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꽃약속
동백꽃은 산다목(山茶木)이라고도 해서 잎이 두꺼우며 윤채가 난다. 잎은 가장자리에 톱니가 있고 타원형인데, 원래 동백나무는 섬에서 자라고, 동쪽으로는 울릉도, 서쪽으로는 옹진 대청도까지 자라고, 육지에서는 충청남도 서천군 서면 마량리의 것이 가장 북쪽이고, 내륙에서는 지리산 화엄사 경내에서 자라는 것과 고창군의 선운사 경내에서 자라는 것들이 가장 북쪽에 위치한 것이라고 사전에는 나와있다.
지금은 기후가 변하고 있으니까, 서울 근교에서도 동백을 기르는 집이 있을지 모르지만, 북쪽에 사는 사람은 일부러 애써 찾아와야 한 번 볼 수 있을까 말까하는 꽃이라서, 문수선원 앞에서 동백꽃을 처음 보았을 때 정말 반가왔었다.
*
올해도 어김없이 선원앞에 동백꽃이 피었다. 이번에 보니 늘 살펴보는 부동산 앞에 말고, 그 아래 수퍼 앞에도 동백나무가 있었다. 햇빛이 그쪽으로 더 많이 갔는지 수퍼앞 동백나무에 꽃이 더 많이 피었다. 이곳이 섬도 아니고, 군락을 이룬 것도 아니지만, 심어놓고 방치한 듯, 제멋대로 까칠하게 커나가는 나무에서도 ‘이맘때면 어김없이 꽃이 피어난다’고 하는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때 되면 피겠다고 하는 꽃약속을 벌써 몇 해째나 잘 지키고 있는 동백나무들이다.
큰스님이 차에서 내리시면서 “뭘 보고 있나?” 하시면서 밝게 웃어주셨다.
*
큰스님이 법공양실을 먼저 들르셨을 때, 지난 달에 자원봉사하시는 보살님과 큰스님이 같이 찍으신 사진을 꺼내놓았는데 ‘잘 나왔다’ 하시면서, 사진을 선물 받으시는 ‘등선생님’ 보살님보다 더 기뻐하셨다.
함께 일하시는 자원봉사자분들이 부럽다고 하셨다.
“그럼 우리도 찍지.” 하고 큰스님이 말씀하셔서 다 같이 단체사진을 찍었다.
*
“경전연구회 공부가 2008년부터 시작해서 벌써 만7년이 되었네.”
큰스님이 선원에 올라와서 염화실지를 보면서 말씀하셨다.
“예 스님 이제 8년째 들어갑니다.” 곁에서 다른 법회에서 만난 스님들과, 가사체 금강경을 오디오로 녹음하고 싶어서 목소리 좋은 비구니 스님을 찾는다는 거사님 소식을 전하시던 학무거사님이 말씀하셨다.
“화엄경 공부한지는 만 오년이 됐고.”
그 사이에 화엄경이라는 말이 귀에 많이 들리게 되었다고 말씀드리자
“요즘 화엄경이 많이 유행하고 있지. 금강경 시대 지나간 지 오래고 법화경도 지나갔고. 법화경 가지고는 성이 안차는가 봐.” 라고 큰스님께서 말씀하셨다.
*
스님들이 속속 들어오셔서 설 지나고 처음 뵙는다고 세배를 올리셨다.
모두 한결같이 “새해에도 건강하십시오.” 라고 인사 올렸다.
이윽고 상강례
법회의 시작
화엄경강설 제12권이 나왔다. 12권은 여래명호품과 사성제품 두 품이 들어있는데 함께 서문을 크게 읽는 것으로써 점안식을 대신하겠다.
서문
당신은 부처님.
부처님인 당신의 이름을 무엇으로 불러야 하겠습니까?
천백억화신 석가모니 부처님, 청정법신 비로자나 부처님, 원만보신 노사나 부처님, 서방정토 아미타 부처님, 무량광 부처님, 무량수 부처님.
우리들이 사는 사천하에서는 “혹은 이름이 비로자나(毘盧遮那)이며, 혹은 이름이 구담씨(瞿曇氏)이며, 혹은 이름이 대사문(大沙門)이며, 혹은 이름이 최승(最勝)이며, 혹은 이름이 도사(導師)이시니라. 이와 같은 이름이 그 수가 십천(十千)이니라.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제각기 다르게 알고 보게 하시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달리 또 무엇이라고 불러야 부처님인 당신의 마음이 흡족하겠습니까. 그래서 처음도 당신은 부처님, 중간도 당신은 부처님, 끝도 당신은 부처님입니다.
