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좀 진부한 주제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한번은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기에 비판해본다.
우리 나라 역사책 가운데서 가장 권위있고 정평나 있는 책은 어느 대학에서도 교재로 쓰이고 있는, 많은 책도 있지만, 아마도, 이기백(李基白)이 지은『韓國史新論』일 것이다.
이기백은 이병도(李丙燾)와 더불어 우리 조선사를 주도해온 거두였다. 그들이 지은『한국사』로써 우리 젊은 학도들에게 그들의 역사를 가르쳤다.
여기서 이기백은『한국사신론』이라 하여 학계에 좋은 반향을 많이 얻은 바 있다. 그 책이 각 대학에서 교과서로 채택이 되기도 하였다. 그 이유는 그가 주장하는 처음 논조가 서장(序章)에《韓國史의 새로운 理解》라는 데서 <主體性의 認識>이 시사하는 바가 매우 인상적이고, 젊은이들로 하여금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고 본다.
그런데 그토록 좋은 반향을 일으킨『한국사신론』에 대하여 아직까지 그 이상의 발전이나, 어떤 반론도 제기하고 있지 못한다는 것에 참으로 불행하다고 생각한다.
여기서『한국사신론』이 거의 가치 없는 논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언급하고자 한다. 우리는 곧 이런 역사에서 탈피하여 새로운 각도에서 인식을 달리하여 조선사 - 한국사를 보아야 한다. 그래서 여기서 이기백의『한국사신론』가운데 그 서장에서 주장하는《한국사의 새로운 이해》가 얼마만큼 잘못된 인식에서 출발한 논리인지를 밝히고자 한다. 물론 이병도나 변태섭(邊太燮)·한우근(韓佑劤) 등의 한국 역사에 관한 논조도 마찬가지다. 요즈음이라 하여 변화된 내용은 거의 없다.
끝내 이기백은《韓國史의 새로운 理解》라는 차원에서 식민사학에서 벗어나려는 의도로 논리를 펴려고 했지만, <主體性의 認識>에서 "半島的 性格論"은 잘못된 논리임을 필자는 지적해둔다.
半島的 性格論에 대하여
일본인들이 주장하는 반도적 성격 내용은 참으로 황당하다. 그들은 한민족의 기백을 까뭉개기에 충분한 논리를 전개했기 때문에 이에 대응하는 주장은 누구에게나 감명 깊을 것이다.
이기백의 주장도 이 바탕에서 시작했을 것이다. 그가 가장 먼저 강조한 것이 <主體性의 認識> 가운데서 "半島的 性格論"이다. 그는 "소위 事大主義는 韓國의 면할 길 없는 운명이라는 주장으로 기울게 된다."는 말로써 일부 日本學者들의 주장을 일축하려고 하면서, "日本의 溫情的인 支配를 받음으로써 韓國은 半島史的인 性格을 지양할 때를 얻었다는 것이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단지 "면할 수 없는 선천적인 운명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부당하다고 하는 것이다."고 한 것이 그의 반박하고 있는 큰 줄거리이다.
이것은 반박하는 논리라 할 수 없다. 그는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선천척인 운명이 잘못되었다는 것인가? 아니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을 부당하게 여긴다는 것인가?
결국은 이기백 자신의 생각일 뿐이며, "地理的 決定論을 가지고 歷史를 해석하려는 이론이 우리는 承服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이것은 곧 半島的 性格論을 반박한 것 같지만, 그 반도적 역사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모순을 낳고있다. 다시 말하면, 이기백의 이론은 그 반도적 성격론을 반박한다는 것이 朝鮮史를 韓半島에 묶여진 역사에서 전개한 논리이며, 그 자신의 주장이 타당하다는 한반도가 조선이라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결국 그는 "흔히 事大主義라는 술어로 요약되어온 韓國史의 대외적 성격에 있어서도 그 결정적 요인을 地理的 條件에서 찾으려고 함은 잘못인 것이다."고 결론짓고 있다. 그가 결론 내린 이 말 자체가 조선사 - 한국사의 무대가 한반도라는 데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日本人들은 겨우 1935년부터 "半島的 宿命論"을 일관되게 주장하였다. 1935년에 도엽암길(稻葉岩吉)·조산희일(鳥山喜一)이, 1940년에 삼품창영(三品彰英)이, 1950년에 화전청(和田淸)·암정대혜(岩井大慧)가, 1951년에 사방박(四方博)이라는 학자에 의해 한일합방의 타당성을 꾸미면서 주장된 이론이다.
