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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하는 삶 혹은 언어의 발견
―박만진의 시세계
이은봉
1.
박만진의 시집 『남산만한 배』에 수록된 시들이 보여주는 세계는 다음 몇 개의 키워드로 요약된다. 수행(修行), 자아, 순수(무구), 사랑, 고향(서산), 말재미(기표놀이)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들 키워드를 통해 유추할 수 있는 그의 시세계는 결코 단순하지 않다. 이 시집의 각각의 시들이 서로 다른 외면을 갖고 있으면서도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내면으로 수렴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이번 시집의 그의 시에서 가장 먼저 주목해야 할 가치는 ‘자기 수행 혹은 자아 탐구’라고 생각된다. ‘자기 수행 혹은 자아 탐구’는 자신의 생각 안에 화두를 갖는 일로부터 시작된다. 이를 두고 그는 “마음의 손에” “생각의 알”을 쥐는 일이라고 노래한다. 그의 시에 따르면 “불佛이란 과연 무엇입니까”(「생각의 알―경허 큰스님」) 등의 질문이 다름 아닌 “생각의 알”이라고 할 수 있다. “생각의 알”은 궁극적으로 자아, 곧 ‘나’로 모아지거니와, 이렇게 모아지는 ‘나’에 대해 그는 별로 긍정적이지 않다. ‘나’ 자신의 현존에 대해 아직은 그가 불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인생이 연극이라는 말의 문장이
김밥 옆구리처럼 툭 터지기 시작하자
걱정 어린 까치 한 마리가
수수꽃다리 가지 위에서 까깍거린다
작은 키에 꽃미남이 아닌 나는
아무리 그럴 듯이 분장을 하고
물방울 넥타이에 삐까번쩍인다고 해도
주인공이 아닌,
주인공이 될 수 없는,
내 자신을 내 자신이 잘 알고 있다
다스리지 못한 몸매도 그렇고
연기조차 서툴기 짝이 없으니
주연 배우일 리가 만무하다
요즈음 나는 어줍은 시를 쓰는
늘쩡거리는 독거노인 역을 해내고 있다
내 인생에 내가 주연이 아니고
가까스로 조연노릇이라니
―「배역配役에 대한」 부분
이 시는 “인생이 연극이라는” 전제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인생이라는 연극에서 시인은 자신이 맡은 배역에 대해 일단 부정적이다. “그럴 듯이 분장을 하고/물방울 넥타이에 삐까번쩍인다고 해도” “주인공이 될 수 없는,/내 자신을 내 자신이 잘 알고 있다”고 그는 노래한다. 이어지는 구절에서 그는 “요즈음 나는 어줍은 시를 쓰는/늘쩡거리는 독거노인 역을 해내고 있다”고까지 말한다. “내 인생에 내가 주연이 아니”라고, “가까스로 조연 노릇이”나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 그가 크게 부정적인 태도를 보여주지는 않는다. 심지어는 저 자신을 소에 비유하고 있는 것이 그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애써 졸음을 쫓으며” “동그랗고 순한 큰 눈”을 “끔벅이고 있”는 소에서 저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있는 것이 그라는 얘기이다.
저 언덕 위 시푸른 풀이
잠이 오는 풀인가 보아,
되새김질하는 누렁이의
동그랗고 순한 큰 눈이
애써 졸음을 쫓으며
이따금씩 끔벅이고 있네
저토록 덩치가 크다고
왕 노릇이야 하겠는가?
천년의 눈물을
그렁그렁 지니고도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어
하품하듯 토해 내는 울음,
숫제 말이 없는 사람을
소 같은 사람이라 하네
사람의 전생이 소라고 하면
소의 전생이 사람이라고 하면
서로 극진히 아낄 노릇이지
논밭 궂은일을
부리면 안 될 텐데,
사람과 소의 울음 중에서
가장 흡사한 울음이 있다면
엄마는 사람의 울음이고
음매는 소의 울음이지만
음매를 엄마로 알아듣는 것은
결코 말귀가 어둔 내 탓만이 아니네
―「천년의 눈물」 전문
불가에서는 전통적으로 소의 이미지를 빌려 도(道), 곧 진리를 설명해온 바 있다. 십우도(十牛圖)에서의 소가 바로 그것이다. 무엇보다 십우도는 도, 곧 진리를 찾고 간직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구체적인 이미지를 통해 보여준다. 하지만 그의 이 시에 등장하는 소를 도, 곧 진리의 상징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이 시에서는 소의 이미지가 “천년의 눈물을/그렁그렁 지니고도/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어” 울음을 토해 내는 사람을 비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소 같은 사람” 말이다. 물론 이때의 소 “같은 사람”은 시인 자신의 객관상관물임에 분명하다. 소 “같은 사람” 역시 수행자로서의 내포를 갖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말이다.
