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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김씨, 가장 많은 성씨로 2000년 현재 전국에 412만명>
김해김씨는 가락국의 시조 수로왕을 시조로 하는 성씨로 우리나라에서 수가 가장 많은 성씨다. 2000년 현재 전국에 4,124,934명이 있다.
수로왕의 탄생설화에 관해서는 삼국유사에 실린 ‘가락국기’에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김해김씨의 시조인 수로왕이 가락국을 창건한 것은 서기 42년 (후한 건무 18년)이다. 수로왕이 나라를 세우기 전에 가락의 땅에는 나라의 이름이나 군신의 칭호가 없었다.
다만 여러 부족들의 추장들이 백성을 통솔하고 있었으니 그들은 아도간. 여도간. 피도간. 오도관. 유수간. 신천간. 유천간. 오천간. 신귀간 등 등 9간이었다.
서기 42년 3월 이들의 제삿날에 구지봉 산정에서 이상한 소리와 기운이 있어 2백, 3백여 명이 모였다.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어라. 내지 않으면 구워서먹으리”
노래하고 춤을 추며 기원을 하던 중 한 줄기 붉은빛이 하늘에서 내려 달려가 보니 해 같은 황금알 여섯이 금합에 담겨져 있었다. 다음 날 여섯 개의 황금알은 동자로 화했고 그 중 먼저 나온 동자 이름은 수로라 짓고 금합에서 태어났다 하여 성을 김씨로 하였는데, 그가 바로 대가락국의 시조 김수로왕이다.
6개의 알에서 화생한 동자 중 첫 번째의 수로는 대가락국(가야국이라고도 함)의 왕이 되었고, 다섯 동자들도 각각 5가야의 국주가 되었으니 아라가야(현 함안지방), 고령가야(현 함양지방), 대가야(현 고령지방), 성산가야(현 성주지방), 소가야(현 고성지방)였다.
대가야(김해)를 중심으로 하여 동쪽으로는 황산(신라국경), 서쪽으로는 지리산, 남쪽으로는 남해에까지 이르러 지금의 경상도 일원을 통치하기에 이르렀다.
수로왕은 즉위한 6년 뒤 아유타국(지금의 인도)의 공주 허황옥을 비로 맞이하여 10왕자, 2공주를 두었다.
10왕자 중 장자인 거등왕자가 왕위를 잇고 둘째, 셋째 왕자는 모성을 따라 허씨로 계승하였다.
그리고 나머지 7왕자는 옥보선인을 따라 가야산에서 운상원으로 들어가 수도, 부처가 되었으니, 지금도 경남 하남군에 칠불사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와 같은 허씨의 모성 계승을 우리나라 고대의 부계사회와 모계사회와의 접합현상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거등왕으로 이어지는 김수로왕의 후손들이 바로 김해김씨를 이룬다.
대가야는 532년 구형(구해)왕에 이르러 신라에 항복하여 나라가 망한다. 신라에서는 병합된 대가야 유민들의 민심 수습을 위해 구형왕에게 대등의 위를 주고 본국 김해를 식읍으로 하사하였다. 즉 가야왕족은 신라의 신골신분에 포함되었다. 구형왕의 셋째 아들(족보에는 둘째 아들로 되어 있음) 김무력은 신라에서 벼슬이 각간에 이른다. 그의 손자 김유신이 태종무열왕으로 맺어지고 삼국통일에 큰 공을 세워 흥무대왕에 봉해짐으로써, 이 집안은 심라의 골품체제 내에서도 최고 가문의 하나로 자리잡을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김해김씨는 김유신을 중시조로 받들고 있다.
김해김씨는 역사가 길고 자손이 번성한 만큼 후손들에 이르러 나누어진 분파도 1백48개에 이른다.
(김해김씨 삼현파)
김해김씨 삼현파의 삼현은 김극일, 김일손, 김대유를 가리키다.
김극일은 김해김씨 삼현파(판도판서공파)의 파조인 김관의 5세손으로 일찍부터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했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조모가 병으로 눕자 단지로 피를 흘려 넣어 그 병을 낫게 했다. 뒷날 조모가 세상을 떠나자 묘막을 지어 시묘의 예를 올렸고 조부상에도 조석으로 성묘하여 정성을 다하니 호랑이가 나와 길동무가 되어 주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세종 때 조정으로부터 효자정문이 세워졌다.
그의 2남 김맹이 세종 때 문과에 올라 집의에 이르렀다. 맹의 세 아들 준손. 기손. 일손이 모두 당대의 문장으로 과거에 올라 ‘김씨삼주(金氏三珠)’라는 호칭을 들었다.
