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영상으로 4회분의 극을 모두 보았다.
예전에 집에 TV를 두었을 땐, 드라마나 영화를 보고 나면
극중 인물들의 갈등과 아픔과 또 설레임과 희열들이 모두 내 것인양
이전의 경험과 상상력까지 동원되어 극 이상의 현실적인 체감으로 오랜동안 사로잡히곤 했었다.
현실상의 단조로운 생활을 유지해나가는 것만으로도 벅찬 내게,
다른 이들의 삶까지 그렇게 덤으로 지고 정신적 감정적 에너지를 소모시키던 습관은
뒤돌아 생각해보면, 그리 유익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만약 영빈이가 정신적인 장애를 가지지 않고 평범하고 똑똑하게 태어나
엄마의 감정상태나 습관들에 크게 좌우되지 않을 정도로
한걸음 뒤로 물러서서 여유롭게 키울 수 있는 아이였다면 모르겠지만,
잠시의 쉼이나 아픔도 쉬이 허락되지 않는, 나의 말투 하나 표정 하나에도
마치 아직도 엄마의 뱃속에서 태교하는 아기처럼 그대로 영향을 받는 아이이기에
나는 맘껏 감정의 기복을 따라 울거나 센치해지거나 깃털처럼 아늑한 우울감도 느껴선 안되었고,
지적인 호기심을 채우기 위한 철학적인 고뇌나 고독한 사색조차 지극히 절제해야만 했다.
아, 굳이 발달장애아를 키우는 엄마가 아니라 하더라도
30대를 넘어서서 자녀들을 키우고 시부모님을 모시며 또 직장생활까지 병행하는 대개의 주부들은
나 이상으로 쉼없이 쳇바퀴 돌아가듯 하루하루를 유지하는 데에 급급하며 살아내고 있을것이다.
그래. 상황만 다를 뿐, 한국의 3,40대 여인들은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모두가
자신을 절제하며 인내하며 스스로를 단순함으로 길들이는 가운데
오히려 강해지는 법을 익혀가고 있을 것이다.
아무튼, 어쩔 수 없이 드라마나 영화에의 습관적인 관람을 절제하며 지내는 동안,
나의 정신은 단조로우면서도 명쾌해졌고, 육신과도 균형있는 상태로 변해가게 되었다.
지극히 단순하고 솔직하고 영롱한 영혼을 가진 영빈이의 눈을 오랫동안 바라보면서
그저 냄새맡고 소리를 듣고 입술을 부벼대는 순간의 표현하지 못할 존재적 충만감,
관념과 상상을 지극히 배제하고 굳이 무어라고 언어적 정의를 내리지 않아도
이미 오감으로 살아서 꿈틀거리는 사랑에의 현현을 체험할 수 있었다.
영빈이는 나를 그렇게 가르쳤고, 그렇게 다시 살게 해주었다.
그러다가 [부모님 전상서],
타인의 갈등과 야망과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나와 영빈이의 이야기로 얽혀가는 이 드라마를 만나고,
나는 새삼스레 침잠되는 우울까지 느끼면서 감정과 정신을 다시 이입해본다.
김수현작가 특유의 어법, 따따따따 쏘아붙이는 말투나
근래의 쿨하고 담백한 스토리를 전개시키는 젊은 작가들과 달리
가부장적 가정의 배경설정과 이질적인 가치관의 대치구도,
작가의 심리적 깊이를 드러내는 갈등의 전개 방식 등에 대해선
이미 많은 시청자들이 더 잘 파악하고 있을 것이므로 여기선 언급하지 않겠다.
나는 다만,
발달장애아 준이와 그 엄마 성실(김희애 분)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싶다.
인기드라마가 일반의 무수한 시청자들에게 주는 파급효과는 실로 막대하다.
아마도 틀림없이 나의 이웃들과 친척들은 극 중의 준이와 성실을 보면서
나와 영빈이를 떠올리고 안쓰러운 연민과 이해해주지 못했던 미안함으로 가슴을 쓸었을 것이다.
'전철 속에서 버릇없이 고집부리던, 멀쩡하게 잘생긴 그 아이도 발달장애아였나보다.'
'내 조카도 명절 때마다 밥상 앞에서 저렇게 숫자를 세었지.'