우리들의 고통도 그대로 성스러운 진리입니다.
그 고통의 원인도 그대로 성스러운 진리입니다.
그 고통이 사라진 그 자리도 그대로 성스러운 진리입니다.
그 고통이 사라지게 하는 방법도 또한 그대로 성스러운 진리입니다.
모두가 성스러운 진리라는 사실에 눈을 뜨는 것밖에 달리 다른 길은 없습니다. 그 고통이라는 성스러운 진리가 아니었다면 어찌 이 위대한 화엄경에 눈뜰 수 있었겠습니까.
고통이라는 성스러운 진리에 눈을 뜰 때까지 화엄경에 정진합시다. 고통의 소멸이라는 성스러운 진리에 눈을 뜰 때까지 화엄경을 천착합시다.
나무 고집멸도보살마하살
나무 고집멸도보살마하살
나무 고집멸도보살마하살
2014년 8월 1일
신라화엄종찰 금정산 범어사
如天 無比
한 권에 두 품이 들어있어서 서문도 두 가지 내용을 표현하였다.
금세기 최고의 축제 화엄경 강설 시간에, 화엄경 강설 책을 다같이 점안식 할 수 있어서 화엄법회가 더욱 풍성하고 성스럽다. 매달 기다려지는 시간이다.
우리가 다 같이 책을 받은 지도 벌써 만1년이 되어서 그새 열 두권의 책을 점안하였다.
大方廣佛華嚴經 卷第二十
二十一, 十行品 2
10, 第八難得行 願波羅密
오늘 강의는 43쪽 아래 단락(화엄경 제2권,민족사 刊)부터 할 차례다.
보살의 열 가지 행을 나타내는 십행품 중에 여덟 번째 제8난득행을 하고 있다. ‘얻기 어려운 행’이라고 해서 난득행인데 그 중에서도 ‘더욱 수승한 행에 나아가다’라는 뜻의 승진승행을 공부할 차례다.
(10) 昇進勝行
菩薩이 成就如是難得心하야 修菩薩行時에 不說二乘法하고 不說佛法하며 不說世間하고 不說世間法하며 不說衆生하고 不說無衆生하며 不說垢하고 不說淨하나니 何以故오 菩薩이 知一切法이 無染無取며 不轉不退故로 菩薩이 於如是寂滅微妙甚深最勝法中修行時에 亦不生念호대 我現修此行하며 已修此行하며 當修此行이라하야 不着蘊界處와 內世間外世間內外世間하고 所起大願諸波羅蜜과 及一切法에 皆無所着이니라
"보살이 이러한 얻기 어려운 마음을 성취하고 보살행을 닦을 때에 이승(二乘)법도 말하지 않고 부처님 법도 말하지 않고 세간도 말하지 않고 세간법도 말하지 않고 중생도 말하지 않고 중생 없음도 말하지 않고 때 묻은 것도 말하지 않고 깨끗한 것도 말하지 않나니, 무슨 까닭인가. 보살은 일체법이 물들지도 않고 집착도 없고 전변(轉變)하지도 않고 물러가지도 않음을 아는 연고며, 보살이 이렇게 적멸하고 미묘하고 매우 깊고 가장 수승한 법 가운데서 수행할 때에 '내가 현재에 이 행을 닦고 이미 이 행을 닦았고 장차 이 행을 닦으리라'는 생각을 내지 아니하며, 오온(五蘊), 십팔계(十八界), 십이처(十二處)에 집착하지 않고, 안쪽 세간, 바깥 세간, 안팎 세간과 일으킨 큰 소원의 바라밀다와 일체법에도 모두 집착이 없느니라,"
*
승진승행(昇進勝行) : 더 수승한 행에 나아가다
*
보살(菩薩)이 : 보살이
성취여시난득심(成就如是難得心)하야: 이와 같은 얻기 어려운 마음을 성취해서
보살수행시(修菩薩行時)에 : 보살행을 닦을 때에
불설이승법(不說二乘法)하고: 이승법을 설하지 않는다.