시인이 저 자신을 수행자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이 시집의 [시인의 말]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지질이도 가난한 내 눈이여!/어둠에 젖어 귀를 열려는가?//보이는 것만 보지 말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라”고 노래하고 있는 것이 그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시인의 말]에 드러나 있는 자아개념은 위의 시 「천년의 눈물」에서 살펴볼 수 있는 자아개념과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이때의 자아개념에는 시인의 참으로 지극한 마음, 겸손한 마음이 들어 있다. 이는 이어지는 글에서 저 자신을 향해 “들리는 것만 듣지 말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들으라./들리는 것은 물론이고 들리지 않는 것을 보라”고 하고 있는 것만 보더라도 확인이 된다.
박만진의 이번 시집에서 자기 수행 혹은 자아 탐구의 내포는 「가야산 정경」 「천장사 같은 시 한 채 짓고 싶다」 「바람벽 겨울」 「어두운 허공」 「거울 속에 들어가다」 「고 법장 스님과의 추억」 등의 시를 통해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들 시에서 그는 “산 속에서 듣는 물소리”로부터 “부처님 말씀”(「가야산 정경」)을 깨닫기도 하고, “도비산 입구 수도사”의 “보름달 같은” 항아리로부터 “드렁드렁 코를 골며/깊이 잠든”(「어두운 허공」) 달마대사를 발견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수행하는 자아의 현존을 되묻고 있는 시 「거울 속에 들어가다」에서는 “시를 쓴답시고 빈둥거리는 내가 부끄럽다”라고 노래하기까지 한다. 급기야는 “거울 밖의 내가/거울 속의 나를 꺼내 놓는다면/거울 밖의 내가 나일까,/거울 속의 내가 나일까”(「바람벽 거울」)라고 되묻는 것이 이들 시에서의 그이다.
2.
수행하는 자아를 되묻고 있는 그의 시는 항상 순수하고 무구한 마음, 곧 천진한 자아와 더불어 존재한다. 그의 시에 드러나 있는 이들 마음은 동심과 다르지 않다. 동심은 인간의 있는 그대로의 마음, 곧 적심(赤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들 마음은 가리거나 꾸미지 않는 마음, 즉 자연의 그대로의 마음을 가리키기도 한다. 이들 투명하고 깨끗한 마음을 시인은 때로 노치(老稚), 사추(思秋) 등의 기표를 통해 드러내기도 한다. 「노치원老稚園」 「사추기思秋期」 등의 시에 드러나 있는 철들지 않은 마음이 바로 그것이다. 실제로는 이 또한 시인이 지니고 있는 수행하는 자아의 결과라고 해야 마땅하지만 말이다.
올해 들어 두 번째 서른셋이다
아직은 할아버지 소리가 낯설다
이즈막까지 설레는 누군가를
내 마음 속에 품고 있어
사추기思秋期라는 시를 쓰기도 했다
어른이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다시 아이가 돼 간다고 한다
천사유치원 미니버스가 지나간다
참 좋은 세상에 양노원보다
노치원이 더 필요하지 않을까
―「노치원老稚園」 전문.
이 시에 따르면 67세인 그는 “할아버지 소리가 낯설다”. 자신의 내면 자리해 있는 젊음이 “할아버지 소리”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설레는 누군가를” “가슴 속에 품고 있”기까지 하다.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다시 아이가 돼 간다고” 하는데, 그는 정말 아이가 돼 가고 있는 것이다. “천사유치원 미니버스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양노원보다/노치원이 더 필요하지 않을까”하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그 아닌가.