드라마 1회분에서 준이와 성실이 나오는 첫장면,
방과 후 몸부림 치며 떼 쓰는 반아이들을 뒤로 하고,
준이를 데리고 걸어 나와 승객들이 붐비는 전철에 올라탔을 때
"앉을 거야, 앉을 거야!"
이미 앉아 있는 어른을 밀쳐내고 앉기를 고집하는 준이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그만 눈물을 줄줄 흘리고 말았다.
그나마 극 속에선 친절한 아저씨가 흔쾌히 자리를 비켜주었고,
성실은 이내 안도하며 "감사합니다."라고 했기에, 나도 급히 숨을 다독일 수 있었다.
그러나 나의 현실, 거칠고 투박한 부산에선 그렇게 친절한 사람은 참으로 드물다.
타인의 아이에게도 자신의 아이인양 큰소리로 호통치는 것을 따뜻한 정으로 여기는
부산 어른들임을 알기에, 길을 나설 때마다 속을 다 비우려 애쓰지마는
그래도 한마디씩 "뗏끼 이놈" 소리를 들을 때마다, 내 가슴은 철렁 내려앉고 만다.
극 속의 준이아빠(허준호 분)가 성실이 대중교통 이용하는 것을 싫어했듯이
내 남편도 내가 아이훈련시킨다면서 굳이 전철이나 버스를 타고 고생하며 다니는 것을 꺼려한다.
준이아빠는 "다른 사람에게 피해주잖아!"라고 호통쳤지만,
그 말 속엔, 내 남편과 마찬가지로 아내에 대한 연민이 더 깊게 숨어들어 있었으리라.
그리고, 장인어른의 생신잔치상 앞에서 어른들 머리를 일일이 짚으며 숫자를 세는 준이에게
버럭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내었던 준이아빠의 모습을 두고,
극 속에선 아이에 대한 사랑을 제대로 체득하지 못한 철없고 나쁜 아빠인양 몰아붙였지만
실상, 자폐아를 키우는 대부분의 가정에서 그런 당황스런 분노는 수도 없이 일어난다.
세상의 어느 자폐아 부모도
자신들의 아이가 그렇게 말귀를 못알아듣고 이상한 행동을 하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없으며,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하더라도, 특수교사와 같은 냉정한 지식을 제대로 적용할 수는 없는 것이다.
준이의 나이를 12살로 설정해놓았기에, 그 엄마 성실은
그동안 이미 온갖 우여곡절을 다 겪고 냉정하고 차분하게 아이를 다룰 정도로 익숙해진 모습으로
극 속에서 역할지어졌는지 모르겠지만
실제로 평범한 인성과 생활습관을 가진 많은 자폐아 부모들은,
아이와 마찬가지로 상처받은 짐승처럼 수년이 지나도록 울고 분노하고 방황하곤 한다.
바람을 피우는 남편.
장애아를 키우며 피눈물 흘리는 아내를 두고 어떻게 그런 파렴치한 짓을?
이라고 시청자들은 쉽게 욕할 수 있을런지 모르겠지만,
10여년전의 통계만 하더라도,
장애아를 가진 부부의 80%가 이혼 또는 별거상태에 이르렀으며,
거의 대부분의 가정에서 아이로 인하여 심각한 불화의 경험을 겪게 된다고 나와있다.
잠시 보여주는 5회분 예고편을 보니,
불륜현장을 목격하는 성실에게 준이아빠의 애인이 오히려 당당하게 맞서며,
"당신같은 여자가 아내로서 제대로 한 게 뭐가 있어?"
라고 성실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 대사가 나오던데,
흠, 제대로 된 아내노릇이라... 남편을 끌어당기지 못하는 아내라...후후
장애아, 특히 자폐아를 키우는 엄마들이
호호 웃으며 자신을 가꾸고 돈벌어주는 남편에게 감사의 애교를 부릴 여유는 없다.
수면장애까지 가진 아이를 키우며 24시간 전쟁과 같은 초긴장상태로 살면서,
제 정신을 잃지 않고 하루하루를 지탱해나가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내성적인 기질을 가진 엄마들은 점점 더 소심해지고 대인을 기피하며 우울하기 십상이고
다혈질의 엄마들은 더욱 자주 흥분하며 강박적으로 아이의 치료에 집착하기도 한다.