불교수행점차는 성문에서부터 연각으로, 또 보살로 나아가는 것으로 표현되는데, 초기의 불교는 이승불교다.
부처님이 열반하시고 400년, 500년이라고 하는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대승불교가 생겨났다. 대승경전인 금강경, 법화경, 화엄경, 유마경은 부처님 열반하신 후 사,오백년 경에 비로소 결집되었다. 그 시기가 대승 불교가 활발하게 전개되던 시기였고, 그 전에는 전부 이승법이었다.
이승법을 가르치는 불교를 흔히 소승불교, 상좌부 불교, 근본불교, 초기 불교라고 한다.
초기불교는 소승불교였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은 처음부터 대승법을 다 아우르고 있었다. 그런데 대다수 수행자들이 이승법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이승법만으로는 부처님의 근본정신을 표현할 수가 없었다.
불교가 업그레이드 되기 위해 생긴 것이 소위 근본불교에 근거를 한 대승불교다. 그래서 법화경이나 유마경 같은 경전은 완전히 대승불교 운동의 선언서 역할을 했다. 그러다보니 이 경전들에는 소승불교인 이승불교를 사정없이 비판하는 내용들이 많이 담겼다.
유마경에는 유마거사가 출가한 스님들을 사정없이 꾸짖는 내용이 나온다고 해서 혹 고지식한 스님들은 ‘거사가 왜 그렇게 부처님의 상수제자들을 사정없이 깔아뭉개느냐’하며 유마경을 싫어하기도 한다.
심지어 현대의 최고 큰스님인 틱낫한 스님도 유마경은 싫어한다고 경전 강의에서 말씀한 적도 있다.
유마경이 대승불교의 선언서로써 소승불교를 강력하게 비판하다 보니 그런 경향을 띌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여기는 그런 차원과는 또 다르지만, 이승법을 설하지 않는다고 나와 있다.
불설불법(不說佛法)하며 :불법도 설하지 않는다.
*
불설세간(不說世間)하고: 세간도 설하지 않고
불설세간법(不說世間法)하며 :세간법도 설하지 아니하며
불설중생(不說衆生)하고: 중생도 말하지 않고
불설무중생(不說無衆生)하며: 중생 없음도 말하지 아니하며
*
불설구(不說垢)하고 : 더러운 세계, 때 묻은 세계도 말하지 아니하고
불설정(不說淨)하나니 :청정한 세계도 말하지 않는다.
십행중에서 난득행은 52위 점차 중에서도 불과 얼마 안 되는 지위인데도 이런 이야기를 한다. 화엄경 답게 시원하다.
차별없는 참사람의 세계, 참마음의 세계, 참나의 세계에는 이승법이니 불법이니, 세간이니 세간법이니, 중생이니 중생이 없다느니, 더럽다거나 깨끗하다고 하는 차별이 없다.
난득심이라는 것은 얻기 어려운 마음인데, 우리들이 갖고 있는 오온의 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온을 초월한 참마음을 말한다.
우리들이 늘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을 ‘나’라고 하면서 집착하고 사는 것은 보통 세속적인 관점에서의 나일 뿐이다.
깨달은 안목에서 볼 때, 그러한 오온을 초월한 진정한 나가 있다. 그것이 참나고 참마음이고 참사람이고 임제스님이 강력하게 주장하는 차별없는 참사람, 무위진인(無位眞人)이다. 난득심의 심(心)은 그것을 말한다.
*
하이고(何以故)오 : 왜냐
보살(菩薩)이 : 보살은
지일체법(知一切法)이 : 일체법이
무염무취(無染無取)며 : 물듦도 없고, 취함도 없음을 알며
부전불퇴고(不轉不退故)로 : 또 굴러감도 없고 물러섬도 없음을 아는 고로.
절대적인 본질의 입장이 그렇다는 것이다.
일체법 하면 두 가지 측면이 있다. 눈으로 보이는 현상의 측면과 눈에 보이지 않는 본질의 측면이다. 여기는 본질의 측면에서 이야기 하고 있다.