이 시에 드러나 있는 천진하고 무구한 마음은 그의 다른 시 「사추기思秋期」를 통해서도 확인이 된다. “사춘기를 지낸 사람이/사추기가 없을 리 있겠는가”하고 되묻는 것이 이 시에서의 그이다. 이어지는 구절에서 그는 자신이 “이른 아침에//꽃씨 하나 심어 놓고//새싹이 돋아나기를 기다리는” 사람이라고 노래한다. 이 시에서 살펴볼 수 있는 “사추기의 두근거리는” 사랑이 순수하고 투명한 그의 마음에 기대고 있는 것은 물론 사실이다.
이들 마음이 바로 동심이거니와, 이번 시집에는 동심을 마음을 바탕으로 하지 않고서는 쓰기 어려운 시들이 다수 들어 있다. 「강아지풀」 「섬」 「개구리헤엄」 「무지개」 「어머니 생각」 등의 시가 그 예이다. 이들 시에는 주체의 의식이나 정서보다 객체의 물물(物物) 그 자체가 좀 더 강화되어 있어 관심을 끈다. 주체로서의 그가 얼마간 객체로서의 그에게로 옮겨가 있다는 것이다. 시인의 자아나 상상력이 완전히 배제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바위가 바지를 내리고
똥을 누는가 보아!
파도가, 그 엉덩이를
철썩철썩 때리며
밑을 닦아주고 있다
―「섬」 전문
이 시에는 바닷가의 신선한 풍경이 시인의 독특한 시선에 의해 점묘되어 있다. 바위가 있는 바닷가 풍경을 특이한 서정으로 에두르고 있는 것이 이 시이다. 이때의 풍경은 무구하면서도 앙증맞아 더욱 관심을 끈다. 이 시가 이러한 형상을 보여주는 것은 무엇보다 시인의 동심이 투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여기서 바닷가의 바위에 부딪치는 파도의 모습을 “바위가 바지를 내리고//똥을 누는” 모습으로 상상한다. 나아가 파도가 바위의 “엉덩이를//철썩철썩 때리며//밑을 닦아주”는 모습으로 상상하는데, 이들 형상에서 시인의 동심을 읽기는 별로 어렵지 않다.
이처럼 이 시는 시인의 의식보다 객관적 사물의 이미지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면은 그의 다른 시 「무지개」에 의해서도 확인이 된다. 물론 이 시는 앞의 시에 비해 시인의 자아가 좀 더 개입되어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의 시 「무지개」에는 “소나기 삼형제 지나간 뒤”에 펼쳐지는 무지개가 “비의 활”로 발상되어 있다. 둥글게 휜 무지개에서 활의 모습을 발견하고 있는 것이 이 시이다. 나아가 그는 이 시에서 “사랑의 심장이 두근거리는” “그리움의 화살”을 찾기까지 한다. 이 활을 들어 그는 “그미의 먼 과녁을 향”해 “그리움의 화살”을 당기고 싶은 것이다. 이처럼 티 없이 맑은 사랑의 감정을 잃지 않고 있는 것이 이 시에서의 그이다.
자연의 사물로부터 깨닫는 그의 사랑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바다로부터 “가없는 어머니”를 발견하고 있는 시 「어머니 생각」이나, 몸에 난 상처를 통해 슬픔과 어둠의 의미를 되묻고 있는 시 「상처」에도 그의 이러한 사랑은 잘 드러나 있다. 산자락 끝에 몰려 있는 바위로부터 “무릎을 꿇”고 있는 큰스님을 발견하고 시 「무릎을 꿇어」에서도 이는 마찬가지이다. 이들 시와 함께 하고 있는 사랑 역시 그의 동심이 십분 발현되어 있는 것은 분명하다. 종심(從心)을 바라보는 나이이지만 시인 박만진은 이처럼 지고하고 지순한 사랑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다.
