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강의 (2)
진누가
CMI의 현재와 미래: 구조적 관점에서 본
CMI의 정체성
행13:36 “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섬기다가 잠들어
그 조상들과 함께 묻혀 썩음을 당하였으되”
선교총무이신 박여호수아 목자님으로부터 선교적인 측면에서 지난 13년간 CMI 역사를
평가하고 앞으로의 방향이 될 만한 부분에 대해 말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사실 3년 전 10주년을 맞이했을 때에도 동일한 주제로 강의부탁을 받아 준비를 했었지만 포럼이 취소되는
바람에 발표하지 못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렇지만 이듬 해 2014년
미래 포럼이라는 이름으로 제가 발제한 내용을 중심으로 박여호수아 목자님이 한국과 미국 수양회에서 발표했고 일부 독일 선교사님들도 내용을 접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기보다는 각도를 좀 달리 해서 우리 모임의 구조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과거 UBF와 13년간 지금의 CMI 역사를 구조적 측면을 중심으로
평가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왜 구조문제에 초점을 두느냐 하면 이것이 선교단체로서 CMI의 본질 및 정체성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13년간 한국 CMI 안에서는 구조에 대해 여러 논의가 있었습니다.
많은 토론을 거쳐 우리 모임은 대학선교회, 교회협의회, 해외선교협의회의 세 가지를 축으로 구성되고 작동되는 모임이라고 선언했고 이것을 한국과 해외의 각종 수양회에서 반복적으로 말해왔습니다.
그러다가 올 해 들어와 한국 CMI는 구조적인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합의를 했습니다.
그것은 세 축이 여전히 유기적 관계를 유지하지만 기존의 CMI 배경의 교회대학부와
선교단체로서 CMI 곧 대학선교회는 구별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세 축은 삼위일체적 연관성을 가지지만 우리의 정체성과 관련하여 캠퍼스 단체로서 CMI를 대표하는
것은 대학선교회가 되는 것이 마땅하다고 내규를 정한 것입니다. 해외 CMI는 그동안 국내의 구조적 틀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아 왔기 때문에 국내의 변화가 해외 CMI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 그리고 해외 현장의 다양한 상황 속에서 어떻게 설정하는 것이
좋은지 논의와 합의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동안 우리의 구조문제 논의는 개혁 이후 우리의 달라진 생각을 반영하긴 하였으나 대체로 편의주의적 관점, 그리고 내부자적 관점에서 다루었습니다. 그러나 CMI가 회원으로 있는 세계선교협의회(KWMA)와 학복협, 그리고 일반 교계가 가지고 있는 보편적 관점 또는 객관적 관점을 도외시하게 되면
우리는 숲에서 길을 잃어버리거나 이단적 단체, 도는 왕따 단체로 빗나갈 우려가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CMI의 구조 문제는 선교단체의 구조와 교회 구조라는 큰 틀에서 성경적 교회사적
선교학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큰 틀에서 볼 때에만 우리가 과거 어디에 서 있었고 지금은 어디에 있으며
앞으로 어디로 갈 것인가 방향을 잡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문제의식 가운데 이 강의는 첫째,
선교단체의 구조에 대한 기존의 논의를 살펴보고 둘째, 이러한 논의에 기초하여
UBF와 기존 10여 년간 CMI의 구조에
대해 평가하며 마지막으로 앞으로 CMI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1.
선교단체와 교회의 관계
선교단체와 교회의 관계를 바르게 이해하고 세우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양자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는 가에 따라 선교단체의
정체성과 역할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이 양자
88
의 관계에서 핵심적인 질문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선교단체는 교회와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만일 선교단체가 교회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라면 선교단체는 교회화,
또는 교단화해도 되는 것인가? 만일 선교단체가 교회와 다른 것이라면 양자 사이의
관계는 어떠해야 되는가? 선교단체와 교회와의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는 세계 복음화에 있어서 갈등과 배제가 아니라
협력자로서 조화와 공조를 취하여야 한다는 입장이 지배적입니다. 강조점에 따라서 선교단체가 더 중요하다고 하거나
아니면 양자를 대등한 파트너로 말하든지 아니면 지역 교회에 좀 더 비중을 두고 선교단체의 역할을 임시적, 부차적 역할로 제한하는 식으로 정도 차이는 있지만 상대방의 존재를 완전히 부정하는 경우는 거의 드뭅니다.