김준손은 직제학에 이르렀고, 김기손은 이조정랑을 지냈는데 이 가운데서도 탁영 김일손이 가장 돋보인다.
김일손은 점필재 김종직의 문인으로 성종17년 생원이 되고, 같은 해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 예문관에 등용된다. 여러 청환직을 거쳐, 뒤에 이조정랑이 되었다.
성종 때 춘추관의 사관으로 있으면서 관리들의 비행을 직필함으로써 관리들로부터 원한을 사게 되었는데, 전라관찰사 이극돈에 대한 사초가 문제가 되었다.
연산군 4년 성종실록을 편찬할 때 공교롭게 이극돈이 당상관으로 참여, 사초를 살피게 되었다. 그때 김일손의 스승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이 말썽이 되었다. 이는 옛날 항우가 초 양왕을 죽인 중국의 고사에 비유, 세조의 왕위찬탈을 풍자한 글이다. 이극돈, 노사신, 한치형 등이 들고 일어나 김종직은 부관참시되고 김일손 등 일족은 참수당하거나 유배되고 만다.
탁영은 시가와 문장에 뛰어났으며 ‘탁영집’이 전한다. 이 시문집은 초간연대는 미상이나 1669년에 중간되었다. 1-4권에 시문이, 5권에는 습유가, 6권엔 행장. 묘문. 제문. 사향에 관한 기술 등이 실려 있다. 중종반정 후에 도승지에 추증되었으며 목천 도동서원, 청도 자계서원에 제향되었다.
그는 35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했고, 그의 형 동창 김준손은 호남에 유배되었다. 김준손의 아들 삼족당 김대유는 무오사화로 숙부 김일손이 사형되고, 아버지와 함께 호남에 유배되었다가, 중종반정 후에 풀려나왔다.
다음해 진사가 되고 전성서직장을 지내다가 1519년 현량과에 병과로 급제, 전적, 호조좌랑, 칠원현감 등을 역임했다.
이해 칠원군수를 지내다 기묘사화가 일어나 현량과가 없어지자 고향인 청도 운문산에 은거하며 유유자적 시서로 만족했다.
그의 호 삼족당은 60을 살았으니 나이도 족하고 벼슬도 족하고 의식주도 족하다 하여 지어진 것이었다. 뒷날 남명 조식은 묘지에 짓기를 “기개가 세상을 덮을 만하던 영웅이 이제는 없어졌으니 아아 애달프다. 내가 일찍이 남을 보증한 적이 없고 천하의 선비로 인정하는 이는 오직 공뿐이다”라고 했다.
김관 은 판도판서공파의 파조다. 일찍이 벼슬이 판도판서. 국자사에 이르렀는데, 충선왕 때에 누차 부도(불교)를 배척하고 학교를 세워 유학을 진흥시키자고 상소하였다. 고려말 불교배척에 앞장섰던 유학자 중의 한명인 셈이다.
( 김해김씨 사군파 )
사군파의 파조는 김익경(金益卿)이다. 그의 손자 김진문(金振門)은 고려 말에 예의판서를 거쳐 대제학에 올랐다. 그러나 조선이 개국하자 관직을 버리고 이색, 박자검등과 함께 은둔 생활을 하며 절의를 지켰다.
그의 둘째 아들 김추 는 도총관, 넷째 아들 김석 은 찬성사를 지냈다. 막내 김조 는 세종 때 집현전수찬을 거쳐 예조판서에 올랐다. 특히 직제학을 역임할 때 장영실과 함께 간의대, 자격루, 혼천의 등을 만들었다.
김조 는 충신으로서도 이름이 났다. 세종이 평소의 소원을 묻자 "백 년 동 안 날마다 어탑(임금이 앉는 제구)을 모시고 진퇴를 엎드려 묻기를 원합니다" 라고 대답한 것으로‘필원잡기(筆苑雜記)’에 전한다.
김진문의 6세손 김극희는 명사수로 이순신 장군의 막하에서 전공을 세우고 한산도 싸움에서 전사했다. 그의 조카 김완 은 역전의 명장으로 이름을 날렸다. 임진왜란 때 남원대첩에 공을 세웠던 그는 1624년(인조 2년) 이괄의 난을 평정 할 때 벽동(碧潼)의 성을 사수했다.
김여준은 볼모로 잡혀가는 소현세자(인조의 맏아들-인열왕후 한씨의 소생)와 인평대군을 호종한 18장사(壯士)의 한 사람이다. 중국 심양에 갔을 때 옥하관(玉河關)에서 세자를 소리내어 울렸다는‘월명비안(月明飛雁)’의 노래를 읊어 더욱 명성을 떨쳤다. 세자가 돌아와 즉위한 다음에도 이 슬픈 기쁨과 옥하관의 달밤 일을 못 잊어 과거의 시제(時題)에‘월명비안(月明飛雁)’의 노래를 자주 출제했다.
