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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소몰이 소년
2화 회색 도시
3화 달님의 슬픔
4화 고향의 설음
5화 루즈-내츄럴 캔디
6화 낯선 만남-하나 그리고 열하나
7화 그녀, 또 다른 그녀
8화 그녀의 향기, 그녀의 아픔
9화 아아, 달님
10화 벼랑의 끝자락
11화 어머니의 끝섬
12화 작은 장구벌레의 우화(羽化)
13화 아담과 이브, 만개하다
14화 꽃잎 떨어지다
끝섬(EDGE ISLAND)
<2화> 회색 도시
내가 마지막 승객인 듯싶었다. 주변을 둘러볼 겨를도 없이 황급히 열차에 올라탔다. 열차에 올라선 후로도 가쁜 숨은 멈춰지지 않았다. 나는 열차의 연결통로에 숨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흙먼지를 털었다. 열차는 어둠을 헤집고 평행선을 더듬으며 서서히 충주역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승객들이 모조리 나만 쏘아보는 것 같아 불안했다. 열차 안 어스름한 귀퉁이에 몸을 감췄다. 그리고 승객들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누군가 건드리기라도 하면 살쾡이처럼 할퀴어버릴 것처럼 잔뜩 웅크리고 공격 자세를 취했다. 눈빛은 공포에 질린 야행성 동물처럼 번뜩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차라리 모른 체하는 것이 나을 듯했다. 여유로운 척 팔짱을 껴보고 이리저리 몸도 비틀었다. 시선은 창밖으로 돌렸다. 도시의 끝을 지나는 열차의 차창으로 쏜살같은 불빛이 눈동자를 할퀴고 지나갔다. 아예 눈을 감아버렸다. 그리고 뒤죽박죽된 생각을 듬성듬성, 조심스럽게 되새김질해보았다.
‘민기는 죽은 것일까? 달아난 송아지는 어떻게 되었을까? 송아지 주인인 유정숙의 아버지 유 씨는 어찌하나…….’
짧은 신음을 삼켰다. 그간 있었던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며 나를 괴롭혔다. 다시금 두려움이 엄습했다. 어떻게 해도 헤어날 수 없는 너무나도 큰 공포였다. 그 공포는 떨쳐버리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더 생생해졌다.
밤이 깊어지자 승객들은 너저분하게 흩어진 채로 추위와 선잠으로 꿈틀댔다. 터널을 지나는 듯 덜컹거리는 소리가 커졌다가 작아지기를 반복하며 밤의 무게를 가르고 열차는 달렸다. 규칙적으로 덜컹거리는 소리에 빠져들다 보니 무심한 열차에 버려져 있는 것을 겨우 알았다.
얼마를 달렸을까? 나에게도 추위가 찾아왔다. 정신은 흐릿해지고 온몸의 맥이 풀려 마치 천길 나락으로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곤두세웠던 신경은 이내 지치고 눈꺼풀까지 가물가물 내려앉았다. 졸음이 장맛비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다. 그래도 애써 참으며 얼마를 더 버텼는지 모른다.
“이봐, 내려야지!”
어깨를 툭툭 치는 웬 사내의 고함에 놀라 눈을 떴다. 언제 잠들었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입술 밑을 혀로 훑으니 쓴 맛이 느껴졌다.
내가 골아 떨어져 있는 동안 열차는 종착역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흐릿한 조명으로 어두컴컴한 것을 겨우 모면한 철길 사이로 승객들이 줄지어 내렸다. 피난민 행렬과도 같은 그들 틈에 끼어 열차 밖으로 빠져 나왔다. ‘조치원’이라는 역명이 아스라이 시야에 박혔다. 분명 용산 행 열차표를 구입했는데 조치원에서 모든 사람들이 내리고 있는 것이 의아했다. 승객들은 대합실로 들어가지도 않고 열차 주변에 쪼그리고 앉거나 삼삼오오 서서 추위를 달래고 있었다. 순간 나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민기가 죽어서 그 범인을 잡으려고 열차를 세웠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공포는 또 다시 내 몸을 살쾡이처럼 도사리게 만들었다. 때마침 먼발치에서 정복 차림의 사내가 걸어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경찰인 듯싶었다. 훤칠한 키의 사내는 요란하게 호각까지 불어대며 깃발을 흔들고 내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또렷하게 보이는 사내를 보니 몸이 사시나무 떨듯 떨렸다. 사내의 눈길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는 본능적으로 사람들 틈바구니로 슬금슬금 숨었다. 턱이 덜덜 떨려 위아래 이빨이 부딪히는 소리가 내 귀에 또렷하게 들려왔다. 나는 길게 호흡을 삼켰다. 차디찬 냉기에 콧구멍이 얼어 버릴 것처럼 코털에 엉겨 붙었다.
다행히 사내는 나를 발견하지 못했는지 그대로 지나쳐 버렸다. 유니폼을 입은 역무원이었다. 역무원이 점점 어둠 속으로 사라지자 곧 이어 열차가 나타났다. 번개처럼 나타난 열차의 세찬 바람이 온몸을 강타해왔다. 열차가 몰고 온 차디찬 바람은 사람들의 몸을 일제히 한쪽 방향으로 쏠리게 만들었다. 마침내 열차가 멈추자 추위에 무방비상태였던 승객들이 벌떼처럼 오르기 시작했다. 나도 엉겁결에 그들 속에 휩쓸려 열차에 올라탔다. 비로소 열차가 멈춘 이유를 알고 긴 한숨을 몰아쉬었다. 잠시 후 열차는 출발했다. 조치원에서 갈아탄 열차는 다시 어둠을 뚫고 서울을 향해 달렸다. 나는 여전히 구석에 처박혀 눈빛을 번뜩이다가 또 잠이 들고 말았다.
