유신(金臾信) 일가를 위시한 금관가야계 유민(流民)들이 기존의 김씨 성을 지닌 진골귀족(眞骨貴族)과의 구별을 위하여 신김씨(新金氏)를 칭하였다. 이 '신김씨(新金氏)'를 칭한 인물로는 신라 하대 의 고승 진경대사(眞鏡大師) 심희(審希)가 대표적이다.
납릉 納陵
가락국(駕洛國) 즉, 금관가야(金官伽倻)의 시조(始祖) 이자, 김해 김씨(金海金氏)의 시조인 수로왕(首露王. 재위 42~199)의 무덤으로 납릉(納陵)이라고 부른다. 수로왕에 대한 이야기는 삼국유사(三國遺事) '가락국기'에 전하고 있으나, 그의 무덤이 정확히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무덤의 높이는 5m의 봉토(封土) 무덤인데, 주위 18,000평이 왕릉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왕릉 구역 안에는 신위를 모신 숭선전(崇善殿)과 안향각(安香閣), 전사청(殿祀廳), 신도비각 등의 건물들과 신도비, 문,무인석 등의 석조물이 있다.
고려 문종대까지는 비교적 능(陵)의 보존상태가 좋았으나, 조선 초기에는 많이 황폐하였던 듯하다. '세종실록'을 보면, 수로왕릉과 수로왕비릉에 대해 무덤을 중심으로 사방 30보(步)에 보호구역을 표시하기 위하여
돌을 세우고, 다시 세종 28년(1446)에는 사방 100보(步)에 표석을 세워 보호구역을 넓힌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무덤이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선조(宣祖) 13년인 1580년에 당시 경상도관찰사 허엽(許曄)이 수로왕비릉과 더불어 크게 정비작업을 마친 후이다.
지봉유설(芝峰類說)의 기록에 의하면 능의 구조는 큰 돌방무덤(石室墓)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기록에는 임진왜란 때 일본인들에 의하여 능(陵)이 도굴을 당하였는데, 당시에 왕이 죽으면 주위에서 함께 생활하던 사람들을 같이 묻는 순장(殉葬)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지봉유설 芝峰類說
지봉유설(芝峰類說)은 조선 광해군 6년인 1614년 ' 지봉 이수광(芝峰 李睡光) '이 지은 일종의 백과사전이다. 일찍이 세 차례에 걸쳐 중국 사신으로 갔던 견문(見聞)을 토대로 간행된 이 책 속에는 조선은 물론 중국, 일본, 베트남, 오키나와 그리고 말레지아 등 남양제국과 멀리 프랑스, 영국과 같은 유럽의 일까지 소개하여 한민족의 인생관과 세계관을 범우주적으로 넓히는데 이바지했던 조선 중기 실학(實學)의 선구자 '이수광 (李睡光)'의 명저(名著)이었다. 이수광의 이 책 속에는 놀랍게도 수로왕릉(首露王陵)에 대한 도굴(盜掘)기사가 수록되어 있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벌어지자 왜적(倭賊)이 수로왕릉을 파헤쳤다. 그런데 무덤 안이 매우 넓었고, 큰 대야만한 두골(頭骨)이 있었으며, 손발의 경골(脛骨)도 몹시 거대하였다. 왕의 시신 옆에는 두 구(軀)의 여자 시신이 있었으며, 그들은 마치 살아있는 것 처럼 보였다. 나이는 두 여인 모두 20세 정도로 무덤 안에서 꺼내자 바로 소멸되고 말았다. 아마도 순장(殉葬)된 여자 종인 듯하다.
지봉유설에 나오는 이 기사는 전대미문의 유일한 것으로 그 내용을 면밀히 검토해 보면 추호의 의심도 없는 사실임을 알 수 있다. 우선 김수로왕의 시신(屍身)으로 추정되는 거대한 인골(人骨) 곁에 누워있던 스무살 안팎의 두 여자 종을 순장(殉葬)된 여인으로 판단한 것은 정확한 판단이었다. 결과론이지만 그로부터 500년이 지난 대성동 고분(古墳)에서 30명이 넘는 순장된 유골이 발굴되고서야, 가야(伽倻)의 고분에서는 전통적으로 순장(殉葬)의 풍습이 행해졌음이 사실로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순장(殉葬)은 북방유목민족의 습성이라는 점에서 이는 김수로왕이 북방(北方)에서 이주(移住)해온 유목민족의 기마인(騎馬人)임을 보여주는 산 증거인 것이다.
