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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금란회(舊 02학번과 함께한 방) 원문보기 글쓴이: 자존심(이귀옥)
서울대 박한제 교수
중국문명을 낳고 키워 온 黃河가
이제는 중국인들에게 잊어버려야 할 대상으로 매도되고 있다.
중국인만큼 옛것을 끔찍하게 사랑하고 고이 간직해 온 민족도 없을 것이다.
세상이 바뀌니 인심도 변하고 있다.
100여년 간의 고통과 가난을 수천년간이나
그들의 역사를 만들어 왔던 黃河 탓으로 돌리는 것이다.
지중해에서 발원한 서양의 해양문명에 추월당한
동양의 내륙농업문명을 이끌어 왔던 黃河는
곳곳이 잘리고 막혀 이제 그 물길을 어디로 돌려야 할지 모르고 있다.
黃河를 매도하는 것은 중국의 역사를 휴지통에 넣는 일과 다르지 않다.
가난을 부모 탓으로 돌리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은 없다.
세계의 용마루 靑藏高原에서 발원한 黃河는
그 曲折마다 역사적 흔적을 숱하게 남긴 채
5,464㎞의 긴 길을 따라 흘러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黃河를 이야기할 때면 문득 떠오르는 오랜 갈망의 땅이 하나 있었다.
黃河의 중류 三門峽에 있는 작은 돌섬인 ‘砥柱’가 바로 그것이다.
그간 三門峽市를 10여 차례나 지났으나 막상 진짜 三門峽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지난 겨울 드디어 마음먹고 砥柱를 찾았으나 옛날의 그것은 결코 아니었다.
억겁동안 黃河 가운데 우뚝 서 억센 회오리 물결을 만들었던 砥柱는
이제 스스로 옛날의 기개를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바로 위쪽 500m도 안 되는 거리에 거대한 댐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중국인들도 그 작은 돌섬의 역사를 굳이 기억하려 하지 않았다.
그런 중국인들의 모습이 너무 안타깝다.
歷史를 내팽개치는 사람이 어찌 중국인들뿐이랴!
歷史를 몰라도 밥 먹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다는 인식이 고착되어 버린 지금,
나는 이렇게 외치고 싶은 것이다.
‘黃河는 그래도 굽이굽이 동쪽으로 흘러가야 한다’고….
황하(黃河)는 중국인의 어머니다.
중국인들은 황하에서 태어나 황하에서 자랐다고 한다.
황하는 중국인의 성격을 창조하였으며 중국문명의 운명을 규정하였다.
중국인의 황색 피부는 이 황하에 물든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중국인들의 시조를 황제(黃帝)라 부른다.
중국문명에 끼친 황하의 영향에 비견될 만한 다른 자연적 힘은 없었다.
그만큼 황하는 중국인들에게 절대적이었다.
중국인들은 황토에서 나서 자라고 그곳에 묻혔다.
황미(黃米:기장)와 황두(黃豆:콩)를 먹고 황토산에 땅굴집인 요동(窯洞)을 짓고
누런 진흙물을 마시고 살다가 죽어서는 누구나 황천(黃泉)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황하는 중국인에게 항상 인자하기만 한 어머니는 아니었다.
그들에게 수많은 시련과 아픔을 안겨 주었다.
그 시련을 극복할 수 있었기 때문에 중국문명은 이제껏 지속될 수 있었고,
그만큼 위대할 수 있었다.
끊임없는 고통을 주어도 황하는 결코 원망의 대상이 아니었다.
황하는 하늘에서 내려와 수없이 곡절(曲折)을 겪고는
한번 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바다를 향해 굽이굽이 동쪽으로 흘러간다.
우리 인생이 한번 가면 돌아오지 못할 길을 가는 것처럼 그저 흘러가는 것이다.
황하의 이런 모습은 천재시인 이백(李白)으로 하여금
술을 들고 시(將進酒)를 쓰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던 것이다 .
그대 보지 못하였는가,
황하의 물이 하늘에서 내려와(君不見黃河之水天上來)
바다로 흘러흘러 다시는 돌아오지 못함을(奔流到海不復回)
그대 보지 못하였는가,
고대광실 양반네들 거울 속 백발 슬퍼함을(君不見高堂明鏡悲白髮)
아침에 칠흑같던 머리 저녁에 백발이 되었다네(朝如靑絲暮成雪)
근대 이전 전통시대 중국인들에게 황하는 이렇게 특별한 것이었다.
황하는 중국문화를 꽃피웠고 이제껏 중국사람을 먹여살려 왔다.
"황하는 낙양을 살찌게 하여 1,000가지 꽃을 자라게 하고(滋洛陽千種花)
양원의 만경의 땅을 기름지게 하였도다(潤梁園萬頃田) "
라는 시구는 조금도 과장된 것이 아니었다.
중국인들에게 이렇게 절대적이었던 황하가 최근 중국인들에게 매도당하고 있다.
1988년 양차에 걸쳐 중국중앙텔레비전(CCTV)에 방영되어
폭발적인 반향을 일으킨 6부작 “하상”(河禾)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면서 시작한다.
“중국이 어쩌다 이런 만신창이 나라가 되어 버렸는가?”
“도대체 중국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서구의 침략 이후 지금까지의 100여년간
대를 이어가며 고난의 쓰디쓴 열매를 삼키며 살아왔고
또 막막한 앞날을 바라보며 살아가야 하는
중국인들의 암담한 현실을
작자는 바로 이 황하 때문이라고 절규하고 있는 것이다.
“용의 후예들이여!
황하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일찍이 우리 선조들에게 다 주어버렸다.
우리 선조가 창조한 문명과 같은 영광을 황하가 다시 낳을 수는 없다.
우리가 창조해야 하는 것은 참신한 문명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미 우리 민족의 혈관 속에 가라앉아 쌓인
황하가 날라다 준 낡은 침전물을 깨끗하게 씻어버려야 한다.”
이것이 “하상”의 작가가 내린 결론이다.
그는 다시
“(황하가 낳은) 풍부한 역사, 그리고 유구한 문명은 이제는 모두 과거의 이야기이다.”
“중국문명은 이미 쇠퇴하고 말았다”고 자조한다.
지난 100여년간에 걸친 현실적인 고통에 위안을 주고
진정제 역할을 하기도 했던 ‘유구한 역사’,
그리고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던 고고학적인 유물의 발견이
결코 밥을 먹여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서세동점(西勢東占) 이후 나타나기 시작한 ‘재난’의 원인으로
이제껏 금기시했던 중국문명의 근원까지 거론함으로써
심층적으로 소급해 비판하려는 비장함을 내비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전통의 가치를 추구하기 위한 ‘뿌리 찾기’가 아니라
전통을 도려내기 위한 ‘뿌리 파헤치기’작업인 것이다.
발전의 걸림돌로 치부되는 황하
황하가 중국인들에게 남긴 유산이 무엇이길래
그들은 모든 탓을 이렇게 황하에 돌린다는 말인가?
“하상”의 이론적 근거가 된 것은
김관도(金觀濤)가 지은 “흥성과 위기”(興盛與危機)라는 책이었다.
