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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강아지]
땅강아지
메뚜기목 땅강아지과
몸길이 30~35mm
몸색은 황갈색이나 흑갈색으로 두더지처럼 앞다리가 흙을 파기에 적당히 발달됨.
땅강아지는 본래 습기를 좋아하며 저지대에 산란(産卵)하는데 땅속 10~20cm의 흙집(土窩)을 만들어 200~350개의 알을 낳는다. 부화(孵化)된 약충(若蟲)은 일정기간 동안 흙집 속에서 알껍질을 먹고 자라며 그 이후에도 산란장소를 멀리 떠나지 않고 땅속 10~30cm에서 우화(羽化)한다. 성충(成蟲)은 주로 밤에 활동하며 비상시간(飛翔時間)은 해가 지고 어둠이 깔린 직후부터 2~3시간동안인데 이때 수컷의 울음소리가 중요한 정보교환 수단이 되는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1965년 여름.
날이 슬슬 더워지기 시작하고 있었지만 오전 중의 한옥 대청마루는 기분 좋을 만큼 기운이 서늘하여 나는 배 깔고
대청마루에 엎드려 오빠의 생물도감을 펼쳐놓고 땅강아지 편을 다 본 후 책을 덮어 한쪽으로 밀쳐놓는다.
가족 모두들 일터와 학교로 나선 후의 집 안은 고요하다. 엄마는 언제나처럼 집안 대소사 일로 출타 중 이고
집 안에는 집안일 도와주는 외가 쪽 먼 친척인 양순 언니와 나 둘 뿐이다.
양순 언니는 그 당시의 표현으로 하자면 우리 집 식모다.
그동안 집안 일 돕는 언니들이 여럿 이었지만 오빠들과 나이 차이가 얼마 되지 않는 언니들은 늘 극성맞은 오빠들
틈바구니에서 견뎌내지 못하고 집을 나가곤 했다. 그러나 양순 언니는 나이도 오빠들보다 위이고 속 깊고 참해서
특히 사사건건 트집이던 병약한 막내오빠의 지지 아래 한 가족이 된 언니다.
어느 날 누구에게선가 엄마가 전화를 한통 받고 나면 엄마는 여기 저기 전화를 건다. 집안 도울 사람이 필요하지는 않은지 하는.
그 당시 우리 집에 도울 일손이 없으면 당연히 우리 집이 먼저이지만 우리 집에 누군가가 머물며 집안일을 돕고 있으면
엄마는 가까운 친척 중에 믿을 만 한 집 순서로 전화를 한다. 지금 에야 가사도우미라는 어엿한 이름을 달고
전문 직업인으로 자리 잡고 있지만 당시만 해도 어려운 일가의 숱가락 하나 더는 의미로의 서울행이
가사도우미의 형태가 되는 것이고 물론 월급은 주지만 가족의 일환으로 받아들이는 마음 씀이 우선하던 시절이라서
식모라는 이름이 그렇게 구차한 직업은 아니었다는 기억이다.
물론 어느 언니는 저녁밥 다 먹고 난 후 집안일의 마무리를 하고나면 장독대 위에 올라가 먼 산 바라보며
구슬픈 유행가를 부르기도 하곤 하여 어린 나까지도 공연히 서글픈 생각이 들게 만들기도 하였지만
대개는 가난한 시골의 고된 농사일보다는 서울의 살림살이가 편하여 좋아하는 것 같고 주변의 적당한 베필을 만나
일가를 꾸리기 전까지는 당연히 가족의 일원이고 엄마는 그런 언니들의 조촐한 결혼에도 형편에 맞게
정성어린 혼수를 해주어 보내는데 그렇게 시집을 간 언니들 중에는 아기 낳아 등에 업고 찾아오기도 한다.