또한 도굴 기사는 너무도 생생할 뿐만 아니라 과학적으로도 그 신뢰성을 더하고 있다. 즉, 무덤에서 인골(人骨)을 발견했을 때 ' 그들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무덤 안에서 꺼내자 바로 소멸되었다'는기록이다. 이는 무령왕릉 발굴 당시에도 확인되었듯이 처녀분(處女墳)을 발굴할 때 진공(眞空) 상태의 밀폐(密閉)된 공간에서는 유골(遺骨)이나 유물들이 산화(酸化)하지 않아 당시의 모습으로 생생히 남아 있다가 파헤쳐진 바로 그 순간에 바깥 공기에 노출되면 그 즉시 산화작용(酸化作用)이 일어나 순식간에 소멸되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과연 그 무덤 안에서 나온 유물이 수로왕의 거대한 유골과 순장(殉葬)된 두 여인의 인골(人骨)뿐이었을까. 가야(伽倻)의 묘제(墓制)는 동시대 고구려와 백제와는 달리 풍부한 유물들을 다량으로 부장(副葬)하는 독특한 묘제 즉 후장(厚葬)을 갖고 있었다. 그러므로 수로왕의 묘 안에는 상상할 수 없는 다량의 값진 유물들이 함께 매장되어 있었을 것이다.
수로왕릉이 보존되어온 이유
서기 42년 3월3일 김해 구지봉(龜只峰)에서 탄강(誕降)하여 구간(九干 .. 아홉명의 추장)들의 추대로 왕위에 오른 후, 158년간 나라를 다스리다가 서기 199년 3월23일 15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가야(伽倻)의 시조 수로왕. 그는 전설(傳說) 속의 인물이면서도 이처럼 현실 속의 봉분(封墳)으로 200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이곳에 남아 있다. 이처럼 수로왕의 무덤이 현존(現存)할 수 있었던 것은 삼국(三國)을 통일하였던 신라 문무왕(文武王)의 은덕때문으로, 이에 대한 기록이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실려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기록 ... 가락국(駕洛國) 원군(元君 .. 김수로왕)의 9대손인 구형왕(仇衡王)이 우리 나라에 항복할 때 데리고 온 아들 세종(世宗)의 손자인 서운각간의 따님이신 문명왕후(文明王后 .. 문희)가 곧 나를 낳으신 분이다. 이러한 연유로 원군(元君)은 나에게 15대 시조(始祖)가 되는 것이다. 그 분이 다스리던 나라는 이미 오래 전에 없어졌으나, 능묘(陵墓)는 그대로 남아 있으니 종묘에 합하여 계속 제사를 지내도록 하라
태종 무열왕인 김춘추(金春秋)의 왕비가 되어 문무왕(文武王))을 낳은 문명왕후(文明王后). 김유신(金臾信) 장군의 여동생인 문명부인(文明婦人)은 언니 '보희'가 온 장안에 가득할 정도로 오줌을 누는 꿈을 꾸자 언니의 꿈을 대신 사서 김춘추(金春秋)의 아내가 되었던 여인이다. 따라서 문무왕이 말한대로 김수로왕은 문무왕의 외가(外家) 15대 시조가 되는 것이다.
쌍어문 雙魚文
숭화문(崇化門)이라고 쓰인 수로왕릉의 정문을 지나 가락루(駕洛樓)라는 망루를 통과하면 '납릉심문(納陵心門)'이라고 쓰인 문이 나온다. 그 문을 통과하면 김수로왕의 무덤이다. 그런데 납릉심문(納陵心門)에는 좀 희한한 무늬가 있다. 제단 같은 것을 중앙에 두고 물고기 두 마리가 서로 마주보고 있는 무늬다. 쌍어문(雙魚文)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납릉심문의 우측에 있는 숭인문(崇仁門)에도 동일한 무늬가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러한 쌍어문(雙魚文)이 인도반도(印度半島)의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네팔 등지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된다는 점이다. 허황옥(許黃玉)의 출신지인 인도의 아유타(阿踰陀) 즉 '아요디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또 인도 북부의 유피주(州)에서는 쌍어문이 주(州)의 상징일 뿐만 아니라, 자동차 번호판이나 경찰의 뺏지에까지 새겨져 있다. 쌍어(雙魚)가 인간을 보호해 줄 것이라는 믿음이 이러한 현상의 근저에 깔려 있다고 한다.