김관도에 의하면 중국 전통문명의 특질은 한마디로 ‘안정지향구조’라는 것이다.
‘민주’(民主)와 ‘과학’(科學)이라는 근대문명의 두 가지 결정체가
서방세계에서 성장하고 꽃피었으나
왜 중국에서는 열매를 맺지 못했는가라는 논제에 대해
황하가 생산해 낸 내륙문명은
근본적으로 민주와 과학을 발전시키는 데 부적합했기 때문이라는 결론이다.
즉, 황하가 낳은 문명이란 부족한 물의 공급과
그 해결을 관건으로 하는 전형적인 내륙농경문명이었다.
물에 관한 한 무진장인 지중해에서 발원한 해양문명과는 출발부터 다른 것이었다.
문명 창조의 활력을 잃었으며, 마침내 스스로의 존립 근거마저 잃고 말았다는 것이다.
최근 100여년간 중국인들이 서구에 정복당한 수모와,
지금도 참담한 빈곤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를
심각하게 고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황하가 정치·사회 등 제반에 가져다 준 상처라는 것을….
그래서 중국인이 황하가 낳은 과거 유산으로부터 탈출하지 않는 한, 희망이 없다는 것이다.
“황하가 중국인들에게 가져다 준 상처는 이렇게 중국인들로 하여금 더 넓은 바다로
눈을 돌리지 못하게 하고 황하에 매달려 살아가기를 강요한 것이었다.
중국 역사 속의 역대 제왕들은 황하를 다스린다는 명목으로 백성들을 얽어맴으로써 스스로의 자리를 안정시켰다.
진한(秦漢)제국 성립 이후 19세기 중엽까지 2,000여년동안 왜 중국은 봉건(封建)의 늪에서 헤쳐 나오지 못했는가?
즉, 소농경제(경제구조)가 강력한 왕권(정치구조)과 결합함으로써
중국의 봉건제도는 안정된 상태로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이다.
‘중국사회의 초안정(超安定)시스템’이 구축된 것이다.
여기에 한몫 거든 것이 유교사상(의식구조)이었다.
유교로 무장한 지식인들은 농민에 비해 수적으로 현저한 열세임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정보와 통신수단인 문자를 장악하는 관료로 봉사함으로써 봉건제 유지에 일조했다.
전통에 매달리는 수구적인 유생 출신 관료들은 과학의 발전을 가로막았다.
즉, 전통중국은 한마디로 ‘흥성(興盛) 속에 잠재한 위기(危機)’였다”는 것이다.
TV극 “하상”의 첫머리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노래가 구슬프게 울려 퍼진다.
그대는 아는가/ 하늘 아래 황하가 몇 십 굽이를 돌아 흘러가는지를?/
돌고 도는 굽이마다/ 몇 십 척의 배가 있는지를?/
수십 척의 그 배들 위에는/ 또 얼마만큼의 삿대가 드리워져 있는지를?/
돌고 도는 그 굽이마다/ 몇 십 명의 사공이 노 저어 가는지를?/
작가는 지금도 여전히 황하에 의존하면서 살아가는
중국인들이 많은 현실을 안타까워하는 것이다.
중국의 유구한 역사 속에서 황하가 이처럼 매도당한 적이 있던가?
이 ‘황하’에 매달려 살아가는 사람은 중국인들만이 아니다.
이렇게 잊어버려야 할 역사, 그것도 나의 것이 아닌 남의 나라 역사에 매달려
이러쿵저러쿵 토를 다는 것으로 밥을 먹고 있는 필자도
분명 매도 대상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IMF 이후 학문의 실용성 제고라는 명제 앞에
“도대체 당신은 지금 연구실에 쭈그리고 앉아 무얼 하고 있는가?”라는
나무람이 오늘도 여전히 사회로부터 빗발치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가 처음으로 황하를 직접 대면한 것은
1991년 1월말 한국동양사학회와 베이징(北京)대학 역사학과가
공동으로 주체한 국제학술토론회에 참석한 후 여행길에 나섰을 때였다.
‘은허’(殷墟)로 유명한 고도 안양(安陽)에서 버스를 타고
정주(鄭州)로 가는 도중에
글로만 대하던 황하를 직접 만나게 된 것이다.
황하대교 중간에 잠시 버스를 세워두고
황하를 바라보면서 탄성을 질렀던 사람은 결코 필자만이 아니었다.
학회에 참석하고 같은 코스의 여행단에 참가했던 30여명이
모두 감탄해 마지않았던 이유는
그토록 위대한 황하를 직접 만났다는 것 하나뿐이었다.
유역은 강둑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엄청나게 넓었지만
물이라곤 우리 고향 개천보다 더 적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역시 황하로군!”이라며 수군거렸다.
황하는 우리에게 그렇게 위대했다. 아니 우리는 이렇게 황하에 홀려 있었다.
그 이후 황하를 셀 수 없이 만났고 또 그 모습을 한번이라도 더 보기 위해 많은 애를 썼다.
그러나 지금까지 만났던 황하의 부분은
중국 역사 가운데 필자가 연구하는 영역이 그러한 것처럼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 황하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는 것이 조심스럽기만 하다.
황하는 굽이굽이 곡절 많은 중국 역사의 상징
황하는 5,464㎞이지만 발원지인 황하원두(黃河源頭:河源)에서
바다까지의 직선거리는 2,160㎞이니
그 물길에 곡절이 얼마나 많은지 쉽게 짐작이 간다.
‘동서로 구주를 관통하고 남북으로 백천을 꿴다’(東西貫九州 南北串百川)고 하듯
청해 사천·감숙·영하·내몽고·섬서·산서·하남·산동 등 9개성을 통과하면서
집수(集水)하는 면적만 75만㎢의 대하다.
하원과 하류의 낙차는 자그마치 4,831m이다.
중국의 각종 “지리서”에서는 통상 ‘하’(河)라 지칭되지만,
이 강은 약 200만년동안 퇴적을 거듭해
이제는 두께 10∼200m나 되는 황토층을 가지게 된
황토고원(黃土高原: 해발 800∼2,000m)지대를
지나면서 황색으로 변하므로 ‘황하’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다.
‘세계의 용마루’(屋脊)라는 청장고원(靑藏高原)의 동북부에 있는 바얀카르(巴顔喀拉)산맥 북쪽 기슭,
‘별이 잠드는 바다’(星宿海)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하원에서 흘러나온 황하는
동쪽으로 바다를 향해 굽이굽이 흘러간다.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바다를 찾아간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전설에는 우(禹)임금이 치수사업을 통해 황하의 물길을 인도하였다(導河)고 한다.
우임금이 없었다면 황하는 지금도 저 넓은 중국 대륙을 헤매고 있을지 모르지만,
‘구곡황하’(九曲黃河)라는 말이 있듯
사실 황하의 하도를 살펴보면 정말 굽이굽이 곡절도 많다.
중국 역사가 그랬던 것처럼….
황하가 동류(東流)한다고 보면, 이 말과 가장 맞지 않는 부분이 중류지역이다.
하원에서부터 ‘지’(之)자 걸음을 하던
황하는 감숙성 수도 난주(蘭州)를 통과하면서 북쪽으로 방향을 튼다.
