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 년 만에 다시 가게 된 인문학 여행. 2010년 처음에는 ‘길 위의 인문학’이라는 주제로 몇 년간 진행하다가 중간에 ‘인문열차 삶을 달리다’로 바뀌면서 KTX열차를 타고 하던 것이 2020년 초부터 코로나가 확산되면서 중단이 되었다가 2년 반 만에 다시 재개하면서 ‘나의 책, 나의 인문기행’으로 주제가 바뀌고 실제 대면 여행을 하게 되어 첫 번째 강화도를 갔는데 기회를 놓치고 어느 날 우연히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알게 되어 서둘러 신청을 하였지만 참가 인원을 달랑 20명만 선정한다고 하여 그럼 나에게 기회가 올까하는 마음으로 신청을 했는데 143명이 지원하여 7대1의 경쟁이 된 것이다. 그래서 전혀 기대를 하지 않고 편안한 마음으로 되면 좋고 안 되면 어쩔 수 없다는 생각으로 며칠을 보내며 발표를 기다리는데 선정이 되었다는 말은 없고 그냥 여행안내 문자가 온 것이 아닌가. 결과를 모르는 상황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낯선 전화번호가 뜨는 것을 보고 받을까 말까 하다가 그냥 한번 받아보자 하고 받으니 상냥한 아가씨 목소리로 여행에 관한 설명을 하기에 결과가 어떻게 된 거냐고 물으니 된 사람한테만 문자를 보낸 것이라고 하여 너무 반가운 마음에 고맙다고 하고 잠시 여행에 관한 안내를 받고 그 시간부터 여행 준비를 하기 시작하였다. 수십 번을 다녔지만 여행은 갈 때마다 설레고 기대되고 궁금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과 더구나 내 고향 삼천포대교를 지나간다니 너무 반가워서 며칠을 즐겁게 보내고 전날까지 만반의 준비를 다 해놓았다가 7월22일 아침 이른 시간인 5시에 일어나서 세수만 하고 5시20분경에 바로 집을 나서서 사당역에서 2호선 전철을 타고 서초역에 내려서 잠시 걸어서 도서관에 도착하니 6시30분이다. 미리 나와서 기다리던 진행 팀의 아가씨가 ‘너무 일찍 오셨네요’ 하기에 7시까지 아니냐고 하니 그렇다고 하여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우리 생각에 30분 정도는 미리 오는 것이 일반인데 다들 한참을 기다려서 7시가 다되어 모이기 시작하고 자가 진단키트로 코로나 검사를 하고 발열 체크를 한 다음 7시30분에 출발을 하였다.
독일마을
이른 시간이라서 시원하게 달리는 기분도 좋고 날씨도 구름이 약간 끼어서 뜨겁지도 않아서 여행하기에 안성맞춤인 것 같았다. 안성 휴게소에서 김밥 한 줄로 아침을 먹는데 팍팍한 아침김밥, 먹기가 힘들어서 절반 정도만 먹고 호두과자를 사서 몇 개로 보충을 하고 다시 출발하여 대전을 지나자마자 대진 고속도로로 접어드니 도로는 더욱 한산하여 거침없이 달려 덕유산 휴게소에 들려서 볼 일을 보고 다시 출발을 하였다. 고향을 가던 옛날 생각이 난다. 서울에서 고속버스를 타면 진주로 가거나 부산으로 가서 다시 버스나 배를 타야하고 기차를 타면 역시 진주역에서 버스를 타고 삼천포 시내에서 걸어서 집에까지 가야 하는데 어느 해인가 차 시간이 제대로 맞지가 않아서 통금이 있던 시절 바로 집으로 못가고 삼천포 시내 여관에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날 고향집에 도착하던 일과 대진 고속도로가 다 개통이 되기 전에서 함양까지 고속도로로 와서 거기서부터 국도로 가던 생각, 가는 길에 지리산 산세를 보면서 청정지역을 가는 기분도 좋았고 경호강에서 래프팅하는 젊은이들의 활기찬 모습을 보는 것으로도 충전이 되고 차를 몰고 가는 여행객에게도 저절로 힐링이 되는 것 같아서 즐겁게 고향을 가던 생각이 났다.