그러나 양순 언니는 우리 집에 올 때 부터 그 느낌이 달랐다. 먼 일가 누군가의 딸 인 것은 분명한데 그동안
같이 지내던 언니들과는 달리 나이도 좀 지긋하고 살림 솜씨도 맵차려니와 병약한 막내오빠에게 유난히 마음을 쏟으며
병치레를 하는 솜씨는 엄마의 마음과 다를 바 없어서 예민하고 까탈스러운 막내오빠 조차도 양순 언니에게는
고분고분한 것이 신기하기까지 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떤 이유인지는 몰라도 양순 언니는 한번 쯤 결혼을 하였다가 돌아온 입장이었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그 당시에는 집을 자주 비우는 엄마를 대신한 늘 든든한 우리 형제들의 후견인이었다.
지금도 과묵하고 속 깊은 양순 언니는 어디선가 제 할 일을 소리도 없이 찾아내어 쓸고 닦고 하고 있을 것이다.
이미 양순 언니가 깨끗하게 닦아놓고 지나간 반들반들 윤이 나는 대청마루 바닥에 배를 깔고 납작 엎드려
마루바닥에 비치는 하늘 그림자를 바라본다.마루에 고인 고요 위에 하늘 그림이 떠있는 것 같다.
고인 하늘 그림자에 손가락 꾹꾹 눌러 지문을 묻혀보아도 여전히 재미가 없다.
나는 슬며시 일어나 이방 저방을 들여다보고 빈 집안의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다가 모처럼 다락에나
올라가 볼까 잠시 부엌 위 다락에 눈길을 주다가 대문을 열고 밖으로 나선다.
우리집은 서대문 네거리 한옥들이 옹기종기 잿빛 처마를 맞대고있는 동네에 있다.
우리 집 대문과 마주한 높은 축대 담벼락 위는 큰 길이다.그러니까 길 위에서 보면 저 축대 아래 네모난
회색지붕을 옹기종기 맞댄 한옥들이 보이고 그 중 맨 앞자리의 집이 바로 우리 집이고 그 축대 아래가
나 혼자 노는 나만의 놀이터이다. 지금 이 시간에는 집안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골목도 텅 비어 지나다니는
인적도 없다. 저 위의 찻길도 지나가는 찻소리만 간간히 들릴 뿐 고요하다. 학교 간 동네 아이들이 귀가하는
시간이 되어야 이 골목도 비로소 활기를 띄며 사람 사는 동네 같다. 나는 축대에 등을 대고 쪼그려 앉아
오늘은 어디 가서 놀까 궁리를 한다.
나도 내년이면 학교에 입학한다. 그러면 옆집 태환이가 함께 땅따먹기 하면서 잘 놀다가도 학교이야기로
야코를 죽이는 일은 사라질 것이다. 그래도 오늘은 태환이가 학교에서 돌아올 때 까지는 혼자 놀아야 한다.
아랫골목 구멍가게를 가볼까 미동초등학교 뒷문 담벼락에서 떡볶이와 군만두와 구운 감자를 파는
효정이네를 가볼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효정이는 나보다도 한 살 더 어려서 나를 언니언니 하며 귀찮게 하지만
작은 감자를 쪄서 굽기 전에 껍질을 까는 효정이 엄마를 도와 감자껍질 까기는 나름대로 재미가 있다.
감자 껍질을 다 까고 나면 시뻘건 떡볶이를 몇가닥 얻어먹는 그 맛도 뜨거운 오뎅국물 맛과 함께 일품인데 말이다.
그래 효정이가 좀 귀찮기는 해도 효정이네 감자 껍질을 깔 망정 앞으로는 아이스께끼 사준다고 꼬드기는
미장원 언니를 따라다니는 일은 그만해야겠다 다짐한다.
며칠 전 미장원 언니가 아현동 고갯마루로 미용 재료를 사러간다며 같이 가자고 구슬려서 심심하던 참에
따라 나섰다가 대학생들 데모대와 만나 최루탄 세례를 받은 기억이 떠올라 지금까지 몸서리 쳐진다.
며칠 전 늦은 밤 큰오빠를 불러 앉힌 엄마와 오빠의 두런거리는 소리가 무슨 소린가 했더니 데모 하는 걸 말리지는 않겠다만 앞장만 서지 말아라는 엄마의 간곡한 부탁과 그러마고 주억거리던 큰오빠의 대화내용이
데모대를 맞딱뜨리고 나서야 파악이 되던 거 였다.
