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대 태조 홍무제(주원장, 재위 1368∼1398) 2대 혜제 건문제(주윤문, 1398∼1402) 3대 성조(처음에는 태종) 영락제(주체, 1402∼1424) 4대 인종 홍 희제(주고치, 1424∼1425) 5대 선종 선 덕제(주첨기, 1425∼1435) 6대 영종 정 통제(주기진, 1435∼1449) 7대 경제 경 태제(주기옥, 1449∼1457) 8대 영종 천 순제(6대 황제 정통제와 같은 인물, 주 기진, 1457∼1464) 9대 헌종 성화제(주 견심, 1464∼1487) 10대 효종 홍치제 (주우당, 1487∼1505) 11대 무종 정덕 제(주후조, 1491∼1521) 12대 세종 가 정제(주후총, 1507∼1566) 13대 목종 융경제(주재후, 1566∼1573) 14대 신 종 만력제(주익균, 1573∼1620) 15대 광종 태창제(주상락, 1620∼1605) 16 대 희종 천계제(주유교, 1605∼1627) 17대 의종 숭정제(주유검, 1628∼1644)
태종 영락제
1402.7 친조카와 수많은 사람 들을 희생시킨 4년간의 내전 끝 에 황제에 오르다
1402년 7월 17일, 중국 땅에 새로운 황 제가 탄생했다. 명 왕조가 세워진 지(13 68) 35년, 세 번째의 황제였다. 그러나 금과 옥으로 꾸며진 화려한 옥좌에 오르 는 길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그것은 친 조카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의 피를 뿌린 4년 동안의 치열한 내전의 결과였 다.
거짓 발광과 거위 떼의 울음
주체는 1360년 5월 2일, 명나라를 세운 태조 홍무제 주원장의 넷째 아들로 태어 났다. 당시는 주원장이 홍건적의 두령으 로 원나라와 맞서 한참 항전을 벌이던 시 절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확실하지 않은 데, 공식적으로는 홍무제의 정비인 마황 후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고려 출신의 공 비(碽妃)라는 설이 있고, 또 원나라 여인 에게서 태어났다고도 한다. 이런 출생의 불확실함 때문에 그가 아버지나 형제들 의 신뢰를 받지 못했으리라는 추측도 있 다.
명나라의 건국 과정에서 주체는 아직 코 흘리개 어린아이였기에 별 공로가 없었 다. 하지만 1370년, 홍무제가 아들과 손 자들을 변방 지대의 번왕(藩王)으로 책 봉하면서 주체를 연왕(燕王)으로 북평을 다스리게 한 이후로 점차 두각을 나타냈 다.
북평은 몽골과 여진 등 이민족과 직접 상 대해야 하는 군사적 요충지이며, 오랜 전 란 끝에 도시는 황폐해지고 백성들은 헐 벗어 있었다. 주체는 이곳을 맡아 삼십 년 동안 몽골족의 침입을 물리치고 경제 를 안정시켰으며, 연을 번왕국 중에서 가 장 부강한 나라로 만들어냈다.
하지만 중앙에서 볼 때, 그토록 커진 연 왕의 힘은 국가적으로는 보탬이어도 정 치적으로는 부담이었다. 그래서 1398년 에 홍무제가 사망하고 그의 맏아들 주표 의 맏아들인 주윤문이 2대 황제(건문제) 로 즉위하자, 곧바로 연왕을 제거하려는 움직임이 일었다.
정면 공격은 ‘조카가 삼촌을 박해한다’ 는 점에서 명분도 없고, 연왕의 세력이 워낙 만만치 않았으므로 첩자와 자객들 을 보냈는데, 연왕은 거짓으로 미친 척을 하여 한여름에 화롯불을 껴안고 살거나 시궁창에서 잠을 자는 등 실없는 행동으 로 그들의 주의를 흐리게 했다고 한다.