“이봐, 종점이야!”
종점을 알리는 누군가의 목소리에 놀라 눈을 떴다. 입안은 추위에 바짝 메말라 있었다. 침을 모아 간신히 삼켰다. 쓴 맛이 목구멍을 타고 힘겹게 넘어갔다. 푸석푸석해진 눈을 비볐다. 그리고는 목소리의 사내와 일행인 것처럼 위장하며 열차에서 내렸다. 그의 꽁무니에 붙어 서울에 처음 온 두려움을 모면해 볼 심산이었다.
주위는 아직 어두웠다. 바람조차 바짓가랑이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추위를 피하려 파고드는, 참으로 찢어지게 추운 겨울새벽이었다. 난생 처음 보는 고층건물과 네온사인 불빛에 어리둥절 놀란 나를 ‘용산역’이라는 수은등이 새벽잠이 덜 깬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열차에서부터 뒤따르던 사내와 광장을 지났다. 발끝까지 덮은 긴 코트를 걸친 여자들이 두 손을 겨드랑이에 깊숙이 넣고 서 있었다. 광장 여기저기에서 서성이던 여자들은 지나가는 남자들에게 말을 걸었다.
“아저씨, 추운데 쉬었다 가요. 통행금지 안 풀렸어요.”
대부분의 사내들은 여자들을 힐끗 흘겨볼 뿐 대꾸조차 없이 지나쳤다. 한둘의 사내가 주변을 휭 하니 둘러보고는 못 이기는 척 여자들에게 한쪽 팔을 빼앗긴 채 어딘가로 사라졌다. 나는 여자들이 건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여자들이 말하는 곳에는 따듯한 방이 있는 모양이려니 짐작이 되었다.
그런데 내가 뒤따르는 사내에게는 그 어떤 여자도 말을 걸지 않았다. 사내가 갑자기 뒤를 돌아봤다. 일순간 일어난 일에 나는 몹시 당황했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사내를 실쭉 외면했다. 사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엷은 미소를 띠우며 가던 길을 재촉했다. 남들이 보면 영락없는 아버지와 아들의 모습이었다. 그를 뒤따른 내 계획은 일단 성공이었다.
사내를 따라 큰길로 나왔고 육교를 건넜다. 그사이 통행금지가 해제된 모양이었다. 정류장에는 정갈한 교복의 여학생과 행인 한 명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움츠러진 어깨로 얼어붙어 희미해진 가로등을 떠받들고 있었다. 사내가 정류장 가까이 도착하자 마침 택시 한 대가 미끄러지듯 멈춰 섰다. 택시는 사내를 꿀꺽 삼긴 채 번개처럼 내 시야에서 달아났다. 택시가 사라진 뒤에는 곧이어 버스가 꽁무니를 물고 도착했다. 곧이어 버스의 찬바람이 나의 얼굴에 나뒹굴었고, 학생과 행인이 사라진 정류장에는 에나멜이 벗겨진 양철 표지판만이 뎅그렇게 남아있었다.
나는 어디랄 것도 없이 무턱대고 걷기 시작했다. 도시의 짓눌리는 위압감과 두려움을 숨기기 위해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길 바라면서 계속 걸었다. 골목을 끼고 모퉁이를 돌았다. 또 골목을 끼고 모퉁이를 돌았다. 걷는 일에 기진맥진해질 때까지 나는 걷고 또 걸었다. 작고 초라한 모습으로 서울의 아스팔트에 점을 찍었다. 아스팔트에 찍힌 점처럼 서울에서의 나는 보잘것없는 작은 점이었다.
날이 훤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번개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지던 차들이 긴 행렬로 바뀌었다. 사람들은 이미 수없이 쏟아져 나와 거리는 번잡해졌다. 나는 자꾸 사람들과 부딪히면서 하릴없이 이것저것을 살피며 걷기만 했다. 음식점이나 중국집에 들어가는 것은 겁이 나 포기하고, 호주머니 속 동전을 털어 빵과 우유로 아침을 대신했다.
그렇게 어디인지도 모를 길을 얼마나 더 걸었을까? 오후가 되자 더 이상 걸을 힘이 없어 골목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내가 자리 잡은 골목에는 건물 틈 사이로 비집고 들어온 손바닥 크기의 햇살이 따사로이 멈춰 있었다. 골목을 지나는 사람들이 잠깐씩 햇살을 가렸다가 돌려주는 일이 계속됐다. 그러나 누구 하나 말을 걸어오는 사람은 없었다. 나를 힐끗힐끗 쳐다보며 지나가는 숱한 행인들을 나 또한 힐끗힐끗 쳐다보았다. 무기력한 나의 움직임처럼 시간도 공간도 멈춰버린 것 같았다.
얼마를 더 버텼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눈꺼풀이 자꾸만 내려앉았다. 결국 온몸의 에너지가 빠져나가 천길 수렁으로 추락하는 듯 아무것도 부여잡지 못할 지경이 되었다. 나는 회색 도시에 팽개쳐져 이내 잠이 들고 말았다. 회색 도시의 지독한 무관심에 나는 점으로 버려졌다.
