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문화적으로 행복한 나라다. 한반도 전체가 문화유적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사는 곳에서 30분 정도 거리에 문화유적이 있다. 아니, 우리나라처럼 나라 전체에 풍성한 문화유적이 있는 나라는 이 지구 상에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장 현대적 건물이 많이 들어선 강남에도 봉은사에 가면 추사 김정희가 쓴 현판 <판전(板殿)>을 비롯해 눈여겨 볼 수 있는 문화유적이 41점이나 있고, 강화도에 가면 선사시대의 고인돌부터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유적이 널려있다. 서울 시내 한복판에 조선시대의 궁궐이 있고, 송파구에 가면 한성백제시대의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건너편 아차산에 올라가면 고구려시대의 산성과 유적들이 있다.
봉은사 판전. 현판 글씨가 추사 김정희의 작품으로 세상을 떠나기 3일 전에 썼다.
이런 문화유산은 민족과 역사를 이끌어 온 소중한 흔적이다. 그리고 이런 문화유산을 소중히 여긴 옛 선인들의 흔적 중의 하나가 탁본이다.
추사 김정희 <판전>
먼저 글씨를 본다. 이 글씨에 대해 김성태 서예가는 이렇게 평가했다.
"서예가로서 보아도 완당선생의 작품중 판전만큼 아름다운 글씨가 없다.
최순우 선생님이 말씀하신 '무기교의 기교' 를 이 글씨에 표현해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무릇 예부터 해서는 북위와 당해를 최고로 치는데, 북위의 해서는 근대에 와서 많이들 교본으로 삼고 있다. 그 이유는 북위시대에는 비석(귀두와 이수를 갖춘 형식)이 없었고, 대부분이 전돌에 새겨서 땅속에 죽은 시신과 같이 묻었기 때문에 탁본을 할 수가 없었으며, 용문22품과 같은 용문석굴에서 탁본한 글씨들이 있기는 하나 워낙 초당3대가(구양순,안진경,우세남)의 파워에 밀려서 그 빛을 볼 수가 없었다. 이 초당3대가의 글씨는 조선후기까지 좀 더 진솔하게 말하면 1980년대까지 한국서단을 흔들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의 글씨는 기교의 끝이라고 할 정도로 장법과 결구가 잘 짜여져 있으며 필획 또한 강건해서 더 이상의 완성도를 만들어 낼 수가 없을 정도로 잘 쓴 글씨라 할 수가 있다.
이에 반해서 추사선생의 판전은 그 고졸한 맛이 문질빈빈文質彬彬의 깊은 뜻을 그대로 따른 글씨라 할 수 있다."
<추사 김정희 글씨 '판전' 탁본>
(이미지를 클릭하면 크게 보인다.) '탁본'이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
돌이나 금속에 새겨진 글자·무늬를 원형 그대로 종이에 옮겨 찍는 것. 탑본이라고도 한다. 기와·벽돌·고비(古碑)·판비(板碑)·기념 비·문학비·묘비· 사찰의 종·마애불·벽돌·벼루·동전 등이 그 대상이 된다."라고 나와 있다..
탁본의 기원은 6세기말의 수나라 때부터 시작되었고, 송나라 때 금석학이 성행하면서 더욱 발전하였다고 한다. 금석학이란 옛 석문을 해석하고 연구하여 금석문의 서체, 문체의 분석을 통해 금석문의 제작연대를 연구하며 금석문의 내용을 해석하는 학문이다.
그러나 탁본은 금석한 연구와 이전 시대 서예가들의 서체를 익히기 위한 방법뿐 아니라, 지난 세월의 흔적을 기록으로 남기고 후세들에게 알려주는 역할도 한다.
성덕대왕 신종 비천상 (일명 에밀레종 : 국보 29호, 경주국립박물관 소장) 오른쪽 부분 탁본
이 탁본은 에밀레종 가운데에 있는 비천상 부분인데, 족자를 해서 걸어 놓거나 탁본 종이만 벽에 붙여 놓아도 신라의 숨결이 느껴지는 듯해서 좋다.