이기백은 이런 논리가 부적당함을 알았는지 1990년에『新修版 韓國史新論』을 펴냈다. 거기에는 <主體性의 認識>을 <近代 韓國史學의 전통>으로, "半島的 性格論"을 "植民主義史觀의 청산"으로 고쳤지만, 그 기본 줄거리에는 변함이 없다. 그는 식민주의사관을 청산하는 것이 우선적인 과업이라고 지적하면서 "식민주의사관은 한마디로 말하면 일제의 한국에 대한 식민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한 왜곡된 한국사관이었다."고 정의를 내리고 있다. 이런 정의는 그의 역사이론의 발전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이론의 본질은 반도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새로운 식민주의사관이다. 그 이유는 그가 전개한 논리에서, "그들(식민주의사관: 필자)은 한국이 대륙에 붙어있는 작은 반도였다는 지리적 조건 - 이것은 실은 고려 이후의 일에 지나지 않았지만 - 을 들어서 한국의 역사는 대륙이나 섬나라에 의하여 타율적으로 움직여 온 역사였다고 강조하고 있다."고 하는 지적에서 신민주의사관이 주장하는 "한국이 대륙에 붙어있는 작은 반도였다는 지리적 조건"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는 것은 곧 식민주의사관을 청산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는 고려 이후로 보충설명으로써 반도사관에서 약간은 빗겨가고 있지만,『신수판 한국사신론』이 한반도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함을 볼 때, 역시 그는 한국사 - 조선사 이론에 한계에 다달았을 뿐이다.
한국사의 반도적 성격은 아무런 근거가 없는 허위라는 이기백의 주장은 옳지만, 그 내용은 식민주의사관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말 자체가 한반도가 조선임을 인정하는 논리이기 때문이다. 한반도가 조선이라는 등식의 역사인식이 곧 일제식민사관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그 밖의 다른 주장 - 정체성(停滯性) 이론·당파적(黨派的) 민족성·모방적 문화라는 것들은 모두 한반도에 묶어둔 한국사 전개의 보조 이론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한반도라는 것은 지리적 형태가 대륙에 붙은 반도라고 강요함으로써 독립성·자율성을 부정·부인하는 일제식민사관은 조금도 변화가 없다. 그런 한반도가 조선이라는 변함이 없는 사실에서 조선이라는 무대가 고려 이후라고 한들, 우리의 역사 속에는 한반도가 한국사 - 조선사의 주된 활동무대가 된 적이 없다. 바로 이런 사실을 이기백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기백이 가장 싫어하는 사관이 일제어용식민주의사관인 것 같다. 그런데 과연 그 자신이 일제어용학자들의 식민주의적 한국사관을 타파했는가? 하는 것이 의심스럽다.
이기백은 일제어용학자들이 조선사를 한반도에 얽어 매놓는 당위성을 명분으로 내세우고자 한 말에 지나지 않은 사실을 간파하지 못했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事大主義論에 대하여
이기백의 事大主義論을 반박한 발상은 地理的 宿命을 주장하는 데 대한 강력한 반박이론으로 제시한 것 같다.
그는 "설사 백보를 양보해서 半島는 大陸에 대하여 무력적으로 劣勢를 면할 수 없는 위치에 있다고 가정하더라도, 그렇다고 韓國은 그러한 武力에 대하여 항상 事大主義的 태도를 취하여 왔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고 했다.
이 주장에서 살펴보면, 이기백은 朝鮮史가 韓半島에서 형성된 것이라고 그대로 日本人들의 주장을 수용한 것이 되어 버렸다. 또 "무력에 의하여 사대주의적 태도를 취하여 왔다고 할 수 없다"는 그 자체가 韓半島에 귀속된 조선사에서만이 가능한 표현이다. 이것은 이기백의 가장 잘못된 인식이다. 그것은 이기백 자신이 식민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결과에서 전개된 이론에 지나지 않는다.
이기백의 事大主義 반박 논리는 겨우 이렇다.
"만일 事大主義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韓國史上에 있었다면, 그것은 異民族의 무력적 침략의 所産인 경우보다는 오히려 先進文化에 대한 동경심에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中國에 대한 慕華思想이 그러한 예임은 이미 지적되어 있는 바와 같다."고 하였다.
이기백은 매우 정당한 논리로 주장하고 있지만, 우리는 여기서 전혀 동의할 수 없는 새로운 사실을 찾을 수 있다.
첫째, 사대주의의 발상이 "선진문화의 동경심"으로 풀었다는 것이다.
