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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들하우스 출판사 이 희선 사장
▶기자 : 안녕하십니까? 먼저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이희선 : 제가 어디 인터뷰를 한 적도 없고, 할 만한 내용도 없습니다만, 미주현대불교 발행인 김형근 선배님과의 인연을 생각해서 해보기로 했습니다.
▶기자 : 김형근 발행인과는 어떤 인연이 있으신가요?
▷이희선 : 1986년 제가 민중불교운동연합에서 활동할 때 김형근 선배께서 박성배 교수님이 지도법사로 있는 ‘민족불교연구회’ 회원들이 주축이 되어 모국에서 민주화운동을 하는 불교단체에 후원을 하자는 취지로 모금을 해서 귀국하시는 수경 스님을 통해 제게 전달을 해주셨습니다. 오래된 일이라 정확히 금액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당시에 1년간 매월 . 1,000불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그때는 다들 어려울 때라 활동 자금 마련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 돈은 당시 여익구 의장이 1986년 5.3 인천 항쟁으로 수배 중이었기 때문에 고광진 부의장에게 전달했습니다. 덕분에 그 해 봉은사에서 10.27 법난 규탄 대회를 준비해서 치를 수 있었고 활동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봉은사 규탄 대회 땐 경찰과 물리적 충돌이 있었습니다. 전경이 사찰 안까지 들어와서 공방을 벌였죠. 그 와중에 명진 스님이 옥고를 치렀습니다. 나중에 뉴욕에서 모금의 중축적인 역할을 한 사람중의 한 분인 정효정 씨를 한국에서 뵐 기회가 있어서 감사를 드린 적이 있고, 제가 1994년인가 회사 출장으로 뉴욕에 갔을 때 김형근 선배께서 그때 몇몇 분들과 저녁 식사를 할 기회를 만들어주셨을 때도 감사를 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 때 모금을 해주셨던 후원자님들께 이 지면을 통해서 다시 깊이 감사드립니다. 그 후로 저도 김 선배님을 돕고자 미주현대불교를 창간할 때 3호까지 제가 인쇄비만 받고 제작해서 미국으로 보내기도 했습니다.
▶기자 : 그런 인연이 있으셨군요. 정효정 씨는 지금 뉴욕에서 회생한의원 원장을 하고있다고 합니다.
▷이희선 :그렇군요. 후원금은 몇 차례 모금이 더 전달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저는 고광진 선배에게 인계했고 그 이후의 사정은 잘 모릅니다(편집자 주 매달 1,000 달러씩 1년간 후원이 이루어짐)
▶기자 : 의례적인 질문이지만 언제 어떻게 불교와 인연을 맺게 되셨는지요.
▷이희선 : 어려서부터 벌써 돌아가신지 7년이 되었습니다만 아버지께서 새벽에 금강경 독송을 하시는 것을 듣고 자랐습니다. 그래서 저는 수보리란 이름이 아주 친근해서 제 이메일 아이디도 subhuti로 하고 있습니다. 중학교 3학년 때 고등학교 입시를 보고 겨울 방학을 보내고 있는데 서울대 치대생이었던 저희 큰형이 조계사에서 조그만 팸플릿을 가지고 와서 제게 주었습니다. 나중에 그것이 법정 스님의 <서 있는 사람들>이란 책에도 실린 두 가지 수필인 것을 알았습니다만, 그 팸플릿에 실린 글을 읽고, 특히 그 글 중에 ‘참나’라는 단어에 꽂혔습니다. 내가 그동안 알고 있던 나는 진짜가 아니고 불법을 통해서 ‘참나’를 찾아야 한다는 이야기에 마음이 끌렸습니다.