그런데 선교단체와 교회구조에 있어서 핵심적인 이슈는 선교단체가 지역교회와 마찬가지로 성경이 인정하는 합법적인 교회일 수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먼저 이러한 질문에 긍정적으로 대답하는 사람이 미국의 선교학자이자 미국 세계 선교 센터와 윌리엄 캐리 국제대학의 설립자인 랄프 윈터(Ralph
Winter)박사입니다. 윈터는 세계 선교의 두 구조를 제시했는데 선교단체는 소달리티(Sodaliti:
‘교제’, ‘협회’라는 뜻), 지역교회는 모달리티(Modality:
‘양식, 양상’이라는 뜻)로 형태면에서 각기
다른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윈터의 정의에 의하면 모달리티는 노인과 젊은이, 남자, 여자를 막론하고 모든 신자가 포함된 회중 구조입니다. 이에 비해 소달리티는 모달리티의 멤버가 된 후 특정 목적을 위해 두 번째 결정으로 되는 것으로서 비슷한 나이의 헌신된 사역자들로
구성된 선교회 구조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보면 두 구조가 전혀 다른 구조 같으나 윈터는 두 개가 기능상으로는
같다고 말합니다.9)여기서 그가 말하는 기능은 바로 교회로서의 기능을 말합니다. 윈터는 사도행전 13장에 나오는 바나바와 바울의 선교팀을 소달리티의 성경적 모델로 삼는데 그는 바울의 선교팀이 “지역교회로서 모든 권한을 가지고 있으며
실제적으로 움직이는 교회이다”10)라고 주장했습니다.
윈터만이 아니라 풀러 신학교의 선교학 교수인 폴 피어슨(Paul Pierson) 역시 “모달리티와 소달리티는 각각 교회의 표준적 표현”이라고 말했으며11), 항공선교회의 회장인 찰스 멜리스(Charles
Mellis)도 “두 구조 곧 교회와 선교단체 공히 교회이다”고 주장했다.12)만 일 이들의 말대로 선교회가 선교의 주요 동력일 뿐만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보편교회로서의 기능까지도 합법적으로 가지는 구조라면 선교단체가 교회라는 이름을 붙이고 신학교도 세우고 안수도 주며 교단을 세우는
것에 하등 문제가 없게 됩니다.
그런데 선교단체와 선교학자와 목사들 가운데는 윈터의 입장을 정면으로 반대하는 훨씬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영국의 중국 선교사 롤랜드 알렌(Rolland
Allen), 미국의 나이지리아 선교사 학자 해리 보어(Harry Boer), 달라스
신학교의 죠지 피터스(George Peters)와 같은 사람들은 “세계복음화의 임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선교단체는
성경적으로 이상적인 모델이 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보어는 선교회
구조는 “교회가 세계복음화의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을 때 생겨나는 축복이긴 하지만 비정상적인 모습(abnormality)”이라고 말했습니다.13)특별히 미국의
89
복음주의 자유교회 선교회의 브루스 캠프(Bruce K. Camp)박사는 윈터의 두 구조론을 반대하면서 소달리티 구조의 신학적 오류를
지적했습니다. 그는 먼저 소달리티, 모달리티와 같은 사회학적,
인류학적 개념이 과연 성경의 교회관을 적절하게 대표하는 것인지 의문을 표합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결정적으로 바울의 선교팀이 “보편교회의 또 다른 표현이라는 것은 성경 어디를 통해서도 뒷받침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성경은 바울과 그의 팀을 결코 ‘교회’라는 이름으로 부른 적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습니다.14)
평생을 학생복음운동사를 연구하셨던 고 김요한 목자님은 선교단체와 교회와의 관계를 어떻게 말했을까요? 김요한 목자님은 유작, 『21세기 희망, 대학생 선교운동』에서 “제한된 목표를
중심으로 비슷한 연령층이 모인 기독신앙 대학생들의 모임은 선교단체이지 교회가 아니다. 그러므로 선교단체는
교회와 협력하고 지역사회에 헌신하며 동시에 그들로부터 보호와 도움을 받아야 한다.”15)라고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김요한 목자님은 선교단체 출신이면서도 랄프 윈터와는 반대 입장 곧 선교회는 교회가 아니라는 입장을 취합니다. 이는 주류교회에 속한 목회자들 뿐 아니라 한국세계선교협의회와 학복협에 속한 모든 선교단체들의 일치하는 견해입니다.