조선이 선진국이고 문화국인데, 더 이상 누구에게서 선진문화를 받아들인다는 것인가? 이민족의 침입을 받아 그 영향이 조선 역사에 조금은 미쳤을지라도 동경심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둘째, 사대주의의 숙명은 中國에 대한 慕華思想이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기백의 역사 인식이나 지식의 한계로 여겨진다. 中國이라는 말이 무엇인가? 이것부터 알고 논리가 전개되어야 한다. 그는 그저 중국 대륙이라는 곳을 조선과 분리하여 다른 나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이며, 거기서부터 조선사를 배제하여 역사를 전개했기 때문에 이런 표현이 되어버린 것이다.
다시 말하면, 中國은 朝鮮의 지도자들이 활동한 중심 지역이다. 쉽게 말하자면 그저 서울이란 뜻으로 보면 된다. 그러므로 이것은 모화사상이라는 말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기백의 사대주의론은 지리적 환경의 반도적 성격에서 벗어나려고는 했을망정 조선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한데서 그의 학문의 논리는 상실된 것이다.
그는『新修版 韓國史新論』에서는 이 "事大主義論"을 빼기는 했지만, "植民主義史觀의 청산"에 용해시킨 논리의 발전은 있었다. 그러나 그가 종전에 주장했던 "事大主義論"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주장이 없으므로, 그의 이론은 "事大主義論"에 회귀되어 다시 동조하고 있는 잘못을 저질렀다.
韓國史의 主體性에 대하여
이기백은 역사의 주체성을 논하면서, "異民族의 정치적 지배는 그 民族의 정상적 발전을 저해하는 것이다."고 지적했다. 올바른 지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는 그 올바른 지적에도 불구하고, 그가 펼치는『韓國史新論』에서 한국역사의 主體性에 대해서는 모순에 가득 차있다.
"이를테면, 樂浪文化는 아무리 古朝鮮의 옛 땅에서 번영하였다 하더라도 그것은 韓國文化일 수 없다. 그것은 中國의 文化인 것이요, 中國史의 일부인 것이다. 그러나, 그 樂浪文化에 대하여 일으킨 韓國民族의 反應은 바로 韓國史의 일부가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日本의 植民政策 자체는 日本史의 일부일지언정 韓國史는 아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겪은 韓國民族의 苦悶과 反應은 곧 韓國史가 될 것이다."
이것은, 樂浪文化는 한국문화가 아니고, 中國文化요, 中國史라는 것이며, 단지 韓民族의 反應이 韓國史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주장의 근거를 日本 植民政策으로 비유했다. 日本 植民史는 韓國史가 아니며, 그 속에 있는 韓民族의 反應이 韓國史라는 것이다.
참으로 아이러니컬하며, 모순의 논리이다.
樂浪의 위치가 古朝鮮 땅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그 고조선 땅이 어디라는 말인가? 대체로 동북삼성(東北三省)이 있고 시라무렌강 이동의 만주벌판을 포함한 한반도를 가리키는 말이라야 만이 이런 말이 성립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주장의 뒷받침으로 고고학(考古學)이 있지만, 이 또한 잘못 입혀진 첫단추에서 그 결과도 마찬가지가 되고 있다. 고조선의 위치 비정(比定)에 대하여 두 가지로 범위를 정한 것이 있는데, 그 사례를 보자.
"하나는 문화의 영향과 교류지역의 범위, 또 하나는 古朝鮮의 활동핵심지역(영역으로서 현대의 강역의 의미와는 다르다.)의 범위 등으로 단계적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우선은 한반도의 문화와 동질성 내지는 동일계통문화의 요소가 나타나고 있는 지역을 보자. 즉 서쪽으로는 하북성의 동북부 平란(삼水변+欒)·平泉·承德을 포함하는 란(삼水변+欒)河線의 이동, 서북쪽으로는 英金河·老合河의 이남지역, 동북쪽으로는 吉林·長春을 포함하는 第二松花江과 飮馬河의 이남 지역을 구획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구획안 지역은 통치영역이라고 할 수 없는 단순한 문화의 교류 내지는 영향권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둘째, 古朝鮮은 비파형동검을 산출하는 夏家店上層文化 시기부터 일정한 영역과 체제를 갖춘 고대국가의 확실한 선으로 본다면, 古朝鮮의 핵심영역은 遼河 본류를 중심으로 하고, 서쪽으로는 大凌河에서 동쪽으로 遼東半島를 포함하는 지역으로 한정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明刀錢이 발견되는 下限線인 淸川江 - 鴨綠江지역은 비파형동검을 출토하는 고분유적이 발견되지 않는 공백지임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
고고학적으로 접근하였다는 이 고조선의 강역에 논리적 맹점이 있다는 것이다. 그 맹점은 지명의 고찰이 포함되지 않았다. 같은 지명이 한반도에도, 지금의 중국대륙에도 숱하게 많다. 그 많은 지명가운데서 유독 대한민국 한반도에 국한된 것으로 풀이한 논리는 받아들여질 수 없다. 왜 하필이면 요동이면 요동이지, 요동반도는 무슨 말인가? 하는 것이다. 요동이 한반도 북부에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20세기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본다.
