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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시대의 여행자들]
들어가는 글
지금을 1936년 여름이라 가정하고 당신이 독일에 신혼여행을 와 있다고 상상해보라. 태양은 밝게 빛나고 사람들은 당신에게 친절하게 대해주고 그래서 인생은 마냥 즐겁다. 당신은 라인란트를 통과하여 남부 독일로 차를 몰고 간다. 그 지역의 오래된 성들과 포도원들을 칭송하고, 라인 강을 따라 천천히 오르내리는 만재한 대형 수송선들을 보면서 그 한적하고 아름다운 풍경에 매혹된다. 그리하여 이제 당신은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한다.
당신은 방금 차를 주차했는데 차의 앞유리창에 부착된 GB(그레이트브리튼) 스티커가 햇살을 받아 유난히 반짝거린다. 당신은 이제 유럽에서도 중세 건축물이 많기로 소문난 이 남부 독일의 도시를 샅샅이 탐구할 예정이다.
그런 상황에서 유대인으로 보이는 어떤 여인이 난데없이 나타나 당신에게 다가온다. 그녀는 밑창을 높이 덧댄 두툼한 신체 보정 신발을 신고서 다리를 약간 저는 십대 소녀의 손을 잡아끌고 있다. 순간 당신이 나치에 대해 들었던 온갖 난처한 소문들 - 유대인 박해, 안락사, 무자비한 고문과 재판 없는 투옥 -이 이 절망하는 어머니의 얼굴에 클로즈업된다. 당신의 GB 스티커를 본 이 어머니는 당신에게 제발 자기 딸을 영국으로 데려가 달라고 호소한다.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몸서리치면서 그녀에게 등을 돌리고 다른 데로 가버릴 것인가? 그 어머니의 입장을 동정하면서도 정작 해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대답할 것인가? 혹은 그 소녀늘 안전한 곳으로 인도할 것인가?
나는 이 실화를 어느 영국인 부부의 딸로부터 처음 들었다. 그 딸과 나는 무더운 여름날 오후 한적힌 케임브리지야 이바노브나 정원에 앉아 시원한 레몬수를 마시던 참이었다. 나의 대화 상대 앨리스는 어린아이였던 자신을 안고 미소 짓는 그레타의 사진을 나에게 보여주면서 이 특별한 여행자(그레타)의 이야기가 어떤 식으로 행복하게 결론이 났는지 말해주었다. 만약 내가 그런 상황과 맞닥트렸다면 어떻게 행동했을까? 나는 결론을 내리는 데 불과 몇 초도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그 유대인 여자의 곤경을 안타깝게 여기고 또 나치의 만행에 경악했다 하더라도,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며 중간노선을 선택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일반적 반응을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하지만 실제로 어떻게 반응해야 했다는 것을 정확하게 알 수 있었을까? 과연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우리는 정확하게 해석할 수 있을까?
이 책은 양차 대전(제1차와 제2차 세계대전) 사이에 독일에서 벌어진 일들을 서술하고 있다. 독일을 방문한 외국인들의 일차적이고도 직접적인 기록을 바탕으로 하여, 히틀러의 독일을 여행한다는 것이 정신적, 신체적으로 실제로는 어떤 상황이었는지 생생한 현장 감각을 되살리려 했다. 그 당시 작성된 수십 편에 달하는 미 발간 일기와 편지들을 추적해 나치 독일에 관한 새롭고 생상한 그림을 제시하려고 애썼다. 그리하여 이 책을 펴든 21세기의 독자들이 나치 독일에 대하여 갖고 있는 기존의 인식을 새롭게 되돌아보고 더 나아가 재검토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2차 대전 이후에 태어난 사람들은 초연한 마음과 시선으로 이 시대의 독일을 바라보기가 어렵다. 나치 독일이 저지른 잔학성에 관한 이미지들이 너무나 강력해서 완전히 없애거나 억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2차 대전 종전 이후에나 생겨난 이런 결과적 통찰이 없는 상태로, 2차 대전 발발 이전의 제3제국을 여행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였을까? 당시에 벌어지는 일의 진상을 파악하고, 국가사회주의(나치즘)의 본질을 명확히 인식하며, 나치 당국의 프로파간다에 넘어가지 않고, 더 나아가 유대인 대학살을 예언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었을까? 어쩌면 이렇게 질문할 수도 있겠다. 당시의 독일 여행은 여행자들의 수양, 그러니까 성품과 인격 도야에 도움을 주는 것이었을까, 아니면 기존에 이미 확립되어 있는 편견들을 더욱 심화하는 것이었을까?
