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회 《시인세계》신인작품 공모 당선작
복화술사 하차투리안 / 박은정
하차투리안은 네모난 박스를 들고 유랑을 한다
왈츠를 추듯 우거진 정글을 가볍게 턴을 하고
수백 년 동안 사라진 기억을 단숨에 기억해내는 유연함
하차투리안은 단련되어간다
침묵으로 만든 꽃다발을 창에 걸고
무수히 오르내리는 밤들처럼
앞발을 들고 하차투리안
네모난 박스는 죽은 인형들의 집합체
입을 열면 비가 내리고 온 강이 범람하고
떠내려간 사람들은 다시 언덕을 기어 올라온다
당신에게 가장 어울리는 표정은 말문이 막힌 표정
그러니까 슬프고 발랄한 침묵으로
오늘은 아주 이상한 일들이 많은 날일 테니까
정오가 되면 하차투리안은 이불을 말고
흔들의자에 기대 낮잠을 잤다
귀가 먼 부랑자들이 노래를 부른다
하차투리안 하차투리안 우리의 전사 하차투리안
당신은 우리의 복화술사
당신은 입을 다물고 눈을 감고
매일매일 비밀을 발설하지
멋쩍게 웃던 하차투리안이 잠시 코를 곤다
일상의 불운 따위는 개나 던져주라지
하차투리안이 걷는다 두 팔을 크게 흔들며
그의 마법이 뚱뚱해졌다 날씬해졌다
늑골 속에서 회오리가 분다
수정 구슬을 들고 타로카드를 섞으며
내 목소리가 들리니
너는 지금 딴청을 부리고 있지만
아냐 견딜 수 있어 하차투리안
우리는 한때 불운을 즐기지 않았어
무감각과 무기력을 유일한 취미라고 하면 어떨까
당신의 입에서 나비가 날아다니고
내일 하루도 늙지 않고 죽을 수 있다면
거룩하게 잠이 들 텐데
우리는 목소리를 잃은 지 오래
날마다 똑같은 생을 되풀이하는 복화술사
문득 살아온 날들이 행방불명된다.
페이드아웃 (Fade Out) / 박은정
오늘밤 엑스트라 행인들의 행렬이 지나갑니다.
장렬하게 눈을 감는 건 오래된 기억을 더듬기 위한 신호입니다.
막이 오르면 흑백의 그림자들이 하나 둘 모여들지요.
잠깐, 가벼워지고 싶습니다. 오늘 밤 오래 허락하신다면
망설이던 당신이 담배를 물고 스스로를 생각하는 동안
알몸의 각도가 되는 건 시간문제지요. 몸짓의 비주얼이 좋으니까요.
속임수는 아주 간단합니다. 그토록 점멸하는 불빛들.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정의롭지 못한 일이지요.
광대뼈가 튀어나온 얼굴이 수줍게 멀어지고 있군요.
멀어질수록 허상은 선명하게 반영됩니다.
모든 증후군은 위험합니다.
출근길 신호등은 막바지에 거룩하구요.
나는 매일 똑같은 처방전을 받아 적습니다.
누군가의 인기척을 수소문하는 동안
관객들이여, 위독한 추측은 당분간 보류입니다.
이상하거나 어색한 부분들은 바로 배경이 될 테니까요.
아, 마지막 대사를 놓친 당신이 오버랩되는군요.
당신의 수치심이 유머가 되는 경계를 생각합니다.
망각으로 가는 노래는 모두 끝이 없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점점 희미해져가는 것.
속임수는 아주 간단합니다.
* 페이드아웃(Fade Out) : 천천히 어두워지며 암전 상태가 되는 것.