오빠들이 들고 있던 커다란 깃발에는 [한일 굴욕 외교 반대]이렇게 써 있었던 것 같다.
나는 내년에나 초등학교를 들어가지만 그 정도 한글은 벌써 다 읽을 줄 안다. 그것이 무슨 뜻인지는 잘 모르지만 말이다.
어쩌면 그 들 속에 큰오빠라도 발견할까 싶어서 기웃기웃 거렸는데 굴레방다리도 못가서 안개처럼 피어오른
최루탄 속에서 미장원 언니 손도 놓친 김에 걸음아 나살려라 집으로 달려오는 동안 눈도 제대로 못 뜨겠고
목도 너무 아파 소리도 못지르겠던 기억 생각만 해도 매캐한 그 날의 최루탄냄새가 아직까지도 나는 것 같다.
매운 고춧가루를 탄 오이지 국물이 기도로 잘못 들어갔을 때 느꼈던 죽을 만큼 고통스러운 느낌의 최루탄 속에서도
혹시 최루탄을 터트리며 학생 데모대를 막던 군인들 속에 지난 난 겨울 군에 입대한 막내삼촌이 있을 것만 같아서
억지로 실눈을 뜨는 바람에 눈 속까지 더 아팠었다. 물론 막내 삼촌은 해병대 소속이라서 그 군인들 속에는 없을 터이지만
공연히 대학생 교복을 입은 사람들만 보면 우리오빠 같고 먼 발치 에서도 중학교 교복을 입은 학생을 보면
작은 오빠 같아 목 길게 빼고 확인해 보듯이 군복을 보면 꼭 막내 삼촌 인 것 만 같아서 그래보았던 것인데
늘 목소리 높이는 법 없이도 오빠들 다섯과 삼촌들 셋을 조곤조곤 다독이며 집안을 화목하게 다스리던 우리엄마가
앞장만 서지 말라며 반대를 하지 않았던 데모인걸 보면 누군가 저 위에서 다스리는 분들이 잘못을 하긴 한 것인가 본데
정작 그 분들은 보이지도 않고 오빠와 오빠보다 나이가 두 살 위인 막내삼촌처럼 보이던 군인 아저씨들이
나 처럼 어린아이들까지도 숨 막혀 죽을 것처럼 고통스럽게 만드는 최루탄을 터트려 가며 왜 서로 싸워야만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어 이유 없이 발아래 왕모래 흙 위를 줄줄이 꼬리를 이어 기어가는 개미들 앞길만 훼방을 놓다가
엄마의 말씀처럼 이것도 죄를 짓는 일인것만 같아서 발끝을 오무려 뒤로 물러선다.
"엄마아~~~"송아지 어미 찾는 울음소리를 내며 들어선 나를 마당 수돗가에 앉히고 찬물 떠서 눈을 씻겨주며
집에서 너무 멀리는 가지 말라던 명순 언니의 다짐이 아니더라도 이젠 혼자 놀더라도 미장원 언니를 따라다니지는
않을 것이다. 혼자서 심심해도 옆집 사는 태환이와 뒷골목 안쪽에 사는 수미언니가 학교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집 앞에서 놀아야겠다.
우리 동네는 참으로 놀 거리가 많다 아이들만 많으면 말이다. 아이들과 몰려다니며 노는 동네 골목골목은
눈감고도 훤하다. 저 윗길로 올라가서 서대문 네거리까지 걸어가면 뎅뎅거리며 지나가는 전차를 볼 수 있다.
서울 하고도 서대문 네거리 한옥들이 조롱조롱 이마를 마주한 그 처마 아래로 이어지는 좁디좁은 골목골목들.
