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을 가져온 유탄
증언자: 최복순(여)
생년월일: 1941. 9. 5(당시 나이 39세)
직 업: 미용사 (현재 가정주부)
조사일시: 1988. 12
개 요
5월 22일 집에서 쉬던 중 창문을 뚫고 날라온 M16 총탄에 어깨를 맞았던 최복순 씨가 상무대-통합병원-조대병원 등에서 치료를 받으면서 본 처참했던 5월의 상황을 기록한 글이다.
창문을 뚫고 들어온 총알
나는 1964년에 결혼해 1969년부터 시청 근방에서 식당을 하다가 1972년부터는 내가 미용기술을 배워 학동에다 미장원을 냈다.
1980년 5월 시내가 데모로 어수선할 때 나는 학동에서 미장원을 경영하고 있었 다. 쌍촌동에 집이 있어 매일 미장원에 출퇴근했다. 당시 시내상황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손님들을 통해 들을 수 있었다.
5월 21일 점점 시내 분위기가 험악하고 불안해서 평소보다 일찍 퇴근했다. 저녁 7시 이전에 택시를 타고 태평극장 앞을 지나는데, 그 근방에 공수부대원들이 깔려 있어 검문당할까봐 불안했다. 택시 안에는 나 외에도 대학생 1명과 그 어머니가 함께 합승중이어서 더욱 조마조마했다. 다행히도 검문을 받지 않고 무사히 귀가할 수 있었다.
22일에는 출근하지 않고 집에 있었다. 오후 5시경 아래층에 사는 조카 집에 놀러가 뉴스를 듣는데 두려운 생각이 들어 2층에 올라갔다. 남편에게 아래로 내려 가자고 말하는 순간 M16 유탄 2개가 창문을 魰고 들어왔다. 나는 오른쪽 어깨쭉지를 맞고 그대로 쓰러져 잠시 정신을 잃었다. 남편이 총알을 빼려고 구멍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지만 피만 계속 흐를 뿐 찾지 못했다. 다급해진 남편이 맨발로 뛰쳐나가 사람 살려달라고 외치면서 나를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그때 집 앞 길 건너편에는 군용 트럭 2대가 있었고, 트럭 위에는 공수에 의해 부상입은 환자들이 가득했다. 나도 남편과 함께 트럭 뒤쪽에 올라갔다. 내 앞에는 배에 구멍이 뚫린 청년이 누워 있었다. 차가 움직일 때마다 그 청년의 배 속에서는 무엇인가 오르락내리락하였다. 청년이 몹시 안쓰러워 나는 상처의 아픔보다 먼저 청년의 상처를 감싸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통합병원
통합병원에 도착하니 복도마다 환자가 가득했고 여기저기 악쓰는 소리, 우는 소리로 소란스러웠다. 그 와중에도 방망이로 환자들을 구타하는 군인도 있었다.
저녁 9시가 돼서야 응급처치 후에 엑스레이를 찍고 검사를 했다. 총알이 그대로 어깨 속에 있는데도 제거하지 않고 그 상태로 꿰맸다. 무척 목이 말라 물을 청하자 주전자를 건네줬다. 입에 넣고 막 넘기려는데 누군가 수술 후 물을 먹으면 죽는다고 했다. 나는 재빨리 고개를 옆으로 돌려 물을 토해 냈다. 막상 죽음이 눈앞에서 어른거린다고 생각되자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사흘 후에 시트를 간다기에 일어나려다 어지러워 쓰러져버렸다. 병원측에서 재검사를 하고 수혈을 시작했다. 혈관이 잘 나타나지 않아 몸 여기저기를 혈관을 찾는다며 살을 찢는데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부작용으로 주사 후에는 손목이 심하게 붓고 몸이 쑤셔왔다. 마치 내가 실험용이 된 듯한 생각이 들어 항의도 했지만 소용없었다. 당시 통합병원내에는 5·18 환자가 꽤 많았는 데(여자 11명, 남자 68명) 가족들 면회는커녕 보호자마저도 함께 있을 수 없었다. 군인환자들이 대신 우리 소변까지 모두 수발해 주었다. 면회가 불가능해 시간을 정해서 가족들이 가져온 사식을 군인 환자들이 우리에게 전해 주었다. 빈 그릇도 그런 식으로 가족에게 갖다주었다.