어머니는 내게 바다의 울음소리를 남겨두고 떠나갔다. 춤추는 파도가 가득한 남쪽 섬마을이 고향이라던 어머니는 파도소리가 속삭이는 음률에 가깝다고 말했다. 어머니의 설명으로 그림으로만 보았을 뿐 바다의 음률을 듣진 못했지만, 아랫동네의 머슴애에게 늘 자랑삼아 얘기했다. 녀석이 비웃기에 한 번은 녀석을 실컷 패주었다. 녀석은 코피가 나는데도 울지도 않았다. 나는 어머니에게 다시 한 번 바다 이야기를 듣고 싶었고 확인하고 싶었다. 집으로 돌아왔지만, 그날 어머니는 떠나고 없었다.
나는 어머니가 떠난 것도 모르고 천장을 향해 벌렁 누운 채 어머니를 기다렸다. 때 묻은 벽지에 그려져 있는 낙서들, 뚫어진 문구멍을 때운 85점짜리 시험지, 반쯤 찢겨진 채 대들보에 힘겹게 붙어 있는 부적, 박쥐처럼 메주가 열린 서까래, 다락을 통하는 비밀스런 통로를 차례차례 둘러보았다. 그리고 잠이 들었다.
어머니가 꿈속에 나타났다. 나는 어느 이름 모를 바닷가에 앉아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얀 포말이 바윗돌에 달려와 산산조각으로 부서지며 하얗게 날아갔다. 나는 딱히 할 일도 없었다. 어머니를 기다리며 포말 가까이 돌을 던지는 일만 되풀이했다. 그러다 돌연 바닷물 위를 땅위를 걷듯 하는 어머니를 발견했다. 어머니는 유유히 바다 위를 걸어 점점 더 먼 바다로 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어머니의 모습은 작아지거나 멀어지는 느낌이 전혀 없었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꾸만 깊은 바다로 들어가는 어머니를 한없이 불렀다. 하지만 목소리는 입안에서만 맴돌 뿐 소리로 되어 나오지가 않았다.
그렇게 얼마쯤 갔을까? 어머니는 갑자기 바다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물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한순간이었다. 바다는 다시 끝없는 수평선이 되었다. 목이 터지도록 어머니를 불렀다. 그러나 문지방의 걸린 어린애의 발처럼 입안에서만 맴돌 뿐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았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바다로 뛰어들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나 역시 어느 순간 어머니처럼 바다를 걷고 있었다. 그리고 어머니가 사라진 지점에서는 깊은 바닷물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땅에서와 마찬가지로 자연스럽게 숨을 쉬고 있었고 마치 물고기처럼 헤엄을 치기까지 했다. 바다 속에는 참으로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어머니는 바로 내 눈앞에서 물고기로 변해 헤엄을 쳤다. 어머니 주위에는 온갖 물고기들이 풀숲 사이를 헤치며 숨바꼭질이라도 하는 듯 평화로워 보였다.
큰 소리로 “어머니!” 하고 불러보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어머니의 꼬리를 덥석 물었다. 비로소 뒤를 돌아본 어머니는 그러나 어머니가 아니었다. 거대한 이빨을 가지고 있는 괴물이었다. 기겁해서 사방을 둘러봤지만, 주위에서 평화롭게 노닐던 물고기들도 똑같은 모습을 하고는 나를 노려봤다. 도망치기 위해 필사적으로 헤엄쳤다. 그러나 마음처럼 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손발은 무질서하게 허공을 헤맬 뿐 물위로 떠오르거나 놈들로부터 멀어지는 것 같지 않았다. 공포에 질린 나는 다시 한 번 소리를 질렀다. 마침내 내 목소리가 귓가를 쟁쟁히 울렸고, 그 순간 코와 입으로 바닷물이 사정없이 헤집고 들어왔다. 숨이 턱턱 막혔고 정신은 혼미했다.
“자아식, 또 새우잠이군!”
그때 아버지의 까칠한 손바닥이 얼굴을 훑고 지나가지 않았다면, 나는 엄청난 가위에 눌려 고생을 했을지 모를 일이다. 우시장에서 돌아온 아버지는 언제나처럼 술에 절어 있었다. 나는 콧등에 잔주름을 만들며 눈두덩을 비볐다. 그때까지도 꿈이 덜 깬 나는 떨떠름한 얼굴로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부지, 엄마 왔어유?”
그러나 아버지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방 안 곳곳을 두리번거렸다. 그 어디에도 어머니는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침묵하던 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아직 저녁 안 먹었지? 잠깐 기다리거라. 오늘부턴 내가 하마…….”
슬며시 자리를 피하는 아버지에게 꿈 얘기를 차마 할 수 없었다. 꿈이지만 음률의 바다가 공포의 바다로 나타난 것은 무언가 안 좋은 일이 일어날 수 있는 암시인지도 몰랐다. 며칠 전 잠결에 윗목에 쪼그리고 앉아 흐느끼던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때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그놈이 누구냐며 다그쳤었다. 어머니는 그런 일이 없다며 오해라고 했지만, 아버지의 분노는 밤새 계속되었다. 어머니의 흐느낌 또한 밤새 이어졌다. 내가 아랫동네 머슴애를 실컷 패주고 돌아왔을 때 어머니는 없었다. 밤새 흐느껴 울던 모습이 내가 기억하는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이 되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여러 날이 지나도 어머니는 돌아오지 않았다. 한 달이 지나고, 일 년이 지나고 4년이 지나도 어머니의 소식은 들을 수가 없었다. 나는 아버지에게 끈질기게 어머니의 행방을 물었지만 아버지의 태도는 너무 완강했다. 어머니가 잘못을 했다는 말만 되풀이할 뿐 다른 말은 일절 하지 않았다. 어머니를 향한 엄청난 노여움이 아버지의 마음에 켜켜이 쌓여있는 듯했다.