송상현, 유극량과 더불어 삼충절(三忠節)로 일컬어진 김동광은 회양부사로 있을 때 임진왜란 일어나 성이 함락되었다. 당시 그는 성 앞에 조복단장한 채 관인을 쥐고 왜군에 저항하다가 숨졌다.
( 김해김씨 경파 )
경파의 파조인 김목경(金牧卿)이다. 그는 고려 충정왕 때 조적 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김녕군(金寧君)에 봉해졌다. 당시 혼란한 국정을 개탄하여 정당문학 이조년과 함께 누차 왕에게 상소 했으나 듣지 않자 속리산으로 들어가 세상과 인연을 끊고 여생을 마쳤다. 그래서 후손들이 김녕군파 혹은 경파로 삼았다.
이후 후손들이 서울울 중심으로 거주하여 경파라 칭하였고, 시조의 존함을 빌어 목경파라 칭하였다. 경파의 후손들은 조선시대에 이르러 높은 관직에 이르지 못하여, 위세를 떨치지 못하였으나, 이조참판, 부사, 판서, 판관 등의 벼슬을 하였다. 김목경의 네 아들이 파를 이루어 횡성공파, 안경공파, 참판공파, 석성공파 등 현재 11개 파로 나뉘었다.
김목경의 맏아들 김보(金普)는 공민왕이 세자 때 국가의 사절로서 중국의 북경에 갈 때 시종한 공으로 일등공신의 호를 받았다. 김보 의 6세손 김영견(동지중추부사), 김영서(현감), 김영정(성종 때 대사헌), 김영순(한성판관) 등 4형제가 빼어났다. 숙종 때 명신 김우항은 김영정의 후손으로 1713년(숙종 39년) 우의정에 올랐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김해김씨 경파(京派) 70대손,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는 72대손이다.
( 김해김씨 안경공파 )
김해김씨 안경공파(安敬公派)의 파조는 김영정(金永貞)이다. 그는 조선조 초에 지돈녕부사(왕친의 외척 일을 맡아 보던 정2품관) 등의 벼슬을 하고 안경(安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중조(中祖)는 고려 말경의 금녕군(金寧君) 김목경(金牧卿)이다. 따라서 안경공파는 금녕군파(=경파)의 지파다. 김목경 이하를 별칭으로 경파(京派), 김영정 이하 자손들을 안경공파라고 한다.
세수(世數)는 중조(中祖) 김목경 대부터 기산(起算)하여 7세(世)에 영견(永堅), 영서(永瑞), 영정(永貞), 영순(永純)이다.
김유신과 김해김씨
김해김씨의 중시조 김유신은 구형왕의 증손자로 신라 왕실인 만명 부인에게서 태어났다. 진평왕 31년 화랑이 되어 용화향도를 거느리면서 심신을 수련했다.
629년 중당의 당주로서 낭비성 전투에 출전하여 고구려 군을 격파했다. 압량주 군주가 되었다. 선덕여왕 13년 소판이 되어 상장군에 오르고, 백제군과 여러 번 싸워 이겼다.
선덕여왕 1년 반역을 꾀한 비담과 염종의 반군을 토벌하였다. 648년 백제의 대량주를 공격하여 12성을 함락, 이식이 되어 상주행군대총관에 올랐다. 다음 해 침입한 백제군을 도살성에서 격파했고, 654년 왕이 후사가 없이 죽자 알천과 상의, 김춘추를 왕으로 추대했다.
660년(무열왕 7) 상대등이 되어 당나라 소정방과 연합, 사비성을 함락시켜 백제를 멸망시킨다. 이로써 신라의 삼국통일 기반을 튼튼히 했다. 문무왕3년 백제의 부흥군을 토벌하고, 667년 당나라 군사와 함께 고구려 정벌에 나섰다가 실패한다.
다음해 연합군의 대총관이 되었으나 병으로 출전하지 못했다. 고구려 정벌 후 신라의 최고 위계인 태대각간에 올랐다. 문무왕 13년(673)에 죽었는데, 왕명에 의해 장례를 지내고 비문을 세웠으나 지금 전하지는 않는다. 그 후 1백60여년이 지나 흥덕왕 10년(835)에 ‘순충장열 흥무대왕’의 시호가 추증되었다.
김흠순은 김유신의 동생이다. 진평왕 때 화랑이 되고, 무열왕 7년 형 유신과 함께 5만 군사를 거느리고 당 군과 호응하여 백제 유민들의 반란을 토벌했다. 668년 대당총관으로 김인문과 함께 고구려 정벌에 참전했고, 다음해 양도와 함께 사죄사로 당나라에 갔다가 다음 해 귀국했다. 김유신은 무열왕 김춘추의 셋째 딸과 결혼하여 5남 4녀를 낳았다. 그 중 둘째가 유명한 원술이다.