고대로부터 이 지역에 존재한 쌍어(雙魚) 숭배사상이 그런 형태로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쌍어문이 가야시대의 유물이되었지만, 인도(印度)반도에서는 아직도 그것이 현지인들의 의식(意識)을 일정 정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가야 유적과 인도반도에서 동일한 쌍어문이 발견되는 것은 이 무늬가 허황옥(許黃玉) 집단에 의해 가야(伽倻)에 전파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는 학계의 의견이 많다.
수로왕(수로왕)과 관련된 두 가지 중요한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하나는 신라(신라) 제4대 탈해왕(탈해왕)과 관련된 것이다. 탈해(탈해)는 가야(가야)로 쳐들어와 수로왕에게 왕의 자리를 내놓으라고 협박하였다. 두 왕 사이에 싸움이 벌어진 바, 그것은 아주 재미있는 변신(변신) 이야기이다.
탈해왕이 면해 '매'로 변하자, 수로왕은 '독수리'가 되었다. 또 탈해왕이 '참새'로 변하자 수로앙은 '매'로 변하였다. 탈해왕이 본 모습으로 돌아오자, 수로왕 또한 본 모습으로 돌아왔다. 수로왕의 승리(승리)이었다. 탈해왕이 ' 내가 목숨을 보전한 것은 죽이기를 싫어하는 성인의 어진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하며 곧 절을 하고 나가버렸다. 매우 드물게 보는 변신(변신) 이야기인데, 가야인에게는 수로왕의 위대성을 나타내는 이 같은 이야기가 사실처럼 전해 왔던 것이다.
또 하나는 수로왕을 사모해서 하는 놀이이다. 해마다 7월29일이 되면, 이 고장 백성들과 아전, 군졸들이 승점에 올라 천막을 치고, 술과 음식을 베풀며 환호하였다. 스점은 처음에 '허황옥'이 도착한 곳이다. 그들이 동서쪽으로 눈짓하면 건장한 인부들이 좌우로 나뉘어서, 바다로부터 말을 타고 육지를 향해 급ㅎ 달리고, 뱃머리를 둥둥 띄워 물 위로 서로 밀면서 북쪽으로는 포구(포구)를 향해 다투어 달린다. 이 놀이는 왕후가 오는 곳을 바라보고 신하들이 급히 왕에게 ㅇㄹ렸던 흔적이 남은 것이다. 수로왕과 왕비는 백성들에게 이러한 사랑을 받는 존재이었다.
신화(神話)에서 역사(歷史)로
수로왕비 허황옥은 영제(靈帝) 중평(中平) 6년에 157세로 죽어 구지봉(龜旨峰) 동북쪽 둔덕에 묻혔다. 그 25년 후인 헌제(獻帝) 건안(建安) 4년에 수로왕이 죽자 사람들은 대궐 동북쪽에 장사를 지냈다. 수로왕은 죽음에 있어, 박혁거세(朴赫居世) 처럼 죽어서 하늘로 올라갔다가 7일만에 그 유해가 땅에 흩어져 떨어졌다든가, 주몽(朱蒙)처럼 하늘로 올라가서 다시 내려오지 않는다든가 하는 그러한 신이(神異)는 보이지 않았다. 수로왕의 삶이, 능(陵)에 매장되어 제향(祭享)을 받는 평범한 죽음으로 마감된 점으로 보면, 신화(神話)로 시작된 그의 삶이 종국적으로는 역사 속에 묻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숭신각 崇神閣
허황옥 許黃玉
허황옥(許黃玉)은 가야국 수로왕(首露王)의 왕비(王妃)이며, 김해허씨(金海許氏)의 시조이다. 본래 인도(印度) 아유타국(阿踰陀國)의 공주(公主)로, 배를 타고 가야에 와서 왕비가 되었다. 아들 10명을 낳았는데, 2명에게 어머니의 성(姓) 허(許)를 주었다고 한다.
아유타국(阿踰陀國)의 위치에 대해서는 인도, 태국, 중국, 일본 등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인도(印度)의 '아요디아'라고 알려진 것이 가장 유력한 설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수로왕릉 정문 대들보에 새겨진 두 마리의 물고기가 인도 '아요디아' 지방의 건축양식에서 볼 수 있는 문양(紋樣)이기 때문이다.