고도가 높은 북방 몽고고원을 향하다 보니 힘이 부쳤던지
이제껏 안고 왔던 황토를 유역에 내려놓고 흘러간다.
그래서 영하회족자치주(寧夏回族自治州) 수도 은천(銀川) 근방에
‘새상(塞上)의 강남’이라는 광활한 평야가 생겼다.
그리고는 내몽고자치주 임하(臨河)에서 90도로 꺾어 동으로 흐른다.
예부터 ‘황하는 100곳에 해를 주었지만 오직 일투에 부유함을 가져다 주었다’
(黃河百海 惟富一套)는 말이 생긴 것이다.
이렇게 하도가 90도로 꺾이는 것을 ‘절’(折)이라 하는데
황하에는 삼절(三折:臨河折·托克托折·潼關折)이 있다.
동류하던 황하는 산서성의 운중산(雲中山)과 여량산맥(呂梁山脈)에 막혀
그 물길을 다시 남으로 돌리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런 과정에서 내몽고 수도 호화호특(呼和浩特) 부근
지역(前套)에 비옥한 토지와 적당한 관개를 제공하니
섬서성과 산서성을 가르는 진섬(晉陝)계곡에 들어서면서
황하의 물은 갑자기 숨결이 가빠진다.
이 700여㎞의 남향길에서 중국 제2대 폭포인 절경 호구폭포(壺口瀑布)를 만난다.
그리고는 다시 우임금의 치수사업장의 하나였던
용문(龍門)의 우문구(혐)까지 종종걸음을 쳐야 한다.
우문구를 지나면 일단 가쁜 숨을 고르고,
은천을 지나면서부터 사막과 황토고원에서 다시 모아 품고 온
진흙과 모래(泥沙) 일부를 풀어놓는다.
사마천(司馬遷)의 고향 한성(韓城)의 풍요한 평야는 황하가 준 또 하나의 선물이다.
우문구를 나서면 수세가 평류하여 인자한 어머니가 아이를 무육(撫育)하는 것 같다.
유역이 넓으니 황하의 유동은 산만해진다.
그래서 그 물길이 ‘삼십년은 하동(산서)에,
삼십년은 하서(섬서)에 있다’(三十年河東 三十年河西)는 말이 생긴 것이다. 황하가 동류(東流)한다고 보면, 이 말과 가장 맞지 않는 부분이 중류지역이다.
하원에서부터 ‘지’(之)자 걸음을 하던 황하는 감숙성 수도 난주(蘭州)를 통과하면서 북쪽으로 방향을 튼다.
고도가 높은 북방 몽고고원을 향하다 보니 힘이 부쳤던지 이제껏 안고 왔던 황토를 유역에 내려놓고 흘러간다.
그래서 영하회족자치주(寧夏回族自治州) 수도 은천(銀川) 근방에 ‘새상(塞上)의 강남’이라는 광활한 평야가 생겼다.
그리고는 내몽고자치주 임하(臨河)에서 90도로 꺾어 동으로 흐른다.
이렇게 하도가 90도로 꺾이는 것을 ‘절’(折)이라 하는데
황하에는 삼절(三折:臨河折·托克托折·潼關折)이 있다.
동류하던 황하는 산서성의 운중산(雲中山)과 여량산맥(呂梁山脈)에 막혀
그 물길을 다시 남으로 돌리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런 과정에서 내몽고 수도 호화호특(呼和浩特) 부근 지역(前套)에
비옥한 토지와 적당한 관개를 제공하니
예부터 ‘황하는 100곳에 해를 주었지만 오직 일투에 부유함을 가져다 주었다’
(黃河百海 惟富一套)는 말이 생긴 것이다.
섬서성과 산서성을 가르는 진섬(晉陝)계곡에 들어서면서
황하의 물은 갑자기 숨결이 가빠진다.
이 700여㎞의 남향길에서 중국 제2대 폭포인 절경 호구폭포(壺口瀑布)를 만난다.
그리고는 다시 우임금의 치수사업장의 하나였던 용문(龍門)의 우문구(혐)까지 종종걸음을 쳐야 한다.
우문구를 지나면 일단 가쁜 숨을 고르고,
은천을 지나면서부터 사막과 황토고원에서 다시 모아 품고 온 진흙과 모래(泥沙) 일부를 풀어놓는다.
사마천(司馬遷)의 고향 한성(韓城)의 풍요한 평야는 황하가 준 또 하나의 선물이다.
우문구를 나서면 수세가 평류하여 인자한 어머니가 아이를 무육(撫育)하는 것 같다.
유역이 넓으니 황하의 유동은 산만해진다.
그래서 그 물길이 ‘삼십년은 하동(산서)에, 삼십년은 하서(섬서)에 있다’(三十年河東 三十年河西)는 말이 생긴 것이다
다시 남향하던 황하의 물길은
중국문명의 요람 관중평원을 달려온 황하의 최대 지류로
‘팔백리진천’(八百里秦川)이라 불리는 위수(渭水)를 품에 넣고 흐른다.
당대 왕지환(王之渙)의 천고의 명구
‘천리를 한눈에 다 넣기 위해 누각을 다시 한층 오른다’
(欲窮千里目 更上一層樓·“登觀雀樓”)는 데서 보듯
이곳에서는 황하와 서쪽 관중평원의 광활한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남행 길을 막고 선 진령산맥(秦嶺山脈) 때문에
황하는 다시 물길을 90도 바꿈으로써 비로소 동쪽으로의 흐름을 찾게 된다.
그 지점이 그 옛날 중국을 동서로 나누던 전략적 요충이었던
함곡관(函谷關)이 위치하기도 했고
‘삼성의 닭소리가 들린다’(鷄鳴聞三省:陝晉豫:陝西·山西·河南)는
교계(交界) 동관(潼關)이다.
동관에서의 급커브 때문인지 황하는 역시 숨이 가쁘다.
황하는 흐름을 재촉하는 마지막 협곡인 삼문협(三門峽)을 지나
낙양 근방의 맹진(孟津)을 통과하고서야 비로소 숨을 돌린다.
여기서부터 만리장성, 대운하와 비견되는 중국인이 만든 대공정 중 하나인
1,300여㎞의 긴 제방 황하대제(黃河大堤)가 시작된다.
황하수는 그를 둘러싼 제방 너머에 있는 해발 50m의 화북평원을 넘겨다보기 위해
얼굴을 쳐들면서 점차 게으름과 심술(이것을 ‘決徙’라 한다)을 부리기 시작한다.
하상(河床)은 양안(兩岸)의 지면보다 평균 3∼5m나 높다.
심지어 10m나 높은 곳도 있어
이로 인해 소위 ‘지상하’(地上河)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황하가 이 지역에서 부린 심술 때문에
중국인들은 숱하게 눈물을 흘렸고 한숨을 내쉬어야만 했다.
그러나 아무리 심술부려 보았자 황하수가 가야 할 곳은 역시 대해(大海)일 뿐이다.
황하는 통상 상류·중류·하류 세 지역으로 구분한다.
