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 재 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 창덕궁 탐방코스 】
돈화문-회화나무-금천교-궐내각사-구 선원전 일원-인정문-인정전-선정전-희정당-대조전 일원
성정각 일원-낙선재 일원-후원(부용지와 주합루 일원-애련지와 의두합-존덕정과 폄우사-옥류천 일원-연경당)
1.돈화문 2.금천교 3.진선문 4.인정문 5.인정전 6.선정전 7.희정당 8.대조전 9.경훈각 10.내의원 11.어차고 12.낙선재 13.연경당
【 창덕궁 소개 】
*사적 제122호(1963년01월18일 지정)
*면적:583,516.3㎡
조선 태종5년(1405)에 조선시대 궁궐 가운데 하나로 세워졌으며, 동쪽으로 창경궁과 맞닿아 있다. 경복궁의 동쪽에 있어서 조선시대에는 창경궁과
더불어 동궐(東闕)이라 불렀으며, 당시 종묘, 사직과 더불어 정궁인 경복궁이 있었으므로, 이 궁은 하나의 별궁으로 만들어졌다.
창덕궁은 고려 시대 궁궐의 전통을 이어받았고, 개성의 송악산의 만월대처럼 자연 지형에 맞추어 산자락에 지어졌다.
보통 궁궐은 인위적으로 존엄성과 권위를 드러내도록 건축되지만 창덕궁은 이러한 얽매임 없이 북악산의 줄기인 응봉의 산자락 생긴 모양에 맞추어
적절하게 궁궐의 기능을 배치하였다.
임금들이 경복궁에서 주로 정치를 하고 백성을 돌보았기 때문에, 처음부터 크게 이용되지 않은 듯하다. 임진왜란 이후 경복궁·창경궁과 함께
불에 타 버린 뒤 제일 먼저 다시 지어졌고 그 뒤로 1868년 경복궁이 다시 지어질 때까지 경복궁의 역할을 대체하여 조선왕조의 가장 중심이 되는
정궁 역할을 하게 되어 정궁인 경복궁보다 오히려 더 많이 쓰인 궁궐이 되었다.
화재를 입는 경우도 많았지만 제때에 다시 지어지면서 대체로 원래의 궁궐 규모를 잃지 않고 유지되었다.
임금과 신하들이 정사를 돌보던 외전과 왕과 왕비의 생활공간인 내전, 그리고 휴식공간인 후원으로 나누어진다.
내전의 뒤쪽으로 펼쳐지는 후원은 울창한 숲과 연못, 크고 작은 정자들이 마련되어 자연경관을 살린 점이 뛰어나다.
또한 우리나라 옛 선현들이 정원을 조성한 방법 등을 잘 보여주고 있어 역사적으로나 건축사적으로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160여 종의 나무들이 울창하게 숲을 이루며 300년이 넘는 오래된 나무들도 있다.
1917년에는 대조전을 비롯한 침전에 불이 나서 희정당 등 19동의 건물이 다 탔는데, 1920년에 일본은 경복궁의 교태전을 헐어다가
대조전을 다시 짓고, 강령전을 헐어서 희정당을 다시 짓는 등 경복궁을 헐어 창덕궁의 건물들을 다시 지었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건물 중 궁궐 안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은 정문인 돈화문으로 광해군 때 지은 것이다.
정궁인 경복궁이 질서정연한 대칭구도를 보이는데 비해 창덕궁은 지형조건에 맞추어 자유로운 구성을 보여주는 특징이 있다.
창덕궁과 후원은 한국의 유일한 궁궐후원이며, 한국의 정원을 대표한다는 점, 그리고 자연의 순리를 존중하여 자연과의 조화를 기본으로 하는
한국문화의 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는 장소로, 1997년에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역사▣
창덕궁은 태종5년(1405) 경복궁에 이어 두 번째로 세워진 조선의 궁궐이다.
1392년 태조 이성계가 개경에 있던 고려 궁궐 수창궁에서 왕위에 올라 조선을 건국한 뒤, 재위 3년(1394)에 수도를 한양으로 옮기고
이듬해에 조선의 법궁으로 경복궁을 세웠다.
그러나 건국 직후 왕위 계승권을 둘러싼 왕자와 공신 세력 사이의 갈등으로 왕자의 난이 두 차례나 일어나 경복궁의 지위는 흔들리게 되었다.
이방원이 옹립한 정종은 권력 투쟁이 벌어지는 와중에 재위 2년(1400)에 한양의 지세가 좋지 않다며 도읍을 다시 개경으로 옮겼다.
그 뒤 정종에게서 양위 받은 태종이 재위 5년(1405)에 다시 한양으로 환도하면서, 정궁인 경복궁을 비워두고 경복궁 동쪽 향고동에 궁궐을 새로 지어
'창덕궁'이라 이름 지었다. 1408년 조선 태조는 이 창덕궁에서 죽었다.