허황옥은 아들 10명을 낳았는데, 장자(長子)인 거등(居登)이 왕통을 잇게 하였고, 두 아들에게 어머니의 성(姓)인 허(許)를 주었다고 한다. 나머지 7명의 아들은 불가(佛家)에 귀의하였다. 가야(伽倻)가 몰락하자 허씨(許氏)의 자손들은 흩어졌는데, 김해에 남은 김해 허씨, 하양으로 이주한 하양 허씨, 양천 허씨, 태인 허씨 등이 있으며, 태인허씨에서 갈라져 나온 인천 이씨가 있다.
수로왕과 허황옥의 결혼
저는 아유타국의 공주인데, 성은 허(許)이고 이름은 황옥(黃玉)이며 나이는 16세입니다. 금년 5월 본국에 있을 때 부왕과 모후께서 저에게 말하기를, ' 우리가 어젯밤 꿈에 상제(上帝)를 뵈었는데, 상제께서 가락국 왕 수로(首露)는 하늘이 내려보내 왕위에 오르게 하였으니, 신령스럽고 성스러운 사람이다. 그가 새로 그 나라에 군림했으되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하였으니 그대들은 공주를 보내서 그 배필을 삼게 하라. 너는 여기서 우리와 작별하고 그에게로 가거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바다를 건너 멀리 남해에 가서 찾기도 하고, 방향을 바꾸어 멀리 동해로도 가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이제 보잘 것 없는 얼굴로 감히 용안(龍顔)을 뵙게 되었습니다 ..... 허황옥은 이렇게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등장하고 있다.
건무(建武) 24년 무신(戊申) 7월27일에 구간(九干) 등이 수로왕(首露王)에게 배필을 구할 것을 권한다. 그러나 수로왕은 ' 천명(天命)이 있을 것이니 경들은 염려말라 '라고 대답한다. 그러던 어느날 허황옥(許黃玉)을 태운 배가 붉은 돛에 붉은 깃발을 휘날리면서 바다 서쪽으로부터 온다. 수로왕이 마중을 나가 대궐 서남쪽 산기슭에 장막을 쳐서 임시 궁전을 만들어 놓고 기다린다. 허황옥은 별포(別浦) 나루터에 배를 대고 육지에 올라, 입고 있던 비단 바지를 벗어 산신령에게 폐백으로 바친다.
허황옥이 수로왕이 있는 곳으로 다가오고, 수로왕이 나아가 맞아서 함께 장막 궁전으로 들어간다. 수로왕이 허황옥과 함께 침전에 들었을 때, 허황옥은 자신이 자유타국(阿踰陀국)의 공주(公主)이며, 나이는 16세라고 밝힌다. 그리하여 수로왕은 허황옥과 함께 두 밤 하루 낮을 지낸 후, 8월1일 수레를 타고 대궐로 들어오는데, 오정(午正)이 가까운 시간이었다.
이때 허황옥을 배종(陪從)한 사람으로 신보(申輔), 조광(趙匡)과 그들의 아내 두 사람에, 데리고 온 노비까지 합쳐서 모두 20여 명이 있었으며, 가지고 온 금수능라(錦繡綾羅)와 의상필단(衣裳疋緞), 금은주옥(金銀珠玉)과 구슬로 만든 패물들은 기록할 수 없을 만큼 많았다. 허황옥이 타고 온 배를 본국으로 돌려보낼 때에는 뱃사공 15명에게 각각 쌀 10석과 베 30필씩을 주었으며, 수로왕 부부가 대궐로 돌아올 때, 허황옥이 가져온 중국 상점의 각종 물화(漢珍雜物)도 모두 수레에 싣고 왔다.
허황옥과 결혼한 후 수로왕의 활약은 더욱 빛났다. 추장의 구간(九干)의 이름을 고치고, 신라의 직제를 따라 각간, 아간, 급간등의 계급을 두고, 그 아래 관리들에게는 주(周)나라나 한(漢)나라의 관제를 따다가 나누어 정하였다. 그런 다음의 모습을 '가락국기(駕洛國記)'에서는 ' 나라를 다스리고 집안을 가지런히 하며, 백성 사랑하기를 자식 같이 해서, 그 교화가 엄하지 않으면서도 저절로 위엄이 있고, 정치가 엄하지 않아도 저절로 다스려져지게 되었다 '고 기록하고 있다. 특히 왕비와 무척 금실(琴瑟)이 좋았음을 기록하였는데, ' 마치 하늘에 땅이 있고, 해에 달이 있으며 양(陽)에 음(陰)이 있는것과 같다 '고 기록하고 있다.