그 요동 지역을 포함하여 섬서성과 하남성이 낙랑 지역이요, 그 樂浪은 中國의 중심부에 있었다. 고조선의 도읍이 아사달이요 평양이라 했다. 그 평양이 장안이라고 했다. 장안은 지금 서안(西安)이다. 그렇다면 더 이상의 중국문화니, 중국사니 하는 말은 매우매우 잘못된 주장이다. 조선사 자체가 중국사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이기백은 日本 植民政策을 거들먹거렸지만, 일본 식민정책은 한반도에 국한된 지역사의 부분에 지나지 않으며, 조선사의 지배는 아니다. 그들은 조선사 말살의 명분을 쌓기 위하여 그 논리에 부응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이기백의 한국사의 주체성 논리는 잘못된 것이다.
그는 "표면에 나타난 현상들의 밑에 가로놓인 근원을 파헤쳐 보는 批判的인 眼目이 요구되는 것이다."고 역사의 안목을 넓혀야 한다는 지적을 했으면서도, 막상 이기백 자신은 그런 비판적 안목을 갖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한국사의 주체성을 찾으려면, "韓國史의 對外關係에서 중요한 것은 그가 접촉한 異民族에 대하여 취해온 政策이나 態度, 그리고 그것을 결정하게 한 要因에 있는 것이다."고 한 것은 한국이라는 본질에 전혀 접근하지 못하고서 자신의 논리를 합리화하려는 억측만 벌여놓았다. 특히 "이 民族的인 反應이 바로 그 民族史의 일부를 이루는 것이기 때문이다."고 그는 주장한다.
여기서 민족의 반응이란 무엇인가? 허공에 뜬 몸부림을 말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 땅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역사적 사실이다. 그 역사의 주체가 주역이었는가? 아니면 지배되었는가? 하는 차이는 있을지언정 그 땅의 역사요, 그 나라의 역사이다.
그럼에도 그 지리적 중심의 中原의 朝鮮史에서 이기백은 한반도에 옮겨놓은 조선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민족에 대해 정책·태도 등이 역사의 주체성을 결정하는 요인임에는 분명하지만, 그 영토를 벗어나고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러한 한국 역사의 주체성을 강조했던 그가『新修版 韓國史新論』에서는 한 발 물러섰다. 그는 한국사의 주체성이란 주장을 없애고, "近代史學의 傳統"과 "傳統의 계승과 발전"이라는 내용으로 자신의 이론을 부각시키고 있다. 그 논지는 "民族主義史學·社會經濟史學·實證史學"이 "일제 어용사가들의 식민주의적 한국사관을 타파하여 한국학자들 자신이 쌓아올린 근대사학의 전통을 계승 발전시킴으로써 성장하였다."고 주장하면서, "민족주의사학은 민족의 독립운동을 정신적으로 뒷받침하여 주었으며, 사회경제사학은 전통적인 양반사회의 개혁을 정당화하여 주었으며, 또 실증사학은 한국사학을 독립된 학문으로 정립시키는 데 공헌하였다."고 그 역할이 기여한 공을 설명하였다.
이것은 하나의 훌륭한 논리이고, 그렇게 발전된 한국사라면 참으로 바람직한 역사관일 것이다. 그러나 그가 한국사를 전개한 논리는 한반도가 조선임을 고착화하고 말았다는 지적을 받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주목할만한 것은 "객관적인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 데도 불구하고, 그것이 식민주의사관을 비판하였다거나, 혹은 또 우리 전통을 계승하였다는 한 가지 사실로 해서 높이 평가되는 어리석음은 되풀이될 수가 없다. …전통의 비판적인 계승이 필요하다. 민족적 입장에서 …여러 사실을 독자적으로 체계화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한 것이다.