그렇다. 탁본은 이렇게 종이 한장에 천여년 전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을 수 있고,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지나간 역사 속으로 빠져들어 가게 하는 매력을 갖고 있다.
김성태 서예가는, "성덕대왕신종의 비천상은 조각양식의 최고조인 통일신라시대 중대 양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 수작이다."라고 평가면서 다음과 같은 설명을 했다.
"
통일신라시대의 조각양식인데, 성덕대왕신종은 석굴암군과 더불어 최고의 조각미술품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성덕대왕신종은 비천상도 비천상이지만 그 외각에 새겨진 명문의 내용이 일품이라 할 수 있는데, 그 명문의 서문에 적힌 글귀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夫至道 包含於形象之外 視之不能見其原,
大音 震動於天地之間 聽之不能聞其響
무릇 지극한 도는 형상의 바깥을 포함하므로
볼려고 해도 그 근원을 볼 수가 없으며,
큰소리는 천지 사이에 진동하므로
들으려 해도 그 울림을 들을 수 없다."
백제 도깨비얼굴 무늬 벽돌 28.8 x 29.4 x 4.1cm 보물 343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미지를 클릭하면 좀 더 크게 보인다.)
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면 외리 백제 절터 출토 벽돌의 탁본이다. 백제 무령왕릉에서 나온 벽돌이라고 알려진 건 오류다.
무덤을 지키는 도깨비 모습인데, 백제 화공의 솜씨와 숨결이 느껴지는 좋은 탁본이다.
백제 산수무늬 벽돌 29 x 29 x 4cm 보물 343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미지를 클릭하면 좀 더 크게 보인다.) 위의 벽돌과 같은 곳에서 출토되었는데, 사후(死候)에 좋은 곳(선계 仙界)로 가기를 원하는 화공의 염원이 잘 표현되었다. 이 정도 솜씨면 요즘 웬만한 화가의 솜씨보다 좋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위 벽돌의 탁본이다.
역시 위의 벽돌과 같은 곳에서 나온 벽돌의 탁본으로, 위의 그림과 같은 화공의 솜씨로 추정된다. 이 작품 역시 선계에 대한 염원으로 보여지는데, 우리나라 화가들 중 몇명이 이와 비슷 그림을 현대적으로 그렸다.
<삼한일편토(三韓一片土> 119.5 x 38.7cm
(이미지를 클릭하면 좀 더 크게 보인다.) 고구려시대부터 조선시개까의 기와 탁본들이다. 이 기와는 위창 오세창(1864 ~ 1953) 선생의 수집품이었고 직접 탁본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위창은 맨 아래 왼쪽에 다음과 같은 시 한편을 써넣었다.
자취 뚜렷한 삼한의 한 조각 흙덩이
수많은 풍우 속 상전벽해의 역사 담았구나.
몸소 겪고 닦은 썩지 않을 천년의 업
오랜 이끼 벗겨내자 밝고 큰 빛 발하누나.
번역 '흰구름' 선생님 (아래 댓글 참조)
신라 기와의 글씨
위창은 이 기와가 경주에서 출토되었으며, 쓰여있는 글이 궁와(宮瓦 궁의 기와)임을 밝혔다.
고구려 기와의 글씨 <산해구(山蟹口)>
(이미지를 클릭하면 크게 보인다.) 이 기와의 출처에 대한 위창 선생의 글은 아래와 같고, 해석은 "한문을 공부한 교사"라고 밝히신 '흰구름'선생님께서 해주셨습니다. (아래 댓글 참조)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乙丑夏洪水凌京畿廣州郡東部面,船里江岸多現古瓦破片,槪有文字是高句麗郡縣之名. 余乃派人得其七八片. 此山蟹口三字上缺者其一也.
按三國史地理志載海口郡本高句麗穴口郡景德王改名,今江華縣云. 愚謂海與蟹同音必是江華也. 書□豪健古雅類廣開土王碑筆意. 譬如殘璋斷玦,珍豈在多耶?
을축년에 경기도 광주군 동부면에 홍수가 났는데, 선리의 강안에 많은 옛날 기와조각이 (땅속에서) 드러났다. 문자가 쓰인 것은 모두 고구려 현 이름이었다. 나는 사람을 보내 일여덟 조각을 얻었는데, 이 산해구(山蟹口) 세 글자를 쓴, 위가 깨진 것이 그 중 하나이다.
