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 사진 소동
신형준
조선일보 문화부 문화재팀장 | |
지난 25일 오후 각 언론사의
문화재 담당기자들은 한바탕
취재 전쟁을 치렀다.
이날 오전, 한 언론사에서
LA발(發)로 ‘명성황후 추정 사진이 발견됐다’고 보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사진은 1997년 삼성언론재단에서 간행한 ‘서양인이 본 코레아’에 ‘고종시대 궁녀 혹은 여염집 여인’으로 이미 소개된 사진이었다.
또 명지대 LG연암문고에도 이 사진과 동일한 사진이 게재된 19세기 말책과 잡지가 있으며 여기에도 ‘궁녀’ 등으로 소개돼 있다.
때문에 본지는 26일자 각 일간지에
‘대문짝만하게’ 실린 이 기사를 보도하지 않았다.
그 대신 이 같은 취재 전말을 26일 본지 인터넷 홈페이지(www.chosun.com)에 자세하게 실었다.
임오군란(1882년) 때 홍계훈이라는 군인 등에 업혀
가까스로 궁을 빠져나가 목숨을 건진 명성황후.
그가 생전에 사진 찍기를 그렇게도 피했던 이유는
신변 안전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근대사 전문가들은 말한다.
그래서 1895년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 낭인들도
어느 시신이 명성황후인지 몰랐다.
한영우 서울대 명예교수에 따르면 일본 낭인들은
시신 앞에서 통곡하는 세자(훗날 순종)를 보고서야
‘여우 사냥’이 끝났음을 알게 됐다고 한다.
이처럼 사진을 남기지 않았기에
근대사와 복식사(服飾史) 분야의 내로라하는
학자들은 오래 전부터 사진 한 장이 불쑥 나오면
“명성황후다” “아니다” 논쟁을 했다.
그러나 이번 건은 아무리 생각해도 경우가 다른 것 같다.
19세기 말 고서(古書)에 소개된 것은
제대로 공개가 안 됐으니 그렇다고 치자.
10년 전 국내에서 출판된 책에 이미 실렸는데도
어떻게 ‘발견’이라고 보도될 수 있을까?
본지가 취재한 전문가 대부분도
이 사진을 처음 보았다고 했다.
본지 역시 이은주 안동대 박물관장이
‘서양인이 본 코레아’를 알려주지 않았다면
‘명성황후 추정 사진 발견, 논란 중’이라고 썼을 것이다.
누가 봐도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원로 복식사가조차 “사진 속 인물의 화장법은
먼 산을 그리듯 눈썹을 칠하는 원산대(遠山黛)로서
각종 문헌에 기록된 명성황후의 이미지와 일치한다”라고 말했으니까….
하지만 ‘한여름 밤의 소동’으로 끝난
이번 사태는 전문가들 수준 탓으로만
돌릴 일은 아닌 것 같다.
전문가라고 모든 책과 사진을 다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양한 역사 정보들을 모아서
데이터베이스로 만들었다면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많은 옛 사진과 자료들이
여전히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중앙도서관,
서울대박물관, 한국학중앙연구원,
개인 소장자 등에게 분산돼 있다.
또 하나 지적할 것은
언론의 속성을 이용하는 ‘판매상’들의 행태다.
언론에 보도되면 물건값은 엄청나게 뛴다.
그래서 슬그머니 언론에 자료를 흘리는 것이다.
최근 돈이 될 만한 한국 관련 자료를 갖고
언론 플레이를 하는 외국인들이
심심치 않게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매일 ‘승부’를 겨루는 언론은
자료를 찬찬히 검토할 시간이 부족하다.
그래서 이번과 같은 오보(誤報)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번에 “명성황후 추정 사진을 소장했다”고
주장한 영국인은 사진의 학술적 가치를
정당하게 평가받고 싶었다면
LA가 아니라 한국에서, 언론이 아닌
전문가들에게 우선 자료를 보여줬어야 했다.
물론 “시간에 쫓긴다”는 이유가 부정확하거나
잘못된 언론 보도에 면죄부를 주는 것은 아니지만….
입력 : 2006.07.26 18:57 22' / 수정 : 2006.07.27 06:5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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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사진이 아님에도 명성황후 추정 사진이라고
잘 못 보도 되었던 사진과 보도 내용)
명성황후로 추정되는 사진이 발견돼 화제가 되고 있다. 영국인 테리 베닛 씨가 25일 공개한 한 독일 사진 작가의 사진첩에서 발견된 한 장의 사진에는 ‘시해된 왕비’라는 설명이 붙여져 있다.
학계에서는 사진 속 여성의 모습이 차가운 눈빛에 예지력을 갖춘 것으로 보아, 기록과 일치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사진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고종과 순종, 명성황후로 추정되는 여성, 대원군, 대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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