이후로 아버지께서 읽으셨던 신소천 스님이 해설한 <반야심경, 금강경>을 읽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허공을 보는데 먼 허공에서 머릿속으로 작은 터널 같은 길이 뚫리는 것처럼 텅 비면서 아! 반야심경에서 말한 공이란 바로 이런 것을 이르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허공과 같이 ‘참나’인 본래성품은 불생불멸한 것이고 불구부정한 것이고 무시무종한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죠. 그렇다면 눈에 보이는 것은 금강경에서 말하는 것처럼 환상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하고 싶고 되고 싶은 것이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출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인천 보각선원에 가서 신소천 스님께 말씀을 드리니 너무 어려서 안 되고 적어도 고등학교는 마치고 와야 한다고 말씀하시더군요.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도 틈틈이 불서를 보고 불교신문도 보고 지내다 동국대 불교학과에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기자: 그러니까 형님이 주신 작은 팸플릿 하나가 이희선 씨의 진로를 결정하게 된 계기가 되었군요. 그런데 대학생불교연합회(대불련) 활동을 많이 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떤 활동을 하셨는지요.
▷이희선 : 1978년 2학년 초에 제가 좋아했던 불교학과 1년 선배인 김태영(문사수 법사) 형이 대불련 회장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1학년 때 군종법사 시험에 합격이 되었고 출가에 대한 생각을 계속하고 있었는데 그 이전에 폭 넓게 불교신행 활동을 하고 싶었던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선배를 통해서 대불련 활동을 하게 되었는데 결국 3학년 때 연구조사국장을 하게 되었고 4학년 때도 자료집을 편집해 주는 등 종종 후배들의 활동을 돕게 되었습니다.
초기에는 주로 신앙 활동과 초파일 등 각종 행사를 준비하는 일들을 하였는데 79년 3학년 때부터는 불교의 사회참여에 관한 것으로 활동을 넓혔습니다. 호국불교 산중불교에서 민중불교 도심불교로 불교를 변혁해야 한다는 생각을 절실하게 했던 시기였습니다.
▶기자 : 어떤 계기로 사회참여에 관심을 갖게 되었나요?
▷이희선 : 1983년에 교통사고로 고인이 된 노일현이란 친구가 있었습니다. 이 친구가 2학년 때 전자계산과에서 불교학과로 전과를 왔는데 왜 전과를 왔냐고 물어보았더니 그 당시 잡지 <대화> 폐간호에 실렸던 전서암(전재성 박사의 당시 법명)의 <민중불교론>을 읽고 민중불교운동을 해야겠다고 결심을 했다고 그래요. 그래서 저도 그 책을 구해서 읽어보고 감명을 받고 문제의식을 좀 가졌어요. 그리고 하루는 이영희 선생의 <전환시대의 논리>란 책을 주면서 한 번 읽어보라고 그래요. 그래서 읽어보았더니 제가 이제껏 학교에서 배운 것과 전혀 다른 진실이 책 속에 있었습니다. 그 책은 철저히 반공과 박정희 유신논리에 세뇌되어 있던 제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예를 들면 미국의 베트남 전쟁 참전의 동기가 되었던 통킹 만의 미국 군함 폭침 사건이 미국에 의해 조작되었다는 것이죠. 이 사실은 미국 국방성의 기밀문서가 뉴욕타임즈에 흘러들어가 공개되어 세상에 알려진 것이죠. 미행정부와 군부는 통킹 만 사건을 벌여놓고 의회를 속이고 의회로부터 비상대권을 받아 하노이에 대폭격을 감행하면서 본격적으로 베트남 전쟁을 벌입니다. 이 때 이 전쟁을 반대한 상원의원은 단 두 사람뿐이었습니다. 요즘으로 보면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가 있다고 여론 조작을 하고 이라크를 침공한 것과 같은 것이죠. 예전이나 지금이나 전쟁의 배후에는 군산복합체의 이익과 국가이익을 동일시하는 자본과 권력이 배후에 있는 것이겠죠. 아무튼 그 당시에는 미국은 정의의 나라고 공산국가는 모조리 지구상에서 없어져야 한다고 고등학교 때까지 그렇게 배웠던 시대였으니까 그 책은 제 인식의 바탕을 뿌리째 흔들어 놓은 것이죠. 이후로 역사, 한국근대사, 사회학, 경제학 등 많은 책을 읽으면서 당시 호국불교를 내세우고 있던 한국불교에 대해 비판적 의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요약해 말하면 독재 권력과 독점 대기업이 결탁하여 민중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사회에서 개인적으로 마음을 깨달아 해탈하는 것은 소승적인 삶이고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해결해서 억압이 없고 자유롭고 정의로운 세상에서 더 많은 사람이 해탈과 열반의 길로 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대승불교고 그 주체가 보살이라고 생각한 것이죠. 이 시기에 김지형(동국대 법인사무처 부장)과 저와 노일현이 불교학과 삼총사로 불리었습니다. 셋이 동국대학교 불교학생회와 대불련에서 활동했지요.