[고려 인종 때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 지리지에 따르면, '해구군(海口郡)은 본래 고구려의 혈구군(穴口郡)을 신라 경덕왕이 개명한 것이며, 현재의 강화현이다' 하였다. 내 생각으로는, 바다 해(海)와 게 해(蟹)가 동음이므로 [山蟹口는] 필시 강화도이다. 글씨가 호방강건하고 고졸우아한 것이 마치 광개토왕비 글씨의 느낌이다. 이것은 비유하자면 깨진 홀과 패옥 같은 것이다. 진귀한 것이 어찌 많이 있으랴!
덧붙이는 말씀:
1. 필사본 글씨를 잘 못 보았을까 두렵습니다. ‘書□豪健’의 빈칸 글씨는 짐작을 못 하겠군요.
2. 山蟹는 ‘산의 개울가에 사는 게’와 ‘(산게처럼 생긴) 먼지버섯’이라는 약초의 둘로 해석됩니다. 혹시 강화도에 산게나 먼지버섯이 많다면, 오세창 선생의 해석은 큰 설득력을 갖게 될 것 같군요. 수많은 산게의 구멍[穴, 口]이나 먼지버섯의 꽃밭이 혹시 강화도의 옛 풍경이 아니었나 하는 상상을 해봅니다.
백제 기와의 글씨
(이미지를 클릭하면 크게 보인다.) 병술(丙戌)년에 만들었다는 글이 쓰여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크게 보인다.) 오른쪽에 글씨는<동량해등장로(棟梁海燈長老)>인이고, 왼쪽에는태평(太平) ? 년에 만들었다는 글이 쓰여있다.
이 부분은 기와의 출처와 내력에 대한 위창선생의 글이다. 한문 실력의 부족으로 번역을 해드리지 못함을 혜량하시기 바란다....ㅜㅜ
조선시대 기와의 글씨
(이미지를 클릭하면 크게 보인다.) 신광사(神光寺) 터에서 출토된 기와로 김천동이라는 불자가 시주했다는 글이 쓰여있다.
<고구려 천추총 벽돌 탁본>(집안 소재) 36.2 x 6cm (개인 소장)
탁본 왼쪽 아래에 보이는 '와전산방'은 오세창 선생이 기와 수집품을 뫃아 두었던 장소다. 이 벽돌은 중국 집안현 집안시에 있는 고구려시대 천추총 출토품인데, 광대토대왕비 서풍과 비슷하다고 평가되고 있다.
글씨는 <천추만세(千秋萬世) 영고(永固)>이다. 영고 다음 글씨는 여악(如岳)이라는 기록이 있으니, 그 부분은 파손된 상태라 탁본을 못한 것으로 추정된다.
나는 이 탁본을 보고 '만세'라는 단어가 고구려 시대부터 있었음을 알았다.
<낙랑 기와와 벽돌 탁본> 26.5 x 34cm
(이미지를 클릭하면 크게 보인다.) 평양시 밖 토성리 부근에서 출토된 낙랑시대 벽돌과 기와의 탁본이다.
오른쪽이 벽돌인데 맨 아래 글자 일(日)자를 상형문자처럼 표기한 것이 특이하다.
왼쪽은 기와인데 낙랑의 연호인 듯한 <대진원강(大晉元康)>이 쓰여있다. ('진'자임은 '흰구름' 선생님의 도움을 받았음을 밝힌다.)
위창 오세창 <문화보국> 76 x 34.5cm 1952년
위창 선생이 85세 되던 새해 아침, '문화로써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염원을 담아서 쓴 글씨다. 동시대를 살았던 지식인 중 어느 누구보다도 민족문화와 유산을 사랑했던 분이기에 이런 글을 남겼다.
시끄럽고 어지러운 세상이다. 가끔은 지나간 세월의 흔적을 바라보며 역사와 문화 두 단어를 생각하는 것도, 이 시대를 헤쳐가는 한가지 지혜일지도 모른다...
첫댓글 귀한 자료소개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