한번은 가족에게 편지를 써 그릇 속에 넣어보냈는데 발각되어 군인 환자들이 자기 입장이 난처하다며 쓰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통합병원 입원중 5.25일에서 27일까지는 면회가 허용돼 가족을 만났다.
병실에 있는 동안 5·18에 대해 조사를 받았다. 그러고는 앞으로 다시는 데모에 참가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고 열 손가락 지장까지 찍었다. 각서는 자필로 쓰도록 했다. 조사중 젊은 새댁(이추자)이 두들겨 맞아 우리도 저처럼 욕설과 구타를 당할까봐 같이 울었었다. 우리 병실의 변종만(여, 현재 58세)씨는 화순으로 피난가는 중에 군인이 쏜 총에 맞아 한쪽 눈이 빠져버린 경우였다.
6월 초순이라 기억되는데 시청에서 나온 직원(임종철, 최경옥)이 위로금조로 일률적으로 2만 원인가 3만 원인가를 봉투에 넣어 나눠주었다. 그들은 환자상태를 조사하며 경과를 사진으로 촬영했다.
6월 23일 환자의 상태에 따라 각자 병원으로 배치되었고, 나는 다른 20명과 함께 조선대병원으로 옮겨갔다. 조선대에서 6개월 5일간 입원, 치료했고 퇴원 후 한 달간 자가치료하면서 계속 한방약을 복용했다. 그러나 상태는 계속 악화돼 현재는 오른손을 위로 올리기도 힘들고 오른쪽 다리까지 마비되어 가고 있다. 신경외과 의사의 말이 파편을 제거하지 않은 상태로 상처를 꿰매버려 그렇다고 한다.
부상 후유증
5·18 때의 부상으로 인해 엄마로서나 주부로서 해야 할 일뿐만 아니라 미장원 일도 못하게 되었다. 당시에 미장원 한 달 수입이 1백만 원 정도였다. 현재는 남편마저 실직상태라 가계가 점점 기울어가고 있다.
지금껏 나는 부상자 3급 판정을 받고 위로금 2백만 원과 1983년에 지역개발협의회에서 준 4백만 원을 받았을 뿐이다.
그런데도 1988년 8월 7일 부상자 신체검사를 할 때 보니 부상 정도에 상관없이 형식적인 검사만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5월의 진상은 꼭 밝혀져야 하고 아울러 명예회복도 되어야 한다. 또한 나처럼 후유증으로 아무 일도 못하는 채 집에 들어앉은 사람들에 대한 보상도 있어야 한다.
그것보다 먼저 전두환, 노태우 등 광주의 학살자들을 갈기갈기 찢어죽이고 싶다. 그들이 권좌에 앉아 있는 한 확실한 진상규명이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
5·18 이후 특별히 생활상의 제약을 받은 것은 없다. 다만 이사를 하면 어디로 갔는가 몰래 확인하는 일은 있다.
1987년 대통령 선거 때 방위병이던 아들 희성이가 김대중씨를 지지하는 발언을 했다가 보안대에 잡혀간 적이 있다. 그때 나는 YWCA 부인회에서 부정투표 조사를 하고 있었다. 희성이가 잡혀가자 나는 거짓으로 노태우를 지지한다는 소문을 내야 했다.
엄마는 5·18 폭도이고 아들은 죄인이라니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현재 나는 부상자동지회에 가입해 활동중이다. 그러나 열심히 활동하고 싶은 마음과 달리 몸이 불편해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조사.정리 주경화) [5.18연구소]
첫댓글 행복한 시간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