*
보살(菩薩)이 : 또 보살이
어여시적멸미묘심심최승법중수행시(於如是寂滅微妙甚深最勝法中修行時)에 :이와같이 그러한 법 가운데서 수행할 때, 그 본질인 참마음, 참사람, 참나의 입장은 적멸이고 미묘고 심심이고 최승이다. 그러한 법 가운데서 수행할 때를 말한다. 사실 그 자리는 수행이라고 할 것도 없다. 그냥 그 자리에서 있으면서 오온을 행사하는 것이다.
중생은 그 자리를 전혀 모른 체 오온만을 가지고 살아가고, 깨달은 사람들은 그 자리에 있으면서 오온으로 살아간다.
부처님은 적멸하고 미묘하고 심심하고 최승한 법 가운데 살아가고 있지만, 부처님 역시 육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오온을 행사하지 않을 수가 없다. 부처님도 오온을 행사하지만 그 뿌리는 항상 참마음 자리, 참사람 자리에 있다. 그것이 오온만 집착하는 우리들과 부처님이 다른 점이다.
*
역불생념(亦不生念)호대 : 또한 거기에서 생각을 내지 아니하되
아현수차행(我現修此行)하며 : 내가 이 행을 현재에 닦으며
이수차행(已修此行)하며 : 이미 이러한 행을 닦았으며, 참마음 자리에 뿌리를 내리고 오온의 행을 행하는 것을 이미 닦았으며
당수차행(當修此行)이라하야 : 이 행을 앞으로 당래에 또한 닦는다.
*
불착온계처(不着蘊界處)와 : 오온 18계 12처와
내세간외세간내외세간(內世間外世間內外世間)하고: 내세간, 외세간, 내외세간에 집착하지 아니하고. 우리는 오온에 전무게를 싣고 오온을 나라고 생각하며 산다. 끊임없이 오온, 18계, 12처, 내세간, 외세간, 내외세간에만 전부 눈을 돌리고 산다.
그러나 깨달음의 자리에서 볼 때 참마음 자리는 그 오온과 관계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온에 집착하지 않는다. 육근 육진과도 관계없는 입장이다.
우리도 그것을 깨닫고, 그것을 알자고 하는 것이 견성이고 성불이다. 견성의 입장에서는 마음껏 오온을 행사해도 허물이 되지 않는다. 그 참마음 자리를 도외시 하고 오온만 행사하면 중생의 삶이다. 참마음 자리를 항상 나의 살림살이의 근본으로 하고 오온을 행사하면 부처님이나 보살이나 도인의 삶이다. 불교의 근간을 간단하게 이야기 하면 결국은 그 내용이다. 도를 통한다, 도를 통해서 어떻게 한다고 하는 것들도 결국은 그 내용이다.
끊임없이 그것을 찾으려고 정진하는 것이다.
그것을 찾는다면, 같은 오온을 가지고 현실을 살아가지만, 그 살아가는 입장이 전혀 다르다.
참마음 자리를 모르고서 오온으로 현실을 살아가는 것은 중생의 삶이고, 참마음 자리를 알고 오온으로 현실을 살아가는 것은 부처님의 삶인 것이다.
*
소기대원제바라밀(所起大願諸波羅蜜)과 : 일으킨 바 중생을 건지기 위한 큰 원력
급일체법(及一切法)에 : 육바라밀, 십바라밀과 일체법에
개무소착(皆無所着)이니라 : 다 집착하는 바가 없다.
보살은 중생을 위해서 큰 원을 세우고, 바라밀을 닦고, 그 외 일체법에 있어서 집착하는 바가 없다.
우리는 곳곳에 집착이다. 집착이 없는 참마음 자리, 참사람 자리를 늘 잊어버리고 등한시 하고 살아간다. 그렇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차별만을 본다. 남자다 여자다 속인이다 출가인다 전부 눈앞에 보이는 차별 현상만 보고 거기에만 팔려서 산다.
그렇게 끄달리며 사는 중생이 안타깝기 때문에 깨달은 사람들은 끊임없이 참사람 운동을 펼치고 참마음, 참나 운동을 한다.
*
근래에 남방 불교가 많이 들어왔다. 남방불교는 소승불교이기 때문에 ‘참사람’이니 ‘참마음’이니 ‘참나’니 하는 말을 아주 싫어한다. ‘그것은 부처님의 학설이 아니다’라고까지 한다. 그러한 남방불교를 공부한 사람들은 심지어 종정스님이 참마음 이야기를 한 번 했다고 신문에 공공연하게 종정스님이 외도라고 써댄다. 소승불교인 근본불교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소견이 그렇게 다르다.