이 책은 이러한 질문과 여타 관련 사항들에 대해 답변하려 들면서 여기에 폭넓은 범위의 방문자들이 내놓은 개인적 증언들을 증거로 제시한다. 이 시기의 방문자들을 몇 명만 거론해 보자면, 찰스 린드버그,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인도 파티알라의 태수, 프랜시스 베이컨, 새뮤얼 베케트 등이 있었다. 거기에 평화주의자인 퀘이커교도들과 유대인 보이스카우트, 아프리카계 미국인 학자와 제1차 세계대전 참전용사 등에 이르는 평범한 여행자들도 이 시기에 독일을 방문했다. 대학생들, 정치가들, 음악인들, 외교관들, 학생들, 공산주의자들, 시인들, 언론인들, 파시스트들, 예술가들, 그리고 관광객들 모두 나름대로 나치 독일에 대해 할 말이 있었고, 해마다 휴가철이면 나치 독일을 찾아갔다. 여기에 중국인 학자들, 올림픽 선수들, 친 나치 성향의 노르웨이 노벨 문학상 수상자(크누트 함순)도 독일을 즐겨 방문했다. 이 모든 사례를 한데 모아놓는다면, 히틀러 치하의 독일에 대한 놀랍고도 생생하며 입체적인 장면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직업적인 이유로 제3제국을 방문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즐거운 휴가를 보내기 위해 이 나라를 찾아왔다. 그러나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독일 문화에 대한 갈망과, 가문의 뿌리 혹은 순전한 호기심을 찾아 이 나라를 방문했다. 다른 나라들에서는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실업률이 치솟는 상황에서, 우파에 속한 동조자들은 “성공한” 독재국가인 독일에서 뭔가 교훈을 얻어 그것을 본국에 적용, 실천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에서 독일을 방문했다. 반면 칼라일식의 영웅숭배 이론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실존하는 위버멘쉬(초인)의 살아 움직이는 모습을 독일에서 보고 싶어 했다.
이처럼 여행자들의 정치관과 사상적 배경이 다양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공통적인 주제를 공유하고 있었는데, 이들이 독일의 아름다운 자연경관에 매혹되었다는 것이다. 꼭 친 나치 인사가 아니어도 초록의 농촌 풍경, 포도원을 낀 하천, 눈이 미치지 못할 정도로 광대하게 펼쳐진 과수원에 얼마든지 경탄할 수 있는 것이다. 한적한 중세 도시, 깨끗한 마을, 청결한 호텔, 인심 좋은 주민들, 값싸고 영양가 높은 음식, 아름다운 바그너 음악, 윈도박스, 시원한 맥주 거품 등은 해마다 더 많은 관광객을 독일로 끌어들였다. 여행자들의 본국에서는 나치 체제의 잔학한 횡포가 점전 엄밀한 검증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것도 정작 이들의 관광 열기를 꺾지는 못했다. 물론 그 뒤 제2차 세계대전이 벌어진 여러 해 동안의 일은 인간적 비극이었고 그 손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2차 대전 전에 여러 방문객들의 일기와 편지 속에서 강조되었던 함부르크, 드레스덴, 프랑크푸르트, 뮌헨 같은 도시들의 매력은 엄청난 것이었는데, 그런 도시들이 폭격으로 파괴가 되어버렸으니 히틀러 체제가 독일 - 더 나아가 온 세상 - 에 얼마나 큰 물질적 피해를 입혔는지는 계산할 수조차 없다.
미국과 영국에서 독일을 방문한 관광객의 수는 다른 나라의 관광객 수를 압도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있었지만 상당수 영국 일반 대중은 독일을 가까운 친척으로 생각했다. 독일인은 어느 모로 보나 프랑스인보다 만족스러운 거래 상대였다. 독일 주재 미국대사의 딸인 마사 도드는 이렇게 말했다. ”프랑스 사람과는 다르게, 독일인은 도둑이 아니고, 이기적이지 않으며, 조급하거나 냉정하거나 가혹하지도 않다.“
사실 이런 견해에 많은 사람들이 동의했다. 영국 내에서는 베르사유 조약에 대한 불편한 감정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당시 많은 영국인들은 그 조약을 독일인들에게 매우 가혹한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이 예전의 적에게 지원과 우정을 보내주어야 할 때가 되었다고 보았다. 게다가 많은 영국인들은 영국이 새로운 독일로부터 배워야 할 점이 많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나치의 야만성에 대한 인식이 깊어지고 확산되어가고 있었는데도 영국인들은 업무 혹은 관광 목적으로 제3제국을 계속 여행했다. 미국 언론인 웨스트부룩 페글러는 1936년에 이렇게 썼다. ”영국인이 보기에 나치는 그 보기 흉한 피부 비늘과는 다르게, 속으로는 인간적이라는 낙관적 환상을 품고 있다. 영국인이 이처럼 나치를 관용하는 것은, 나치의 야만성을 인정하려는 것이라기 보다는 나치의 더 좋은 품성에 호소하여 언젠가 문명으로 돌아올 것을 희망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견해는 상당히 일리가 있다.