왜, 어떻게 가야(伽倻)에 왔을까 ?
가야(伽倻)가 건국된 서기 42년으로부터 얼마 전인 기원전 1세기에, 인도 서북쪽에 살던 중앙아시아 '쿠산족(族)'이 인도(印度)로 밀고 내려왔다. 이에 따라 아유타(阿踰陀) 즉 '아요디아'라는도시의 지배층 중에는 동쪽에 있는 중국을 향해 망명(亡命)을 떠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가야(伽倻)에 당도한 서기 48년에 허황옥(許黃玉)이 스스로를 나이 16세의 아유타 공주라고 소개한 점을 볼 때, 그는 아요디아라는 도시를 지배하는 군장(君長)의 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가문(家門)이 아요디아에 있었을 때만 해도 허황옥은 아직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허황옥은 서기 48년에 16세이었고, 그의 가문은 이미 그 이전인 기원전 1세기에 아요디아를 떠났기 때문이다. 중국으로 망명을 떠난 후에도 이 가문이 아유타 출신의 유민(流民)들을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에, 허황옥이 자신을 아유타의 공주라고 소개했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으로 망명을 떠난 허씨 가문이 정착한 곳은 오늘날의 중국 사천성 안악현에 해당하는 보주(普州) 땅이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중국 후한(後漢)의 역사를 기록한 후한서(後漢書)에서, 서기 1세기에 보주(普州) 땅에 소수민족들이 살았다고 기술한 점, 오래 전에 보주 땅에 형성된 허씨(許氏)의 집성촌(集姓村)이 오늘날까지 존속하고 있는 점, 보주 땅의 암벽에서 . 후한(後漢) 초에 허씨의 딸 황옥(黃玉)이 용모가 아름답고 지혜가 남들보다 나았다 '라는 글귀가 발견된 점, 김해의 수로왕릉비에 있는 비문(碑文)에서 허황옥을 보주태후(普州太后)라고 칭한 점 등이 그 근거들이다.
한나라를 계승한 후한(後漢)은 서기 25년에 건국되었고, 가야(伽倻)는 서기 42년에 건국되었으므로, 허황옥이 보주(普州) 땅에 살았다는 ' 후한 초 (後漢 初) '라는 시점은 가야 건국 직전과 거의 일치한다. 서기 48년에 허황옥이 16세이었다는 '가락국기'의 기록에 신빙성을 더해주는 대목이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우리는허황옥이 보주태후(普州太后)라고 불린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가야에 오기 전에 보주(普州)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렇게 불린 것이다. 제주에서 서울로 시집온 여인을 제주댁이라고 부르듯이 말이다.
그럼, 보주 땅에 살던 허황옥 가문이 그곳을 떠나 동쪽의 가야(伽倻) 땅을 향해 이동한이유는 무엇일까 ? 그 이유는 '후한서 (後漢書)' '광무제본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후한(後漢)의 초대 황제인 광무제의 역사를 기록한 '광무제본기'에 따르면 , 허황옥이 가야(伽倻)에 출현하기 1년 전인 서기 47년에 보주(普州)를 비롯한 사천성 지역에서 소수민족들의 반란(叛亂)이 일어났고, 반란이 진압된 후에 사건의 연루자들이 양자강 연변의 무한(武漢)으로 강제 이주 당한 일이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볼 때, 허황옥 가문도 이 반란에 가담하였다가 무한(武漢) 땅으로 강제이주를 당했고 그 후에 배를 타고 양자강을 지나 바다를 거쳐 가야 땅까지 당도했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이러한 추정이 가능한 것은 그들이 지나간 것으로 보이는 지역마다 쌍어문(雙魚文)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인도반도(印度半島)의 쌍어(雙魚) 숭배사상을 반영하는 쌍어문이 허황옥 집단의 이동루트를 따라 김해(金海)의 수로왕릉에까지 도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수로왕비릉 首露王妃陵
높이 5m 정도의 원형 봉토(封土)무덤으로서, 무덤의 밑부분에 특별한 시설은 없다. 무덤 주위에는 얕은 돌담을 4각형으로 둘러 모덤을 보호하고 있으며, 앞 쪽에는 긴 돌을 사용하여 축대를 쌓았다. 중앙에는 비석이 세워져 있는데, ' 가락국수로왕비 보주태후허씨지릉 (駕洛國首露王妃 普州太后許氏之陵) '이라는 글이 두 줄로 새겨져 있다.