불교에서 스님들의 행을 걱정하고, 선거운동에 대해서 개탄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불교에 대한 소견을 바로 세우는 것이다.
개인적이고 실천적인 각자의 문제는 사실 중생세계에서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잡음들이다. 종정을 누가 하든지 총무원장을 누가하든지 종회원을 누가하든지, 심지어 그런 자리를 차지하려고 부정을 저지르는 일 조차 그렇다.
그런데 불법이 무엇인가에 대해 그 이치를 바로 세우는 것은 정말 중요한 일이다.
교통이 편리하다 보니 남방에 가서 공부하고 돌아온 사람들이 부지기수인데 그 사람들이 면밀하게 객관적으로 검토해 보지도 않고 대승불교를 비판한다.
자기가 힘들게 애써서 공부했다고 하는 정 때문에 그렇게 기를 쓰고 대승불교를 비판하고 특히 선불교를 비판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치로써 따진 것이 아니라 순전히 감정적인 문제다.
그 사람들은 선불교는 아예 불교 취급도 안해서 ‘중국에 있는 어떤 사람들 말을 듣고 그걸 불교라고 한다’라는 표현을 하는 것도 내가 직접 귀로 들었다.
조사스님을 두고 ‘중국에 있는 어떤 사람들’ 이라고 하고,
‘중국에 있는 어떤 사람들이 주장하는 소리를 듣고 그것을 불교라고 한다.’ 라고 선불교를 매도해 버린다.
그것은 순전히 자기가 얼마나 정을 쏟았는가 하는 정(情)의 문제다. 인간은 정가는 대로 살아간다.
대승불교권, 선불교권인 우리나라에서 출가해서 10년 20년 공부했으면서도, 어느날 무슨 인연인지 남방불교에 가서 남방불교를 공부해서 돌아왔다면 순전히 고생고생하면서 공부한 그 정 때문에 소승불교를 주장한다. 여기서는 거저먹기로 쉽게 공부를 했는데, 거기에 가서는 말이 통하나, 음식이 맞나, 기후가 맞나, 죽을 고생을 하면서 공부한 것이다. 생활습관이나 문화가 맞지 않는 곳에서 10년씩, 15년씩 이렇게 고생하면서 공부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비판없이 자기 재산이 되어버린다.
불교교리를 따져보지도 않는다.
우리 도반도 그런 사람들이 있다. 내가 건강할 때 같이 소승불교를 공부한 스님과 인도 성지순례를 했다. 법화경을 설한 영축산 밑에까지 갔는데, 영축산에 올라가면 법화경 이야기를 해야되니까, ‘갔다오는데 두 시간 걸린다’고 거짓말을 하고 아예 올라가지도 않는 스님이 있었다. 내가 직접 올라가보니 올라가는데 25분, 빨리 내려오니 15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올라가서 참배하고 실컷 놀다가 내려와도 한시간이 채 안 걸리는 거리였다.
소승불교를 하는 사람들은 대승불교에 그정도로 배타적이다. 깨놓고 이야기 하자면 그렇게 말한 분은 내 사숙 되는 거해스님이다. 해인사 선방에서 같이 공부도 많이 한 스님인데, 스님은 한국에서 출생해서 한국 선방에 살다가 태국에 가서 공부했고, 미얀마에 가서 공부했고, 미국으로 떠돌아 다니면서 살았다. 나는 이 스님에게 ‘국제미아’라고도 하는데, 실명을 거론해서 미안하기는 하지만은 그런 상황이다. 자기가 정을 쏟으면 이치와 상관없이 감정에 휩쓸리는 것이다.
자기 어머니가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 모든 면에서 100분의 1도 안되지만 자기 어머니라는 것에 듬뿍 점수를 줄 수 밖에 없는 것이 사람이다. 자기 가족이고 자기 어머니이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을 또 우리가 이해해야 하지만, 자기 어머니라고 해서 모든 면에서 다 뛰어난 것은 아닌 것이다. 알지만 자기 어머니라고 하는 그 정을 버릴 수가 없다.
천하 사람들이 다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나쁜 사람이 있어도 그 사람이 자기 자식이라면 용서해주고 싶은 것이 부모의 마음이다. 사람은 그만치 정으로 기운다.