1937년에 이르러 제3제국을 찾는 미국인 방문객의 수는 연간 오십만 명에 육박했다. 유럽 여행이라는 모험을 최대한 즐기기 위해 대다수 미국인들은 정치적 문제들을 쓸데없는 불청객이라 여기면서 간단히 무시해 버렸다. 독일인들은 외국 관광객의 환심을 사기 위해 최대한 노력을 경주했고 특히 미국인과 영국인은 더욱 환영했다. 이런 상황이었으므로 정치적 문제를 골치 아프다며 기피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미국인 관광객들이 나치 문제, 특히 인종차별 문제를 깊이 생각하지 않으려 한 데는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유대인 박해에 대해 나쁘게 얘기하면 그것은 곧 미국의 흑인 문제와 자동적으로 연결되었다. 모통 미국인들은 가능한 한 그 문제를 언급하지 않으려 했다.
전쟁 전에 독일에서 휴가를 보냈던 관광객 대부분이, 그 당시 자신들은 나치의 속셈이 무엇이었는지 알지 못했다고 회고한다. 게다가 라인란트나 바이에른 같은 유명 관광지만 잠시 들리는 방문객들의 눈에 나치가 저지른 죄악의 실상이 분명하게 드러날 리가 없었다. 물론 거리에 넘쳐나는 제복과 깃발들, 끊임없는 행군, ”하일 히틀러!“라는 고함 소리를 귀가 아플 정도로 보고 듣긴 했었지만, ”독일인은 원래 저래“하면서 대단치 않게 넘겨버렸다. 어딜 가든 눈에 띄는 반유대주의 포스터나 구호가 혐오스럽다는 얘기를 여행자들이 자주 하긴 했다. 그러나 유대인 차별 대우가 아무리 불쾌하다고 해도, 많은 외국인들은 그것이 독일 국내의 문제일 뿐이니 내정간섭은 안 된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관광객들 자신이 때때로 반유대주의자였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유대인에게도 일정한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다. 제3제국을 비판하는 신문 기사를 보더라도 ”신문이란 게 원래 별것 아닌 일도 대단한 사건처럼 떠들어대기 마련이다“라고 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렸다. 사람들은 또한 과거 제1차 세계대전 개전 초기에 몇 주 동안 신문에 실렸던 독일인의 잔학한 행위들이 훗날 거짓으로 판명난 사실들도 떠올렸다. 시인 루이스 맥니스는 그런 현상을 이렇게 노래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건 우리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관광객들이 원하는 건 현상유지였다.
관광객들을 위해 분명하게 규정된.
게다가 우리는 신문이 장난친다고 생각했다.
신문은 당파정치를 하고 노골적 욕설을 하는 데니까.
지금까지 해온 얘기가 일반 관광객들에게는 들어맞는 얘기인지 모른다. 그렇다면 직업적인 이유로 제3제국을 여행한 사람들, 새로운 독일을 탐구하고 이해하기 위해 그곳을 찾은 사람들은 어떤 생각이었을까? 나치가 집권한 초창기 몇 달 동안, 많은 외국인들은 무엇을 믿어야 할지 난감해 했다. 히틀러는 괴물인가, 아니면 불가사의한 영웅인가? 몇몇 방문객들은 계속해서 유보적인 입장으로 남았지만, 해가 갈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독일에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리고 있었다는 현실을 드러난 자료들이 증명해준다. 이들은 자신의 예상을 검증하는 것이 아니라 확인하기 위해 독일을 방문했다(이들은 소련을 방문할 때도 이랬었다). 독일을 방문하고 나서 자신이 갖고 있던 생각을 바꾼 사람들은 놀라울 정도로 소수였다. 그런고로 우파에 속하는 사람들은 독일인에게서 근면과 진취성을 발견했다. 우파가 보기에 독일인들은 베르사유 조약의 해악을 떨쳐내면서 동시에 유럽 전역을 볼셰비즘으로부터 지켜내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우파 방문객들이 볼 때, 히틀러는 영감이 가득한 지도자였을 뿐 아니라, 성실하게 평화를 추구하는 겸손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이런 우호적 견해를 표명하는 우파 방문객들이 줄을 이었다. 반면 좌파 방문객들은 나치를 잔인하고 억압적인 체제라고 보고했다. 혐오스러운 인종차별 정책을 실시할 뿐 아니라 고문과 박해를 수단으로 시민들을 위협하는 독재정부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좌파든 우파든 한 가지 점에서는 의견이 일치했다. 수백만 국민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지도자 히틀러는 독일을 완전히 장악했고, 이제 그 나라는 그의 손아귀 속에 있다는 것이었다.