숲의 수화 / 박은정
바야흐로 먼 이웃에도 밤이 찾아왔습니다. 도시의 끝은 깊고 고요하여 귓가를 스치는 바람에도 나는 뜨거워집니다. 버려진 달과 구름과 야윈 잠꼬대를 듣는 불면의 밤. 이 계절이 당신을 엿듣는 동안 우리의 전망은 숲의 세계로 전향하는 것. 낯선 밀회도 없이 몽타주도 없이 숲을 상상하는 일은 때로 간절합니다. 서로의 이름을 건네는 동안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천천히 잔상만 남기고 일어서는 사람들. 누렇게 벌린 입들이 웃습니다. 수많은 웃음 속에 공허한 추측이 없었다면 좀 더 많은 대화를 할 수 있었을까요. 더 이상 당신의 다정한 억양을 탐하지 않겠습니다. 당신의 현현을 기록할 것은 이곳에 남아 있지 않으니까요. 숲이 범람합니다. 이곳의 대화체는 누구든지 바람을 불러올 수 있다는 것. 상상하는 것들은 모두 당신이 됩니다. 바람이 일렁이고 늙은 당신이 알몸으로 울고 있습니다. 모든 잎사귀들이 방향도 없이 곤두서고 짐승의 울음은 내내 고요합니다. 입을 열지 않아도 가만히 나를 발음하는 것들. 새들은 깃털을 버리자 공중을 날고 우리는 말랑한 입을 버리자 태초의 불구를 가졌으니까요. 어젯밤 여우는 불면의 밤을 피하지 못해 가끔 천년을 꿈꾼다는 자백을 남겼습니다.
구멍을 엿듣는 시간 / 박은정
그래요, 밤은 커피잔에 가라앉은 설탕처럼 꿈을 남기고, 꿈속 누군가는 던져진 그물 사이로 빠져나가는 방법을 고심하고 있겠죠. 시간이라는 자욱한 안개 사이 초침은 토닥토닥 내 등을 두드리고 아, 당신이라는 커다란 어둠 사이 아침이 삐져나오는 소리 밤새 들을래요 자코메티 자코메티, 시간이 엿듣는 소리를 보아요 밤새 사라지는 소리들이 당신의 표정을 훔치고, 옆방 어머니의 손에는 묵은 시간들 구멍으로 향해 가는 소리, 평생 문구멍을 엿보며 떠는 스릴러물의 주인공이 될 생각이 없다면 자코메티 자코메티, 시간 속으로 떨어지는 구멍을 보아요 뼈대만 남은 당신의 슬픔 따위는 식은 수프처럼 구미를 당기지 않는 것, 웃어요 울어요 나의 자코메티, 어머니의 잠이 깨면 새벽기도를 위한 죽음의 손잡이를 당길지 몰라요 언제까지 엿보고 있을 건가요 자코메티, 두려움은 온몸에서 실이 빠져나가는 시간, 자코메티 자코메티, 당신의 얼굴은 죽음을 향할 때만 웃고 있어요 발걸음은 처음처럼 처절하게 그러나 자코메티, 당신의 시간은 쉴 새 없이 쏟아지는 토사물 같은 것.
* 자코메티 : 알베르토 자코메티, 스위스의 조각가. 초현실주의, 상징주의 작가.
납치된 영화광들 / 박은정
돌아봐, 사진 속 너희들을 찍어줄 테니
새벽은 바람 없이 모래언덕을 불러 삼각대를 세우고
광기 없이 붉은 사진을 연신 찍네
셔터에 눈이 먼 얼굴들
찍어도 드러나지 않는 빛
발기하지 않는 어둠을 향해 몸을 트는 허공은
한 장의 내셔널 지오그래픽 사진
깔깔거리며 입을 여는 발랄한 인생들
납치된 영화광들의 의욕 넘치는 대사
오옷, 우리는 단지 예정에 없던 영화를 보는 것뿐이야
곧 시작될 영화는 아름다운
질기게 아름다운 빛들의 공포
등 뒤에서 덮치는 지문에 몸을 낮추고
흔들리는 클라이맥스를 향해 입을 쩍 벌린
비명은 지금 포장 중이야
팝콘처럼 튀어 오르는 두려움을 아니?