이런 문제는 내가 많이 연구를 하고 하는 소리다.
나는 아함부 경전을 거의 다 읽었는데 그 교리를 따져보면 대승불교에 비해 교리라고 할 것도 없다.
그런데도 대승불교권에서 오래 공부했던 사람이 그렇게 소승불교에 치우치고 도취해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하고 내 나름대로 여러 해 연구한 결과, 정 때문이라고 하는 결과를 얻었다.
선불교나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참마음, 참사람에 대해서 무아를 주장하는 소승불교에서는 기를 쓰고 학을 뗀다. ‘소승불교 공부하는 사람은 참나를 이야기를 하면 경기를 일으킨다’라고 까지 표현하는데 사실이 그렇다.
(11) 無有定法
何以故오 法界中에 無有法名向聲聞乘과 向獨覺乘이며 無有法名向菩薩乘과 向阿耨多羅三藐三菩提며 無有法名向凡夫界며 無有法名向染向淨과 向生死向涅槃이니 何以故오 諸法이 無二며 無不二故니라
"무슨 연고인가. 법계 중에는 어떤 법이 성문승(聲聞乘)에 향한다, 독각승(獨覺乘)에 향한다 이름할 것이 없으며, 어떤 법이 보살승에 향한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향한다 이름할 것이 없으며, 어떤 법이 범부세계에 향한다 할 것이 없으며, 어떤 법이 물드는 데 향한다, 깨끗한 데 향한다, 생사에 향한다, 열반에 향한다 할 것이 없나니, 그 까닭은 모든 법이 둘도 없고 둘이 아님도 없는 연고이니라."
*
무유정법(無有定法):고정된 법이 없다
*
금강경에서 보던 무유정법이 나온다. 고정된 법은 없다는 말이다.
*
하이고(何以故)오 :왜냐
법계중(法界中)에 : 법계 가운데는
무유법명향성문승(無有法名向聲聞乘)과 :무유법명 향성문승과. 성문승과가 있고 향성문승이 있는데, 성문승에 나아가는 것을 향성문승이라고 하고, 성문승에 도달하면 결과 과(果)자를 써서 성문승과라고 한다. 그런데 고정된 법이 없기 때문에 여기에서 과는 이야기할 것이 없다.
성문승에 나아가는 법이나 또 성문승에 도달했다고 하는 법이나, 고정된 법을 이름하여 향성문승이라고 할 수 없으며
향독각승(向獨覺乘)이며:독각승에 향한다고 하는 것도 이름할 수 없다.
*
무유법명향보살승(無有法名向菩薩乘)과 : 보살승에 향하는 고정된 법도 없고
향아뇩다라삼먁삼보리(向阿耨多羅三藐三菩提)며 :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향하는 고정된 법도 없다.
무유법명향범부계(無有法名向凡夫界)며 : 범부계에 향한다고 하는 고정된 이름도 없고
무유법명향염향정(無有法名向染向淨)과 : 염오된 세계를 향한다, 청정한 세계를 향한다, 아니면
향생사향열반(向生死向涅槃)이니: 생사를 향한다, 열반을 향한다, 하는 것이 고정된 법으로써 이름 할 수가 없다. 무유법명이다.
금강경에서 익히 봤던 내용과 똑같다. ‘고정된 무엇이다’ 라고 꼭 찝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성문도 연각도 보살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도 염도 정도 다 그렇다. 사실 염이니 정이니 하는 것도 자기 마음에 들면 정(淨)이고, 자기 마음에 안들면 염(染)이다.
예를 들어서 무슨 자리를 하나놓고 너 댓 사람이 각축을 벌인다고 한다면, 어느 쪽이든지 자기 편에 들면 그 사람은 좋은 사람이고 허물없는 사람이고 괜찮은 사람이고 능력있는 사람이라고 한다. 자기 편에 들지 않는 나머지 너댓사람은 전부 나쁜 사람이고 능력 안되는 사람이라고 본다. 다른 쪽에서도 그렇게 보는 건 마찬가지다.
사람의 감정도 그렇다.
그러나 사람 자체에는 염도 없고, 정도 없고, 성문도 연각도 보살도 없다. 고정된 것은 없다. 생사 열반도 물론 고정된 것이 없다. 이치가 그렇기 때문이다.