아버지는 주량이 늘수록 몸도 이곳저곳 아프기 시작했다. 걱정은 됐지만 아버지를 말릴 수도 없었다. 아버지는 우시장에서 돌아오는 날이면 술로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왔다. 중개인 중 누군가를 지칭하며 욕설을 퍼붓고 원망하며 술주정을 늘어놓는 것으로 보아, 어머니와 연루된 사람이 우시장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 모든 의문을 가슴속에 품은 채 입을 꼭꼭 다물고 세상을 떠났다. 나는 우시장에서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의문 중 어느 것 하나 밝혀내거나 주워듣지도 못했다.
어머니가 그리웠다. 어머니의 따듯한 품이 그리웠다. 어머니의 바닷가, 바다의 음률이 너무도 그리웠다. 힘겹고 어려울 때마다 어머니의 바다는 놀라운 깊이를 지닌 채 그리움으로, 서러움으로 또는 슬픔으로 나의 마음을 출렁이게 하곤 했는데…….
눈을 떴다. 짧지만 단꿈이었다. 눈언저리에는 촉촉한 물기가 흘러 있었다. 그 물기는 차디찬 겨울바람과 마찰을 일으켜 한기를 가져왔다. 입천장은 말라붙어 입안의 씁쓸함이 목구멍까지 길게 맴돌았다.
“저런, 나이도 젊은 사람이…….”
할머니가 나를 보고는 딱하다는 듯 중얼거리며 지나갔다. 나는 거리에 쓰러져 잠들었던 주정꾼처럼 민망한 얼굴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얼마를 더 버티고 서서 무엇을 해야 할까? 도대체 무엇을 기다려야 하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게 막막하고 답답할 수가 없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엄청난 피로와 두려움이 조금씩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벌써 서울에서의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지나버린 시간만큼 두려움도 무뎌지는 걸까?
그런데 몹시 신경 쓰이는 일이 하나 생겼다. 지나가는 행인들이 잠깐씩 훔쳐가는 햇살의 아쉬움이 아니었다. 점심을 걸렀어도 배고프지 않은, 알 수 없는 배 속에 관련된 문제도 아니었다. 길 건너 간판 ‘휘문인쇄소’에서 나를 훔쳐보는 교복 입은 여학생 때문이었다. 여학생은 나를 유심히 관찰하고 있는 듯 느껴졌다. 문을 열고 드나들면서 쉴 새 없이 나를 확인하는 행동이 몹시 신경 쓰였다. 더구나 드르륵 소리를 내며 미닫이문을 드나들 때마다 몇 번이고 마주치는 시선에 나는 고개를 돌려 외면하였다. 비록 신경은 쓰여도 그런 행동이 그다지 싫지 않은 것은 깨끗하고 단정해 보이는 교복 때문이었다. 하루 사이에 걸인이 된 듯한 나와는 대조적인 단정함이 한껏 정갈한 분위기를 느끼게 했다.
다시 한동안의 시간이 지났다. 잠시 후 휘문인쇄소 여학생 때문에 거의 주저앉을 법한 일이 벌어졌다. 드르륵 미닫이 여는 소리가 들렸을 때 나는 그 여학생이려니 생각하고는 눈길을 피하고 딴청을 피웠다. 그저 무심한 척 골목 어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데 어느 틈에 길을 건너왔는지 단발머리의 그 여학생이 코앞에 서 있는 게 아닌가! 내 머릿속은 백지장처럼 하얗게 돼버렸다.
“가출한 거 맞지요?”
“…….”
나는 놀랍고 두려운 마음에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우리 사장님이 좀 오래요!”
여학생에게 무엇 때문이냐고 물어보지도 못했다. 나는 무슨 죄인이라도 된 양 여학생의 뒤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미닫이문을 열자 숨이 막힐 정도로 뜨거운 난로 열기가 얼굴에 달라붙었다. 하루 종일 추운 곳에서 얼어버린 얼굴이 갑자기 아려왔다. 나는 본능적으로 얼굴을 가렸다. 책상에 쪼그리고 앉아 일하던 두세 명의 시선까지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나도 모르게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여학생이 사장인 듯싶은 사람에게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이 사람이에요.”
나는 사장에게 거의 반절을 하다시피 인사를 했다. 코가 땅에 닿을 듯이 구부정하게 허리가 숙여졌다. 그리고 여학생이 가져다주는 의자에 엉거주춤 걸터앉았다.
“은애 얘기를 듣자니 아침부터 있었다고 하던데, 가출했냐?”
사장은 은애라고 불리는 여학생을 가리키며 다짜고짜 물었다. 인물이 썩 잘난 사람이었다. 나도 모르게 고개가 떨어졌다. 멋쩍고 민망한 얼굴은 난로 열기로 계속 후끈거리며 달아올랐다.
“…예에.”