▶기자 : 민중불교의 이념을 잠깐 말씀해주셨는데 좀 더 핵심 사상을 말씀해 주시겠어요?
▷이희선 : 핵심이랄 것까지야 없죠. 법화경 데바닷타 품에 보면 “보살이 중생을 위해 피를 흘리지 않은 국토는 겨자씨만 한 곳도 없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연등불께 수기를 받은 후 삼아승지겁도 넘게 자신을 헌신하신 이야기가 전생담의 주제이지 않습니까? 불자가 아니더라도 사회정의와 얼굴도 모르는 타인의 권리와 행복을 위해 헌신하는 많은 사람들이 다 보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람이 가장 행복할 때가 남을 위해 베풀 때라는 말이 있듯이 보시에서 시작되는 육바라밀이 그대로 사회적 실천의 원리가 된다고 보았고 사제 팔정도 역시 사회적 고를 해결하는 방식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치심은 자비를 근간으로 합니다. 남을 나와 같이 생각하는 대자대비의 마음이야말로 사회적 모순, 사회적 고를 해결하는 원리 그대로라고 생각한 것이죠.
▶기자 : 그러면 그런 인식을 갖고 어떻게 대불련 활동을 하셨나요?
▷이희선 : 글쎄요, 여기서 오래된 대불련 활동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가 필요한지 모르겠습니다만. 대불련의 사회참여 활동은 이미 1976년 최연 선배가 회장이었을 때 그 이전 회장이었던 전재성 박사(빠리성전협회 한국지회장)를 중심으로 민중불교론을 주창한 것으로 시작됩니다. 그런데 그 맥이 두 해 끊어졌고 저희가 다시 주창하려다 결국 실패했습니다. 1979년 송광사 부근 초등학교에서 열린 대불련 하계 수련회에서 ‘사제(四諦)의 현대적 재해석’이란 주제로 대회 준비를 하고 강사로 법정 스님, 소설가 황석영, 문학평론가 임헌영, 백기완 선생, 전재성 선배 등을 모셨는데 보수적인 선배들과 정보기관의 압력으로 대회 도중에 제가 해임되면서 백기완 선생, 전재성 선배의 강의를 진행 못하고 동국대 불교학생회와 서울대 불교학생회가 대회를 보이콧하고 나오고 맙니다. 저희는 이후 조성열(국제정치학 박사), 안동일(소설가), 신상진(전 한나라당 국회의원), 김정우(경남대 교수), 신성규(원담 스님) 등과 칠보사대학생회를 만들어 사원화운동을 했고 대불련은 1979년, 1980년의 우여곡절을 거쳐 1981년부터 다시 민중불교운동을 하게 됩니다.