무덤에 딸린 부속건물로는 숭보제, 외삼문, 내삼문, 홍살문이 있으며, 보통 평지에 있는 무덤과는 다르게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무덤 앞에는 인도(印度)에서 가져왔다고 전하는 파사석탑(婆裟石塔)의 석재가 남아 있다. 세종 28년인 1446년에 수로왕릉과 함께 보호구역이 넓어졌으며, 임진왜란 때 도굴(盜掘)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지금의 상석과 비석 등은 인조 25년인 1641년에 다시 정비하면서 설치하였다고 한다. 왕릉에 비해서는 시설이 소박한 편이고, 수로왕비릉이라고 오래 전부터 전해져 왔으므로 수로왕릉과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졌다고 본다면, 내부의 구조는 널무덤 또는 돌덧널무덤일 가능성이 높다.
파사석탑 婆娑石塔
이 석탑은 48년(수로왕 7)에 수로왕비 허황옥(許黃玉)이 서역(西域) '아유타국'에서 바다를 건너올 때 파신(波神)의 노여움을 잠재우기 위하여 싣고 왔다고 삼국유사(三國遺事) 등 고서에 기록되어 있다. 원래 호계사(虎溪寺)에 있었는데 폐사(廢寺)된 후, 김해부사로 있던 정현석(鄭顯奭)이 현재의 자리로 옮긴 것이다.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227호로 지정되어 있다.
가야인(伽倻人)들이 수로왕의 무덤 앞에 쌍어문(雙魚文)을 새긴 이유는 무엇일까 ? 자신들의 초대 왕후가 인도인(印度人)이었음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그렇게 하였을까 ? 그렇지는 않다. 그렇다면 어떤 이유일까 ? 인도반도에서 사용된 고대 언어인 '드라비다어(語)'에서는 '가야' 혹은 '가라'라는 발음이 '물고기'를 뜻하였다고 한다. 가야(伽倻)라는 국호가 고대 인도어(印度語)에서 나온 것이라면, 이 국호(國號)에는 인도 반도의 쌍어(雙魚) 숭배사상이 반영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물고기를 뜻하는 '가야'라는 발음을 국호(國號)로 선택하였기 때문에, 가야사람들에게는 물고기란 것이 어류(魚類)만 아니라, 나라 이름도 의미하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수로왕릉에 있는 물고기 무늬는 가야(伽倻)의 국호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가야(伽倻)라는 발음이 고대 인도어에서 나왔다는 것을 전제로 할 경우에만 유효한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 본 바와 같이, 고대 인도인들이 기야 땅에 정착해서 왕후 자리를 차지하였다는 사실은 우리 한민족이 단일한 혈통이 아닌 복수의 혈통으로 이루어진 민족임을 보여주고 있다. 북방 유목민족 출신의 김수로(金首露) 집단과 남방 인도(印度) 출신의 허황옥(許黃玉) 집단이 현지 토착세력과 힘을 합해 가야(伽倻)라는 나라를 운영한 것이다. 이같은 가야의 역사는, 한국인들이 협소한 단일민족 관념을 떨쳐버리고 세계를 내 형제처럼 포용하도록 하는 데에 기여할 것이다.
한문음으로 ' 파사석탑(婆娑石塔)'이라고 표기하나, 범어(梵語)로는 '바사석탑'이라고 하는데, 파(婆)는 범어로 '바(bha)'이며 그 뜻은 유(有)이고, 사(裟)는 발음이 '사(sa)'로서 그 의미는 체(諦 .. 진실한 도리)이다. 그러므로 ' 파사(婆裟) '는 유체(有諦)로서, 일체의 지혜가 현증(現證)한다는 뜻이다. 현재 남아 있는 석탑은 4각형의 지대석 상면에 높직한 굄대가 있어 그 위에 여러 개의 부재를 받고 있는데, 각 부재의 측면과 하면 등에서 다양한 조각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을 뿐 전체적으로 파손과 마멸이 심하다.
