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기인물 한국사]9ㅡ3.
왕보다 소주가 좋아!③
고려시절에 밀직부사(密直副使)에까지 올라앉았던, 진안대군(鎭安大君) 이방우! 그런 그가 조선왕조가 들어서자마자 알코올 중
독자가 되었을까? 조선왕조실록에서의 기록만으로 보면, 그는 술에 쩔어 산 폐인이었지만, 야사(野史)를 살펴보면 그는 재야에
은둔한 반체제 인사(?)로 그려져 있다. 이야기는 고려 우왕 14년(1388년)에 시작된다.
"장인어른! 장인어른까지 요동으로 가시면 전 어쩌라구요? 이 개경 바닥에 누굴 믿고 왕 노릇 합니까?"
우왕은 장인인 최영을 붙잡고 매달렸다.
"저기 고려의 전군을 다 끌고 가는 요동정벌인데…이럴 때일수록 제가 나서야…."
"그런 게 어딨어요? 배 째! 장인 가면 요동정벌 안할 거야!"
우왕의 생떼 앞에 최영 대신 이성계와 조민수가 요동정벌군을 이끌고 나가게 된다. 이때 우왕과 최영은 최소한의 안전장치(?)
를 마련하게 되는데…바로 이성계의 가족들을 볼모로 잡은 것이다.
"에…그래설라무네, 내가 이 장군을 의심하는 게 아니라, 혹시 요동정벌 가 있는 동안 가족들이 걱정돼서 전투를 못 할까봐. 가
족들은 내가 보살피려고 하는 거니까…음, 내 맘 이해하죠?"
이때 붙잡힌 이성계의 가족들이 진안대군 이방우, 훗날 정종이 되는 이방과, 그리고 이성계의 오른팔인 이지란(李之蘭:퉁드란)
의 아들 이화상(李和尙)이었다. 이들은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단행하자 그길로 탈출을 시도한다. 당시의 기록을 조선왕조실
록에서 살펴보면,
- (상략)이날 밤에 상왕(上王:정종)이 그 형 방우(芳雨)와 이두란(李豆蘭)의 아들 화상(和尙) 등과 함께 성주(成州)의 우왕의 처소
로부터 태조의 군대 앞으로 도망해 갔으나, 우왕은 해가 정오(正午)가 되어도 오히려 알지 못하였다.(하략)
진안대군 이방우는 형제들과 함께 도망을 쳤던 것이다. 그러나 야사에는 이와 정반대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이지란의 저서인
청해백집(靑海伯集)을 살펴보면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었다.
"형! 우리 탈옥합시다. 탈옥해서 아부지한테 갑시다. 우리 죽으면 아부지가 얼마나 슬퍼하겠어?"
"임금한테 개기는 게 효도냐?"
"지금 죽게 생겼는데, 그런 거 따질 정신이 어딨어?"
"하고 싶으면 너나 해."
둘째 방과가 첫째 방우를 꼬셨지만, 방우는 우왕에 대한 충성심을 버릴 수 없다며 탈옥을 거부한다. 결국 방과는 탈옥해 이성계
에게 달려간다.
"아부지!"
"어이구, 둘째야 무사했구나. 근데 첫째는?"
"형은 오기 싫데."
"이눔자식 무슨 똥배짱이야?"
"원래, 큰 형이 좀 그렇잖아요."
큰아들의 똥배짱에 짜증이 나긴 했지만, 그래도 어쩌겠는가? 자식인데…이성계는 군대를 이끌고 성주(成州 : 당시 우왕은 이곳
에서 정벌군을 독려했었다)를 거쳐 개성으로 진격하게 된다(미워도 자식 아닌가? 일단 구하고 볼 일이다). 그리곤 감옥 안에 갇
혀있는 진안대군을 구출해 낸다. 문제는 이때부터였다.
"아버지! 어떻게 쿠데타를 일으킬 생각을 하셨슴까? 그러면 안 됩니다!"
"이 미친노무자식이…야 이게 어떻게 쿠데타야? 혁명이지!"
"이게 혁명이면, 전두환은 민주투사겠네요?"
"이눔자식이…어휴 이런 걸 자식이라고…."
말고삐를 붙잡고 버티는 이방우를 겨우 떼놓은 이성계는 그길로 개성으로 진격하게 되었고, 고려왕실을 배신한 이성계를 더 이
상 볼 수 없었던 이방우는 가족들을 이끌고 철원 보개산으로 들어가 은거하게 된다.
"장남이란 놈이…어휴 그래, 네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방우의 고집을 끝내 꺾지 못 한 이성계는 고향 땅인 함흥에 거처를 마련해 주고, 여기서 살게 한다. 방우는 그렇게 아버지의 쿠
데타를 인정하지 않고, 술로 한 세월을 보내다. 병을 얻어 저세상으로 떠나게 된다.
정사인 조선왕조실록에 나와 있는 알코올 중독자 이방우가 야사에서는 고려왕실에 대한 충성 하나로 똘똘 뭉친 인물로 그려져
있다. 마치 마의태자(麻衣太子)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조선왕조실록이 옳은 건지, 청해백집(靑海伯集)이 옳은 건지에 대해서는
함부로 예단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이방우의 죽음으로 태종 이방원은 수월하게 왕이 될 수 있었다는 건 사실일 것이다(진안대군이 살아 있었다면, 이방원
이 명나라로 갈 수 있었을까? 아울러 '적장자'가 왕위에 오른다는 명분이 나올 수 있었을까?). 비약하자면, 태종 이방원이 왕위
에 오를 수 있도록 도와준 최고 공신은 소주가 될 수도 있겠다. 정사에서는 단순히 알코올 중독자로만 나와 있는 이방우…알고
보면, 그도 사연 많고 한 많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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