자세한 이야기를 하자면 너무 깁니다. 그 때 함께 했던 친구들과 공유한 생각들을 좀 더 말씀드릴 필요는 있을 것 같습니다. 우선 한국불교는 그 당시 일제강점기에 만들었던 사찰령을 말만 바꾼 불교재산관리법 아래에서 인사권과 재산권에 대해 정부의 간섭과 통제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한국불교는 호국불교라는 미명 아래 권력에 아부하고 눈치를 보아왔습니다. 박정희 정권 때 유신체제를 만들고 영구집권을 꿈꾸며 정치 자금을 대는 대기업에 온갖 특혜를 주면서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 주장을 억누르고 독재에 반대하는 야당과 여론을 탄압하고 있을 때 천주교와 개신교에서는 민주주의를 주장했지만 불교는 침묵하고 있었습니다. 20대 초반에 불과했고 소수였지만 대학생불자들은 부처님의 참 뜻은 호국불교에 있지 않고 위정자의 잘못된 행위에 대해서는 바르게 지적하고 억압 받는 사람들 편에 서서 정의를 세우는 파사현정(破邪顯正)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산중에서 사회 현실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과 진리가 둘이 아니라는 진속일여(眞俗一如)의 정신으로 사회현실에 맞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기자 : 대불련 활동 이후엔 어떤 불교활동을 하셨나요?
▷이희선 : 짧게 요약해서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1980년 4학년 때 앞서 말씀드린 칠보사대학생회를 창립하고 초대회장을 맡았습니다. 그런데 창립이 10월 4일인데 10월 24일 저와 노일현, 김지형이 5.18 광주민주화운동 살인진압과 전두환 집권을 반대하는 학내 시위를 하다 21개월간 감옥 생활을 합니다. 1982년 7월 말에 감옥에서 나와 대불련, 불교사회문화연구원 등에서 일했고 여익구 선배, 서동석 선배, 최연 선배, 최석호 법사(법륜 스님), 성연 스님, 현기 스님, 현담 스님, 고인이 되신 목우 스님, 벽우 스님, 조성열, 이영근, 등등과 1985년 5월 4일 민중불교운동연합을 창립했습니다. 민불련 창설은 1984년 겨울 대불련 법주사 겨울 수련회에서 제가 여익구 선배께 제안을 한 이후로 진행했습니다. 1986년엔 또 <월간 법회> 편집장을 맡으면서 불교재산관리법 폐지에 관한 연재를 연기영 교수(동국대 법대 교수)의 글로 시작합니다. 그 일로 말미암아 그해 월간 법회 발행인이었던 성문 스님(현 동화사 주지), 원혜 스님(현 마곡사 주지), 현응 스님(현 조계종 교육원장) 등이 주도하여 9월 7일 해인사에서 산문을 닫고 불교재산관리법 폐지를 위한 전국승려대회를 열어 결국 성취하게 됩니다.
▶기자 : 그런 대학 생활과 민불련 등의 청년 시절 신행활동이 삶에 어떤 도움이 되었는지요?
▷이희선 : 여러 가지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제가 대학 이후로 불교활동을 한 것은 1987년까지에 불과 합니다. 1987년 제가 편집장을 했던 <월간법회>가 운영이 어려워져 그만두고 작은 편집대행사무실을 운영했습니다. 이 때 미주현대불교 창간을 돕게 되었죠. 그 후로 1990년에 회사에 취직하고 9년 정도 회사원 생활을 하다가 <선재> 출판사를 시작했습니다. 불교책만을 냈는데 운영이 안돼서 다시 전에 다니던 회사에 재취업해서 5년 다니다 다시 <미들하우스>란 출판사를 내서 지금껏 하고 있습니다. 제 삶의 두 축은 불교와 사회입니다. 청년 시절의 불교활동을 생각하면 아주 행복했던 시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시절의 활동으로 스님들도 많이 사회참여에 눈을 떠서 불교계가 민주화를 하는데 일정부분 기여도 했고 오늘날 사회복지나 사회활동에 많은 진보와 성장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그때의 정신을 놓지 않으려고 나름 애써왔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제가 경기도 부천에서 사는데 90년에 <부천시민연합> 이란 NGO 단체 창립 멤버로 지금까지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지난 2년간은 공동대표로 활동했습니다. 특별히 불교나 종교와는 관계가 없습니다만 불교계의 한사람으로서 NGO 활동을 함께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지역에서 지자체의 행정감시, 환경생태운동, 저소득층 아이들의 교육, 노동자와 중소 상공인, 시민 권익운동 등 많은 활동을 함께 하고 있습니다. 회원들에게 불교 강의를 한 적도 있습니다. 부천에서는 석왕사가 지역 공단의 노동자나 외국인 노동자 권익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주지 영담 스님은 부천지역의 멘토이시죠.