최근에 각 부재를 검토하여 새로이 탑을 복원하였다고 하나, 본래의 부재와 똑같은지는 세밀한 고증이 필요하다. 이 석탑에 관해서는 '삼국유사 (三國遺事)'권제3 탑상편 제4 금관성파사석탑조(金官城婆裟石塔條)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금관성 호계사(虎溪寺)의 파사석탑은 옛날 이 읍(邑)이 금관국으로 되어 있을 때, 세조 수로왕이 비(妃) 허황후(許皇后) 황옥(黃玉)이 동한(東漢) 건무(建武) 24년 갑신(甲申)에 서역의 아유타국(阿踰陀國)에서 싣고 온 것이다. 처음에 공주가 어버이의 명을 받들고 동쪽으로 오려고 하다가 파신(波神)의 노여움에 막혀서 할 수 없이 돌아가 부왕(父王)에게 아뢰니 부왕이 ' 이 탑을 싣고 가라 '하여 무사히 바다를 건너 남쪽 물가에 와서 닿았는데, 비범(緋帆 ..붉은색의 배), 천기(玔旗 .. 붉은색의 旗), 주옥(珠玉)의 아름다움이 있었으므로 지금도 이곳을 주포(主浦)라 한다. 탑은 사면으로 모가 나고 5층인데, 그 조각이 매우 기이하여 돌에는 조금씩 붉은 반점이 있고 석질이 매우 부드럼고 특이하여 이 지방에서 구할 수 있는 돌이 아니다.
이와 같은 내용에서 파사석탑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데, 호계사(虎溪寺)에 있던 탑을 조선시대에 이르러 김해부사(金海府使)로 있던 정현석(鄭顯奭)이 ' 이 탑은 허황후께서 아유타국에서 가져온 것이니 허황후릉에 두어야 한다 ' 고 하여 현재의 자리에 옮겨 놓았다는 것이다.
장유화상 長遊和尙
장유화상(長遊和尙)은 '삼국유사' 등의 기록에는 보이지 않고, 그의 행적은 설화의 형태로 전해지고 있다. 장유화상은 수로왕비, 허황후(許皇后)의 오빠로 보옥선인(寶玉仙人)이라고도 하며, 수로왕의 7왕자를 데리고 가야산에 들어가 도(道)를 배워 신선이 되었으며, 지리산에 들어가 7왕자를 성불하게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지리산 반야볼 '칠불사(七佛寺)'에 전하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왕후는 김수로왕과 사이에서 모두 10명의 왕자를 두었는데, 그 중 큰아들 거등(居登)은 왕위를 계승하고, 둘째와 셋째는 어머니의 성을 따라 허씨(許氏)가 되었다. 나머지 알곱 왕자는 어머니의 오빠인 장유화상(長遊和尙)을 따라 가야산에 들어가 3년간 불법을 수도하였다. 왕후가 아들들을 보고 싶어 자주 가야산을 찾자 장유화상은 공부에 방해가 된다며 왕자들을 데리고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왕후는다시 지리산으로 아들들을 찾아갔으나 여전히 장유화상에 의해 제지당하였다.
그 후 다시 지리산을 찾은 왕후를 장유화상은 반갑게 맞이하며 아들들이 성불(成佛)하였으니 만나라고 하였다. 그 때 ' 어머니, 연못을 보면 저희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 라는 소리가 들려 연못(影池)을 보니 황금빛 가사(袈娑)를 걸친 금왕광불(金王光佛), 왕상불(王相不), 왕행불(王行佛), 왕향불(王香佛), 왕성불(王性佛), 왕공불(王空佛) 등 일곱 생불(生佛)이 공중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그 후 김수로왕은 크게 기뻐하여 아들들이 공부하던 곳에 칠불사(七佛寺)를 세웠다. 장유화상 허보옥(許寶玉)은 동생의 신행길에 함께 왔는데, 산에들어가 부귀를 뜬 구름과 같이 보며 불도를 설경하고 산을 떠나지 않았다고(長遊不返)하여 '장유화상'이라고 불렀다고한다.
이 팔각의 사리탑은 김수로왕(金首露王)의 처남(妻男)인 장유화상(長遊和尙)의 사리를 봉안하고 있는 석조물로서, 가락국(駕洛國) 제8대 질지왕(재위 451~492) 제위 중 장유암(長遊庵) 중건 당시 세워진 것으로 전하고 있다. 오랜 세월 속에 여러 번의 변화로 암자와 관련 유물들은 거의 소실되었고 사리탑만 이었다고 전하나, 현존 사리탑은 그 제작수법으로 보아 고려 말 조선 초의 작품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