*
하이고(何以故)오 : 왜냐, 그 까닭을 이야기 하고 있다.
제법(諸法)이 : 모든 법이
무이(無二)며 : 둘이 없으며
무불이고(無不二故)니라: 둘 아닌 것이 없다. 둘 아닌 것이 없어서 또 온갖 차별 현상을 다 펼친다.
이것은 기가 막힌 소리다. 남자 여자, 있다 없다 하는 그런 상대적인 것은 현상의 이야기고 중생세계의 이야기다. 오온의 나인 입장, 관점에서 보는 소리다.
오온을 초월한 본질의 입장, 참마음의 입장, 참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둘이 없다.
내가 늘 말하는데 법문 듣는다고 하는 것, 이 이야기 듣는데 무슨 조건으로 듣는가? 보는 것도 마찬가지다. 글을 보는 그 당체는 여자의 눈을 가지고 보는가? 남자의 눈을 가지고 보는가? 비구라는 조건인가? 비구니라는 조건인가? 아무 조건이 없다.
내가 지금 보고, 듣고, 화내고, 웃고, 울고 하는 이 당체는 결코 어떤 조건, 어떤 차별이 해당되지 않는 그 무엇이다.
거기에는 아무 조건이 없다. 절대적인 한물건이 있을 뿐이다. 그것이 참사람이다. 그 한물건의 능력은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고 그 모든 것을 초월해 있다. 그것이 바로 참사람이고 참마음이다. 어렵게 생각할 것이 없다.
우리가 참사람, 참마음을 찾고 견성을 하려고 무진 애를 쓰지만 그 견성도 사실은 세수하다가 코만지기 식으로 쉬운 것이다. 참성품을 이보다 더 분명하게, 쉽게 이야기 해줄 수 는 없다. 그야말로 세수하다가 코 닿기 식일 뿐이다. 지금 보고 듣고 울고 웃는 그 당체가 참사람이다. 그 이치를 안다면 견성은 다한 것이다.
그것을 알려주려고 조사스님들은 ‘유일물어차(有一物於此)하니, 여기에 한 물건이 있으니, 무두무미(無頭無尾)다. 꼬리도 없고 머리도 없고 형상도 없고 이름도 없다’라고 하였다.
그 한 물건 밝히는 데는 조사스님들의 선문이 기가 막히게 선명하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참성품이고 참마음이고 참사람이다. 그것 떠나서 뭐가 또 있겠는가? 그것이 들어서 좌지우지 하는데 그것이 어느 자리에 있겠는가, 바로 이 자리에 있다. 그것이 무위고 무불이다.
그렇게 안으로 들어오면 둘이 아닌 하나인데 그것을 펼치기로 하면 또 각양각색, 천차만별 천변만화가 벌어진다.
그 소식, 그 자리, 그 물건이 또한 천변만화 하는 것이다.
이 대목은 그대로 선문이다. 선(禪)과 화엄경의 이치는 궁합이 잘 맞는다. 그래서 선사상과 화엄사상이 궁합이 제일 잘 맞는다고 이야기 한다.
|
첫댓글 _()()()_
_()()()_
_()()()_
_()()()_
우리들의 고통도 그대로 성스러운 진리입니다.
그 고통의 원인도 그대로 성스러운 진리입니다.
그 고통이 사라진 그 자리도 그대로 성스러운 진리입니다.
그 고통이 사라지게 하는 방법도 또한 그대로 성스러운 진리입니다 ... 고맙습니다 _()()()_
참마음 자리를 항상 나의 살림살이의 근본으로 하고
오온을 행사하면 부처님이나 보살이나 도인의 삶....
혜명화 님!! 수고 하셨습니다.._()()()_
그냥 책속에 잠자고있던
漢字하나 하나
팔 딱 팔 딱 활발발!
십백년의 잠에서
깨어납니다.
고맙습니다.
_()()()_
_()()()_
혜명화님 고맙습니다_()__()__()_
나무 대방광불화엄경
_()()()_
혜명화님, 고맙습니다
아껴두었다가 다시 이어서 읽습니다
염화실 월간지로 여러해 전 읽었지만 다시 읽어보니 빠른 속도로 쉽게 읽어지네요
이해가 깊어졌다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즐겁게 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