내 목소리는 작고 지쳐 있었다. 사장은 이름을 물었다. 그리고 고향, 가족관계, 나이, 학력, 취미, 아침부터 쪼그리고 앉아 있었던 이유까지 궁금한 사항 모두를 비교적 상세히 물어왔다. 나는 애써 정확하게 말하려고 더듬거렸다. 하지만 무슨 말을 어찌 대답했는지 곧 기억나지 않았다.
사장이 말했다.
“너 그림 좀 그리냐? 도안(圖案) 배우고 싶은 생각은 없니?”
나는 도안이 어떤 것이냐고 물어볼 필요조차 없었다. 어느 곳이든 당장 눈 비 가리고 몸뚱이 하나 의지할 수 있는 곳이라면 엎드려 절이라도 해야 할 입장이었다.
“도안이 무엇인지 잘 모르지만, 열심히 할 게유!”
“허허, 고향 사투리 오랜만에 들어보는군. 용기가 맘에 들었어. 그럼 어디 한번 근무해 보자. 은애가 이 친구 잘 가르쳐 줘라.”
사장이 말하자 은애는 내게 따라오라는 눈짓을 했다. 나는 사장에게 수십 번 절하듯 인사를 하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그리고 은애를 뒤따라가면서도 또 뒤돌아보며 사장에게 인사를 했다.
은애로부터 곧바로 사무실의 모든 상황을 안내받았다. 휘문인쇄소는 20여 명의 직원과 1·2층에 다양한 인쇄보조설비를 갖춘 비교적 큰 인쇄소라고 했다. 인쇄용 필름을 다루는 제판이라는 기계시설이 있는 2층에는 다락이 꾸며져 있었다. 가끔 철야를 하는 직원이 수면을 취하도록 만들어진 그곳이 나의 숙소라며 알려주었다. 은애는 때마침 다락에 기거하며 도안을 배우던 보조도안사가 군대에 가는 바람에 취직되는 행운을 얻었다고 말해 주었다. 그리고 사장과 같은 고향 출신이어서 이런 행운을 얻었는지 모른다며 그녀의 생각까지 덧붙여 주었다.
“난 열아홉이에요. 이제 여고 1학년이지만…….”
은애는 주간에는 인쇄소에 다니고 늦은 나이에 야간전수학교를 다닌다고 했다. 은애가 학교에 가는 오후 3시 이후에는 은애의 일을 내가 대신해야 한다고 설명해 주었다. 은애는 참으로 친절하면서도 상냥하고 열심히 사는 여학생인 듯싶었다. 내가 취직하게 된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천운 같은 일이었다.
“돈은 좀 가지고 왔어요? 한 달 정도 생활할 정도는…….”
은애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궁색한 변명이겠지만 소몰이를 하는 동안 돈을 모은다는 것은 생각조차 하기 힘든 일이었다. 하루하루 생활하기도 벅찬 빈곤의 연속이었던 것이 창피했다. 창피한 마음에 한없이 주눅이 들었다. 은애는 사장에게 건의하여 가불 명목으로 약간의 돈을 내게 건네주었다. 그녀는 사장에게 상당한 신뢰를 얻고 있는 듯했다. 나는 사장과 그녀의 세심한 배려에 울컥해졌다.
내 몰골이 흉했던지 은애가 목욕탕 위치를 알려주었다. 아직은 모든 것이 어리둥절한 입장이라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목욕탕에 갔다. 기껏해야 여름철 개여울에서 물장구치며 몸을 씻는 것 외는 겨울 내내 목욕 한 번 할 수 없었던 나였다. 늦봄부터 물가에 가면 겨울동안 낀 때가 복숭아 뼈에 모래알처럼 박혀있던 처지였으니……. 그래도 동네에서는 그것이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다. 목욕탕의 따뜻한 물은 사치스럽고 낯설게 느껴졌다. 알몸으로 여기저기를 활보하는 사람들을 보니 더욱 당황스러웠다. 그들의 당당한 모습을 쳐다보기도 민망했지만, 벌거벗은 내 아랫도리가 더 민망했다. 나는 한참을 탕 속에 숨어서 몸을 담그고 있었다. 얼었던 몸이 서서히 녹았다. 온몸이 가려워지기 시작하면서 벌레가 온몸으로 스멀스멀 기어가는 듯했다. 몸을 긁을 수밖에 없었다. 가려워진 곳을 긁을 때마다 여기저기에 붙어있던 시골의 때가 물위로 떠올랐다. 둥둥 떠다니는 그것은 내 몸에서 기생하던 찌꺼기였다. 군더더기처럼 나를 괴롭히던 찌꺼기가 서울의 목욕탕에서 떨어져 물위를 떠다녔다. 떠다니는 찌꺼기를 입으로 불어 물 밖으로 밀어냈다. 나는 사람들이 조금 뜸해진 틈을 타 대충 몸을 씻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군에 간 전임 도안사의 추리닝으로 갈아입었다. 꼭 맞는 추리닝은 나를 제법 도시적 모습으로 탈바꿈시켜 주었다. 어둡고 궁색한 다락도 내게는 최고로 훌륭한 둥지라 생각했다. 다락 여기저기에 어지럽게 널려 있는 물건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전임 도안사가 보다가 구석에 처박아 놓은 성인잡지 ‘선데이서울’을 정리하는데 얼굴이 붉어졌다. 가릴 곳만 겨우 가린 비키니 차림의 여자들이 맨살을 드러내고 나를 향해 웃고 있었다. 행여 잡지가 은애의 눈에 뜨여 오해를 받을까 염려스러웠다. 그래서 되도록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숨겨 버렸다. 그러나 맨살의 여자들이 예쁘기도 할 뿐만 아니라 호기심까지 자극하여 한 번 더 훔쳐 본 것은 무슨 조화인지 모를 일이었다.
