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평선 외 9편 / 차영호
수평선
내가 여남은 살 적부터
주름을 나풀대기 시작하여
눈 딱 감고
니 곁에 눌러 살아도
여태껏 가슴 그득 찰람
찰람거리는 주름
치마
끈
쌍골죽雙骨竹
-향산 박종현 선생 대금大笒연주에 토 달다
시詩를 양쪽 골 깊은 대통 속에 구부려 넣고 흔들면 욜랑
욜랑 물총새처럼 멋들어진 맵시가 될까
몇 만 년 떨어져 내린 별똥들이 포로롱
포로롱 도로 날아오르지는 않을까
Y
내가 사는 길목마다
니 몸내 나지 않는 곳 있을까
마음 속 체 눈을
더 성긴 것으로 바꾸어도
헛일
얼기미에조차 얼금
얼금 걸리니…
상괭이*도 너끈히 삐져나갈 만큼 코가 큰 그물로 교체하여야
겠다
물밑바닥 암초에 걸려 추 다 떨어지고
찢어진 그물이 풍력발전기 날개처럼 너풀거리는데 속살
속살 걸려 올라오는 목소리
목성 골짜기 깊숙하게 말을 숨겨도 저만치 안개 낀 성간星間에
서 하늘
하늘 훌라후프 돌리는 허리
사랑의 흔적은 지울수록
푸른 바다에서 작살에 찔린 물고기 피같이
붉게 번져서
아직은 가본 적 없는 우주모퉁이 어디쯤
니 그림자 어룽이지 않는 곳 없을까
* 쇠돌고래
장자莊子와 석빙고
청도에 가서
석빙고 속에 들어가 얼음장으로 차곡차곡 쟁여져 있다가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네
쨍그랑, 유리창과 함께 깨져 내리는
흰긴수염고래
아득한 성간星間을 헤치고
하늘 너머 먼 세상에서 날아든 고래, 아니
곤鯤이여
내리 삼년 굶주린 이서국* 사람들
아귀악신 들러붙어
몇 달은 족히 뜯어먹었으리
몸 보시하고 남겨진 늑골
무슨 할 일이 더 남아있어
아직까지 이륙하지 않고 코를 골고 있는지
뼛속에 경전을 도로 묻고
마니차摩尼車 돌리듯 밥통 언저리를 문지르면
따뜻한 피 다시 돌아나
겨울 볕 쬐며 녹아내리니
훌쩍, 저기 저 남쪽 읍성너머 아지랑이를 타고 날아오르는
붕鵬
* 경상북도 청도 지역에 있었던 삼한시대 성읍 국가
명命
해삼이 지 먹을 게 없으면 먼저
내장을 버리고
몸무게 줄여 버틴다하네
그런 줄도 모르고 나는
해삼을 썰다가
후루룩
문어는 먹을 게 없으면
지 다리를 뜯어먹으며
새 다리가 돋을 때까지 기다린다네
그런 줄도 모르고 나는
삶은 문어다리를
질겅질겅
온갖 것들로 채워진 나의 장기臟器여
한 열흘쯤 굶게 되면
베갯잇이라도 뜯어먹고 웅크리게 될 거야
그런 줄도 모르고 당신들은
확인해 보겠지 발길로
툭툭
늑대와 개의 시간에
둑길을 거닐다가
물 건너는 목성을 만난다
별은 늘 빛나는 것이 아니라며
물속에 잠긴 허벅지를 지그시 누른다
느닷없는 배설
분홍이 검정 속으로 들어가기 전
변기 물 내리는 소리
멈칫, 곤혹스러울수록 고요해지는
강
바람
소리 없이 다가온 냄새그림자는
예리한 면도날
콧구멍을 후벼 판다
니가 내 체취를 기억하는 것은
니 마음의 체 눈이 너무 촘촘하여
쓰잘머리 없는 걸 다 추려내기 때문이야
목성은 홀로 날아 내리는
압시향鴨屎香 숨결을 가지고 있다
임무
죽겠으니 섹스나 하려는 걸까
봄철에만 스커트 자락을 지피는 핑크레이디*
바깥베란다에 내놓고 깜빡
뙤약볕이 지져대니
차마 말라죽지 못하고
한여름 또 꽃망울을 맺었다
야합하듯
제 꽃자리도 아닌 곳에서
암내를 피운다
목숨보다 어리둥절한
완수
* 양란, 덴드로비움 속의 한 가지 이름
크로키하는 젓대
4B연필로 프로펠러를 돌리면
가재 비린내가 난다
그들이 숨어사는 깊은 계곡 개울에 바람이 일고
구절초 꽃이 흰 장송곡처럼 흔들리는 벼랑
바위를 딛고 허리 곧추세운 늙은 향나무가 궁둥이를 흔든다
어때, 이 냄새 환쟁사 해우소 널판만큼 쿰쿰하지 않아?
4B연필로 금을 자꾸 겹쳐 그으면
마그마가 급격하게 식는 화산
천길만길 막장에서 흑요석黑曜石 한 덩이 캐내어
검디검은 가슴에 일렬로 아홉 구멍을 뚫는다
취구에 입술을 대고 부니
헛바람 새는 소리만 푸푸
구멍 속 빨강
지구 내부가 다시 들끓고
화산재가 부우― 영혼처럼 뿜어져 나올 때까지 불고 또 불다가
4B연필을 입에 물면 새근한
젓대소리 쪽배 타고 일렁이겠지
바람은 서낭나무 가지에 박쥐처럼 매달려 호오이호오이
가재, 자네는 빨갛게 구워진 가위를 쩔꺽이고…
설악雪岳을 오르며
Ⅰ
일행一行들은 저마다
망치와 정을 들고
벼랑을 쪼아
선녀를 불러내기도 하고
강생이를 꺼내기도 하고
산은 계류谿流를 은린銀鱗으로 바꾸어
저만치 구름 위로 오르고
Ⅱ
마등령 잔등에 올라타니
공룡이 바드득 이를 갈며
길 가웃 넘는 눈 헤치며 다가오네
등딱지에 방패 곧추세운 걸 보면
초식草食이 분명한데
밥 못 자셔서 시장하신가
백악기 콧김이 서리서리
바람맞이에 선
내 안경알까지 서려오네
Ⅲ
희운각 전나무가
잔별들을 떨어내자
동고비 한 쌍 번갈아
내 손바닥 헬기장에
착륙
이륙
착륙
이륙
포록포록 프로펠러 소리
온 산이 기지개를 켜네
아들 두 녀석은 아직도 별을 줍고
아내는 아침쌀을 씻어 앉히겠지
먹감
감나무도 감을 잔뜩 달고 살기 고달프면
속을 저렇게
썩혀
탱글탱글
지 새끼들 목숨
영글리는데…
ㅡ『우리詩』2017년 5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