중고교 학생들은 아주 흥미로운 여행자그룹을 형성했다. 나치가 이처럼 혐오스러운 체제라는 맥락 속에서도, 독일 문화에 대한 감상은 지적 성장과 인격 도야의 필수적인 부분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2차 대전 발발 직전까지 왜 그토록 많은 미국과 영국의 십대 소년들이 나치 독일로 수학여행을 갔는지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나치와 그 ”야만적“ 문화를 경멸하던 부모들조차도 자녀들을 일정 기간 제3제국에 여행 보내는 것에 대해 아무런 양심의 거리낌을 느끼지 않았다. 수학여행을 떠나는 학생의 입장에서 보면 지적 성장과 인격 도야라는 원래 목적은 접어두고서라도 독일로의 여행이 결과적으로는 매우 보기 드문 체험이었다. 물론 그런 학생들 중에는 독일에서 돌아와 각족과 친지들에게 독일에 잠복해 있던 위험들에 대해 경고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그러나 일반 대중의 무관심 혹은 나치의 ”업적“에 대한 동조, 맥줏집과 던들 여성복에 대한 유쾌한 추억,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로, 또 다른 전쟁에 대한 두려움 등이 종합적으로 작용한 나머지 그런 경고는 소귀에 경 읽기가 되고 말았다.
전쟁에 대한 두려움은 제3제국을 바라보는 많은 외국인들의 마음속에서 중요한 사항이었고, 이것은 특히 제대군인들 사이에서 두드러졌다. 이들은 이렇게 믿고 싶어 했다. 히틀러는 실제로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치의 소란스러운 혁명은 곧 잠잠해지고 안정되어 문명화 단계로 들어갈 것이다. 독일의 의도는 그 시민들이 약속하는 것처럼 정말로 선량한 것이다. 제대군인들은 이렇게 생각한 나머지 새로운 독일을 자주 여행하면서 그 나라를 적극 후원했다. 이들은 아주 어렵게 살아남은 1차 대전의 악몽을 자신의 아들들이 다시는 겪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서 이런 반응을 보였고, 이는 충분히 이해할 만한 일이었다. 게다가 나치 체제의 질서 유지, 절도 있는 행군, 높은 효율성 등은 제대군인들을 원천적으로 매혹시켯다.
제3제국의 주요 특징인 장대한 횃불 행진과 이교도적 축제 행사 등은 자연스럽게 많은 외국인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어떤 외국인들은 그 광경을 혐오스럽게 여겼는가 하면 어떤 외국인들은 신생 독일의 자신감을 화려하게 표현하는 행사라고 보았다. 많은 외국인들에게는 국가사회주의(나치)가 기독교를 대체하여 국교로 자리잡은 것처럼 보였다. ”피 그리고 땅(Blut und Boden)'으로 강조되는 아리안 우월주의는 독일 국민들에게 하나의 복음이 되었고, 퓌러(총통)은 이들의 구세주였다. 실제로 많은 외국인들(특히 친 나치가 아닌 인사들까지 포함하여)이 뉘른베르크의 나치당 정당대회나 대규모 횃불 행진 등의 초호화 행사를 참관하고서 깊은 감동을 받기도 했다. 나치는 대규모 군중의 심리를 배후 조종하는 방법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많은 외국인들은 그런 군중 심리에 휩쓸려 들어가는 자신을 발견하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어떤 사람이든, 또 어떤 목적이 있었든, 제3제국을 방문한 여행자들은 모두 끊임없는 프로파간다에 노출되었다. 베르사유 조약은 불공정하다, 나치 혁명은 놀라운 성취를 이루었다, 히틀러는 평화를 선봉하다, 독일은 국방력을 갖출 필요가 있다, 독일은 예전 식민지들을 되찾아야 하고, 동쪽으로 발전해 나가야 한다. 이런 것들이 프로파간다의 주된 메뉴였다. 그러나 나치가 가장 강력하게 내세우는 프로파간다, 미국과 영국이 독일의 편에 서서 합류해올 것이라고 확신하는 프로파간다는 “볼셰비키/유대인”의 위협이 엄청나다는 것을 그 배경으로 삼고 있었다. 나치는 외국인들을 상대로 이런 설교를 계속했다. 소련의 붉은 군대가 유럽 대륙을 휩쓸고 인류의 문명을 파괴해버리려 한다. 그런 붉은 군대를 상대하는 유럽의 최전선에 누가 서 있는가? 오로지 독일뿐이다. 많은 방문객들에게 그런 프로파간다는 일상적인 것이었다. 지나치게 자주 들려오니 익숙해져서 더는 귀담아 듣지 않는 사람도 많았다.