나는 마침내 자리에 누웠다. 길게 심호흡을 삼키자 긴장이 풀렸다. 그리고 곧 천길 바닥으로 가라앉는 몸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눈을 감았다. 고향이 보였다. 어머니가 보였다. 아버지가, 민기가, 유정숙이 보였다. 그리고 얼마 후 깊은 잠에, 서울에서의 첫 번째 밤에 깊이깊이 빠져들었다.
눈을 떴다. 서울에서의 첫날밤인데도 그런대로 단잠을 잤다. 잠자리가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한숨에 잠을 잔 결정적 이유는 아마 극도로 지친 탓이었을 것이다. 나는 아침을 해결하기 이전에 간밤에 제판실 직원이 일러 준대로, 서둘러 사무실 청소부터 했다. 직원들이 하나 둘 출근하기 시작하고 이윽고 은애가 출근했다. 사무실 청소가 말끔히 된 것을 눈치 챈 은애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나를 소개한 것이 다행이라는 표정이었다.
은애가 각 부서의 직원들과 첫인사를 시켜주었다. 대다수의 직원들은 시골에서 상경한 사람들이라고 말해 주었다. 다들 넉넉하지 못한 집안 형편으로 학벌이 좋은 사람은 없다고 귀띔해 주었다. 소박하고 욕심 없는 사람들이니 적응하기 쉬울 것이라며 은애는 나의 걱정을 덜어 주었다.
서울생활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집단생활의 요령도 모르고 경험도 없던 탓인지 하루하루가 언제 지났는지 모를 만큼 바쁜 날들이 이어졌다. 아침에 일어나 사무실 청소를 시작으로 쉴 새 없는 심부름으로 이어지는 오전 시간을 보내면, 난롯불에 라면을 끓여먹는 점심시간이 돌아왔다. 점심을 해결했다 싶으면 이내 하루는 저물어 있었다. 더욱이 은애가 학교에 가는 오후 무렵에는 그녀의 몫까지 대신 일해야 했으므로 나는 더욱 바쁘게 움직여야만 했다. 비록 은애가 하는 일보다 단순한 일들이었지만 열심히 일했다.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배고픔이었다. 회사에서 나오는 돈은 겨우 보름 정도의 끼니를 챙길 수 있을 뿐 무엇 하나 다른 곳에 쓸 형편은 못됐다. 최소한의 생활조차도 벅찬 궁색한 금액이었다. 그것도 점심을 늘 라면으로 해결해야만 보름을 견딜 수 있는 액수에 불과했다. 야식으로 저녁을 때우고 남은 반찬으로 다음날 아침을 해결할 수 있는 날은 그나마 운이 좋은 날이었다. 그래도 다른 인쇄소에 비하면 급료가 후한 편이라서 박봉에 토를 달 수 없었다.
주변에서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나는 그나마 형편이 나은 편이었다. 기술을 습득하는 동안에는 일체의 보수가 없는 곳이 대다수였다. 고작 야식 한 끼만을 보조해 주면서 야간에 기술을 배워야 하는 열악한 곳도 꽤 많았다. 그들은 야간 팀에서 기술을 습득하고 주간 팀으로 옮겨야만 비로소 나만큼의 대우를 받게 되는 것이었다. 회사에 종이를 납품하는 지업사에서 재단기술을 배우는 내 또래의 사내는 더욱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는 잘 곳이 없어서 재단된 파지더미 속에 들어가 파지를 이불 삼아 덮고 잔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에 비하면 나의 푸념은 사치에 불과했다. 정말로 막막하기만 했던 용산역의 새벽에 비하면 나는 참 운이 좋았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강해져야 했다. 사무실 분위기에 빨리 익숙해지려 애썼고 선배들에게 인정받으려 부단히 노력했다. 정신없고 춥기만 했던 석 달의 겨울이 번개처럼 흘렀다. 선선한 바람을 앞세우고 봄의 계절은 어김없이 내 코앞에 와 있었다. 길게 심호흡을 삼킬 때마다 제법 향긋한 봄 냄새가 코털을 간질이는 봄이었다. 서울의 봄 냄새는 고향의 봄 냄새와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사무실 직원들은 사장이 퇴근하고 난 저녁이면 기계실 직원들과 어울려 화투놀이를 했다. 나는 그들의 유혹도 뒤로 하고 선배의 어깨너머로 훔쳐본 그림을 도안해 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막상 그려 놓고 보면 멋대로 휘갈긴 낙서 같아서 찢고 또 찢기를 반복해야 했다. 도안은 노력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끈기와 소질이 요구되는 어려운 작업이었다. 도안을 하기에 적합한 섬세한 성격으로 마음을 가다듬는 것이 우선 필요했다. 처음에는 어느 정도 흉내를 낼 수 있게 된 것에 의미를 두어야 했다. 다시 얼마동안 글자 레터링을 되풀이했다. 지독한 습작의 연속이었다. 나는 점차 나만의 방법과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또 몇 달이 지났다. 사무실은 평소보다 많이 바빠졌다. 선배는 일이 넘쳐났다. 일이 벅찬 선배는 비교적 간단한 디자인을 나에게 넘기는 일이 잦아졌다. 그때마다 순조롭게 작업을 성공시켰고 나는 서서히 인정받기 시작했다. 봄이 지나 일이 뜸한 여름이 되었다. 어느덧 서울에 온 지도 일 년을 훌쩍 넘기고 반년이 더 지나 있었다. 점심메뉴는 라면에서 자장면이나 볶음밥으로 바뀌었다. 일요일이면 시골이 고향인 몇몇 동료들과 서울나들이를 다녔다. 남산과 고궁은 물론 북한산이며 남한산성 등 비교적 서울과 가까운 여러 곳을 어울려 구경했다. 그리고 술도 배웠다.