▶기자 : 대학생 불자들에게 선배로서 조언을 하나 해주시지요.
▷이희선 : 요즘 대학생들은 저희 때보다 좋은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그런데 97년 외환위기 이후 한국의 경우, 지금은 2007년 뉴욕발 금융위기 때문에 미국에서도 취직이 더 어려워지면서 대부분 취직을 위한 스펙을 쌓고 취직 시험 준비하는 데 몰두하고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현재의 위기의 근본원인은 신자유주의에 있다고 봅니다. 모든 진리는 시장의 경쟁을 통해 검증된다. 그러니까 시장 경쟁에서 살아남는 것만이 진리라는 것이 신자유주의의 핵심 사상입니다. 지독한 승자독식 사상입니다. 시장은 기본적으로 이윤추구, 탐욕이 서로 부딪치는 곳입니다. 부처님은 탐욕을 근본무명으로서 극복해야 할 것으로 보았습니다. 모든 존재는 서로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서로 존중하고 도와야 한다, 세상은 나와 나 아닌 것의 배타적 관계로 보지 말아라. 분리된 것으로서의 나의 존재를 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부처님은 세상을 경쟁의 관계로 보는 것은 무명이고 연대하고 협동하는 것이 바른 견해라고 하십니다. 대학생 불자들이 먼저 바른 견해를 가져야 하고 세상을 바르게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사회를 만들려면 선거에 꼭 참여하고 올바른 견해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정치를 하게 해야 합니다.
▶기자 : 그동안 사회활동을 하면서 개인적 신행활동은 어떻게 해 오셨는지요?
▷이희선 : 초기에는 기수련이 수행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해서 수년간 했습니다. 임독맥을 돌리는 소주천 수련 정도였습니다. 기 수련을 하다가 쿤달리니 체험도 했지요. 삼십대 중반의 일입니다. 일요일 아침부터 거실에 앉아서 간단한 체조를 하고서 반가부좌를 하고 호흡을 조절하면서 기를 돌리고 있는데 갑자기 꼬리뼈 부분에서 아주 뜨겁고 밧줄처럼 굵은 기운이 뱀이 똬리를 풀듯이 척추로 올라오는 겁니다. 그리고 기운이 꼬이면서 계속 척추로 올라오다가 경추 그러니까 척추가 끝나고 경추가 시작되는 부근에서 멈추는 거예요. 그래서 지식을 계속했는데 온 몸에서 땀이 뻘뻘 나고 목과 얼굴이 경직이 돼서 장애가 오는 겁니다. 그래도 지식을 계속 길게 해나갔지요. 한두 시간 정도 그렇게 하다 보니 갑자기 시원해지면서 마치 코브라가 머리에 앉는 것 같은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그 기운이 백회를 뚫고 나가야 한다고 하는데 그렇게 안 되고 만트라만 머릿속에서 울렸어요. 마치 뱀이 소리를 내는 것 같은 소리였지요. 짧게 말씀드렸지만 여덟 시간 정도 진행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 체험이 있고 나서 양손과 발바닥 중앙이 도드라지게 솟아올랐고 기운이 숙숙 나왔습니다. 사람들에게 손바닥을 갖다 대면 금세 뜨겁다고 피할 정도였습니다만 제가 바랐던 것은 진리에 눈을 뜨는 것이지 신체적 변화가 아니었기 때문에 환자를 치료한다거나 기 현상에 관심을 계속 갖지 않았습니다.
▶기자 : 불교 수행은 하시지 않았나요?