하원에서 내몽고자치구 탁극탁현의 하구진(河口鎭)까지가 상류로
3,472㎞에 그 낙차가 3,846m나 된다.
중류는 하구진에서 하남성 정주(鄭州) 도하욕(桃花頒)까지인데
1,206㎞에 낙차는 890m이다.
그 가운데 하구진에서 용문 우문구까지의
소위 진섬계곡 718㎞의 낙차는 자그마치 611m이다.
하류는 도화욕에서 산동성 간리현(懇利縣)까지로 786㎞에 낙차는 95m에 불과하다.
발원지 부근의 황하는 황토물이 결코 아니었다.
어디에서부터 황하의 이름에 걸맞게 황토색이 되는지는
시대에 따라 다르고 학자에 따라 해석도 가지각색이다.
황토고원을 지나야 비로소 황색의 진흙강으로 변한다고들 하지만,
선진(先秦)시대에는 황하의 물이 황색이 아니었다는 설도 있다.
황토지대에 수목이 많이 자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황토고원이 형성된 것은 지질시대이기 때문에
황토고원을 통과한다고 해서 반드시 황색이 되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황하의 지류인 위수와 경수(涇水)의 수색이 대조적이어서
‘경위분명’(涇渭分明)이라는 말이 예부터 전한다.
황토고원에서 발원하는 경수의 물은 황색의 위수와는 달리 푸른 색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국(戰國)시대에는 황하를 ‘탁하’(濁河)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에
진한시대 이후 황하수가 황색으로 변했다는 설을 그냥 믿기는 어려울 듯하다.
그러나 현재 황하 하류에 퇴적되는 니사를 주로 제공하는 지역은
하구진에서 우문구까지의 진섬황토고원이다.
중국사 가운데 어느 시대를 공부하든 황하를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을 만큼
황하는 중국 역사를 추동시켜 온 원동력이었다.
영향력이 큰 만큼 관심도 커서 황하 자체의 역사가 성립했다.
‘황하사’(黃河史) 혹은 ‘황하하도사’(黃河河道史)라는 것이 그것이다.
황하는 ‘(제방이) 잘 터지고 (하도가) 잘 변하는 것(善決善徙)’이 특징이었다.
황하에 대한 기록이 시작된 이후
2,500여년간 개도(改道:大徙)가 26차례나 있었다고 하니
평균 100년만에 한차례 꼴인 셈이다.
개도의 범위(황하의 行迹)도 산동반도를 사이에 두고
북쪽 천진(天津)에서 남쪽 강회(江淮)지역까지
25만㎢나 되어 남북한을 합친 면적보다 넓다.
그러나 필자가 전공하는 위진남북조에서 수·당(隋唐)시대에 이르는
800년간 황하의 하도(河道)는
몇차례 터지고 넘치는 일(決溢)은 있었으나 개도에까지는 이르지 않았다.
이런 사실을 일러 ‘황하안류’(黃河安流)라 하지만,
이것을 황하 사상 일대 사건으로 학계에서는 여기고 있다.
이처럼 장기간에 걸쳐 하도의 변화가 없었던 이유에 대해 논란이 많지만
크게 보아 두가지 설이 있다.
첫째, 후한시대 왕경(王景)이라는 사람의 소위 ‘치하’(治河)에 공로를 돌리는 학설이다.
이런 관점에 선 학자는 청대의 위원(魏源)에서
최근에는 영국의 중국과학사가 조지프 니덤(Joseph Needham)에 이르기까지 상당수 된다.
즉, 왕경은 ‘10리 수문지법(水門之法)으로
제방을 튼튼히 하고 하조(河槽)를 깊게 하고,
또 소도지법(疏導之法)으로 흐름을 다양화하여 하류의 수량을 적게 함으로써
그 궤결(潰決)의 우환(憂患)을 점차 줄였다.
이 두 법을 지킴으로써 황하가 크게 다스려지고
진(晉)에서 수·당(隋唐)까지 800여년간에는
하익(河溢)이 16차례나 있었으나 결사지환(決徙之患)은 없었다’는 것이다.
둘째는 최근 새로이 제기된 학설이다.
전국시대 이전에도 황하 하류의 소위 결사가 적었는데
원시림의 대량 파괴가 없어 수토의 유실이 경미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진(秦)과 전한(前漢)에 들어
‘관중을 충실히 하고’(實關中)
북방의 흉노족을 방비하기 위해 변방에 군대를 주둔시키는
소위 ‘수변군’(戍邊郡)정책을 수행함에 따라 자연히 대규모 사민조치가 실시되었다.
이에 따라 황토지대의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되고
농지개발(墾田) 또한 급속도로 진행돼 황토가 대량으로 씻겨 내려가게 되었다.
이에 따라 하류에 결사가 더욱 빈번해지고 더욱 흉폭해진 것이다.
한대(漢代)에
‘황하의 물이 혼탁하여 물 한 석에 여섯 말의 진흙이 들어 있다’
(河水重濁 號爲一石水而六斗泥)는 기록이 나온 것도 이런 연유에서이다.
그러나 후한말 이후 북방 유목민족이 대거 남방으로 이동해 옴에 따라
농경민족인 한족은 점차 화북평원쪽으로 후퇴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황하 중류지역에 유목민과 농경민 거주지역의 분계선이 생겼으니
북방의 운중산과 여량산맥에서 섬북고원(陝北高原)을 거쳐
남쪽의 진령산맥(秦嶺山脈)으로 연결되는 선이 그것이다.
이 분계선을 경계로 동쪽과 남쪽은 농업구로,
서쪽과 북쪽은 유목구로 변하기 시작했다.
즉, 농업인구의 동남으로의 후퇴와 유목인구의 내지 진출로
황하 중류지역 황토지대의 토지이용 상황이 크게 달라지게 된 것이다.
즉, 황토지대의 목장화 진전으로 하류지역의 홍수량과 니사량(泥沙量)이 크게 감소되었다.
위진남북조에서 수·당까지‘하환’(河患)이 크게 부각되지 않았던 것은
유목민의 중국 내지로의 이동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방면에는 문외한인 필자로서는 어느 학설에 동조해야 할지 알 수 없지만,
필자가 연구하던 시대는 중국 역사상 난세 중의 난세였다.
인재(人災)로 그렇게 살기 괴로웠던 시대에 자연마저 혹독했다면 어떠했을까?
황하는 하(夏)나라 우(禹)임금을 떼어놓고서는 이야기할 수 없다.
우임금의 황하 치수 치적은
“상서”(尙書) ‘우공편’(禹貢編)에 기록되어 있지만 그에 대한 전설도 많다.
우는 그 신체의 우람함이 마치 높은 산(高山)을 보는 것과 같아
키도 크고 손도 커 일보를 내디디면 2리 반을 가고,
손으로 1,000석의 돌덩어리를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를 ‘대우’(大禹)라 칭하는 것이다.
우는 도산씨(塗山氏)와 결혼한 지 4일만에
순(舜)임금의 명령을 받고 치수를 위해 집을 떠났다.
그가 ‘13년간 집 앞을 세번 지났으나 한번도 들어가지 않았다’
(三過家門而不入)는 것은 익히 아는 사실이다.