그즈음 버릇이 하나 생겼다. 무료할 때면, 다락 깊숙이 묻어두었던 비키니 여자들을 간간히 꺼내보는 습관이었다. 처음에는 사람들에게 들킬까 염려되어 상당히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걱정은 무뎌졌다. 끝내는 ‘선데이서울’의 신간을 구입하기에 이르렀다. 내가 구입한 ‘선데이서울’은 차곡차곡 쌓여갔다. ‘선데이서울’의 치정에 얽힌 기사는 말초신경을 자극해 묘한 흥분을 가져왔다. 기사 속 이야기들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떠나 마음속 깊은 곳에 도사리던 욕구를 자극하기에 손색이 없었다. 아랫도리에 불쑥불쑥 힘이 실리는 경우도 종종 생겼다. 엉뚱하게도 유정숙과 결혼하는 상상을 하거나 은애와 데이트하는 밑도 끝도 없는 공상도 했다. 은애를 보면서 유정숙을 떠올리는 것은 또 다른 내면의 비밀이 되었다. 유정숙에 대한 비밀은 아련하게 간직되어 고착되어 갔다.
시간은 그녀들에 대한 내 마음과는 상관없이 강물처럼 흘러갔다. 시간은 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유정숙의 얼굴을 가물가물 흐려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민기에 대한 궁금증이나 고향에 대한 그리움 또한 점차 잊게 만들었다. 불쑥 민기와의 그날이 떠올라 자책하기도 했지만 고향을 찾아 생사를 알기 전에는 어쩔 도리가 없는 일이었다. 안타깝게 세월의 강물은 그렇게 흐르고 또 흘렀다.
다시 가을이 왔다. 사보의 마지막 수정자를 쳐서 편집을 끝내야만 한 달이 마무리되는 바쁜 월말이었다. 스카라 극장에서 이소룡 영화를 본 다음날 아침 여느 때처럼 원고를 가지고 사진식자 집을 찾았다. 거래처 사람들로 북적이는 틈에 평소 안면이 있던 ‘태평양기획’의 임 실장이 보였다. 나는 임 실장에게 의례적인 인사를 건넸다.
“실장님, 많이 바쁘신가 보네유?”
태평양기획은 휘문인쇄소에 인쇄를 의뢰하는 거래처 중 제법 비중이 큰 곳이었다.
“어, 강 군! 어때, 요즘 할만 해?”
“예, 그럭저럭요.”
“허허, 제법이야. 적응력 빠른데. 이젠 사투리도 많이 안 쓰네.”
나는 겸연쩍게 웃었다. 나의 서울 생활을 낱낱이 알고 있는 임 실장 앞에서는 늘 주눅이 들었다. 임 실장은 고학력을 앞세워 우쭐하는 일이 많았다. 자신감이 몸에 밴 그는 가끔 영화감독과 여배우들과의 친분을 과시하곤 했다. 그는 나에겐 전혀 다른 세상의 사람이었다.
“강 군, 마침 할 말도 있고 한데 우리 차나 한잔 할까?”
“저하구유?”
“으음, 중요한 얘기야.”
나는 임 실장에게 끌리듯 다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소위 ‘중요한 이야기’를 듣고 적잖이 놀랐다.
“우리 회사에 퇴사하는 디자이너 녀석이 있어. 그놈 대신으로 디자이너를 구하는데, 혹시 생각이 있나 해서 보자고 한 거야. 추천하고 싶어서…….”
내가 놀란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태평양기획은 한미합작회사로서 업계에서는 선망이 되는 종합광고대행사로 명성이 대단한 회사였다. 하지만 혼자서 결정할 수 있는 간단한 문제가 결코 아니었다.
“실장님, 생각 좀 해야 되겠습니다.”
“그도 그렇겠지. 그럼 며칠 고민하고 결정해서 알려줘.”
나는 무거운 마음으로 다방을 나왔다. 불현듯 그동안의 서울생활이 떠올랐다. 조치원역의 공포와 용산역의 두려움이 한꺼번에 겹쳐왔다. 목욕탕의 궁상과 밀폐된 다락의 비밀스러움이 또한 겹쳐왔다. 오랜 기간의 라면이, 자장면이, 볶음밥이 겹쳐왔다. 긴 시간은 아니지만 살기 위해 버틴 서러움이 차올라 목젖을 적셨다. 태평양기획의 책임자급인 임 실장의 눈에 들었다는 것은 나의 가능성을 인정받았다는 의미였다. 임 실장의 제안은 앞만 보고 달려온 나에게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계기를 주었다. 그러나 은인과도 같은 사장님과 은애에게는 쉽게 말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며칠 후 나는 임 실장을 거래처에서 우연히 다시 만났다.