물론 「외도」 등의 시에는 사랑의 대상이 시의 모습으로 치환되어 드러나기도 하다. 하지만 그의 시에서 사랑의 대상은 기본적으로 여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 여인에 대한 사랑은 그의 시 「홍시」 「예쁜 고집쟁이」 「가벼운 입맞춤」 「김소엽 시인」 「제발, 하느님!」 「가시나무새」 「줄곧」 「십계명」 「짝사랑도 사랑이다」 등을 통해서도 익히 살펴볼 수 있다. 이들 시에 드러나 있는 사랑은 여전히 정겹고 뜨겁다. 심지어 그는 사랑에 대한 정겹고 뜨거운 마음을 “그대 입술이 내 입술에 입맞춤을 하고//내 입술이 그대 입술에 입맞춤을 한다면//오! 그 얼마나//달콤할 것인가” “황홀할 것인가”(「가벼운 입맞춤」)라고 노래하기까지 한다.
예쁜 고집쟁이,
예쁜 만큼 고집도 예쁘다
받지 않을 것을 염려하며
다시 또 전화를 하겠지만
마음의 불을 끌 수 없으니
이대로 끝낼 수는 없다
그끄제 문자로 띄운,
비온 뒤에 땅이 굳을 것이고
백지 위에 다시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말뜻을
강물처럼 사려 깊은
그녀가 모를 리 있을까
하얀 촛농 속에
똘똘 뭉쳐 놓은
우황청심환 같은
예쁜 고집쟁이,
예쁜 만큼 고집도 예쁘다
―「예쁜 고집쟁이」 전문
이 시에는 “예쁜 고집쟁이”에 대한 시인 박만진의 상큼한 사랑이 담겨 있다. 이 시를 두고 누가 망종심(望從心)의 나이에 쓴 시라고 하겠는가. “예쁜 고집쟁이”, 그녀가 전화를 “받지 않을 것을 염려하며/다시 또 전화를 하겠”다고 하는 시인의 마음, 도저히 “마음의 불을 끌 수 없”다고 하는 시인의 마음이 귀엽고 앙증스럽다. 한편으로는 부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주책이라고도 할 만한 것이 이 시에 드러나 있는 시인의 사랑이다. 하지만 이 시에 드러나 있는 그의 사랑이 더없이 천진한 마음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실제로는 더없이 외롭고 쓸쓸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그인지도 모른다. 외롭고 쓸쓸하게 살아가는 그의 마음이 여실하게 드러나 있는 시도 없지는 않기 때문이다. “말 한 마디 나눌 사람이 없으니//온종일 말 한 마디 듣지 못하네//지금 나는 1005호 섬에 있네//내가 살고 있으니 무인도가 아니네//1005호가 섬이 아니라 내가 섬이네”라고 노래하고 있는 것이 그이기 때문이다. 그가 “사람새가 되어//마음의 문을 닫아버린 그대에게 날아가” “이 세상이 밀물이듯 가득”(「사람새가 되어」) 차기를 바랄 따름이다.
3.
시간은 세월을 만들고, 세월은 역사를 만든다. 공간은 고향을 만들고, 고향은 민족과 국가를 만든다. 인간은 시간과 공간 속에 내던져진 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자기가 태어나고 자란 시간과 공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이다. 많은 시인들이 자신의 시에 고향이라는 이름의 장소 혹은 공간에 대한 사랑을 드러내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시인 박만진의 고향은 충청남도 서산이다. 지금도 그는 이곳 서산에서 살고 있다. 따라서 그의 시에 서산 혹은 서해안 지역의 풍물들이 드러나 있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호랑가시나무」 「만리포에 가면」 「류방택 별」 「류방택 선생 영정 우러러」 「해 뜨는 서산」 「가야산 풍경」 「호랑이 얼굴」 등이 그러한 시의 대표적인 예이다. 이 중에서도 「류방택 별」과 「류방택 선생 영정 우러러」는 “서산시 인지면 양리촌에서” 태어나 “여든세 살의 일기로 눈을 감으신/류방택 선생”을 기리고 있어 좀 더 관심을 끈다. 류방택 선생은 “석각본石刻本 천상열차분야지도”를 남긴 분으로, “단군 이래 최초로 별을 연구”한 선현(先賢)이라고 할 수 있다. 고향인 서산에 ‘류방택천문기상과학관’이 세워져 높이 선양되고 있는 류방택 선생은 “고려 충숙왕 7년에 출생하여/조선 태종 3년”까지 활동한 우리나라 최초의 천문학자이다.