또 땅굴을 파고 그 안에서 무기를 제작하 면서 땅 위에서는 거위 떼를 길러, 그 꽥 꽥대는 소리로 무기 만드는 소리를 감추 었다고 한다. 이렇게 만반의 준비를 갖 춘 연왕 주체는 마침내 1399년, 조카에 맞서 거병한다. 명분은 ‘정난(靖難)’, “황 제를 에워싸고 있는 간신들을 처단하여 나라를 바로잡는다”는 것이었다
북평의 군대는 정예병이었으나 수도 남 경의 황제군에 비해 수적으로 크게 열세 였다. 그래서 연왕 측이 크게 패하고 연 왕조차 죽거나 사로잡힐 위험에 빠진 경 우도 있었지만, 건문제가 “숙부님의 생 명까지 위협해서는 안 된다. 지나치게 몰아붙이지 마라”며 제동을 거는 바람에 위기를 모면했다고 한다.
반면 연왕은 자신에 버금가는 군사력을 가졌던 영왕 주권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 여서 함께 조카를 노렸다. 두 세력 사이 의 치열한 공방전은 마침내 1402년 6월, 정예병만을 추려 남경을 전격 습격한 연 왕의 필사적인 도박이 성공을 거두어 남 경이 연왕군에게 함락됨으로써 끝난다.
역적의 십족(十族)을 멸하다
남경에 입성한 연왕은 사흘 동안 궁궐 안 을 이 잡듯 뒤지며 건문제에게 충성하던 신하들을 숱하게 죽였다. 연왕을 제거해 야 한다는 주장에 앞장섰던 제태와 황자 징은 눈앞에서 사지를 찢어버렸다.
그런데 정작 건문제는 온데간데가 없었 다. 함락 당시 일어난 불에 타 죽었다고 했지만, 시체를 끝내 찾지 못했다. 꺼림 칙함이 남을 수밖에 없었던 연왕은 건문 제를 찾는 일을 그만두지 않았는데, 정화 의 대원정도 그런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고도 한다.
옥좌의 영락제. 그가 이 자리에 앉기까지는 수많 은 사람들의 피가 필요했다(왼쪽), 자금성의 그림 (오른쪽)
이런 와중에도 연왕은 건문제의 스승이 며 연왕 제거론의 주역이기도 했던 방효 유만은 살려두었고, 옥에 가두기는 했어 도 정중하게 대접했다. 방효유는 당대 최고의 학자로서 존경 받고 있었기 때문 에 회유하여 자신의 통치를 선전하게 하 려는 속셈이었다. 마침내 옥좌에 앉은 연왕, 영락제는 방효유를 불러오게 했다.
그리고 지필묵을 주면서 자신의 즉위 조 서를 쓰도록 부드러운 말로 권했다. 잠 시 생각에 잠겨 있던 방효유는 순순히 붓 을 들었다. 그리고 글씨를 쓰기 시작했 다. 그러나 영락제가 지은 득의의 웃음 은 이내 얼어붙고 말았다. 방효유가 쓴 글은 단 네 글자뿐이었기 때문이다.
‘연적찬위(燕賊簒位)!’ 연나라의 도적놈 이 제위를 찬탈했다는 말이 아닌가. 화 가 머리끝까지 난 영락제는 소리질렀다. “네가 정녕 구족을 멸해야 말을 듣겠느 냐?” 방효유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맞받았다. “구족(九族)이 아니라 십족(十 族)을 멸한다 해도 역적과 손잡을 수는 없다!”
영락제는 그 자리에서 방효유의 입을 찢 어버리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방효유를 잔인한 방법으로 죽였을 뿐 아니라, 정말 로 십족을 멸했다. 구족이란 자신을 기 준으로 위로 사대, 아래로 사대를 가리킨 다. 구족을 멸한다면 그야말로 일가친척 피붙이는 남김없이 몰살시키게 된다.
역적은 구족을 멸한다는 말이 있었지만, 범위가 너무 넓다 보니 이리 저리 안 걸 리는 사람이 없으므로, 실제로 구족을 멸 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영락제 는 문자 그대로 구족을 멸했을 뿐 아니라 혈연관계가 아닌 제자, 친구, 선후배 등 방효유와 친분관계가 있다 싶은 사람도 ‘ 열 번째 일족’이라 하여 모조리 처형장으 로 보냈다. 중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형 벌이었다. 이후에도 정권이 안정될 때까 지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