▷이희선 : 간화선 수행과 위빠사나 수행을 두루 하고 싶었는데 회사를 다니면서는 못했습니다. 제가 뭐든 열심히 하는 편이라 회사일도 워커홀릭 정도였거든요. 그런데 회사를 그만두고 개인 사업을 하면서는 시간을 낼 수 있어서 2008년 겨울에 서울 가회동에 있는 안국선원에서 수불 스님 지도로 일주일간 철야정진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화두 덩어리가 눈앞에서 산산조각 나는 체험을 했는데 좀 미진해서 한 달 뒤에 부산에 내려가서 일주일 철야정진을 다시 했습니다. 이 때에는 여러 가지 삼매체험을 했습니다. 그리고 작년 7월에 남양주 봉인사에서 아눌라 스님의 지도로 일주일간 위빠사나 수행을 했습니다. 이때 약간의 체험이 있었습니다.
▶기자 :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수행 체험은 시간의 길이와 꼭 비례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간화선 체험과 위빠사나 체험의 다른 점이 있다면 무엇이며 같은 점은 무엇인지요.
▷이희선 : 개인적인 성향이나 전생의 업에 따라 각자에게 좀 더 잘 맞는 것이 있지 않을까 먼저 생각되고요, 저는 간화선에서는 무념, 무심을 체험했습니다. 생각이 사라지고 다시 나지 않는 것이죠. 대상이 마음에 거울처럼 비쳐지기만 하고 마음이 그 대상을 해석하지 않는 것이죠. 그런데 단지 이틀 정도에 그쳤습니다. 하지만 선사들께서 말씀하신 무념 무심이 수행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위빠사나를 하면서도 작은 체험을 했습니다. 부처님은 “일체는 오온이다. 십이처다. 십팔계다.” 라고 말씀하셨잖아요. 이 말씀은 삼라만상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식주체의 인식행위와 의존적으로 상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란 말씀이잖아요. 요즘 물리학계에서도 현상과 관찰자는 분리될 수 없다,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죠. 이것이 연기라는 것이죠.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 식(識)이 있으므로 경(境: 대상)이 있다. 그렇다면 식이 사라지면 어떻게 될까요? 저는 그것이 바로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공이라고 봅니다. 그러니까 만법유식이죠. 우리가 보고 듣는 모든 것은 식의 현상이고 실체는 공(空)이지요.
일주일간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위빠사나를 통해 집중과 관찰이 깊어지면서 어느 순간 나와 대상이 완전히 사라지고 텅 빈 상태가 되더라고요. 그러면서 벅찬 기쁨이 솟아올라요.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온 존재가 꽉차버리는 그런, 텅 빈 충만이란 말처럼 그렇게 오더라고요.
▶기자 : 그 이후로 지금은 어떠신가요?
▷이희선 : 하하, 모든 것이 사라졌었는데 겨우 한 시간도 채 안 되는 시간이었고요. 결론적으론 아직 제 에고는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에고는 잡초같이 생명력이 강한 것 같습니다. 갈 길이 멀지요. 그이후로 많은 견해가 밀려왔습니다. 제가 견해를 많이 원해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견해에서 벗어나 무심이 되지 못하고 번뇌만 많이 자란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제 짧은 경험만으로도 간화선과 위빠사나가 서로 도움이 된다는 것을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아직까지 지도적 위치에 있는 간화선사와 위빠사나 선사들은 서로를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진정한 이해가 없는 것 같습니다. 물론 최근에는 간화선을 하던 스님, 수행자들이 남방으로 가서 몇 년씩 위빠사나 혹은 사마타를 공부하시고 성취해서 한국에서 선원을 열고 가르치시는 분들이 여러분 계시고 성과도 좋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도 그분들 지도를 받아 공부를 계속할 생각입니다.
▶기자 : 재가자로써 수행이 일상생활을 하는데 어떤 도움이 되는지요.