다른 시에서는 “해가 뜨는” 서산瑞山과, 해가 지는 서산西山, 한자 표기가 다른 두 개의 서산을 말놀이로 받아들이며 자신의 고향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기도 한다. “서산瑞山이 서산西山이고/서산西山이 서산瑞山”이거늘 “뜨는 해”가 “어디에 있고”, “지는 해”가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다. 이 시의 결구에서 그가 “상서로운 서산에 해가 뜨는데/누가 서산에 해가 진다고 하나”(「해 뜨는 서산」)라고 반문하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해수욕장
아우들이 넷,
정겨운 발자국을 제각각 만날 수가 있네
이를테면 다섯 형제인 셈인데
금시초문인 나는
사람에게만 형제가 있는 줄 알았지
미처 몰랐던 사실이네
낯선 풍경을 누리는 호강을 하려면
때로는 귀동냥이 필수 조건이네
누구이든 현지인에게 물어보면
저기유, 해변을 끼구 쭉 따라가슈, 라고
지그시 웃으며 길을 가리켜 줄 것이네
만리포해수욕장이 맏이이고
천리포해수욕장이 둘째,
백리포해수욕장이 셋째,
십리포해수욕장이 넷째,
일리포해수욕장이 막내인 모양으로
구름포란 아명으로 불리어
일리포해수욕장을
자칫하면 만나지 못하고 돌아올 번했네
사람들은 나이로 터울을 가늠하지만
그 형제들 터울이 천차만별인 것이
드높은 하늘이 아버지이고
드넓은 바다가 어머니이니 그럴 수밖에,
형만 한 아우 없다고
사람이나 해수욕장이나
매 일반인 듯하네
―「만리포에 가면」 전문
말재미를 추구하면서도 서해안 일대의 해수욕장을 잘 보여주고 있는 시이다. “만리포에 가면” 누구나 이 시에서처럼 네 개의 “해수욕장/아우들”을 만날 수 있다. 해수욕장의 형제가 다섯이라는 것인데, 맏이인 만리포 해수욕장와 함께 하는 네 명의 “아우들”이 바로 그것이다. 물론 이는 천리포해수욕장, 백리포해수욕장, 십리포해수욕장, 일리포해수욕장(구름포)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들 구절에 드러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은 말들이 이루는 맛과 멋, 곧 말재미이다. 이 시가 지니고 있는 말재미는 “현지인에게 물어보면/저기유, 해변을 끼구 쭉 따라가슈, 라고/지그시 웃으며 길을 가리켜 줄 것이네”와 같은 구절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들 말재미를 바탕으로 그의 고향인 서해안 일대의 해수욕장을 우회적으로 홍보, 선전하고 있는 것이 이 시에서의 그이기도 하다.
말재미에 대한 자각과, 그것의 심미적 표현이 오직 이 시에만 드러나 있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이번 시집의 시들이 지니고 있는 그의 시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가 언어에 대한 자각인지도 모른다.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언어에 대한 자각은 기표놀이 혹은 언어유희를 가리킨다. 다음의 시 또한 일단은 말재미에 대한 자각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남산만한 배,
왜 남산만하다고 하나
남산은 그 사실을 알고 있나
예부터 알면서도
짐짓 모르는 체하고 있나
남산만한 배라고
말하는 사람,
진작 남산은 가보았나
아차산만한 배라고 하면 안 되나
보문산만한 배라고 하면 안 되나
유달산만한 배라고 하면 안 되나
팔공산만한 배라고 하면 안 되나
이따금 거리에서
버스 터미널에서
마트에서
저자에서
남산만한 배를 보았네
그때 그 베트남 여인,
그때 그 필리핀 여인,
그때 그 우즈베키스탄 여인,
그때 그 스리랑카 여인,
달 달 무슨 달
쟁반같이 둥근 달이 뜨는
거뭇한 남산이 있어
서울에 사람들이 넘쳐나나
남산만한 배,
왜 남산만하다고 하나
―「남산만한 배」 전문
이 시에서 시인이 가장 먼저 주목하는 것은 “남산만한 배”라는 말이다. 이어 그는 임신한 여자의 배를 두고 “왜 남산만하다고 하나”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 질문은 남산이 “그 사실을 알고 있나”, “알면서도/짐짓 모르는 체하고 있나”로 이어진다. 시인은 다시 “남산만한 배라고/말하는 사람,/진작 남산은 가 보았나”라고 질문한다. ‘남산’이라는 말에 집착하고 있는 이들 질문에는 얼핏 아무 의미도 들어 있지 않은 듯하다. 물론 그렇지 않다. 그가 “남산만한 배”를 “이따금 거리에서/마트에서/저자에서” 만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때의 그 “남산만한 배”의 주인공은 한국의 여인이 아니라 “베트남 여인”, “필리핀 여인”, “우즈베키스탄 여인”, “스리랑카 여인”이다. “달달 무슨 달” 어디어디 떴나 남산 위에 떴지라고 노래할 때의 ‘남산’이 더는 이 나라 여인의 임신한 배에 비유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제는 임신한 여인의 배를 “남산만한 배”라고 부를 수 없게 되었다는 얘기이다.