태종11년(1411)에 진선문과 금천교, 이듬해에 돈화문에 이어 여러 전각이 차례로 들어서면서 창덕궁은 점차 궁궐의 모습을 갖추어나갔다.
창덕궁은 500여 년 조선 역사에서 가장 오랫동안 임금이 거처한 궁궐이었다. 공식적으로 조선의 법궁은 경복궁이었으나,
조선 초기부터 여러 임금이 경복궁을 기피하여 창덕궁이 그 자리를 대신할 때가 많았다.
특히 태종은 왕위를 위해 이복동생을 죽인 곳인데다, 자신의 정적 정도전이 주동하여 건설한 경복궁을 꺼림칙하게 여겼다.
창덕궁의 위상은 임진왜란으로 더욱 확고해졌다.
선조25년(1592)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서울에 있던 모든 궁궐이 불타버리자, 선조38년(1605)부터 재건 준비를 시작하여
광해군원년(1609) 10월에 인정전 등 주요 전각이 거의 복구되었으며,
이때 공사가 완벽하지는 않았는지 이듬해 2월부터 다시 공사가 진행되어 9월에 완료되었다.
이후 역대 왕들은 창덕궁에서 주로 정무를 보게 된다.
인조반정으로 궁궐 대부분이 소실, 조선 인조25년(1647)에 재건하였는데 인조는 한편 후원에 여러 정자와 연못을 조성하였다.
숙종30년(1704) 12월에 대보단이 조성되었으며, 정조는 인정전에 품계석을 세우고 후원에 부용지를 중심으로 부용정, 주합루, 서향각을 세우고,
국내외 서적을 보관하기 위하여 열고관, 개유와, 서고를 지었다.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는 의두합과 연경당을 지어 오늘날의 후원 모습을 마무리하였으며, 헌종은 짧은 재위 기간 동안 낙선재, 석복헌, 수강재를
건설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선 말기에는 서구의 문물을 도입하면서 창덕궁에서도 서양식의 전등이나 차고가 설치되기도 하였다.
1907년 에는 순종이 고종의 퇴위 후 이곳으로 이어하여 황궁이 되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돈화문 앞에 도로가 생겨 창덕궁과 종묘가 갈라졌으며,
주요 전각 외의 여러 건물이 대부분 헐리는 등 궁궐이 크게 훼손되었다.
1912년부터는 창덕궁의 후원과 아울러 인정전(仁政殿) 등의 중심부와 낙선재(樂善齋) 등이 창경궁과 함께 일반에 공개되었다.
1917년에는 대조전과 희정당 같은 핵심 전각이 소실되었으며, 이곳을 재건하기 위하여 1918년에 조선총독부와 이왕직에서는 경복궁 교태전,
가녕전과 그 앞의 동ㆍ서 행각을 헐어다 창덕궁으로 이건하였다. 1921년에 일제는 대보단을 없애고 그 자리에 신 선원전을 지었다.
해방 이후에도 창덕궁은 한동안 그대로 방치되었으며, 주변에는 민가와 학교, 대형 건물이 들어섰다. 그러다 복원 작업이 진행되어, 현재 창덕궁은
제한적으로 일반인의 관람이 가능하다. 1997년에는 조형미와 주변 환경과의 조화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 건축과 구조 ▣
현재 창덕궁은 크게 인정전과 선정전을 중심으로 한 치조(治朝) 영역, 희정당과 대조전을 중심으로 한 침전 영역, 동쪽의 낙선재 영역,
그리고 북쪽 언덕 너머 후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창덕궁은 북쪽으로 산을 등지고 14만 5천여 평의 산자락에 자리 잡았으며, 북쪽 응봉의 지형에 따라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과 정전인 인정전,
편전인 선정전 등 각 건물이 일정한 체계 없이 자유롭게 배치되어 있어 평지에 세운 경복궁과 대비된다.
그러나 언뜻 보아 무질서해 보이는 창덕궁의 건물 배치는 주변 구릉의 높낮이 뿐 아니라 그 곡선과도 조화를 잘 이루고 있으며,
풍수 사상에 따라 뒤에는 북악산 매봉이 있고 앞으로는 금천이 흘러 배산임수를 이루고 있다
또 궁궐의 앞쪽에는 공적인 공간을 두고 뒤쪽에는 사적인 공간을 두는 전조후침(前朝後寢)의 원칙에 따라 궁궐 앞에는 공적인 공간으로
궁궐의 으뜸 건물인 인정전, 임금의 집무실인 선정전, 임금을 보좌하는 여러 관청인 궐내각사(闕內各司)가 자리 잡고 있고,
뒷부분에는 임금과 왕실의 사적인 공간인 임금과 왕비의 처소가 있다.
선정전, 희정당, 낙선재 등 임금의 거처는 외부에서 침입하기 어렵도록 여러 겹의 건물과 마당으로 사방을 에워싼
소위 '구중궁궐'(九重宮闕)의 모습이다.