▷이희선 : 글쎄요, 수행을 하다 보면 물질적 욕심이 적어지고 뭐가 되어야 한다는 집착이 적어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니까 일상생활에서는 소욕지족(少慾知足)하는 것이 공부에 가까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 같은 경우는 수행에 전념하고 싶은 생각이 커져서 여건이 되면 전문수행을 몇 년 집중해서 하고 싶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본래 빈 성품이라 취할 것도 없고 버릴 것도 없는 담연(淡然)한 중도에 서야 한다, 진속일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은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닌 것이죠. 수행을 계속해서 공성(空性)과 완전한 계합을 이루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기자 : 질문 ; 수행은 계가 탄탄한 바탕이 되어야 정이 확립되고 그 선정에서 바른 지혜가 나타납니다. 계, 최소한의 5계를 지킨다는 것의 중요성을 재가 수행자로써 어떻게 생각하며 지키는지요.
▷이희선 : 지난 7월 위빠사나 공부 이후로 육식을 끊었습니다. 그냥 육식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현재 완전 채식은 아니고 유제품은 마시고 있는데 언젠가는 완전 채식을 할 생각입니다. 술은 거의 마시지 않고 지내왔습니다. 모임에서 한 모금 정도 마시고 말지요. 저는 불교도의 모임에서 술과 고기가 사라졌으면 좋겠습니다. 자비를 근본으로 하고 불살생을 근본계율로 하는 불교에서 채식을 하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남방에서는 초기경전에 고기를 금하지 않아서 공양하는 대로 고기를 먹는다고 하는데 대승경전에서는 자비종자가 끊어진다고 해서 육식을 금하잖아요. 중국이나 대만의 경우 스님들은 철저하게 육식을 금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술이야 말할 것도 없지요.
▶기자 : 마지막으로 지금 미들하우스 출판사를 하고 계신데 어떤 책을 내시고 있는 지 간단히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이희선 : 앞서 말씀드린 선재출판사를 3년 정도 하면서 불교책만 내다 망한 적이 있어요(웃음). 그래서 이번엔 좀 다른 분야 책도 함께 내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정작 불교책은 아직 두 권 밖에 내지 못했습니다. 정찬주 씨가 쓴 <뜰 앞의 잣나무>, <행복한 선여행> 두 권입니다. 두 권은 시리즈로 중국선의 발자취를 찾은 여행깁니다. 앞의 책은 달마, 혜가, 승찬, 도신, 홍인, 혜능, 조주, 임제, 운문 등 선종 초기 시대의 조사께서 주석했던 절을 찾아다니면서 선사의 행적과 핵심 사상을 조명합니다. 뒤의 책은 남악, 마조, 석두, 위산, 석상, 앙산, 백장, 황벽, 동산, 양기, 운거 등 강서성과 호남성을 중심으로 당송 시대 선의 황금시대를 다룹니다. 두 번째 여행은 안국선원 수불 원장스님을 모시고 다니면서 들은 법문이 담겨 있습니다. 저 자신 선사 여행을 함께 하면서 선사들의 행적에 많은 감동을 받았고 그 경험이 공부에 많이 도움이 된 것 같습니다.
▶기자 : 오랜 시간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이희선 : 아닙니다. 조금이라도 미주현대불교 독자님께 도움이 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배워본 적도 없는데 요즘 문득 시심에 잠길 때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졸작 선시 두 수를 독자님들께 올리고 싶습니다.
馬祖西江 마조 서강
馬祖一撚成話頭 마조께서 한번 비트니 화두가 되었네
若曰六塵是心影 육진경계가 모두 마음의 그림자라고 일렀더라면
不與萬法誰人得 누가 만법과 짝하지 않는 이치를 알았을까
龐蘊及第師之功 방거사가 급제한 것은 선사의 공덕이네
日面佛月面佛 일면불월면불
一日生佛卽是佛 하루를 살아도 부처요
萬年生佛亦是然 만년을 살아도 부처인걸
何以苦惱侍者耶 시자야 무슨 까닭에 걱정이 많으냐
生死旣忘困來眠 생사는 이미 잊은 일 졸려서 자야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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