이 시에는 서울 중심의 문화에 대한 시인의 거부감도 들어 있다. 이는 “거뭇한 남산이 있어/서울에 사람들이 넘쳐나나/남산만한 배,/왜 남산만하다고 하나”와 같은 구절에 의해 증명된다. 서울 중심의 사고방식에 대한 거부감은 그의 또 다른 시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서울행 버스에서」가 그것이거니와, 이 시에서 그는 “앞좌석에 앉은 낯익은 여인이” 하는 “좋은 일이 있어 올라가시나 봐요””라는 인사말을 문제로 삼는다. “언덕을 올라가는 것도 아니고/산길을 올라가는 것도 아니고/마냥 고속도로를 달려가는 것뿐인데/어찌 서울에 올라간다고 하”느냐는 것이다.
기표든 기의이든 말에 대한 성찰을 보여주는 것은 그가 그만큼 오늘의 현실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갖고 있다는 뜻이 된다. 근대 후기의 시에 이를수록 기표놀이를 통해 삶의 의미를 되묻는 경향이 강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논의는 기표놀이, 곧 언어유희에 대한 관심이 단순한 놀이에 그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대상을 합리적으로 바라볼 수 능력이 없이 언어에 대한 제대로 된 관심을 갖기는 어렵다. 언어 그 자체가 체계이기 때문이다. 기표로서의 언어는 본래 법칙에 맞게 결합되기 마련이다. 언어의 법칙, 곧 문법을 두고 논리 운운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논리는 일종의 질서이다. 문법 자체, 곧 음소가 모여 음절이 되고, 음절이 모여 단어가 되고, 단어가 모여 구와 절이 되고, 구와 절이 모여 문이 되는 과정 자체가 질서이기 때문이다, 이때의 질서에는 당연히 기의보다 기표가 선행한다. 기표가 모여 질서를 이룬다는 것인데, 여기서 말하는 기표가 단지 기의만을 거느리지 않는다는 것은 불문가지이다. 이미지나 어조, 화자나 청자 등과 어울려 미묘한 재미를 만드는 것이 기표이거니와, 시에서는 이를 가리켜 흔히 기표놀이라고 한다.
그의 시는 이처럼 기표놀이를 기초로 하고 있어 좀 더 주목이 된다. 바로 그러한 점에서 그의 시는 근대를 넘어서는데, 「퐁, 퐁, 퐁」 「무이파」 「츠환러마」 「복수, 복수초」 「바퀴벌레」 「운석隕石」 「하루살이」 「너구리」 등의 시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퐁, 퐁, 퐁」은 삼세번, 「무이파」는 무이파, 「바퀴벌레」에서는 바퀴, 「복수, 복수초」는 복수 등을 동음이의어로 받아들여 시의 말맛을 추구한다. 「너구리」는 동물의 이름 너구리와 태풍의 이름 너구리를 비교, 대조하는 가운데 어희를 추구하고 있어 더욱 관심을 끈다.