“어떻게 생각해 봤어?”
나는 또 겸연쩍게 웃기만 했다. 하지만 눈치 빠른 임 실장은 내 마음을 훤하게 꿰뚫고 있었다. 임 실장은 이미 그의 목표를 정해놓고 있는 듯했다.
“사장에게 말하기 곤란하면 내가 대신 얘기하면 어떨까?”
나는 또 침묵했다. 임 실장은 침묵을 긍정의 뜻으로 받아들였는지 사장에게 직접 말하겠다며 더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런 임 실장을 만류하지도 못했다. 그날 저녁 나는 사장에게 불려갔다.
“임 실장에게 얘기 들었다. 네가 부탁한 거니?”
사장의 목소리에는 노여움이 잔뜩 섞여 있었다. 무작정 상경한 형편없던 나를 거두어 준 결과가 배신으로 돌
아왔다는 얼굴이었다. 언젠가 사장은 내가 은애의 눈에 띈 것은 운명이었다고 말했었다. 그렇게 말했던 자신을 후회하는 표정이었다. 사장이 은애를 그토록 신뢰하는 것은 그녀가 성실하다는 것 이전에 둘 사이의 혈연관계 때문이라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침묵으로 그 상황을 버텼다. 어떤 이유에서든 할 말이 없었다. 염치가 없었다.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허헛… 이제 좀 쓸 만하게 되었다 했더니, 딴 놈이 채 가는구먼 그려! 젠장…….”
사장의 푸념에는 임 실장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한탄도 담겨 있었다. 태평양기획에서 넘어오는 일이 휘문인쇄소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러니 임 실장의 입김이 셀 수밖에.
“어떻게 할 것인지 며칠 생각해 보자!”
사장은 풀이 죽은 내가 측은했던지 나가라는 손짓을 했다. 힘없이 고개를 떨어뜨리고 사장실을 나오자 동료들이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나는 몹시 궁금해 하는 그들을 뿌리치고 어두운 다락에 처박혔다. 다락에 처박혀 저녁도 거르고 두문불출했다.
이튿날 소식을 들은 직원들은 나를 배은망덕한 사람으로 낙인찍었다. 오갈 데 없는 나를 거두어준 걸 뻔히 아는 동료들은 아무도 내 행동을 좋게 받아주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달리 변명을 꾸밀 줄도 모르는 나는 그 상황이 가시방석이었다. 감정이 격해진 선배는 가슴이 시릴 정도의 따끔한 핀잔을 주었다.
“…정말, 가고 싶으세요?”
은애가 동정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그저 고개를 떨어뜨린 채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은애로 인해 취직을 하게 된 걸 생각하면 누구보다 그녀에게 미안했다. 구차한 변명이 될 것 같아 내 독단적인 의지가 아니었음을 말하지도 않았다.
“나에겐 미안하게 생각하지 말아요. 난 이해해요.”
어느덧 졸업반이 된 은애는 제법 어른스럽게 나를 위로해 주었다. 그녀의 단발머리는 그동안 긴 머리로 변해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의 교복 대신 사복을 즐겨 입는, 숙녀 티가 물씬 풍기는 여인의 모습이었다. 군더더기 없이 간결한 성격에 늘 단정한 은애는 교탁 앞의 여선생님 같았다. 그녀는 손으로는 잡을 수 없는 아득히 날아오르는 나비였다.
그로부터 나흘이 지나서 사장은 다시 나를 불렀다.
“미스터 강, 도안사와 의논했는데 자네를 보내기로 했네. 태평양기획과의 인연도 있고 미스터 강한테 그게 좋을 것 같아서……. 하지만 거기서도 열심히 하게. 우리가 바쁠 때 전화하면 저녁이나 일요일에 가끔 와서 도와주기도 하고 말이야.”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그저 사장의 넓은 마음이 고맙고 감격스러웠다. 회사 입장에서는 나를 태평양기획에 심어놓는 것만큼 두 회사의 관계를 돈독하게 하는 방법이 없다는 판단으로 결정을 내린 듯했다. 나를 스파이로 태평양기획에 보낸다면 손해 볼 일이 없다는 계산이 깔린 것인지도 몰랐다.
사장의 허락이 떨어지자 핀잔을 주던 선배는 처음의 노여움을 누그러뜨리고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선배는 오랜 실무경험에서 우러나온 기술적 문제까지 지적해 주었다. 그리고 태평양기획에 대한 정보와 임 실장의 성격까지 말하며 오히려 나를 다독거려주었다. 며칠 동안 소원했던 기계실과 제판실 동료들의 분위기도 반전되었다. 그들은 함께 축하해 주었고 이제는 거래처 고객이 되었다며 너스레까지 떨었다.
송별회 자리에서 동료들은 나에게 과하게 술을 권했다. 나는 그들의 채근에 못 이겨 ‘울고 넘는 박달재’를 서투르게 불렀고, 정말이지 꿀꺽 눈물까지 삼켰다. 어머니가, 유정숙이, 그리고 은애가 마음속에서 눈물로 뒤엉켜 흘렀다. 쉽게 보일 수 없는 마음속의 눈물은 회색 도시에 내던져졌던 지난 설움이 한꺼번에 밀려오는, 분명 파도 같은 눈물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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