황 판사네 집을 끼고 골목을 몇 구비 돌면 철길이 나온다. 이상하게도 골목으로 가지 않고 곧장 가도 철길은 나오는데
골목을 몇 구비 돌며 색색 분필로 낙서가 되어있는 담장을 손끝으로 훑으며 지나가는 맛이 따로 있다. 이렇게 특별히 떠오르는 놀이나 친구들이 등장하지 않으면 담벼락에 등을 대로 해바라기를 하는 것도 좋다.
눈을 감고 태양을 바라보는 즐거움. 이글거리는 햇살은 눈꺼풀 속을 파고들어 망막에 새로운 유희를 부려 놓는다.
뱅글뱅글 돌며 살빛을 파고든 햇빛들의 환한 분홍빛 따스한 빛 잔치.
그 때 갑자기 나의 햇살 유희를 훼방이라도 놓듯이 골목길이 소란해 진다.
화들짝 뜬 눈 속으로 햇살이 파고들어 부시다. 실눈 뜨고 바라본 풍경은 작은 리어카에 실린 소박한 세간들.
누군가가 이 동네로 이사를 오는 모양이다.
내 눈이 번쩍 띄게 만든 또 하나의 풍경. 엄마의 손에 끌려 따라온 내 또래의 계집 아이. 나는 그 아이가 누구보다도 반갑다.
‘이젠 심심하지 않겠군.’그 계집아이도 나를 빤히 바라본다. 낯선 동네에서의 첫 번째 또래 아이.
내가 가만히 손짓으로 부르니 겁먹고 손가락을 빨던 아이가 제 엄마 손을 살그머니 놓고 내 곁으로 온다.
그 아이도 나를 따라 담벼락에 등을 대고 쪼그려 앉는다. 그 아이의 엄마도 두 아이에게 눈길을 주고는
우 리 집 대문을 두드린다.'아 우리 집 문간방에 이사 온다던 그 집 인가보다.'
"나도 저 집 살아."
"그래?"
아이가 매우 반가운 눈치다.
"어." 내가 웃자 그 아이도 따라 웃는다. 이 것으로 그 둘의 인사치레는 끝이 난 샘이다.
그 사이 명순 언니가 대문 앞까지 나와 그 아이의 엄마를 맞이한다.
"들어오셔요 방은 제가 잘 치워 놓았어요."
이 아이네가 이사 올 문간방을 치우느라 명순 언니가 안보였구나.
이 아이는 이름이 영옥이다.
영옥이 엄마가 리어카 꾼과 함께 세간들을 집안으로 들인다.
우리들처럼 작은 아이들은 저런 일이 있을 땐 그저 성가시지 않게 멀찌감치 떨어져서 바라만 봐주면 된다.
그래도 너무 멀리 가면 안된다.이삿짐이 다 내려질 때까지 짐을 봐야 하니까.
그러지 않으면 짐을 덜 내린 리어카 꾼이 그냥 가져가는 수도 있고 지나가던 거지들이 슬쩍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영옥이 엄마는 작은 체구에 단아한 기품이 있다. 소리 내어 웃는 법이 없어도 살짝 웃는 모습이 참 곱다.
낯선 동네에 와서 주인댁 아이와 제 아이가 스스럼없이 어울려 잘 노는 게 다행스러운 눈치다.
영옥이 네가 우리 집 문간방으로 이사 온 후 부터 나는 하루하루가 심심할 새가 없다.
아침 먹고 쪼르르 영옥이네로 달려가면 그리 넓지 않은 문간방에 많지 않은 살림살이지만 잘 정돈된 세간들과
아이자기한 영옥이의 장난감들은 나에겐 새로운 신세계이고 희열이다.
나는 솥단지가 걸린 부뚜막까지 딸린 소꿉놀이 라든지 민대머리에 커다란 눈이 뉘어놓으면 스르르 감기고
배를 꾸욱 누르면 소리 내어 웃는 거의 간난 아기만한 커다란 인형을 가져 본 적이 없다.
나의 손 위로 온통 오빠들 뿐 이니 솔직히 겨울 내복도 파란색이거나 회색빛 오빠들이 입던 엑스란이 전부다.