그의 시에서의 기표놀이는 기의놀이와 함께 하고 있기도 하다. 기의놀이라고 할 때의 ‘기의’는 기본적으로 동음이의어의(同音異議語)의 이의어(異議語)가 만드는 말재미와 무관하지 않다. 실제로는 이들 이의어(異議語)가 만드는 재미를 십분 이용하고 있는 것이 그의 시이다. 동음이의어는 하나의 기표에 두 개 이상의 기의가 따르는 말을 가리킨다. 이는 앞의 시 「사과」에서의 ‘사과’, 「너구리」에서의 ‘너구리’라는 기표가 갖는 다의성을 통해서도 확인이 된다.
실제로는 일상의 모든 언어(어휘)가 동음이의어이다. 수의 언어를 제외하면 하나의 기표가 하나의 기의만을 갖고 있는 경우는 없다. 사전에 수록되어 있는 기표는 모두 두 개 이상의 기의와 함께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의 시에는 언어의 이러한 특징에 주목해 시인 자신의 심미적 가치를 제고시키는 예가 적잖다. 시라는 것이 본래 언어 자체를 질료로 하는 예술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는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동명반점에서 울면을 시켜
울면을 먹었어
울면을 울지 않고
웃으면서 먹었어
울면이 아니라 웃으면을,
웃으면이 아니라 점심을 먹었어
아무튼 혼자 사는 게 죄야
이제 혼자 먹는 밥이 지겨워졌어
예순일곱 징그러운 나이가
찰거머리처럼
내게 착 달라붙어 있어
살기 위해 먹는 밥은
죽지 못해 먹는 밥이 아니야
홀로 산 지 열두 해가 지났으니
슬슬 지겨울 때가 되기도 했어
아침은 먹는 둥 마는 둥하고
점심은 친구들 아니면
지인知人들과 식당에서 해결하지만
함께 할 사람이 없을 때에
정말 어려운 게야
김밥, 칼국수, 짜장면을 즐겨 찾지만
되우 쑥스러운 게야
마치 무슨 죄를 짓는 사람처럼
슬금슬금 주변을 살피게 되는 게야
일요일 한낮 빈둥거리며
라면을 끓일까 하다가
동명반점에서 울면을 시켜
울면을 먹었어
울면을 울지 않고
웃으면서 먹었어
―「울면」 전문
이 시는 ‘울면’이라는 기표가 갖는 양가적 의미에 기대어 내용이 전개되고 있다. “동명반점에서 울면을 시켜/울면을 먹었어”, “울지 않고/웃으면서 먹었어”라는 구절이 바로 그것인데, 이들 구절은 일단 독자들을 웃게 만든다. 이어지는 구절을 보면 결코 웃을 수 없는 것이 이 시의 내용인 데도 말이다. “혼자 사는 게 죄야/이제 혼자 먹는 밥이 지겨워졌어/예순일곱 징그러운 나이가/찰거머리처럼/내게 착 달라붙어 있어” 등이 구절이 이를 잘 말해준다. 아내와 헤어지고 “홀로 산 지 열두 해가 지났으니” 그로서는 “슬슬 지겨울 때가 되”었다고 할만도 하다. “울면을 울지 않고/웃으면서 먹었어” 운운하는 이 시의 결구 역시 동음이의어에 기초하고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그의 시를 읽는 즐거움이 오직 동음이의어에만 기초해 있는 것은 아니다. 이음동의어에 기초해 말재미와 삶의 의미를 되묻고 있는 시도 없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시 중에는 하나의 기의가 갖고 있는 두 개의 기표에 기초해 어희를 추구하고 있는 시도 있다는 것인데, 「사과」나 「달걀」 등이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전자는 ‘사과’와 ‘능금’이라는 두 개의 기표를 통해 어희를 시도하고 있는 시라고 할 수 있고, 후자는 ‘달걀’과 ‘계란’이라는 두 개의 기표를 통해 어희를 시도하고 있는 시라고 할 수 있다.
강조하거니와, 그의 시에 드러나 있는 기표놀이는 단지 기표놀이에 그치지는 않는다. 언제나 그의 시에서의 기표놀이는 새로운 의미를 만드는 가운데 삶의 진정한 의미를 되묻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시가 지니고 있는 이러한 특징이야 말로 근대를 넘어서는 그 나름의 선진적 시의식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박만진 시집, 『붉은 삼각형』, 《현대시학》, 2015. 6.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