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5월 양주에 밝은도량 풍경입니다. 이제 불두화 필 날도 머지 않았습니다.]
이제 오랜 겨울 추위를 뒤로 하고
온 세상이 봄소식으로 한창이다.
우리 도량 주변에도
진달래, 개나리, 백목련, 자목련, 산수유, 벚꽃 등이 예쁜 꽃을 피웠고,
가만히 발 아래를 살펴보면
민들레, 제비꽃, 양지꽃, 냉이꽃, 꽃다지 등이
지천으로 피어올라 봄기운을 느끼기에 손색이 없다.
그런가 하면 온갖 이름모를 나무며 풀들도
앞다투어 새순을 틔워내고 있고,
한겨울 호젓하고 조촐하던 숲의 모습도
조금씩 푸른 빛으로 옷을 갈아입고 있다.
지난 일요일에는 고로쇠나무 수액보다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그 맛이나 효과에서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는 이웃스님 말씀 따라
도량 주변에 많이 자생하는 자작나무에서 수액을 채취해
신도님들과 시원하게 나누어 마셨다.
지금까지 그 나무에서 물을 뽑아 먹었다고 해서
모두들 고로쇠나무라고 믿고 있었고 나도 그런 줄 알았는데
아무리 봐도 남쪽지방에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고로쇠와는 너무 달랐던 터라
이런 종류의 고로쇠가 따로 있는가 보다 했더니
그간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었다는 것이 얼마전에 드러났다.
그래도 다행인 것이
지난 주 법문을 주신 이웃 절에 스님께서
자작나무 수액이 오히려 고로쇠보다 더 좋다고 극찬을 하고 가신 뒤로
서운하던 마음들에 많은 위로가 되었나 보다.
일요일 법회가 끝나고 나누어 먹으며 웃음꽃을 피웠으니...
스님께도 한 통 가져다 드려야 할 것 같다.
그러더라도 한 나무에서 너무 많은 물을 뽑아내지는 않아야 할 것 같다.
그 녀석에게도 꼭 필요한 피와 같은 것일텐데
몸에 좋다는 몇 마디에 혹해서 이렇게 뽑아 먹는다는 것이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우리가 과일나무에서 과일을 따 먹을 때
그냥 마구 따 먹지 않고 고마움을 표현해야 하듯,
땅을 갈고 씨앗을 뿌릴 때
미리 땅의 모든 생명에게 양해를 구하고
내가 필요한 땅의 사용에 대한 감사를 표해야 하듯,
그렇게 하고 나서는
될 수 있다면 최소한의 것을 꼭 필요한 만큼 사용하고
나머지는 본래의 자리로 다시 되돌려 주고
쓰고 나서도 자연 본연의 모습으로 환원시켜 주는 것을 잊지 않듯
그렇게 자작나무에게도 양해를 구하고
감사의 기도를 올리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할 것 같다.
땅을 갈고 씨앗 뿌리는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마침 오늘 봄을 맞아 그렇게 기다려왔던 씨앗을 뿌렸다.
장에 가서 구해 온 온갖 씨앗들과
얼마 전 신도님들께 보시 받아 놓은 씨감자며 땅콩, 팥 등을
지난 겨울부터 만들어 둔 텃밭에 나누어 심으며 봄의 조화에 동참했다.
대웅전 앞 뜰에는 저 아래 주차장 쪽까지
계단이 어름잡아 108개 정도 나 있는데
그 계단 양쪽으로는
위쪽에는 키큰 조릿대인 이대가 있고
그 아래로는 ‘부처님 머리와 같은 꽃’이란 이름을 지닌 불두화가 피어올라 있는데
바로 그 양쪽 불두화 너머로 참나무 숲에 못미쳐
햇살이 짠히 비춰주는 작은 공간
그곳을 작은 텃밭으로 만들어 씨앗채소류들을 심어 놓았다.
이것 저것 많이 심어 놓았는데
잘 키워 먹는 것도 먹는 것이지만
하나 하나 씨앗 뿌릴 때 그 생김새에서부터
올라오는 시간이나 올라오는 생김 생김들
하루 하루 시간이 갈수록 조금씩 변해가는 그 각양각색의 모습들을 보고 있자면
내 안에서는 맑은 샘이 넘쳐흐르는 것 같다.
작년 농사를 시작하면서
심어 두었던 온갖 채소들이며 과실들이
하루 하루 작은 떡잎을 피우고 본잎을 피워낼 때
그 싱그럽고 경이로운 생명의 몸짓들을 난 잊을 수가 없다.
그 모습을 떠올리기만 해도 내 마음은 어린애처럼 설렌다.
그런 연유로 좀 욕심을 부렸다.
감자, 팥, 땅콩, 상추, 쑥갓, 알타리무, 부추, 파, 들깨
돌산갓, 취나물, 아욱, 치커리, 청경채,
청치마, 시금치, 근대, 배추, 케일, 참나물
이상이 오늘 심은 채소들이고
한달 후 쯤 모종을 사다 심을 것들까지 생각해 보면
아직 심어야 할 것들이 한참이다.