이 말은 다분히 전자에 대하여 재야(在野) 학자들의 주장에 대한 태도를 비판한 것이 아닌가 여겨지며, 후자에 대해서는 이기백 자신을 제외한 다른 강단(講壇) 사학자들의 주장에 대하여 역사인식에 경고를 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이기백 자신의 역사관이 가장 옳다는 것일 것이다. 그런데 그는 그 다음에서 주장하는 <韓國史의 體系的 認識>에서 논리의 공동(空洞)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국·한국사와 그 체계화는 본질부터
이기백은『新修版 韓國史新論』에서 그가 종래에 주장하던 <韓國史와 民族性>과 <韓國史의 體系化>를 <韓國史의 體系的 認識>으로 대체하였다.
그는 한국인의 黨派性이나, 文化的 獨創性이나, 民族性에 대하여 일본식민사학의 부당함을 신랄하게 비판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그 일본식민사학에 굴복이나 한 듯이 그런 비판 의식이 삭제되고, 더 이상의 주장이 겨우 "人間 중심의 이해·普遍性과 特殊性·韓國史의 時代區分"으로 탈바꿈해버렸다.
이런 태도는 지금까지 한국사의 주체성에 대한 인식이 바로 서지 않은 상태에서 논리를 전개한 이기백의 학문은 더 이상 한국사에 유효하지 않으며, 한국사 전개에 발전되지 않는 저해요인으로 작용될 뿐이다.
그가 주장하는 <韓國史와 民族性>은 허구이다. 왜냐하면, 그의 역사 본질이 韓半島에 국한된 역사의 주장이며, 그나마 반도의 역사마저 한 가지도 밝히지 못했을 뿐 아니라, 조선 본토의 中國 - 中原 역사를 왜곡시켰다.
더구나 새로운 이론으로 부각시킨 "人間 중심의 이해"에서 "역사는 곧 인간의 역사이며, 한국사는 곧 한국인의 역사이다. 이것은 다툴 수 없는 진리이다."고 못박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더 이상의 역사 연구를 포기한 것으로 인정된다.
물론 한국사는 한국인의 역사임에는 분명하지만, 한국의 역사이지, 협의로 인간이 중심된 한국인의 역사는 잘못된 논리라 하겠다.
나라[國家] 땅이 없는 역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라가 없는 역사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역사가 아니다. 그 좋은 본보기로 이스라엘을 들 수 있다.
이스라엘이 나라를 잃었을 적에는 성경(聖經: Bible)으로, 또 입에서 입으로 전하는 고통으로 점철된 역사였다. 2000년이나 방황했던 그들이 그들의 역사라고 인정받을 수 있는 것도 1968년에 이스라엘 민족이 모여 나라를 되찾았기 때문이다. 대신에 팔레스타인의 역사는 어떻게 되었는가?
우리 나라엔 일제시대가 있었지만, 이 때 조선이 당한 고통의 역사는 이스라엘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런 역사는 온전한 역사가 아니라, 역사발전의 정체된 시기라 할 수 있다. 역사의 정체기가 역사전개의 주역이 될 수 없으며, 한반도가 조선사 - 한국사의 주역이 될 수 없다.
나라가 있는 역사라야 건강한 역사 - 논리 정연한 역사이다. 나라는 영토(땅)·주권·국민(백성·인간)으로 구성된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나라에는 인간이 내재되어 있는 용어이다. 그래서 이기백이 주장하는 인간중심의 역사로서 발전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고, 나라의 역사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
땅은 확장·수복·병탄·합병 등으로 역사의 형성에 있어서 하나의 과정으로 작용되며, 인간은 그것들을 주도할 뿐이다. 그래서 제정분리니 일치니 하는 역사적 유산이 땅[山河]에서부터 비롯되므로, 결코 땅과 인간을 분리할 수 없으며, 인권·권리·책임·자유라는 종교·철학 등의 형이상학적 학문이 역사 속에 용해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기백이 진정으로 한국사 - 조선사를 밝혀서 전개하였다면, 그가 펴낸『한국사신론』의 분량이 450쪽이든, 610쪽이든, 그 가운데서 단 한 마디의 "東夷"라는 낱말이 있었어야 할 것이다.
이기백은 어느 민족인가? 누구의 사주로, 어느 나라를 위하여 쓴 글인가?
우리의 역사에서 東夷의 역사를 빼고 나면, 무슨 역사가 이루어지겠는가?! 나무에 뿌리가 없다면 줄기와 잎은 어떻게 자랄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용비어천가』에도 "뿌리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흔들린다"고 하였다.
東夷를 밝히고, 中國이 무엇인지를 알고서, 조선의 역사를 전개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