막내로 딸 하나인데 예쁜걸 사 줄 만도 하건만 아무도 사준적도 사달란 적도 없다.
근검절약이 몸에 밴 엄마 아버지의 삶이 당연히 나의 생활양식인 것이다.
그래서 영옥이의 장난감들은 매우 신기하고 유혹적이었으며 영옥이 또한
장난감 들을 같이 가지고 놀 친구가 생겨서 고마운 것이다.
내가 영옥이 장난감들을 가지고 놀거나 배 깔고 엎드려 그림책을 보거나 방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 천장의 무늬를 세며
재잘거리거나 하면 영옥이 엄마는 아이들을 위해 무언가 간식을 만들어 주신다.
그것들은 명순언니가 해주는 밀가루 부침개나 누룽지 튀긴 것에 설탕 뿌린 그런 먹을 거리가 아니다.
이스트라는 걸 넣고 반죽을 한 찐빵이거나 좌판에서 파는 불량식품이라고 그것 마저 잘 사주지 않는 시뻘건 떡볶이가 아닌
하얗고 달콤한 소고기 떡볶이라든지 색색깔로 물들인 밀가루로 만든 수제비라든지 먹는 것 하나도 우리 집과는 달랐다.
나는 하루하루가 행복했고 즐거웠다.우리 가족들이 하나 둘 귀가하는 저녁시간이 될 때 까지 내가 영옥이네서
지내는 시간이 많고 얻어먹는 것도 많지만 그렇다고 내가 집주인 딸이라고 텃새도 부린 적이 없으니 공평하다.
공평하게 나누는 습관은 오빠들이 여럿이다 보니 사탕 한 봉지도 똑같이 나누고 대보름날 아버지가 사오시는
부럼 나누기에서 식구 수대로 준비한 대접에 땅콩과 호두 잣이며 밤등을 개수 세어가며 골고루 나누어 담아
방방이 머리맡에 돌리는 역할은 내 몫이다.먹을 것이 무엇이든 공평하게 나누는 소임은 우리 집 안의 평화스런 덕목이다.
물론 보름날 새벽 날 밝기 전에 입 밖으로 한마디의 말도 내뱉기 전 먼저 머리맡의 부럼들을 이빨로 깨어 윗목에
던져버려 한 해 동안의 부스럼 예방을 하는 풍속은 그것의 효험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그 자체가 즐거운 간식이며
놀 거리라 나는 대보름날 부럼깨기가 좋다.
그것은 동지 날 팥죽을 쑤어 뒷간이며 다락까지 팥죽그릇을 가져다 놓으며 중얼중얼 무언가를 비는 엄마의
경건한 기원행위와도 같은 맥락인 것을 막연하게나마 짐작하는 일들인 것이다.
동지 날 엄마의 한해 집안 무사안녕을 비는 고사가 끝나고 나면 커다란 가마솥에 끓여진 찹쌀로 빚어 넣은
새알심이 들어간 팥죽은 옆집 뒷집에 돌려지고 쟁반에 받혀 상보를 씌운 그 팥죽 돌리는 일 또한 내 몫이다.
우리 동네에서 우리가족 중 내 얼굴을 모르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늦둥이인 내 이름을 따서 우리엄마 이름은 민희 엄마 이니까.
나와 영옥의 집 안 에서의 놀이가 지겨워지면 슬슬 골목가 탐험으로 이어진다.
눈을 감고도 훤한 골목골목들을 영옥이에게 일러주며 보니 그 골목들이 그렇게 새로울 수가 없다.
뎅뎅거리 전차 길과 기찻길 옆 실 개천 길 건너편 거지 아파트 그 위의 경기대학교 담장까지 갔다 오면 하루가 간다.
이젠 기찻길 차례다. 기찻길은 오후에 가야 재미난 구경도 만날 수 있다.
때때로 짓궂은 동네 오빠들의 장난들은 때로는 도가 지나칠 때도 있어 달리는 기차를 멈추게 하는 일도 벌어지고
그럴 때는 기관사 아저씨들의 욕설도 들어야 했지만 기차가 서도 기관사아저씨들이 내려올 때는 동네 오빠들은
다 도망간 후라 어쩔 수 없다.