내가 먹는 것만 생각한다면이야
한참 욕심이고 집착이지만
어차피 절집안에 찾아오시는 누구든지
어느 때든 찾아오셔서 뜯어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나.
게다가 난 이 다양한 채소들이 커가는 아기자기한 모습을
매일 매일 바라볼 수 있고
그 때마다 싱그러워질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 일인가.
마침 오후에 빗방울이 조금씩 내리고
오늘 밤에 한차례 더 비가 온다고 하니
자연이 내가 해야 할 일을 한참은 덜어 주었다.
우리 절 법우님하고 둘이 심다 보니,
또 물호스도 없는 입장에서 물주는 일도 만만치 않았는데
이렇게 고맙게도 대자연의 힘을 빌게 되니
더없이 감사의 기도를 드리지 않을 수 없다.
기도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오늘 새벽기도는 1부 2부로 나누어서 보았다.
1부는 법당에서,
2부는 오늘 씨앗을 심을 텃밭에서 작업복을 입고 기도를 드렸다.
2부라는 표현이 좀 그런데
텃밭에서 오늘 하루 내가 밟고 일해야 할 흙에게
또 나에게 공간을 나누어 줘야 할 흙이며
땅 속의 모든 생명들에게 먼저 양해를 구하고,
최소한의 공간만을 최소한의 훼손으로 가꾸겠노라고
말을 하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게 된 것.
물론 아직 농사일에 많이 서툰 탓도 있겠고
생각처럼 그렇게 잘 되지는 않았기에
지금 생각해 보니
미안한 부분이 없지 않다.
앞에서도 잠깐 말하였지만
사실 삽자루를 들고 흙을 파헤친다는 것이
가만히 생각해 보면 여간 미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흙을 한 번 파헤칠 때
그 속에서는 얼마의 생명이 죽어갈 지도 모르고
행여 지렁이 몸을 두 동강 내게 될 지도 모르는 일.
하기야 우리들 숨을 쉴 때도
들숨 날숨에 수많은 생명이 나고 죽는다고 하고,
또 걸음을 걸을 때 또한
수많은 생명이 죽어간다고 하니 이런 일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흙에 삽질을 한다는 것도
어찌 생각해 보면
사람 몸에 칼을 대는 것 만큼이나 아픈 건지도 모른다.
하기야 요즘같이 포크레인 같은 대형 기계와 장비를 가지고
산 하나를 불과 몇 일 만에 평지로 만들어 놓고
그 위에 산 크기 만한 빌딩을 올린다거나,
그렇지 않아도 너무 빠른 세상 좀 더 빠르게 가겠다는
그 정신 빠진 생각에서 산에 커다란 터널을 뚫는다거나 하는 일이
아무런 반성과 미안함 없이
저 산과 대지에 양해를 구함 없이
지금 이 시간에도 수없이 행해지고 있음을 본다면
이 말이 과민하고 하찮은 말로 들릴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산에도 들에도 흙에도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에도
내 생명과 똑같은
부처님 생명과 똑같은 생명이 담겨있다.
많은 사람들이 꼭 한번쯤 이러한 생명에게
시선을 돌릴 수 있기를 간절하게 바라고 또 바란다.
물론 이러한 생각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농사도 짓지 않고, 집도 짓지 않고
걷지도 말고 숨도 쉬지 말라는 말은 아니다.
행하되 함이 없이 행하던가
그것이 안 된다면 최소한의 감사와 양해라도 구해야 한다.
함이 없이 행한다는 것은
무책임하게 자연을 파괴하고 나서도
아무런 죄스러움이 없어도 된다는 말이 아니라,
내 몸과 대자연이, 온누리 우주 법계가 그대로 한생명이라는 자각 아래
동체대비의 마음이 바탕되었을 때 자연스레 발현되는
실천을 의미하는 것인데
지금의 우리들이야 그럴 수 없는 형편이지 않나.
그렇다면 내 마음 안에서 진실로 우러나오는
감사와 양해,
대지와 우주에 대한 사랑과 자비를
우리 안에서 먼저 싹틔울 수 있어야 한다.
그러고 난 뒤라야
저 대지 위에 생명의 싹도 틔울 수 있는 것이다.
될 수 있다면
그 곳에 있는 것은 그대로 두고
최소한의 일만 하다보니
많을 것 같은 일이 너무 단순하고 간단히 끝났다.
작년 같았으면 흙안에 돌덩이라던가
이런 저런 풀뿌리들이며
전년에 떨어진 아직 썩지 않은 그 많은 낙옆들을
말끔히 골라 내고 씨앗을 뿌렸을 텐데,
이번에는 그냥 그대로 흙과 함께 놓아 두었다.
물론 그랬더니 일도 매우 수월할뿐더러
별다른 힘 들이지 않고도 일찍 일을 끝마칠 수 있었다.