몸의 돌기에서는 달싹한 플라스틱 맛이 나는
사르르 감겨오는 혀의 느낌
너희들의 이름에 괄호를 열고 새벽 지문을 다는 건
우연을 가장한 죽음이 아침으로 오고 있다는 것
적요는 흐르는 자막 위 마지막 눈을 뜨고
복선 없이 드러나는 영화광들의 침묵
돌아봐, 사진 속 웃는 너희들을 찍어줄 테니
혼자만 남은 사진 낭자한 붉은 암호들
심약한 너희들이 북북 찢어지는구나
오그라든 검은 필름 속에서, 오오.
박은정 시인
1975년 부산 출생. 창원대학교 음악과 졸업.
[심사평]
말하는 자의 삶과 시_ 김종해
우편, 이메일, 온라인을 합하여 제17회 《시인세계》신인작품 공모 투고자 수는 246명, 작품 편수로는 3천 편을 상회한다. 이 가운데 예심을 통과한 응모자는 24명이다. 다들 예비시인으로서의 발상법과 화법, 언어구사가 매끄럽고 유려하지만 좀더 낯선 의미망과 제 목소리를 갖추고 있는 신인은 드물었다.
최종심에 세 사람이 남기까지는 어렵지 않았다. 「스테인리스」외 9편의 박은영, 「애장골」외 10편의 이현옥, 「복화술사 하차투리안」외 10편의 박은정이 이들이다.
이현옥의 「애장골」은 시의 완성도 면에서 무난하지만 화자가 풀어내는 비극적인 가족사의 서사가 시로서 잘 숙성되지 못한 흠을 보이고 있다. 주제를 파고드는 응집력이 부족하고 전체적으로 산만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박은영의 「스테인리스」는 무료급식소의 노숙자가 가진 ‘빈 그릇’에 담긴 사회성과 그를 보는 화자의 인간적인 연민이 그려져 있다. “이팝나무가 슬며시 젓가락을 내밀자 햇빛을 반사하는 눈부신 끼니”와 같은 표현은 탁월하다. 이 같은 시의 표현이 작품 전체를 받쳐주는 평형수준이 되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당선작으로 뽑힌 박은정의 「복화술사 하차투리안」은 유랑하는 복화술사의 삶과 일상을 내것과 교감하는 시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하차투리안은 자신이 설정한 인형극의 상황을 “매일매일 비밀을 발설하지만” 화자 자신도 “날마다 똑같은 생을 되풀이하는 복화술사”임을 진술한다. 설정된 대상의 삶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있고, 나와 함께 노래하고 말한다. 시를 읽음으로써 읽는 이에게 쉽게 시가 전달되는 시, 이런 시를 박은정은 쓰고 있다. 시인으로서의 앞날이 기대된다.
시의 핵심을 끝까지 붙잡는 긴장감_ 신달자
예심을 넘어온 작품이 24명, 그 중 한 명을 고르기는 쉽지 않았다. 시를 읽은 첫 번째 인상은 시가 비슷비슷하다는 점이었다. 시가 불필요하게 길었고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잘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시의 전달보다 시 예술 영역의 확장을 바란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찾기 어려운 것이 심사자의 심정이었다.
마지막 남은 작품들은 이현옥 「애장골」, 박은영 「스테인리스」, 박은정의 「복화술사 하차투리안」이었다. 이현옥은 톡톡 튀는 언어들과 표현들이 있었지만 내용이 잘 잡히지 않아 아쉬웠고, 박은영도 이야기를 풀어 가는 재주가 잇는데 너무 불필요한 말들을 붙잡고 있는 듯했다. 전달하고 싶은 내용이 길을 잃었다고 표현하고 싶다.
당선된 박은정의 시도 크게는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이야기의 전개에 무리가 없고 시의 중요한 핵심을 끝까지 붙잡고 있는 긴장으로 인하여. 셋 중에서 시인의 명예에 오를 수 있었다. 시가 화면과 함께 떠오르게 하는 시적 장치가 매력이라고 더 덧붙이고 싶다.