그런 놀이도 시들해져 동네오빠들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나면 우리 둘은 땅을 판다. 땅을 파다 녹슨 못이라도 찾아내야
그다음 놀이를 할 수가 있다. 녹슨 못이나 동전 그런것 들을 철길 위에 올려놓고 기차가 오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기차가 녹슨 못을 밟고 지나가고 나면 녹슨 못은 납작해져 녹 속의 철이 그대로 드러나 햇빛을 받아 빤짝이는 칼이 된다.
구부러진 못은 구부러진 대로 멋진 칼이 되어 색다른 장난감이 된다.
그렇게 장만한 반짝반짝 빛나는 칼들을 가지고 기찻길 옆 실개천에 들어가 송사리 몰이도 하고나면
손끝은 하얗고 쪼글거리는 모양이 되어 우리는 손가락을 들여다보며 깔깔거리기도 한다.
서대문 네거리 굴다리 아래쪽의 기찻길은 철로가 두 개인데 기차가 다니는 길은 왼쪽 길 뿐이다.
오른쪽 기찻길은 중간에 거적 같은것이 가려져 있고 거지들이 살고 있다는 말이 있어 무시무시한 느낌에
들여다 볼 염두도 못내고 기차가 다니는 왼쪽 길 저 건너에는 어디인지 모르지만 파릇파릇한 기운이 늘 느껴져서
언젠가는 그 끝을 꼭 가보리라 생각만 하다가 영옥이와 함께 가는 길이라 큰 맘 먹고 중간정도 가다가 언제
기차가 올지 몰라 돌아가자고 조르는 영옥이 때문에 그 기찻길 굴다리 속 끝까지는 한 번도 건너가보지 못 한 것이
늘 아쉬움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이렇게 마냥 행복하던 시절을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영옥이네가 이사 온 초여름부터 시작된 영옥이와 나의 행복했던 한 시절,한여름 뙈약볕 아래 기찻길과
실개천에서의 물장구치던 시절을 지나 동짓날 팥죽 끓여 뒷간이며 부엌 안방 건넌방 뒷간방과 대청마루
대청마루 뒤의 뒤꼍과 부엌 위의 다락에까지 팥죽을 올려다 놓고 지성껏 두 손을 비비며 기원을 하던 늦가을도 가고
손 끝이 시려워 입김을 호호 불며 김장감을 들이던 초겨울 무렵 어느 날.
엄마와 명옥이 언니 그리고 그것을 거들던 영옥이 엄마 셋이서 오순도순 이야기꽃을 피워가며 마당에
산더미처럼 부려진 김장배추며 무다발을 정리하던 그 때 대문이 우당탕탕 큰 소리를 내며 열리더니
한복에 양단 두루마기 그위에 여우털로 만들어진 숄을 걸친 낯선 아주머니와 그 아주머니의 친구인 듯 차림새와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 여인과 그 보다는 어린,딸인 듯 한 언니 세 사람이 들이 닥치는 것이다.
세 여인의 거침없는 등장으로 엄마와 명순 언니, 영옥엄마의 손길이 멈춰지고 툇마루 끝에 놓인 소금자루를
손끝으로 꾹꾹 눌러가며 간수를 빼먹던 나와 영옥의 손가락도 동시에 멈춰진 그 때.
한복 아주머니는 마당의 세 여자를 한눈으로 주욱 훑더니만 단번에 목표물을 찾아내어 날랜 독수리처럼
영옥이 엄마의 머리채를 거머쥐고 대문 밖으로 끌고 나가는 것이었다.
대문을 열어 젖혀지던 순간부터 영옥엄마가 대문 밖으로 머리채를 거머잡힌 채 끌러나간 시간까지는
거짓말 같지만 불과 몇 초 만에 그야 말로 눈 깜빡할 새에 이루어 진 일 들이라 엄마나 명순 언니나
나와 영옥이까지도 잠시 넋을 잃고 바라만 보고 있었다.