그리고 남는 시간에
좀 더 공부하고 책도 보고 앉아 있기도 하고
좋은 일이 아닌가.
될 수 있다면 우리들 머리 굴려
이것 만들고 저것 만들고
여기에 좋다는 것, 또 저기에 좋다는 것
밭에다가 자꾸 사다가 뿌려주고 그런 것 좀 없애야 한다.
공연히 간단하고 쉬운 일을
우리들 욕심과 판단 분별 개발 발전 대량수확
뭐 이런 저런 명목으로 너무 복잡하고 어렵게 만들어 놓았다.
참 농사꾼은
하루에 한나절 농사 지으면 충분하고
일 년 가운데 반절 가량은 쉬면서
그 시간에 공부도 하고 수행도 하고 들길도 거닐고
자연과 대화도 나누면서 그렇게 보낸다고 한다.
농사가 일이 되면 안될 것 같다.
요즘 농사는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이 되어 버렸나.
많이 지어야 하고, 많이 수확해야 하고,
그래서 많이 돈 벌어야 하니까 그렇게 어려워졌지
그냥 우리 가족 먹을 만큼 농사 지어
욕심 좀 줄이고 만족 좀 늘이면서 산다면
농사라는 것이 그렇게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 아니지 않을까.
물론 이런 말들이
밥줄 달린 농부들에게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말이고,
농사를 잘 모르는 이상주의자나 하는 말로 치부할지 모르지만
내 말은 지금의 이 사회에서
지금의 세상 사람들이 사는 만큼 살면서
세상 사람들 수준으로 먹고 자고 쓰고 교육 받으면서
그렇게 살려고 하고 그러기 위해 농사를 짓는다는 그 생각부터
완전히 놓아버렸을 때 이상이 아닌 현실이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기야 이즈음 와서는
농사 얘기가 아니라 수행자 얘기를 하는 것일지 모르겠다.
어쩌면 그것이 맞는 얘기일꺼고...
참된 농부는 그래서 수행자라고 말하는 것이니까.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전에 같으면 다 주워내고 골라냈던 돌들을
그냥 그곳에 그대로 놓아 주었더니 한결 수월해졌다.
농사 지을 때 될 수 있다면 바위나 돌을 다 골라내고
흙만 있는 곳에 농사를 짓기 위해
논밭에 있는 모든 바위며 돌들을 다 골라낸다고 하던데,
그러다 보니 요즘에는 시골에 좋은 바위들이 없고
때마침 바위나 돌을 사고 파는 업자들이
논에 바위나 돌도 치워주고 돈도 벌기 위해
우리 시골의 바윗돌들을 다 캐어 간다고 한다.
요즘엔 그게 문제가 된다는 걸
어지간히 알아 차렸는가 보다.
그것들을 다 치워 버리고
개울물 양옆으로 콘크리트를 다 찍어바르고
보기에는 번듯하게 공사 해 놓고,
그것도 장마 대비를 위한 하천 복구공사라고 하면서
시골 미관도 버려놓고
그 소중한 바위나 돌의 씀씀이도 다 파괴해 버렸다고 들었다.
그런데 요즘 와서 연구 결과
시골이나 논밭에 있는 바위나 돌들이
농사에도 매우 큰 도움이 되고
또한 그 시골마을의 재해 예방이나
기운, 정기 같은 것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고 뒤늦게 말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 세상 모든 것들은
인간이 인위적으로 바꾸고 손을 대기 전에는
있어야 할 것이 꼭 그 자리에 있다.
그래서 이 세상을 법계라고 하는 것이다.
그냥 세상이 아니라 진리의 세계라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대자연에 최대한 우리의 욕심을 개입시키지 말고,
우리의 판단이나 분별 지식으로
대자연의 지혜로운 운행을 거스르지 않는 것이다.
아직도 나의 농사는 너무 서투르고
여전히 파괴적이며 인위적이다.
그러나 될 수 있다면 ‘마음밭’을 일구듯
저 밭을 일구고픈 마음은 간절하다.
대자연의 변화에 턱 맡기고 함께 따라 흐를 수 있도록,
나와 대자연이 둘이 아니고 대자연의 일부일 수 있도록,
저 돌과 바람과 하늘처럼 나도 돌과 바람과 하늘일 수 있도록,
자연의 변화에 맞춰
내 삶의 리듬도 그 자연의 조화로운 변화에 장단을 맞출 수 있도록
그렇게 조화롭고 평화로운 삶을 살고 싶다.
세상이 활짝 핀 꽃과 함께 봄을 맞이할 때
내 안의 뜨락에도 꽃이 피고 봄을 맞이할 수 있으면 좋겠고,
한참 물이 오른 산빛 찬연한 여름 숲을 바라보며
내 생명의 뿌리에도 물이 올라 싱그러운 여름을 맞이할 수 있었음 좋겠다.
🩸글쓴이: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