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 규모를 키우다.
농사 2년차가 되자 쓸데 없는 바람이 들어서 인지 난데 없는 용기가 생겨서 인지 농사 규모가 커져 버렸다. 그 주된 이유는 첫해에 진 농협 대출금을 성급하게 값으려던 욕심 때문이었다. 2년차엔 농사규모가 무척 커졌다. 토지 임대도 4000평 가량 더 늘어나 총 7000평 정도가 되었다. 물론 대출금도 작년의 두배가 되었다. 그 대출금으로 작년 대출금 값고,나머지는 농자금으로 쓸 요량 이었다. 그러나 이건 계획일 뿐 현실은 달리 움직였다.
더 임대한 토지중 2500평 전부에 풋고추와 고추가루용 건고추를 약간 심었다.총 2만 3천주 가량 되었으리라. 나머지 500평은 토질이 좋지않아 들깨모종을 내었던 기억이 있다. 나머지 임대한 땅엔 콩을 더 심고,한참 유행이던 직립성 호박,쥬키니 호박을 심었다.
고추 모종은 고추모종 키우는 전문 생산업체인 대관령 플러그 묘를 썼다.그당시는 그게 최상의 품질을 보증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일이 어디 계획대로던가. 처음 호박부터 문제가 생겼다. 밭은 퇴비,비료,기타 자재 적당히 그것도 미리 토양검정을 철저히 한다음 분석해 과학적으로 시비 했는데도 문제가 생겼다. 그건 가뭄이었다. 하늘이 하는 일을 어찌 막겠는가? 그해 다른 농민들은 5월에 호박심는 일은 포기한지 오래 였다. 나는 1000평 전 면적에 심으려던 계획을 수정에 시차를 두고 심기로 방향을 선회하곤 약 400평만 먼저 1차로 심기로 했다. 모종은 지인에게서 가뭄 때문에 포기한 모종을 무료로 인수 했다. 그게 정확한 수량은 기억 않나지만 300-400주 였던 것 같다.
가뭄 때문에 심을 수 없던 것을 물을 주기로 했다. 처음에는 분수 호스를 깔아 물을 주었으나 이렇게 주다간 한달내내 주어도 물이 배어 들아갈 것 같지 않았다.극심한 5월 가뭄은 물을 뿌리는 대로 말려 버렸기 때문이다. 동네 사람들은 헛일 하지 말고 포기하라 했다.
나는 포기 하지 않고 분수호스로 물을 주는 대신 그냥 1000 리터 통으로 물을 받아 호스로 열차 이상을 뿌렸다.그렇게 엄청나게 뿌렸는데도 갈증난 땅은 겨우 2-3센티가 젖을 뿐이었다.그리곤 곧바로 비닐 피복을 했다. 물을 가두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내 예상은 적중해서 갖힌 물은 도망 못가고 비닐 속에서 서서히 퍼져나가 모종이 활착을 할 만한 토양이 되었다. 그렇게 호박을 심었는데 이게 대박이 났다. 이렇게 심은 농민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그해 첫 호박 농사에서 3-400 만원정도 수입을 올렸다. 적은 면적이라 아내와 둘이서 할 수 있었고 비용도 많이 절감 되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10년에 한번 있을까 말까한 일이라며 나의 고집을 용기라 칭찬했다. 모종을 무료로 준 지인께 선물을 사다 사례했다.
호박을 심자 마자 풋고추를 심었다. 인부를 대량으로 동원 했다. 20명 이상이 고추를 심었고 나는 무슨 사장이 된거 마냥 착각이 들기도 했고, 근심이 생기기도 했다.당연한 거지만 잘될까 하는... 다행히 고추를 심지 않았던 땅이어서 인지 초기 활착은 무척 좋았다. 초기 활착이 확인되자 고추대를 박기 시작 했다. 이른봄 내내 이산 저산 돌며 준비한 고추대를 박는데만 일주일이 소비 됐다. 혼자 다 이일을 했는데 사람들은 혀를 내둘렀다. 바짝 말라 힘도 못쓸 것 같은 사람이 팔과 어깨가 빠질 것 같은 일을 해내니 당연한 반응 이었다.
그러나 나는 고교 3년때 취직해 엔진공장에서 3년간 한 일이 망치질 이었다. 물론 힘들어 야간 대학에 진학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지만...