우의 치수지역은 하원 근방의 적석산(積石山)에서
하류까지에 걸친 전 지역으로
손대지 않은 곳이 없다고 하지만, 특히 어려운 공정은
용문을 개착하고(鑿龍門), 지주의 험을 나누고(析底柱), 이궐을 연 것(闢伊闕) 등이었다.
홍수를 다스린 후 전국을 구주(九州)를 나누니
중국이 온전한 행정단위를 갖추게 되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수차례 황하 답사길에 나섰지만
인상에 진하게 남아 있는 곳은
역시 필자가 연구하는 시대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지역이었다.
그 가운데 이 글에서는 호구폭포에서 삼문협까지의 역사와
그에 대한 필자의 여행기록을 소개하려 한다.
호구폭포는
섬서성 의천현(宜川縣)과 산서성 길현(吉縣) 사이에 있는
황하의 본류가 갑자기 폭포가 된 지역을 말한다.
1999년 여름 필자는 그림으로만 접하던 호구폭포를 볼 기회를 얻었다.
오르도스 지역 답사를 끝낸 여행단은
홍군(紅軍) 대장정(大長征)의 종착지인 연안(延安)에서 일박하고
버스편으로 호구로 향하였다.
철강도시 포두(包頭)의 황하대교 아래로 유유히 흐르던 황하의 물이
어찌하여 폭포가 될 수 있는가가 가장 의아했던 부분이었다.
의천을 지나자 산세가 갑자기 달라진다.
날카로운 칼로 동강낸 것처럼 산들은 모두 큰 단애(斷崖)를 이루고 있다.
문득 눈앞에 나타난 천길 낭떠러지,
그 아래에 황하수가 거대한 바위 위에 노란 선을 긋고 있는 것이 가물가물 보였다.
산의 주름에 의지해 간신히 만들어진 좁고 굽은 도로 위로 전세 버스가 길을 찾아간다.
모두 앞 의자에 달린 손잡이를 다시 굳게 다잡고 그저 말이 없다.
그런 길을 달리기를 10여분만에 호구폭포에 닿았다.
이 호구폭포도 역시 우임금의 치적의 하나로 되어 있다.
황하는 중국 하천 가운데 황제라 하지만 호구는
황관(皇冠)에 달린 한 알의 명주(明珠)에 비유된다.
상류 300여m의 강 흐름이 갑자기 50여m로 줄어들더니
낙차 50여m의 깊은 돌웅덩이(石潭)로 떨어진다.
유량은 일반적으로 초당 300~500㎥이지만,
홍수 때는 초당 2,000㎥의 황토물이
마치 거꾸로 세운 항아리 주둥이에서
물이 쏟아져 나오듯 한다고 하여 호구폭포란 이름을 얻었다.
이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소리는 몇십리 밖에서도 들린다는 말이 실감난다.
호
구폭포는 ‘소원침식’(溯源侵蝕)작용에 의해 매년 평균 3∼4m씩 상류로 이동한다.
하구진에서 시작되는 진섬협곡이 거의 이런 V자형 석조(石漕)라 하니
호구폭포가 700여㎞ 상류에 위치한 하구진까지 닿은 데는 몇 년이나 걸릴까?
한성에서 일박한 이튿날
북쪽으로 30㎞ 떨어진 진섬협곡의 최남단 용문을 지나게 되었다.
호구폭포로부터 남방 65㎞지점이다.
그날 일정이 매우 바빠 구경할 시간을 갖지 못하고
버스 차창 밖으로 용문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것은 지금도 유감이다.
용문은 자고로 진진(秦晉:關中과 山西)을 연결하는 요충으로
병가필쟁(兵家必爭)의 땅이었다.
지금도 용문 아래로 108국도와 서후선(西侯線:西安∼侯馬)철로가 놓여 있어
그 역할은 예나 다름없어 보인다.
수(隋) 양제(煬帝) 말기(617)
당나라 태조 이연(李淵)이 태원(太原)에서 병을 일으킨 후
군사를 이끌고 관중땅을 선점함으로써
대당제국(大唐帝國) 건설의 기초를 닦기 위해 이 용문나루를 건넜던 것이다.
‘수환이 심한 곳으로는 황하만한 것이 없고,
황하 가운데 험하기로는 용문만한 곳이 없다’
(水患莫甚於河 河莫險於龍門)고 했듯이
우임금의 공사 가운데 가장 어려운 것이 바로 용문의 개착이었다.
우임금이 만민을 거느리고 한성 용문산에 오니
산은 용마루같이 가로질러 황하를 막고 있고 온 평지가 홍수로 범람해 있었다.
우임금은 산정에 올라 아버지 곤(嫩)이
그에 앞서 하도를 개착한 유적을 보고 용문산을 개착할 계획을 세웠다.
그의 발이 닿은 곳은 땅이 꺼지고
손이 닿은 곳은 단단한 돌이 물렁하게 변하여
하루만에 하나의 큰 구멍을 팔 수가 있었다.
이상하게 여긴 우가 그곳 부근 백성들에게 물었더니
“황포(黃袍)를 입은 노인 한 사람(산신령)이 ‘황하가 바다로 들어가는 것을 막고 있는
이 산은 원래 한 마리의 큰 용이었다’고 말하고는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우는 이 노인의 이야기를 듣고
풍우를 가리지 않고 끊임없이 개착함으로써 용이 숨쉴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리하여 끝내 용의 허리를 잘라 물이 흐르도록 하니
일대에 범람했던 물이 일사천리로 흘러갔다.
이리하여 생긴 석문(石門)을 ‘용문’이라 하고,
후인들이 우가 용문을 개착한 공로를 영원히 기념하기 위해
‘우문’(禹門) 혹은 ‘우문구’(禹門口)라 한 것이다.
황하 치수의 아버지 禹임금과 등용문
실제로 동쪽의 용문산과 서쪽의 양산(梁山) 사이에 생긴 100여m의 좁은 문구는
흡사 큰 부젓가락으로 황하를 끼워 넣어 짜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용문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강 양안을 살펴보면
우임금이 칼과 도끼로 내리쳐 만든 때문인지 천길 단애(斷崖)다.
상류 4㎞ 지점에 있는 석문은 그 폭이 60m로, 황하 가운데 가장 좁은 곳이다.
이곳은 갑구(匣口)와 같아 황하의 인후(咽喉)라 한다. 물의 흐름이 급하기 이를 데 없어
사람들은 ‘우문의 3층 물결’(禹門三級浪) 혹은 ‘용문의 세번 떨어지는 물’(龍門三跌水)이라 하였던 것이다.
황하수는 이 용문을 통과하자마자
수위가 갑자기 낮아지고 하폭 역시 갑자기 10㎞ 정도로 넓어져 흐름이 매우 완만해진다.
하류에서 올라온 고기들이 이곳 용문을 통과하여 상류로 오르기는 쉽지 않았다.
그래서 ‘잉어가 용문을 뛰어오르다’(鯉魚跳龍門)
혹은 ‘등용문’(登龍門)이라는 고사가 생긴 것이다.
