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5일 대전 이응노미술관에서 열린 <연민> 전시회에 다녀왔습니다. 이응노미술관을 방문하여 한국 근현대 미술의 거장인 고암 이응노 화백의 작품들과 함께 김선태, 오완석, 김기태, 고산금 등 현대 작가들의 다채로운 작품들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번 전시는 전통적인 동양화의 정신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고암의 세계관을 필두로, 오늘날 작가들이 저마다의 방식과 매체로 세상과 소통하는 흔적을 보여주는 뜻깊은 자리였습니다.
가장 먼저 눈길을 끈 것은 고암 이응노 화백의 문자 추상 작품들이었습니다.《구성》 연작은 문자가 더 이상 정보를 전달하는 도구가 아닌, 그 자체로 아름다운 조형예술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특히 황토색 빛의 《구성》은 흡사 고대 상형문자나 픽토그램들이 유쾌하게 살아 움직이는 듯한 생동감을 주었습니다. 글자의 획이 자유롭게 뻗어나가고 춤을 추듯 만들어낸 화면은 전통이 어떻게 현대적인 감각으로 진화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것 같았습니다.
다음으로 인상깊은 작품은 고산금 작가의 작품들이 었습니다. 고산금 작가의 연작들은 예술적 치환의 정수를 보여주었습니다. 멀리서 보았을 때는 미니멀한 색면 추상인가 싶었지만, 가까이 다가서 봤을때 붉고 푸른 바탕, 혹은 짙은 초록색 바탕 위에 깨알처럼 박혀 있는 것은 수천 개의 작은 인조 진주들이었습니다. 작가는 시나 소설, 법전 같은 텍스트의 글자 하나하나를 진주라는 물질로 치환하여 고정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읽고 이해하던 언어를 완벽히 지워버리고, 오직 시각적인 체적과 질감으로만 남겨둔 것입니다. 붉은 화면 위의 은빛 진주들은 마치 밤하늘의 은하수 같기도 했고, 거대한 데이터의 바다 같기도 했다. 언어가 가진 의미의 굴레를 벗어나서 표현한 것이 정말 인상 깊었습니다.
또 다른 인상 깊은 작품은 김기태 작가님의 양치기 이야기였습니다. ㄱ자로 꺾인 거대한 화면은 왼쪽의 밝은 연두색 숲에서 오른쪽의 깊고 어두운 숲으로 색조가 자연스럽게 변화하며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주는 작품이였습니다. 가장 흥미로웠던 점은 그림이 그려진 방식이었습니다. 한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화면이 전시실 구석의 꺾인 벽면을 따라 설치되어 있었는데, 마치 관객인 내가 울창한 숲 한가운데에 갇혀서 주변을 빙 둘러보는 듯한 묘한 몰입감을 주었습니다.
사실 천안에서 대전까지 이동해 전시를 관람하는 여정이 생각만큼 쉽지는 않았습니다. 게다가 지금까지는 무료 전시만을 접해왔는데, 제 돈으로 직접 관람료를 지불하고 본 전시는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작품 하나를 보더라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캡션의 설명과 작가의 의도를 더 꼼꼼히 읽으며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그리고 깊이 있게 감상하게 되었습니다. 이동하느라 몸은 조금 피곤했지만, 비용을 들인 만큼 예술을 대하는 태도도 더 진지해질 수 있었던, 여러모로 뜻깊고 값진 경험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