당은 멸망된 고구려. 백제 옛 땅을 당의 영토로 편입하려고 했다. 그러나 신라가 백제, 고구려의 유민과 힘을 합쳐 당의 세력을 쫓아 내려하자 문무왕 12년(672)에 말갈과 연합하여 신라에 쳐들어왔다.
원술은 비장으로 출전, 대전하다 전세가 불리하여 부하 담릉의 권유로 뒷날을 기약하고 후퇴했다.
왕이 패전 이유를 묻자 김유신은 “장군과 병졸이 목숨을 걸고 병영을 지켰어야 하는데 원술은 말을 돌려 달아났으니 왕명을 욕되게 했을 뿐 아니라 임전무퇴의 가훈 까지 어겼으니 참형을 하는 것이 옳은 일입니다”고 하였다. 원술은 부끄럽고 두려워 아버지 김유신을 보지 못하고 시골에 숨어 살았다.
김유신은 죽은 뒤 어머니 뵙기를 청하였으나, 어머니 만명 부인은 “삼종의 뜻에 따라 남편이 없는 지금 의당 자식을 쫓을 것이나, 원종 같은 자식은 이미 선군에게 자식의 도리를 못했으니 내 어찌 그의 어머니가 되겠느냐”며 만나 주지를 않았다.
이에 원술은 탄식하며 태백산으로 들어갔다. 문무왕 15년(675) 당병이 가소주성(양주)에 쳐들어오니 원술은 지난날의 욕됨을 씻기 위해 다시 출전, 공을 세우고 상을 받았다. 그러나 부모에게 용납되지 못한 자식임을 한으로 여겨 죽을 때까지 벼슬길에 오르지 않고 화개에 식읍을 받았을 뿐이다. 그의 후손은 진주김씨로 분적을 했다.
김암 은 유신의 현손으로 김윤중의 서손이다. 천성이 총명하고 민첩하였으며 젊어서 이식이 되었다. 당에 들어가 숙위하였는데, 틈틈이 음양가법을 배워 일가를 이루었다.
혜공왕 때 돌아와 사천대박사가 되었고, 양주(양산), 강주(진주). 한주(광주) 등 3주의 태수를 역임하고, 집사시랑, 패강진두상을 지냈다. 외관으로 나가 이르는 곳마다 백성을 위무하고 여가에 병법을 가르쳐 사람들이 편하게 여겼다. 패강진두상으로 있을 때 황충의 해를 구했다.
김유신을 정점으로 하여 최고의 영화를 누렸던 김해김씨는 그 이후 그만한 가세를 유지하지는 못했다. 고려에서는 정승급 15명, 명신.공신 10여 명과 장군 8명, 제학 11명을 배출하였다.
대가야는 532년 구형(구해)왕에 이르러 신라에 항복하여 나라가 망한다. 신라에서는 병합된 대가야 유민들의 민심 수습을 위해 구형왕에게 대등의 위를 주고 본국 김해를 식읍으로 하사하였다. 즉 가야왕족은 신라의 신골신분에 포함되었다. 구형왕의 셋째 아들(족보에는 둘째 아들로 되어 있음) 김무력은 신라에서 벼슬이 각간에 이른다. 그의 손자 김유신이 태종무열왕으로 맺어지고 삼국통일에 큰 공을 세워 흥무대왕에 봉해짐으로써, 이 집안은 심라의 골품체제 내에서도 최고 가문의 하나로 자리 잡을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김해김씨는 김유신을 중시조로 받들고 있다.
김무력은 진흥왕 14년 백제 동북의 땅을 취하여 신주를 설치하였을 때 군주가 되었다. 관산성 싸움에서 신주병을 거느리고 출전하여 성왕이 이끄는 백제군을 크게 물리치는데 기여하였다.
김서현은 진흥왕의 조카 만명 부인과 결혼하였다. 각간에 올라 대량주도독을 지냈다. 진평왕 51년 (629)에 소판으로 각간 김용춘 등과 함께 고구려의 낭비성을 공격하고 있을 때 아들 김유신이 적장을 베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김해김씨는 역사가 길고 자손이 번성한 만큼 후손들에 이르러 나누어진 분파도 1백48개에 이른다. 김유신의 직계종파는 고려의 김목경을 중조로 하는 경파(금령군파)와 그의 아우 김익경을 중조로 하는 사군파(감무공파), 김관 을 중조로 하는 삼현파(판도판서공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