전설에 의하면 3월3일 잉어가 물을 거슬러 올라가다
힘을 다하여 이곳을 뛰어넘어 올라가면 용이 되고,
그렇지 못하면 ‘이마에 상처만 입고 돌아간다’(點額而還)고 한다.
출세경쟁에서 패배하거나
고시에 낙제한 사람을 ‘점액’(點額)이라 하는 것은 여기서 유래된 것이다.
‘상처뿐인 낙방’이라 할까? 이 등용문의 고사는
수천년 동안 황하가 준 시련과 난관을 백절불요(百折不撓)의 정신으로
극복해 온 중국민족의 역사를 용의 분투불식(奮鬪不息)의 정신을 빌어 표방한 것이다.
필자가 진정으로 황하를 사모하게 된 것은
황하의 삼문협(三門峽)에 있는 지주지험(砥柱之險)이라는
일개 지점에 대한 아련한 추억 때문이다.
지주지험과의 인연은 필자의 학계 입문작인 석사논문의 주제로
중국 최고의 가훈으로 평가되는 “안씨가훈”(顔氏家訓)을 잡은 데서부터 시작되었다.
지주를 책에 따라서는 ‘저주’(底柱)라고 쓰기도 한다.
이 가훈의 작자 안지추(顔之推)는
당나라 때 “한서”(漢書)의 주석가로 유명한 안사고(顔師古)의 조부이며,
서법가로 유명한 안진경(顔眞卿)과
안사(安史)의 난 시기의 충신 안고경(顔豈卿)의 5대조이기도 하다.
이 가훈의 영향 때문인지 대대로 훌륭한 자손들을 많이 배출하였다.
필자가 안지추를 만난 것은 필자 인생의 중요한 전기가 되기도 했다.
춥고 배고프고 막막하고 또 억울했던 그 시기에
그를 만나지 않았다면 필자는 그 어려운 학문의 길을 포기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의 가훈의 문장 하나 하나는 무한한 감동을 안겨 주었다.
좌절 속에서 그래도 희망과 성실성을 잃지 않도록 독려한 것이 바로 이 책이었다.
그의 자전적(自傳的) 부(賦)인
‘내 인생을 돌아보는 부’(觀我生賦)"는
필자로 하여금 감히 “인생(人生)-나의 오십자술(五十自述)”이라는
자전을 쓰게 한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그 논문을 쓴 지 20여년이 지난 지금도
필자는 벅찬 가슴으로 간혹 안지추의 글을 만나곤 한다.
안지추는 남조 양(梁)나라 무제 시기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지만(531)
난리와 국망의 과정 속에서 귀족으로 관료로
또는 포로로 양극을 오가면서 신고(辛苦)에 찬 생애를 보낸 사람이다.
남조 귀족제를 붕괴시킨 ‘후경(侯景)의 난’ 때
그는 임지였던 강릉(江陵:현재 湖北省 荊州)에서
후경군의 한 부대의 급습을 받고 포로가 되어
수도 건강(建康)을 이미 함락한 반란의 우두머리인 후경 앞으로 압송되어
처형 직전 후경군의 한 간부의 호의로 목숨을 건졌다.
난이 진정되어 강릉 옛임지로 귀환했으나
또 다시 북조 서위(西魏)군의 침략으로
오랫동안 섬겼던 주군(主君)인 원제(元帝)를 잃고
다시 포로의 몸으로 가족과 함께 적국의 수도 장안으로 호송되었다.
그를 호송한 이현(李顯)이란 장수가 그의 문재(文才)를 평가하여
형 이원(李遠)이 주둔하고 있던 홍농(弘農:현재 河南省 靈寶縣)으로 보내
문필을 맡도록 조처하였다.
홍농은 삼문협의 상류에 있었다.
안지추는 강남으로 귀환하려면 우선 조국 양과 화친관계에 있던
북제(北齊)로 탈출하는 것이 급선무라 생각했다.
황하수가 가야 할 곳은 결국 大海뿐
북제로의 탈출은 용이하지 않았다.
북제로 가기 위해서는 바로 이 지주지험의 난관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이다.
지주지험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홍수로 황하가 범람하는 시기를 기다려야만 했다.
556년 황하의 범람을 틈타 처자를 데리고 칠흑같은 밤을 이용하여
미리 마련해 둔 작은 배(小舟)에 운명을 맡긴 채
하룻밤 사이에 700리를 떠내려간 후 낯선 북제 땅에 도착했다.
북제에 도착하여 들은 조국의 소식은 그의 기대와 달리 참담했다.
이미 그의 조국 양나라는 망하고
그와 정치적 노선을 달리했던 진패선(陳覇先)에 의해 진(陳)나라가 성립되었던 것이다.
그때 그의 나이 26세.
그는 하는 수 없이 강남으로의 귀환을 포기하고
아무런 기반이 없는 북제에서 생활을 도모하게 된다.
후원자가 있을 리 없는 이국에서의 생활은 만만하지 않았다.
42세에 문림관대조(文林館待詔)에 오를 때까지
15년이란 연부역강(年富力强)한 시기를 그는 생경한 환경 속에서 살기 위해,
아니 가족을 굶기지 않기 위해 처절한 삶의 투쟁에 나서지 않으면 안 되었다.
피나는 노력 끝에 북제 말기 차관급인 황문시랑(黃門侍郞)에 올랐지만,
그 생활도 그리 길지 않았다.
곧바로 북주의 침략으로 북제가 패망하니
그가 탈출했던 나라로 다시 호송되는 운명을 맞게 된다.
그간의 사정은 확실하지 않지만
그는 북주에서 어사상사(御史上史)로,
수나라에서는 태자의 사부(師傅)로 일하다 굴곡 많은 생을 마감한다.
남부러울 것 없는 귀족에서 포로와 망국과 탈출이 중첩되는 그의 인생,
드라마보다 더 극적이었던 그의 생애를 마칠 즈음 마음먹고 써 낸 그의 가훈은
중국 수천년 역사 속에 남겨진 무수한 가훈 가운데 최고의 가훈으로 대접받고 있다.
그의 생애는 바로 지주지험의 그것처럼 회오리가 되어 필자에게 다가왔던 것이다.
따라서 그가 타고 넘어야 했던 지주지험,
그곳은 필자가 황하를 생각할라치면 빼놓을 수 없는 오랜 갈망의 땅이 되었다.
그 곳이 어떻게 생겼기에 조그마한 배도 통과할 수 없다는 것일까?
필자는 정말 뜨거운 가슴을 안고 그곳에 가고 싶었다.
십여 차례 열차로, 버스로 삼문협을 지났건만 그곳에 갈 기회를 좀체 얻지 못하였다.
1999년 여름 38명의 여행단(한국위진수당사학회 회원이 중심)과 함께
그곳에 가기로 예정했다.
그것은 억지였다.
우겨서 답사일정에 집어넣었지만,
같은 여행단이 1997년 여행시에 이미 이곳을 방문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몇 명 안 되는 여행단원을 위해 다시 그곳에 간다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였다.
이렇게 지주지험은 쉽게 필자를 만나려 하지 않았다.