설리 스카이 워크
남해안 고속도롤 만나서 바로 삼천포 쪽으로 나가서 전에는 없던 새길 대포에서 실안 해변을 끼고 다도해를 보며 달리는 기분은 정말로 멋진 풍광이다. 2003년 개통한 길이 3,4km의 삼천포 대교를 지나는데 머리 위로는 케이블카가 지나가고 아래로는 죽방렴이 군데군데 보이고 옹기종기 섬들의 모양과 아기자기한 바다의 모습이 너무 친근하고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바다라기보다는 호수 같은 바다다.
창선 대교를 지나서 남해로 들어서자마자 동천식당에서 출출하던 차에 불낙전골로 푸짐한 점심 식사를 하고 2003년 완공한 독일마을로 갔다. 깨끗하게 꾸며진 붉은 지붕이 이국적인 풍경을 느끼게 하고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의 눈물과 한숨을 느끼며 가난한 대한민국, 간호사와 광부를 보내는 조건으로 독일로부터 1억5천 마르크의 차관을 들려오게 된 사연을 들으니 가슴이 뭉클하였다. 대부분 본국으로 돌아왔지만 혹자는 현지에 눌러 살기도 하고 현지인과 결혼을 하여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고국에 대한 향수는 잊을 수 없어서 정부에 건의하여 일부 지원을 받고 자신들이 투자를 하여 만든 마을이 독일 마을인데 지금은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오는 명소가 되었다.
설리 전망대 스카이 워크는 상주 해수욕장에서 남쪽으로 바라보이는 산자락에 스카이 워크를 만들어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서 잠시 다리 위를 거닐며 유리바닥을 보니 아찔하고 멀리 바다를 보는 느낌은 묵은 체증을 확 풀어주는 것 같아서 잠시지만 기분 좋은 시간이었다.
상주해수욕장! 나에게는 참으로 많은 추억이 새겨진 잊을 수 없는 곳이다. 대학 시절 처음으로 캠핑을 하게 된 곳이 바로 상주해수욕장인데 그때만 해도 관광객이라는 말이 생소하고 여행을 다니는 사람이 많지 않은 시절이라 모래사장에 텐트를 쳤는데 넓고 고운 모래사장에 우리 친구 세 명밖에는 사람들이 없으니 너무 심심하고 재미가 없어서 해수욕복 차림으로 금산 등산을 하고 산 정상에서 수영복 차림으로 사진을 찍은 것을 KBS 황금연못이라는 방송에서 소개를 한 적도 있고 또 고등학교 때 무전여행 중 금산에 올라가서 산속의 여관에서 하룻밤을 묵던 기억이 새삼스럽게 다가오는 것이다.
길이 1,5km에 뒤에는 울창한 소나무 숲이 운치를 더하고 56년 전에 걷던 비단결처럼 고운 모래사장을 걸으니 그때 그 시절이 생각나서 사진을 찍어서 같이 캠핑하던 친구에게 카톡으로 보내며 잠시 쉬었다가 벽련항이라는 작은 항구에서 바로 눈앞에 건너다보이는 노도를 보면서 숙종 때 장희빈의 왕후 책봉을 반대하다가 남해도 중에서도 작은 섬 노도로 유배되어 채 3년이 못되어 56세의 한창 나이에 생을 마감한 김만중의 한 많은 인생역정을 그리며 붉게 물드는 서녘 하늘을 바라보며 치열한 당파의 희생물이 된 김만중을 그려보았다.
오랜 역사 속에 전국으로 유배를 갔지만 제주도 다음으로 남해도가 숫자적으로 제일 많은 사람들이 유배를 갔다는 사실을 문학관의 전시물에서 알 수가 있었다.