또 중희당, 연영합 등 세자의 거처는 '동궁(東宮)', 수강재와 같은 대비의 거처는 '동조'(東朝)라 하여 옛 법도에 따라 이들의 처소는 궁궐 동쪽에
두었다. 또 유교 이념에 따라 호사스럽기보다는 검소하고 질박한 궁궐 건축이 돋보인다.
창덕궁은
동쪽에 자리 잡은 궁궐이라 하여 창경궁과 함께 '동궐'로도 불렸다. 경복궁을 보조하는 궁궐로 지어졌지만, 임진왜란 이후에는 경복궁보다 먼저
복구되어 명실상부한 조선 제일의 궁궐이 되었다. 경복궁과 마찬가지로 궁궐다운 규모와 체제를 갖추었으며,
조선 왕조의 오백 년 역사를 놓고 보면 경복궁보다 창덕궁에서 왕들이 머문 기간이 더 길다.
너른 평지 위에 직선의 축을 따라 전각들이 들어선 경복궁에서 위엄과 권위, 질서와 절제가 돋보였던 것과 달리,
창덕궁은 전각들이 산과 언덕 등 지형을 따라 비교적 자유롭게 배치되고, 규모도 배치된 공간과 쓰임에 걸맞게 지어졌다.
조선시대 왕들이 창덕궁에 머무르기를 좋아했던 이유도 이와 같은 친환경적인 매력,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건축 공간의 편안함 때문이 아니었을까.
특히 산과 언덕에 둘러싸인 창덕궁의 후원은 조선시대 궁궐의 후원 가운데에서도 가장 넓고 경치가 아름답다.
자연의 지형지세를 그대로 따르면서 최소한의 손길만을 더하여 자연의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한 솜씨가 절묘하다.
자연미를 중요시한 조선시대의 미감이 잘 드러나 있다.
정조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왕의 전용도서관인 규장각을 설치하여 인재를 모으고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는 혁신 정치를 펴서 조선시대 문화를
가장 화려하게 꽃피웠다. 정조에게 규장각은 세종의 집현전에 버금가는 큰 힘이 되었다. 후원의 부용지에 자리한 주합루 1층이 규장각이다.
부용지에 서면 왕과 신하들이 아름다운 후원을 거닐면서 함께 시를 짓고 나랏일을 의논하는 활기차고 이상적인 모습이 절로 눈앞에 펼쳐진다.
창덕궁의 아름다움은 1820년대 후반에 그려진 국보 제249호인 '동궐도'에도 잘 드러나 있다
.
동궐도는 창덕궁과 창경궁을 둘러싼 주변 지세와 전각, 담장, 각종 기물들을 상세하게 또한 사실적으로 그려낸 궁궐 기록화이다.
궁궐의 현재와 옛 모습을 비교하여 살펴보면 역사의 흐름 속에 변화해온 궁궐의 면모를 볼 수 있다.
창덕궁은 자연과 조화를 이룬 아름다운 궁궐로 왕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지만, 조선 왕조의 마지막 순간을 안타깝게 지켜본 궁궐이기도 하다.
한일병합을 결정한 조선 왕조의 마지막 어전회의가 흥복헌에서 열렸고,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과 중전인 순정효황후,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였던 영왕과 부인 이방자 여사가 창덕궁에서 생활하다 생을 마쳤다.
【 방문일자 】2011년 4월 5일(화)
【 관람정보 】
*관람시간 :
-자유 관람 4월~10월 09:00~18:30/11월, 3월 09:00~17:30/12월~2월 09:00~17:00(매주 월요일 휴궁)
-후원 시간제 관람(2시간 소요) 10:00~15:00 매시 정각, 15:30, 16:00, 16:30/정해진 시간에 해설사의 안내를 받아 관람
*관람요금 :
-자유 관람 어른(19~64세) \3,000/청소년(7세~18세) \1,500
-후원 시간제 관람 어른(19~64세) \5,000/청소년(7세~18세) \2,500
-통합관람권 \10,000 : 4대궁(경복궁, 창덕궁<후원포함>, 창경궁, 덕수궁)과 종묘 관람 가능
*교통안내 :
- 지하철 : 종로3가역(1,3,5호선) 6번출구 도보 10분/안국역(3호선) 3번출구 도보 5분
- 버스 : 109번, 151번, 162번, 171번,172번, 272번, 7025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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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궁 관람은 생각도 못했는데 ~~ 하고나니깐 이렇게 좋은 시간이 될줄은 ..
설명서와 함께 관람을 하니 우리의 옛 왕들의 모습도 그려보게 되고 .
특별한 어느 봄날의 하루 울 랑이랑 데이트 하며 소중하게 보낸것 같습니다
항상 생각도 못한 계획에 다시 한번 옆지기님께 감사를 느끼며 항상 ~~ 건강 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