시인의 기회는 언제나 열려 있다. 낙선자들은 더 분발하고 당선자는 겸허히 약점을 극복하고 정진 있기 바란다.
자신만의 시적 공간을 창출_ 권혁웅
이현옥, 박은영, 박은정의 시가 최종적인 논의 대상이 되었다.
이현옥(「애장골」외 10편)의 문장은 다정하고 유머러스하고 농염하다. “녹색 철대문이 툭, 뱉어낸 우체부는/ 왜 빨간 인주를 또, 들이밀까요”와 같은, 힘주지 않고도 시가 되는 구절들이 툭툭 나온다. 말을 다루는 솜씨가 좋은 시인이 갖추어야 할 우선적인 덕목이라면, 이현옥의 자리가 거기에 가장 가깝다. 그런데 시 곳곳에 꾸며낸 감정들이 얹혔다. 호흡이 풀어지고 방금 한 말을 또 하고 의성어나 의태어에 재차 기대는 것은 아직 자신감이 모자란다는 증거다. 자신을 조금만 더 믿는다면 아주 좋을 것이다.
박은영(「스테인리스」외 9편)의 시는, 어느 지면에 응모하든 본심에 올랐을 작품이다. 시선이 안정되어 있고 전언이 분명하며 대상을 확실히 포획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안정감은 짐이기도 하다. 안정된 시선은 정형화된 시선이고 분명한 전언은 당위적인 전언이며 사로잡은 대상은 놓친 대상이 많다는 증거다. 유비에 기대어 작업하는 시의 장점과 단점이 이번 시편들에서 극명하게 보인다. 개성을 밀고 나가 보편성에 이르는 것이지, 보편성에서 지분을 물려받아 개성을 확보하는 것이 아님을 유념했으면 한다.
박은정(「복화술사 하차투리안」외 10편)의 시는 앞의 시들보다 좀 더 어눌하고 좀 덜 선명하지만, 자신만의 목소리를 가졌다. 고백체 말 사이에 현실을 촘촘히 박아 넣는 솜씨도 좋다. 자신만의 시적 공간을 창출할 줄 안다. 대상이 없는 고백, 다시 말해서 신파에만 주의한다면 돌올한 시들을 낳을 것이다. 당선을 축하드린다.
최종적으로 논의의 대상이 되지는 못했으나, 이정훈(「쏘가리 호랑이」외), 이복현(「혀」외), 안명하(「조심鳥心」외) 등의 시편들도 내려놓기에 안타까운 시편들이었음을 부기해둔다.
제17회 시인세계 예심 통과자 명단
김정 「사막 암살자」 외 10편
김지훈 「직립」 외 9편
도복희 「뜨거운 자세」 외 9편
류명순 「내통」 외 9편
박은영 「스테인리스」 외 9편
박은정 「복화술사 하차투리안」 외 10편
서경 「거울을 마주한 이상」 외 9편
서희자 「압록강을 넘어온 적벽대전」 외 9편
신지영 「기록된 바람」 외 10편
안명하 「조심鳥心」 외 12편
오광석 「안드로이드」 외 9편
유안나 「매지구름」 외 10편
유지원 「햇살론」 외 9편
이복현 「혀」 외 11편
이승준(본명:이재근) 「얼굴」 외 12편
이어진 「폴리나」 외 10편
이재흔 「크라이오닉스」 외 9편
이정훈 「쏘가리 호랑이」 외 10편
이현옥 「애장골」 외 10편
이형기 「점심 때 노인들은 병원처럼 앉아 있고」 외 9편
이혜경 「욕망의 빙주氷柱」 외 9편
전영관 「침묵」 외 12편
최윤채 「대칭성 인류학」 외 9편
홍순영 「구름세탁기」 외 14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