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1년 러시아의 차르 이반 4세는 유목민족이자 같은 정교회를 믿는 코사크 족에 물질적 지원을 약속하고 충성 맹세를 받았다. 그들은 그 때부터 시베리아로 진출하여 얼마 안 되는 원주민들을 지배하고 ‘야사크’라는 모피세를 부과하여 담비, 비버, 늑대, 여우, 해달 등 강제로 징수하였다. 시베리아의 중심도시 하바로프스크는 코사크 족 대장이었던 하바로프에서 유래한다.
결국 동진에 멈추지 않고 남하하던 러시아는 청나라와 충돌하였고, 조선이 지원병을 보냈던 나선정벌의 시작도 따지고 보면 모피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 결과, 17세기 중반에 이르면 러시아 정부는 서유럽과 중동의 물품 수입 대금의 상당 부분(세입의 10퍼센트)을 모피로 충당할 수 있었다. 1622년에 2만 3천 명에 불과했던 시베리아 인구는 모피산업 덕분에 17세기 후반에는 10배로 늘어났다. 한때 러시아가 알래스카까지 지배했던 이유도 시베리아의 모피 동물들이 남획으로 인해 줄어들자 그곳까지 진출했기 때문이다.
17세기에 건설된 뉴욕도 모피 덕분에 기반을 닦을 수 있었다. 뉴욕의 시작이 된 그 유명한 맨해턴 섬 매입도 모피교역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었고, 뉴욕의 부호 애스터 가문과 2명의 대통령을 배출한 루즈벨트 가문도 모피 무역상으로 부를 쌓으면서 시작된 것이었다. 서부개척도 비버의 모피를 얻기 위한 사냥꾼들이 역할이 컸다. 그 과정에서 수십만 마리의 비버가 사라졌지만 말이다.
동물의 개체수가 격감했지만 모피산업은 여전히 러시아의 중요한 산업이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소련군 최고사령관 자리에 오른 주코프 원수도 청소년 시절에는 모피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