그런데 국가사회주의와 볼셰비즘의 정확한 차이를 파악한다는 것은 방문객들에게 아주 어려운 문제였다. 그들은 물론 나치와 공산주의가 철천지원수라는 것은 알았다. 하지만 이 두 사상의 목적과 방법에는 정확히 어떤 차이가 있는 걸까? 이런 방면에 대해 해박하지 않은 사람이 보기에 히틀러는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고, 국가와 개인 생활의 모든 측면을 통제하고, 피의자를 고문한 뒤 형식적 재판을 하며, 무소불위의 비밀경찰을 운영하고, 대내외적으로 지독한 프로파간다를 수행하는 자였다. 이런 행태는 적어도 겉보기에는 스탈린의 공산체제와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그래서 낸시 미트포드는 이렇게 적으며 빈정거렸다. “공산주의자와 나치주의자 사이에는 핀 하나 꽂아 넣을 차이도 없다. 공산주의자는 당신이 노동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당신을 고문하여 죽인다. 나치는 당신이 독일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당신을 고문하여 죽인다. 귀족들은 나치를 더 좋아하는 경향이 있고, 반면 유대인은 공산주의자들을 더 좋아한다.”
반(反) 나치 합창이 더욱 커지기 시작한 1937년에 이르기까지, 반 나치 전선의 영웅으로 등장하는 이들은 언론인과 외교관이었다. 물론 이들 중에도 일부 아주 명백한 친나치 인사들이 있기는 했다. 반 나치 언론인과 외교관들은 정확한 그림을 파악하기 위하여 독일 전역을 폭넓게 여행한 뒤, 나치의 잔학성에 대해 일반 대중의 주의를 환기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이들의 보고는 자주 편집되거나 삭제되었고 때로는 사태를 과장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불안감을 조성하는 독일 내 생활을 견디면서 오랫동안 그 나라에서 일을 해왔던 이들이었다. 특히 언론인들의 경우, 즉각 국외 추방이나 날조된 혐의로 나치 당국에 체포될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하고 그런 사실 확인 노력을 꾸준히 해왔다. 이들의 여행 보고서는 단기간 방문객들의 일기와 편지 속에서 발견되는 독일 예찬론과는 내용이 전혀 달랐다. 단기간 머물다 가는 방문객들은 독일 현지 사정이 신문에서 떠들어대는 것처럼 그리 심각한 것은 아니라고 믿는 것을 더 좋아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현지에 오래 산 사람과 일시적으로 말해서 현지에 오래 산 사람과 일시적인 방문객의 관점은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나치 독일의 경우, 그 두 관점은 놀라울 정도로 확연히 차이가 났다.
2차 대전 종전 후의 관점에서 되돌아볼때, 1930년대에 독일을 방문했던 사람들의 문제는 너무도 손쉽게 흑백 논리로 귀결되어 버린다. 그러니까 히틀러와 나치는 악마이고, 그걸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은 바보이거나 파시스트라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독자 여러분이 지금 손에 들고 있는 이 책이 나치 독일을 방문햇던 외국인들의 총체적인 그림을 제시한다고 주장하지는 않겠다. 그렇지만 그 당시의 여행 기록을 남겨놓은 수십 명에 달하는 여행자들의 경험을 통하여 이런 사실을 제시하고자 한다. 어떤 나라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종전 후에 해답을 모두 알고 있는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리 손쉽고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 책에 인용된 여행자들의 기록은 황당하기도 하고, 어리석기도 하고, 감동적이기도 하고, 아주 사소한가 하면, 아주 비극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아무튼 이들의 얘기는 제3제국의 복잡한 사정과 구조, 그 역설과 모순, 그리고 그 제국의 최종적 멸망에 대하여 신선한 시각을 제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