보리암
풍운정에서 갈치조림과 생선구이 정식으로 푸짐한 저녁 식사를 하고 버스기사가 숙소를 찾아 가는 길을 놓치는 바람에 오던 길을 되돌아서 겨우 길을 찾았지만 길이 좁고 또 길가에 주차해놓은 차들 때문에 힘겹게 찾아간 남해 시즌 관광호텔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시설이었다. 이름은 그럴싸한 호텔인데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니 신발 벗는 곳부터가 겨우 두어 컬레 신발을 벗으면 꽉 찰 것 같고 바로 옆에 싱크대는 조심스럽게 서야 부엌일을 할 수 있을 정도요 방은 없고 홀 하나가 전부인데 서너 평은 되는지 두 사람이 누우면 딱 맞을 정도의 참으로 소박한 내부였다. 그러나 다행으로 나는 룸메이트가 갑자기 여행을 못 오게 되는 바람에 혼자서 자유롭게 방을 쓸 수 있게 되어 너무나 편하고 좋았다. 여행 다니던 중 처음으로 이런 일도 생긴 것이다.
다음 날은 근처 농가집어부림 식당에서 해물탕 정식으로 아침을 먹는데 주먹만한 튼실한 삼치구이와 방아 잎을 넣은 부침개가 입맛을 확 돋우어서 너무 맛있게 식사를 하였고 방아부침개는 경남 서부지방 음식의 특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 옛날 어릴 적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음식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삼천포와 남해의 유명한 문화재로 지정된 죽방렴 관람을 하였다. 오랜 역사를 간직한 아주 원시적이지만 살아있는 멸치를 그대로 잡아 바로 뜨거운 물에 삶아서 말리는 죽방렴 멸치는 고급으로 가격도 일반멸치보다 배로 비싸게 팔린다고 한다.
금산 보리암은 전국적으로 이름난 사찰로 평생소원을 한 가지는 꼭 들어준다는 소문으로 전국에서 찾아오는 불자들이 연신 줄을 이었다. 주차장에 버스를 세워놓고 다시 미니버스를 타고 절 입구까지 가서 걸어가는데도 숨이 차도록 한참을 걸어서 도착한 701m 금산 정상 부근의 보리암. 사방이 바다라 탁트인 전망이 좋고 산세도 멋진데 마치 운무가 덮치는 바람에 시야가 별로 좋지는 않은 것이 아쉬웠다. 고등학교 시절 무전여행하면서 또 대학 시절 상주 해수욕장에서 캠핑을 하다가 금산 산행을 하던 옛 추억이 고스란히 재생되는 것 같았다.
첨망대
보광 해물탕 집에서 소라와 낙지, 새우를 넣은 해물탕으로 마지막 식사를 하고 유배문학관과 이충무공 유적지인 관음포와 이락사 그리고 첨망대에서 노량해전 중 적의 총탄을 맞고 마지막 숨을 거두는 역사의 증언을 들으며 백의종군을 하던 장군의 위국정신과 사랑하는 가족을 두고 적탄을 맞고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戰方急 愼勿言我死)는 한 마디를 남기고 최후를 맞이한 이충무공의 안타까운 심사를 충분히 헤아릴 수 있었고 현장 이벤트로 ‘남해바다’라는 제목으로 4행시를 각자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남 : 남인과 서인의 피 터지는 암투로 위리 안치된
해 : 해상의 유배지 외로운 섬 노도
바 : 바라보기만 해도 가슴이 먹먹해지고
다 : 다함이 없이 이어지는 만중에 대한 그리움
신병주 교수가 현장에서 직접 심사를 하여 2명을 선정하여 선물을 주었는데 그 전 여행에서는 두 번에 한 번은 선정이 되어 선물을 받곤 하였지만 이제는 잘 선정이 안 되는 것을 보면서 이것도 나이 탓인가 하는 생각과 이번 일행 중에 내 나이가 제일 많은 것 같아서 조금은 조심스러운 마음이 없지를 않았다.
모든 참가자에게 교수의 저서 ‘우리 역사 속 전염병’이라는 책을 직접 사인을 하여 한 권씩 나누어 주고 마무리를 하였다.
내 고향 삼천포를 끼고 간 남해, 아파서 더 아름다운 섬 남해여행은 오래도록 잊혀 지지 않을 또 하나의 추억을 만들었고 멋지게 기억될 것이다. 지금도 내 고향 남쪽 바다 그 파란 물 눈에 보이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