대문 밖으로 영옥이 엄마를 끌고 나가 내동댕이 치고 발로 차고 밟는 사이 친구인 듯 한 여인은 하이얀 고무신을
신은 채로 거침없이 영옥이네 문간방까지 들어가서 옷장이며 세간들을 닥치는 대로 때려 부쉈다.
그 와중에 영옥이의 그 곱고 예쁜 분홍색 부엌놀이세트도 이리저리 팽겨 쳐 지고 부숴 지고 있었다.
그 사이 마당에서 팔장 끼고 씩씩거리며 영옥이를 쏘아보고 서있는 그 아주머니의 딸. 그녀의 눈초리가 어찌나 맵던지
나한테 종주먹을 들이대며 “너도 한 패지?”하고 묻는다면 꼼짝없이 시인을 하고 말 것만 같아서 울지 못하고
잔뜩 겁먹고 움추린 영옥이 옆에서 나 또한 같이 움츠리고 앉아 겁에 질려 울먹거리고 있었다.
부술 만큼 다 부수고 대릴 만큼 다 때린 모양 침략자들의 행패가 그들의 분이 풀릴 때까지 이어진 후
한복아주머니는 그 때까지도 대문 밖에 엎어져있던 영옥엄마를 향해 캭! 가래침을 뱉듯이
“젊은 년이 할 짓이 없어서 첩질이냐.”그런 악다구니를 마지막으로 사라지고.
마당에 뒹굴던 무와 배추.
대문 밖의 영옥이 엄마의 헝클어진 머리 채와 숨죽인 흐느낌에 따라 흔들리는 어깨.
며칠 후 단촐하게 왔듯이 단촐한 이삿짐이 리어카에 실려지고 영옥이는 그렇게 떠나갔다.
유난히 밝던 초여름 햇살아래 이사를 오던 영옥이네 이삿짐이 왜 그리 단촐했는지 이제는 설명을 하지 않아도 알만한
단촐한 이삿짐을 앞세우고 영옥이와 영옥이 엄마는 우리집을 그렇게 떠나갔다.
나는 따사로운 봄볕 해바라기를 하던 그 담벼락에 기대어 늦가을 해바라기를 하며 오래도록 영옥이네가 사라진
골목 끝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또 다시 혼자 담벼락에 기대어 해바라기를 하던 나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두 계절이나 함께 산 영옥이네 가족 중 영옥이 아버지의 모습은 기억에 없는 것이다.
분명히 영옥이 엄마가 저녁 무렵 부지런한 손놀림으로 요술 같은 반찬들을 만들었던 기억들은 분명
영옥이 아버지를 위한 저녁 준비였고 영옥이의 희귀한 장난감들의 출처도 분명 영옥이 아버지에게서
온 것 임에 틀림 없는데도 마치 존재 하기는 하되 눈으로 만져지지 않는 공기나 바람 같은 그런 사람이었을까.
한복을 입고 개선장군처럼 등장했던 아주머니나 영옥이 엄마나 영옥이 세 여자와 자잘한 영옥이네 문간방 살림살이와
귀한 영옥이의 장난감들과 분명 상관이 있을 영옥이 아버지는 끝내 기억조차 되지 않는 것이 너무도 이상했다.
물론 영옥이 엄마와 영옥이의 "아버지 오실 시간이다'"는 신호는 내가 우리집 안방으로 건너가야 하는 시간을
일리는 소리이기도 하고 영옥이네 따스한 밥상머리에 내 자리는 없으니 우리집으로 가야 한다는 소리이기도 했거니와
내가 안방으로 건너가고 안방에서 평화로이 무언가 바느질거리나 뜨개질을 하고있던 우리 엄마와 명순이 언니의 목소리가
낮춰지는 시간이 대문소리가 나고 문간방에서 두런두런 세 식구의 다정한 웃음꽃이 들리는 시간과 거의 맞물리린 걸 보면
무언가 입 밖으로 소리를 내면 안되는 금기 같은 것이 공기 속에 흐르고 있어 공연히 반짓고리 속의 실타래들만
들어 올렸다 내렸다 하고는 했어도 분명히 언젠가는 한두 번쯤 보았을 법도 한데 말이다.
