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6차 산행 순례기(참 소중한 당신 4월호) : 주어사 앵자봉 천진암

[알삼토]

제76차 가톨릭 언론인 산악회 산행 및 성지순례는 주어사에서 앵자봉을 거쳐 천진암성지로 내려오는 여정이다. 230여 년 전 이 척박한 땅에 복음의 텃밭을 일군 선조들의 얼이 밴 현장을 찾아간다는 사실이 감흥을 솟구치게 한다.

2월 넷째 토요일인 25일 아침, 순례 산행에 함께 한 17명을 태운 버스는 예정보다 15분 늦게 덕수궁을 출발했다. 강변북로와 6번 국도를 따라 양평으로 향하다 양근대교를 건너 왼쪽으로 98번 국도를 타고 광주·곤지암 쪽으로 10여 분을 더 달리면 상품초등학교가 있는 상품 네거리에 이른다.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마을을 따라 2km 가량 가면 버스가 더 갈 수 없는 좁은 길로 이어진다. 경기도 여주군 산북면 하품2리 마을이다. 버스에서 내려 개천과 마을을 오른쪽에 끼고 산기슭으로 향하면 바로 ‘여주주어사지’라는 이정표가 보인다. 7km 거리다. 길을 따라 10분 남짓 걸으니 일부만 콘크리트로 포장한 삼거리에 이른다. 왼쪽 언덕길로 접어든다. 임도(林道)인 듯 제법 넓고 평탄하다. 20분쯤 걸어 올라가자 주어사지에 관한 안내판이 보인다.

한 승려가 절터를 찾던 중 잉어를 따라가는 꿈을 꾸고 얻은 절이라는 이야기가 안고 있는 주어사(走魚寺)는 언제 누가 창건했는지, 또 언제 폐사했는지 정확히 알려진 것이 없다. 다만 발굴 당시 수습한 도·자기류가 17~18세기 때 것이라는 조사 결과가 주어사의 활동시기를 어렴풋이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안내판의 설명이다. 주어사지의 행정구역상 지번은 여주군 산북면 하품리 산 106번지 일대. 설명을 읽은 후 안내판에 표시된 지도를 따라 200m 떨어진 주어사지로 향한다.

10시 50분, ‘주어사지’라고 쓰인 낡은 표지판 앞에서 함께 주모경을 바치고 잠시 상념에 잠긴다. 한국 천주교 창설 주역 가운데 하나인 녹암 권철신(암브로시오, 1736~1801)이 1770년대에 제자들과 강학회를 열던 곳이다. 그 강학회는 실사구시를 위한 개혁 성향이 강했고, ‘천주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는 천주교 교리는 강학에서도 쟁점이 됐을 것이다. 순례 산행에 함께 한 김태진(암브로시오) 대선배가 즉석 ‘강학’을 연다.

‘당시 개혁의 흐름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토지 개혁이고, 다른 하나는 과거제도 개혁이었다. 인재 등용을 위해 과거제도를 개혁하자는 것이었지만 그 이면에는 신분 철폐라는 혁신적 사상이 있었다. 이는 하느님 앞에 모두가 평등하다는 천주교 교리와 상통하는 것이었다. 천주교 교리는 조선 후기 사회에서 혁명적이었다.’

강학(?)을 듣다 보니 ‘예수는 혁명가였다’는 말이 떠오른다. 누가 왜 이런 말을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천주교 신자임을 고백하며 살아가는 내게도 ‘예수는 혁명가’라는 사실이다. 내게 예수는 어떤 혁명가인가? 보수와 수구를 깨부수는 이른바 진보와 혁신의 혁명가가 아니다. 내게 예수는 ‘사랑의 혁명가’다. 보수와 진보 양 진영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이다. 그리고 지금 요청되는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은 나와 달리 생각하고 달리 판단하는 이들에게 대한 ‘배려’다.

어쭙잖은 상념과 함께 주어사지를 내려와 앵자봉을 향해 산행을 계속한다. 안내판 지도에는 앵자봉에 이르는 가까운 길이 표시돼 있지만 찾기가 쉽지 않아 멀리 둘러가는 길을 택한다. 꼬불꼬불 정상으로 이어지는 임도를 따라 주어재 정상에 도착해서 보니 주어사지에서 2.4km 거리다. 약 45분을 걸었고, 시각은 12시 5분을 가리킨다. 주어재 정상에서 왼쪽 등성이를 타고 앵자봉으로 향한다.

15분쯤 더 걷다가 길 한쪽에서 온 점심 보따리를 풀었다. 성지순례 산행의 즐거움 중 하나는 음식을 나누는 것이다. 양이 많고 적든, 맛이 있든 없든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나눔 그 자체에서 일체감을 맛본다.

오후 1시 5분. 다시 길을 나선다. 헬기장을 만나고 앵자봉이 가까이 다가오면서 살짝 눈발이 휘날린다. 그 눈발로 살포시 눈꽃을 피워 올린 나뭇가지들이 하얀 자태를 수줍은 듯 드러낸다. 늦겨울 산행에서 맛볼 수 있는 색다른 정취다.

해발 667m 앵자봉 정상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2시. 정상 등정 기념 촬영을 한 후 반대쪽 길로 하산하기로 한다. 천진암성지까지 4.5km, 1시간 30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다. 서두르지 않기로 한다. 내려가는 길에 성 정하상 바오로와 성 유진길 아우구스티노 순교성인 묘역을 참배한다. 천진암 한국 천주교 창립 선조 5위 묘역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3시 40분. 이벽(세례자 요한), 이승훈(베드로), 정약종(아우구스티노), 권철신(암브로시오),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 5위 묘 앞에서 다함께 큰 절로 인사를 드리고 기도를 바친다.

일반적으로 한국 천주교회 창립을 1784년으로 보지만 천진암성지는 천진암에서 이벽이 중심이 돼 천주교 강학회를 열고 교리에 따른 수계 생활을 시작한 1779년을 한국 천주교회 창립 연도로 본다. 이벽이 이곳 천진암을 천학도장(天學道場)으로 삼은 것은 자신의 고향 광주에서 멀지 않은 곳인 데다 산 너머 앵자봉 아래에는 스승 권철신이 강학을 열었던 주어사가 있었기 때문일 게다. 한국 천주교회 초기 역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 두 곳에 대한 순례를 무사히 마칠 수 있게 된 것을 감사하며 천진암 빙천수로 목을 축인다.

하지만 순례 일정이 끝난 것이 아니다. 오후 4시 10분 성지 주차장 옆에 있는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한 후 천진암성지 변기영 몬시뇰에게서 즉석 강연을 45분 동안 들었다. 성지에 대한 몬시뇰의 뜨거운 열정과 해박한 지식은 또 다른 자극이 돼 길게 여운을 남긴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순례의 끝은 감사와 친교의 잔치 마당이다. 돼지 꼬챙이 바비큐로 하루 피로를 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