아침 섬서성 한성(韓城)을 출발한 버스가
산서성 운성(運城)의 하동염지(河東鹽池)와
관우(關羽)의 고향 해주(解州)의 관제묘(關帝廟)를 답사하고
다시 하남성 삼문협에 도착하니 이미 해가 기울어가던 4시였다.
이제까지 도와주었던 내몽고청년여행사의 가이드 및 버스와 이별하고
낙양여행사로 교대하는 등 수속을 끝내고 나니 이미 5시 반이 되었다.
지주지험까지는 왕복 2시간에다 관람시간을 합치면 3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그곳에서 그날밤 숙박지인 낙양까지는 3시간 반이 걸린다.
어림잡아 자정이 가까워야 도착할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또다시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2000년 1월 나는 제자 3명과 호북성 양번(襄樊)에서 밤 열차를 탔다.
오가는 길에 들리기로 해서는 지주지험은 영원히 만나주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고난의 ‘지주지험’을 찾아서
삼문협에 내리니 새벽 6시가 조금 넘었다.
역무원에게 차편을 물으니 눈이 많이 내려 길이 미끄러워
대형 버스나 열차가 아니면 곤란하다고 했다.
열차는 하루 한차례, 버스도 하루 두차례밖에 운행하지 않으며,
어제 내린 눈 때문에 운행할지 모른다는 대답이다.
역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빵차’(麵包車)에 접근해
운전기사에게 말을 걸었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이렇게 지주지험에 접근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이전에는 실로 상상하지 못했다.
중국사람들은 지주지험에 대해 잊고 있었다.
이 시대를 전공하는 학자가 아니면 지주지험이라는 이름조차 아는 사람이 드물었다.
중국에서 1년간 생활하면서 중국인과의 대화 중에 자주 이 지주지험을 화제에 올리곤 했다.
아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100사람 가운데 한둘 안다는 사람도 그게 무슨 볼거리냐며 한심한 눈길을 보냈다.
중국인이 황하를 잃어버려야 한다고 야단치고 있는데,
그 강물 속에 솟아 있는 바위 덩어리 하나를 보기 위해
이다지 정성을 다하는 필자란 인간은 정말 정상적인 사람인가?
몇 번 자문을 거듭했으나 여전히 그 대답은
눈으로 직접 보아야 한다는 결론밖에 얻지 못했다.
내친 걸음, 이제는 걸어서라도 가야 할 형편이었다.
제자들이 동행하지 않으면 혼자서라도 말이다.
다른 빵차에 접근하였다.
그 기사는 ‘지주지험’의 이름은 모르고
‘따빠’(大患:댐)라고만 알고 있는 것이 괘심하기 짝이 없었지만,
그래도 제의를 귀담아 들어주는 것이 너무 고맙다.
왕복과 관람시간 30분에 인민폐 80원에 낙착을 보았다
여러 차례 그곳에 댐이 생겼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지주지험에 대한 상세한 소식은 들은 적이 없었다.
그래도 역사를 존중하는 중국인들인 만큼
댐을 만들어도 지주지험을 손상하지는 않았겠지 하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철로 옆으로 난 길은 공사중이었다.
중국에서는 공사를 하면 사람의 통행문제 같은 것은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
공사가 끝날 때까지 며칠이든 몇달이든 통행을 안 시켜도
크게 문제될 것이 없고 항의하는 사람도 없다.
‘도대체 이 나라는 사람을 어떻게 취급하는 것이야’ 하는
울분도 투정도 이제는 옛일이 되어버렸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 하는 법이다.
야간열차에 지친 몸을 그저 뒤뚱거리는 작은 빵차에 맡기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시가를 벗어나니 깎아지른 황토고원이다.
억겁을 두고 빗물에 의해 갈라진 천길 흙구덩이가
우리가 탄 작은 빵차를 삼킬 듯이 입을 벌리고 있다.
S자형의 작은 길에는 눈이 군데군데 녹지 않고 쌓여 있다.
특히 음달진 곳에는 이미 활빙의 상태다.
가던 차들이 길 옆 구덩이에 빠져 있는 것이 군데군데 눈에 띈다.
무사하게 서울로 돌아갈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삼문협이란 황하에 돌출한 거대한 두개의 암석으로 황하의 물이 세 갈래로 흐르는 데서 나온 말이다.
귀문(鬼門)·신문(神門)·인문(人門)이 그것인데
귀문과 신문은 귀신만이 통과할 수 있다는 의미이니 그 물살이 얼마나 급한지 짐작이 간다.
삼문을 통과한 물이 한군데로 합쳐지는 지점에
암석으로 된 작은 섬(小島)이 가로막고 있다.
이 작은 섬을 끼고 물줄기는 ‘천지를 진동하면서 흐른다’고 한다.
이 암석의 소도가 지주지험으로 알려진
‘지주석’(砥柱石) 혹은 ‘중류지주’(中流砥柱)이다.
삼문 가운데 인문의 물살은 험악한 정도가
다른 두 문에 비해 상대적으로 양호하여
역사시기 이 문을 통해 배들을 통과시키기 위해 애를 썼다.
그곳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배에 줄을 매달아
수많은 사람들이 끌어올리는 형식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은 항상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담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고난의 지주지험!
그러나 우리나라 조선시대 선비들에게는 그것은 신념과 의지의 표상이었다.
어떤 고난이 와도 의리(義理)는 반드시 이기는 법이니 불의에 항거해야 한다는
소위 ‘중립지주’(中立砥柱)라는 용어가 바로 여기에서 연유했던 것이다.
지주지험은 안지추의 탈출길을 막은 것만이 아니었다.
만약 이 지주지험이 없었다면
전통시대 중국의 수도는 여전히 관중평원(關中平原) 장안에 있었을지도 모른다.
송(宋)나라 창업주 조광윤(趙光胤)이 정권을 잡고 나서 장안으로 천도를 계획했고,
명(明)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璋) 역시 장안으로 천도를 시도했던 것은
관중평원이 공수(攻守)에 유리한 천혜의 요충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지주지험이 운하길을 막고 있었기 때문에
관중에서 낙양(洛陽)으로 다시 개봉(開封)으로
수도의 동진(東進)운동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수나라가 수도 대흥성(大興城:장안)과 낙양을 양경(兩京)으로 삼아
거의 같은 무게를 두었고,
당나라도 장안성과 동도(東都) 낙양성을 병중(幷重)의 위치에 두었던 것도
조운을 방해하는 이 지주지험 때문이었던 것이다.
관중에 계속해서 수도를 둘 수 없었던 것은
관중의 경제력이 날로 쇠퇴해져 간다는 점이었다.
즉, 장안이 수도로서 현실적으로 부적당한 상황이 점차 전개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 경제문제는 이미 한대부터 나타나고 있었지만 수·당시대가 되면 더욱 심각해진다.
중국의 경제중심이 관중에서
후한(後漢) 때에는 하내(河內)·여남(汝南)·진류(陳留) 등 하남과 산동으로,
점차 동쪽으로 이동하다가
마침내 당 후반기에 이르면 강회(江淮)지역에까지 미치게 되는 것이다.
