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내집이니 벽에다 못을 박고 액자도 여러개 걸고 벽에 뭔가 붙이는데 부담이 없었지만 전세나 월세를 사는 과거에는 함부로 뭔가를 하는게 조심스러웠고 주인집이 바로 옆이면 더 부담스러웠다.
결혼 하기 전까지 거의 40년을 대부분 월세로 살다 보니 늦게 떠드는 일도 조심스러웠다.
그나마 70년대 후반 잠깐 시골에 내려갔을 때는 넓은 마당이 있는 독채에 살았는데 지역의 면장님이 살던 집이라 영화의 양반집 같이 마루도 넓은 고옥에 텃밭도 넓어 좋았었고 또 한번은 지하실이 큰 독채에 살았는 데 어른들은 청포도를 농장에서 사와 술을 담근적이 있고 마루도 넓고 옥상도 넓은데다 부엌도 입식이었다. 그러나 1년 살고 이사를 가야 해서 좋은 것도 잠깐이었다.
도시로 다시 이사와 잠깐 아파트를 전세로 산적이 있어 덜 불편했던 적이 있었고 가족이 2년 연립에 함께 잠깐 주인집과 독립해서 산 거 빼고는 대부분 한 지붕 세가족의 순돌네 처럼 바로 옆이나 문을 열면 주인집 거실이 나왔던 것이 일반적이었다.
다행히 집주인을 잘 만나 급한 전화도 잘 연결해 주고 가게나 식당을 하는 주인이면 그 집 덕분에 외상도 편안하게 할 수 있었고 동생들도 집에 혼자 있을 수 있었다.
또 집주인댁 누나나 형이 놓고 간 참고서나 책이 있어 도움을 받기도 했고 가방이나 옷을 물려 받기도 했고 잔치나 큰 일이 있으면 주인집의 가족이나 친지들이 우리방을 이용하는 대신 우리 가족들은 그 집의 행사나 큰 일 덕분에 여러 날 밥을 할 필요가 없었고 농사를 짓는 집이면 농번기 때 새참도 챙겨 먹을 수 있었지만 어른들은 집주인 부부나 가족이 멀리 출타하면 가축들을 돌 봐줘야 했다.
이사를 나온 후에 연락이 되어 다시 찾아 뵙기도 하고 경조사에 가기도 했지만 세월이 지나 안 계시는 경우가 많고 사는 곳이 멀다보니 잊고 지내게 되었다.
좋은 기억도 있지만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하거나 주인집 아이와 싸워서 문제가 되기도 하고 전기요금 수도요금으로 세입자들끼리 다투기도 하고 우물물이나 화장실 문제로 겨울엔 김장독 파묻는 문제로 연탄을 쌓는 것을 놓고 다투는 경우도 있던 것 같다.
마당이 있고 여러집이 한 지붕에 사는 경우가 많이 사라진 지금 그 당시로 돌아가 산다면 어떤 모습일까?
밤 10시가 되면 불을 끄던 집에 늦게 자율학습이 끝나 들어 갔을 때 어두운 부엌에 백열등을 키고 석유곤로 심지에 불을 붙여 끓여 먹던 라면맛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