남편의 넓은가슴에 충분히 안기지 못하는 아내들은
곪은 상처를 부여안고 캄캄한 동굴 속에서 홀로 끙끙 앓는 연약한 짐승처럼 위축되며 날카로와진다.
극중에서 준이아빠와 대화할 때마다 단 한마디 대답조차 시원하게 하지 못할 정도로,
속으로 울음 삼키며 신음소리도 없이 끙끙 앓는 성실의 모습은,
바로 나이며, 내 아들 친구의 엄마들이다.
그리고 가슴은 있으나, 그 넓은 품으로 아내를 감싸줄 용기가 없는 남편들.
뱃속 내장을 꿈틀꿈틀 건드리며 태동하는 느낌을 가져본 적도 없고,
자신의 젖꼭지를 물려 쪽쪽 빨며 행복해하는 아이의 숨결을 느껴본 적도 없고,
아내가 진통하여 낳은 아기를 품에 안겨주기 전에는
그저 운동하며 일하며 땀흘리고 승리하는 것밖엔 인간의 가치를 알지 못했던 남편들.
그들은 아이가 자라서 "아빠, 아빠!" 라고 불러주는 순간이 되어서야 겨우 어렴풋이 느낀다.
그렇게 늠름하지 않아도, 그렇게 쟁취하지 않아도,
아이와 눈을 맞추고 콧김을 불어주며 작은 소리로 "착한 내아기"라고 속삭이는 것만으로도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가정은 이미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그제서야 겨우 어렴풋이 느껴본다.
아, 그런데...
자폐아들은 두 살이 지나고, 세 살, 네 살이 되어도 "아빠"를 불러주지 않는다.
가족들을 위해 바깥세상에서 고독한 투쟁과 수고로 돈을 벌어왔는데,
퇴근하여 현관문에 아빠가 들어서도 아이는 본 체도 하지 않고 무관심하다.
게다가 아내는 아직 저녁도 준비해놓지 않고, 나날이 흙빛같은 얼굴로 찌푸려져 있다.
그렇게 상처입은 또 하나의 짐승은, 거칠게 포효하며 분노하며 방황한다.
더욱 더 돈 버는 일에만 매진하며,
간간이 느끼는 아기와 같은 연약한 외로움은 차마 피곤하고 지친 아내에게 나누지 못하고,
바깥에서 풀려고 애쓰다가 점점 더 공허한 수렁으로 빠져들어간다.
나는 준이엄마와 아빠의 갈등을 그렇게 해석한다.
이는 그 누구의 극단적인 잘못도 아니다.
둘 다 그야말로 아이와 같이 상처입은 연약한 인간의 모습일 뿐이다.
그렇게 해답은, 서로를 측은하게
나의 상처가 아프듯 그의 상처도 아픈 것임을 바라보아주는 것.
누구든 먼저 다가가 끌어안고 치료해주는 것...
10여년전보다 특수교육적 상황도, 그리고 가정 내에서의 남녀간의 위치도 많이 나아져서,
준이엄마와 같은 비참한 모습은 이젠 소수에 불과한 경우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단 한명이라도 이와 같은 아픔에 처한 아이와 엄마가 있다면,
드라마를 통해서든, 글을 통해서든 사회적으로 드러내고 함께 치료해나가야한다고 본다.
발달장애아가 일반인 가운데 1/1000밖에 존재하지 않는 소수이지만,
모두에게 알려서 함께 고민하며 실질적인 도움으로 교육해나가야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4회분을 통해서 본 준이와 성실의 연기는,아직은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워
자폐아 모자의 내면을 시청자들에게 제대로 전달하기에는 부족해보이지만,
인간에 대한 남다른 깊이와 관점을 가진 김수현 작가를 존경하며
앞으로 계속 긴장하며 그리고 응원하며 드라마를 지켜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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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집에TV가 없어 보지는 않지만 내용은 전해듣고 있다.발달장애아들에대한 사회인식을 높이는점으로는 동감하지만 정말 가슴에 품고 아이의치료에 전념을 다하는 아빠들에겐.....
정말 눈물이 나요..아줌마님 별바다에 가져갈께요,,,부모님 전상서를 볼 여유가 없어서 못봤는 데..꼭 봐야겠습니다.좋은 자료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