북방의 남방에 대한 경제의존도가 커짐에 따라
당 왕조는 장강(長江) 하류지역, 즉 강남을 새로운 재원 확보지로 이용하려 했다.
이런 현상을 ‘경제적 중심(重心)의 남이(南移)’라고 한다.
관중지구의 양식 생산은 이와 같이 줄어드는데
소비인구는 부단히 늘어나 양식 공급과 소비 사이의 모순은 날로 커져갔다.
수 양제가 장강 유역과 황하 유역을 연결하는 대운하를 개착한 것도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경미한 손해를 지불하고 수나라 수도 장안을 약취한 당 왕조는
수나라의 생명선이라 할 수 있는 대운하도 유산으로 물려받았다.
대운하를 얻었다고 해서 바로 강회의 곡물을 장안으로 수송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강회의 곡식은 운하를 통하여 낙양까지는 큰 문제가 없이 운반되지만
문제는 삼문협이었다.
이 삼문협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당 고종은
신료와 군대를 이끌고 낙양으로 ‘취식’(就食)의 길을 떠났다.
그의 부인인 측천무후(則天武后)는 아예 수도를 낙양으로 옮겨버렸고,
당 현종은 다섯차례나 나들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처럼 고종과 무후·중종과 현종 등이
동도 낙양으로 양식을 얻기 위해 자주 행차했기 때문에
‘축량천자’(逐糧天子)라는 불명예스런 칭호를 얻기에 이르렀다.
강회의 곡물은 변하(薦河)와 황하의 합류점인 하구(河口)에 집적된 후
황하를 이용하여 낙양의 함가창(含嘉倉)으로 옮겨진다.
그 후 육로로 막대한 경비와 노력과 시간을 투여하여 장안까지 운반할 수밖에 없었다.
낙양에서 장안까지의 수로에는
선박의 운행이 거의 불가능한 삼문협(지주지험)이 가로놓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먼저 수레나 낙타를 이용하여 섬주(陝州)의 태원창(太原倉)까지 300리를 운반했다.
문제는 운량(運糧)의 반 이상이 운반 도중 소모된다는 사실이었다.
이런 비효율성을 타파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이 동원된 것이다.
그 가운데 가장 효과를 거둔 것이 현종 시기에 우수한 경제관료로서
강회하남전운사(江淮河南轉運使)로 임명된 배요경(裴耀卿)에 의해 창안된 방식이다.
그의 계획은 삼문협을 가능한 한 적은 경비와 노력으로 통과하고
동시에 조운 시스템 전체를 효율적으로 운용하는 방법이었다.
먼저 삼문협 동쪽에 집진창(集津倉)을 설치하여
황하를 거슬러 싣고 온 곡물을 하역하고
황하 북안(北岸)에 18리를 우회하는 길을 만들어
그 사이에 수레로 서쪽의 삼문창(三門倉)까지 운반한 후 다시 배에 싣는 것이다.
섬주(陝州)까지 황하를 이용하여 운반하고
그 후 위수를 이용하여 장안의 태창(太倉)까지 운반하였다.
여기에다 각처에 설치된 창고를 이용하여 수요와 공급관계를 조절하였다.
이런 조운개혁으로 육운경비 40만관(貫)을 절감시켰을 뿐만 아니라,
현종은 개원(開元) 22년(734)의 ‘취식’을 최후로
낙양 행행(行幸)을 드디어 중단할 수 있었다.
이런 조운로의 정비는 개원 29년(741)
섬주자사 이제물(李齊物)에 의해 지속적으로 추진되었다.
그는 다시 삼문협의 암벽을 깨 통로를 만들고
강가에서 수많은 끈으로 배를 끌어올리는 개량법을 창안하였던 것이니,
이 물길을 ‘개원신하’(開元新河)라 한다.
흉물스런 거대한 댐이 황하를 가로막고 있었다. 운전기사와 약속한 시간은 30분이다.
묘하게도 댐막이는 세 갈래로 물길을 가르던 귀문도와 신문도 그리고 개원신하 위에 설치되어 있었다.
공사의 편리와 경비절감 때문이었으리라.
오랫동안 황하의 진주였던 삼문협, 이제 그 자취는 거의 사라졌다.
이제 사람은커녕 귀신도 드나들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그래도 댐 아래쪽에 지주만은 그대로 남겨둔 것은
먼길을 찾아온 나그네를 위한 작은 배려이던가?
삼문이 없는 지주는 의미없는 하나의 돌섬에 불과할 뿐이지만….
삼문협뿐만이 아니다. 황하는 동강나고 있다.
현재까지 댐을 막아 홍수를 조절하며 전기를 생산한다는 명분으로
유가협(劉家峽)·염과협(鹽鍋峽)·청동협(靑銅峽) 등에 댐이 만들어졌다.
더구나 최근 호구폭포가 유력한 댐막이 후보지로 거론되고 있다.
호구폭포를 댐으로 막으면
그 낙차가 90m나 되고 또 수몰 면적도 넓지 않기 때문에
대단히 유리한 조건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인류(중국인)에게 조복(造福)을 가져다줄 대공정이라며 야단이다.
항일전쟁이 한창이던 1938년
‘물로써 군대를 대신한다’(以水代兵)는 황당한 생각으로
장개석 정권이 정주 근방 화원구(花園口)에 있는 황하 제방을 일부러 터뜨려
죄없는 수많은 백성을 수몰시켜
중국 근대 10대 재앙의 하나로 기록된 사건(花園口決口事件)을 다룬
중국의 인기작가 이준(李準)의 “황하는 동쪽으로 흐른다”(黃河東流去)는
소설의 주제는 한마디로 황하는 동쪽으로 흘러가게 해야지
인위적으로 흐름을 바꾸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황하는 곳곳에서 그 물길이 잘리거나 막히고 있다.
좀 더디고 불편하고 가난하게 살면 어떤가?
인간은 인간다워야지 결코 기계다워서는 안 된다.
아무리 서구의 기계문명이 이 세상을 풍미해도 중국이 갈 길은 역시 따로 있는 것이다.
역사를 잃어버린 인간이 동물과 무슨 차이가 있으랴!
‘1만번 꺾이어도 반드시 동쪽으로 (萬折必東)흘러간다’고 하지 않았던가?
용의 후예들이여!
황하가 그대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을
일찍이 그대들 선조들에게 모두 주어버린 것은 결코 아니다.
그대들에게는 참신한 문명도 필요하지만, 옛것을 살피는 지혜도 역시 필요한 것이리라.
아직도 황하에서 얻을 것은 너무도 많다.
세계 4대문명 가운데 지금까지 그 문명의 유산을 단절없이 면면이 이어가고 있는
유일한 민족이 바로 중국인 당신들이 아니던가.
세상이 아무리 바뀌어도 황하는 역시 굽이굽이 동쪽으로 흘러가야 하는 것이다.
첫댓글 퇴파지주,중류지주,지주중류의 지주지험에 관한 긴 글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저도 너무 재밌게 읽었기에 서울대 교수님의 긴 글을 옮겨 왔습니다. 공감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우리는 산을 용이라 부른다고 하더니, 중국은 물을 용이라 부른다는 이유를 덕분에 알게 되었네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