그러나 다른 일은 일하는 아주머니를 동원 해야 했다. 비용이 엄청나게 들어갔다.하루에 백만원 정도 들어가는건 예사 였다. 고추 따는 철이 오자 그 잘 됐던 고추 밭에 문제가 생겼다. 고추포기는 아무 이상이 없었지만 폭우가 쏟아지자 엄청난 문제가 또 생겼다.이번엔 무슨 병이 생긴건 아니고 고추포기가 양분을 너무 잘 흡수해 생긴 일이었다.기비로 들어갔던 비료가 폭우에 한꺼번에 녹아 흡수되자 풋고추가 상품성이 없게끔,마치 돼지처럼 과다성장 했던 것이다.수량은 무척 많이 나왔지만 시세가 다른 사람의 1/3 수준 이었다. 그 많은 인력을 동원 했는데 헐값이라니... 마음은 착잡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한박스에 10킬로 그램 들어가는데 이렇게 900 박스를 출하했다. 나는 고추 나르는 일만 전담해도 하루가 벅찼다. 야간엔 300와트짜리 전등아래서 선별 작업을 했으며 12시 넘기는 일은 다반사 였다. 꾸벅꾸벅 졸음이 쏟아지는 새벽 2시에 집으로 들어가는 일도 많았다. 작업장으로 쓰는 하우스에 물이 차 고추를 버리기도 하고,박스를 강풍에 날리기도 하고... 비가 잦아들어 땅이 안정되자 품질이 좋아졌다. 그러나 이때는 벌써 예상 수확량의 반정도를 출하한 시점이었다. 따라서 제값을 받은 것은 전체 수확량의 절반 정도였다.
그해 총 2200 박스를 출하했다. 전체 매출도 3천만원이 넘었다. 그러나 비용도 많았다. 고추심기 시작 했을 때는 수익률을 40%로 잡고 고추를 심었는데 계산해 보니 10% 도 않되었다. 무언가 한참 빗나간 결과 였지만 모두가 그런건 아니고 나만 그런 결과를 얻었다는데 대해 무척 많은 생각을 했다. 여름 내내 하루에 18시간씩 무지막지하게 일한 결과가 겨우 단돈 몇백이란 말인가? 도데체 뭐가 잘못 된 걸까?
알고 보면 모든게 단순한데 그당시는 감이 잡히지 않았고 나는 이걸 깨닫는데 3-4년을 허비 했다. 수익률 4-50%란 자기 노동비용을 제외한 거였고,고 수익률에는 자기 노동이 고스란히 반영돼 있다는걸 어리석고 미련하게도 뒤늦게 깨달았다. 내 노동이 아닌 남의 노동은 죽었다 깨나도 고수익율은 달성되지 않는다는 걸 절감했다.
콩농사는 잘 되었다. 내가 직접 일한게 다른 농민 보다 무척 많았기 때문이기도 했고, 한편으론 운도 좋았다.북향 밭이었는데도 콩이 다 여물었기 때문이었다. 그늘 밑에서 콩이 여문 것이 신기 하기만 했다. 그해 27가마를 수확 했다. 아직 머릿속의 부업 계획이 구체화 되지도 않았고 그럴 여건도 아니어서 그대로 상인에게 넘겼다. 그해 콩으로 얻은 매출액은 7백여 만원 되었다.그러나 여기에 경비를 삭감하면 절반 정도로 준다.
어쨌든 많은걸 배웠다. 매출액과 인건비,그리고 수익률의 함수관계를 체험적으로 배웠다.
그리고 본전치기 농사가 되기는 했지만 어쨌든 수입을 낼 수 있겠다는 어렴풋한 자신감이 생기기도 했다.
그러나 자신감과,깨달음과는 다르게 농협 채무는 쌓여갔다. 본전치기 농사가 되어 그해 대출금이 그대로 연체금과 함께 쌓여갔다. 여름엔 정신없이 일하는라 실감하지 못하고, 수확물에 대한 희망이 여름과 가을을 버티게 해주지만 겨울이 오면 고뇌는 깊어졌다.
겨울에 학교에 마지막으로 나가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머릿속은 어지러웠다.부채에 대한 고민이 가장 컸다. 다음은 무었을 어떻게 해야 이상황을 호전 시킬까에 대한 여러 대안들이 머릿속과 마음속을 심란하게 했다. 대관령 횡계에 있는 부도난 14평짜리 임대 월세 아파트 보증금이라도 해결되면 우선 급한 불은 끌 텐데...그러나 이런 생각도 내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아파트가 법정 소송에 휘말렸기 때문이었다. 이놈의 소송은 5년을 끌었고 입주민 900여 세대의 가슴에 대못 하나씩을 박고는 끝이났다. 끝났다고 보증금을 돌려 받은건 아니었다. 오히려 보증금보다 더 큰 빚을 떠안기곤 끝이 났다. 법정관리인과 법원은 그렇게 판결해 버렸다.그게 만사형통하는 길이라나 뭐라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