그러나 다시 혼자가 된 나는 심심할 새가 없어졌다.
초봄 영옥이네가 이사 오기 전부터 시작된 서대문 네거리의 우리나라 최초의 육교 공사가 마무리 되어 육교 위에는
한밤중에도 대낮처럼 밝은 가로등까지 붉을 밝히고 들어서서 동네 아이들의 새로운 놀이터가 되었던 것이다.
초여름에 데모대에 몰려다니던 큰오빠도 대낮처럼 밝은 가로등 아래에서 친구들과 만나 세상을 논하고
그 당시 유행하던 미국인과의 펜팔이야기며 미국 유학이며 미래를 논하는 동안 나는 동네 아이들과 학교 운동장에 서있던
정글짐에서만 해오던 하늘 땅 놀이를 육교 계단을 오르내리며 놀곤 해 하루하루가 어찌나 피곤하고도 즐거운지
어느 날은 밤새 요에다 지도를 그린일도 생겼다.
달도 밝던 어느 날 저녁 그날도 술래를 피해 육교 계단 끝까지 뛰어올라가느라 숨이 턱에 차서 허리를 구부리고
헥헥거리던 나의 눈에 땅강아지 두 마리가 눈에 띄었다.
크기로 보아 엄마와 자식인 듯 보이던 땅강아지 두 마리.
어느 날 갑자기 땅 위에 콘크리트가 덮여지고 육교가 세워져 흙이 귀해진 서대문 네거리 육교위에 땅 속에서 기어나와
갈 길을 잃고 사람들 발길을 피해 우왕좌왕하는 땅강아지 두 마리를 본 순간 나는 눈물이 왈칵 쏟아져서 그 자리에 쪼그려 앉고 말았다. 육교 저 아래에서 술래가 쪼그려 앉은 나를 잡기위해 두 계단씩 올라오고 있었지만
눈물 그렁그렁 맺힌 나의 눈에는 조촐한 세간을 리어카에 얹고 떠나가던 영옥이네 모녀가 보이는 듯도 하여
나는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이 겨울만 지나면 나는 여덟살이 되고 드디어 학교엘 간다.
그러면 눈물나게 맵던 최루탄의 기억도 엄마 손에 이끌려 조그마한 리어카를 따라가며 자꾸 뒤 돌아 보던
영옥이도 차차 잊혀 질 것이다.
대낮처럼 밝은 가로등 아래에서 숨을 곳이 없어진 땅강아지 두 마리 우왕좌왕 하는데
육교 위 저 먼 곳에서 겨울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첫댓글 어릴적 회상에 푹익은 인간애로 두모녀를 그려낸 단편. 꽉찬 생각들이 꼬물꼬물 땅강아지처럼 기어듭니다. 두모녀와 숨을곳 없어진 땅강아지의 비유는 아찔할 정도로 감동입니다.
여러분들 덕에 용기도 내보고 욕심도 내봅니다.저 어릴적엔 서울도 나름의 정취가 있었다는 기억도 나구요.... 그런 기억들을 기록도 하고싶다는 생각에...어줍짢은 글이지만...과감하게 올렸습니다.
동임~ 바쁜 중에도 좋은 글 감동입니다. 앞으로 짚신 작품방값이 금값 일겁습니다~^^
신동임님 소설 창작 솜씨가 상당합니다 어린날 서대문 중심의 시대적 변화 속에 겪은 이야기가 흥미롭습니다 회상 소설인데 사건은 학생들 한일굴욕외교 반대 시위의 정치적 사건,영옥 엄마의 부조리한 인생사건 두개인데 더욱 다듬어진 문장력으로 구성을 더 긴장감 있게 잘 다듬어 보기 바랍니다 소질 큽니다 힘 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