소수이긴 하지만
UBF 같은 일부 단체는 랄프 윈터의 두 구조 이론을 환영하며 자신들은 학생복음운동을 하는 선교단체이지만
IVF나 CCC와 같은 준교회(parachurch)가 아니라 ‘교회’라고 주장합니다. UBF 정준기 선교사의 『기독 학생 운동사에서 본
UBF 복음사역』 중 교회론 부분을 보면, 신약의 교회를 뜻하는 ‘에클레시아’는
“어떤 건물이나 장소의 개념보다 하나님의 백성을 지칭하며”, 종교개혁자들이 말하는 교회의 표지는 하나님의
말씀선포와 합당한 성례전(세례와 성찬), 그리고 권징인데,
UBF는 이 모든 것을 충족시키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의 모임이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UBF를 ‘준교회’라는 애매모호한 범주로 넣는 혼란된 교회관을 가질 필요가 없다.
UBF는 신약성경이 말하는 에클레시아이며 학원선교를 위한 시대적 사명을 가진 특수한 캠퍼스 ‘교회’이다”라고 주장을 했습니다.16)UBF가 이처럼 자신이 준교회(선교단체)임을 부정하고 교회로 강변하는 것은 정준기만의 견해가 아니라 안암센타 홈페이지에 ‘캠퍼스
복음운동의 유형’이라는 글에서 동일한 내용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을 보면 공식적인 입장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UBF가 학생복음운동 단체를 자처하면서도 이렇게 준교회(선교단체)가 아니라 교회라는 모순되는 주장을 하는 것은 만일 준교회라고 하면 ‘성경공부는 UBF에서
하더라도 주일에는 교회에 보내야 한다’는 주위의 압박을 피하고 독자적인 예배를 유지하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UBF가 스스로 주장하는 바대로 ‘parachurch'가 아니라 성경적으로 명확한 교회라면 왜 스스로를 교회라고 부르지 않고 ‘대학생 성경읽기 선교회’라고 부르는가 하는 질문이 떠오릅니다.
이는 결국 교회화를 하지 않으면서 대학생 선교단체의 정체성을 계속 유지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경우 두 가지 문제가 생깁니다. 첫째, 주일에 독자적 예배를 드리는 선교단체는 대부분의
선교단체와 교회가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UBF는 타 단체 및 교회와 정상적 관계 단절을 피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학복협이 UBF를 회원단체로 허입을 거부하는 이유가 이 때문입니다.
둘째는 선교단체에서 교회를 분리해 내지 않을 경우 결국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선교단체로서 소달리티적
90
성격은 사라지고 모달리티만 남게 될 것입니다.
처음에는 소달리티로 시작했을지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모달리티로 전환하는 현상을 제일 먼저 지적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랄프 윈터입니다. 랄프 윈터의 두 구조 이론을 자세히 살펴보면 아주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는 그가
모달리티 마인드에 사로잡힌 개신교인들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부분에서 심지어 소달리티 구조를 가진 선교단체가 자율적 선교활동을 하면서도 그들이 추구하는바
유일한 목표는 모달리티를 세우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17)다시 말하면 교단 배경을 가지지 않은 독립된 선교단체조차도
자신들이 사역하는 선교지에서 소달리티 구조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단지 모달리티 구조인 교회를 설립하는데 힘쓰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에딘버러 대학의 선교역사가 브라이언 스탠리는
UBF가 모델로 삼고 있는 모라비안 선교회조차도 1735년경에는 첫 번째 주교를
갖기 시작했고 1764년경에는 공식적으로 교회로서 정관을 채택하였다고 말합니다.18)뿐만 아니라 모라비안 선교회의 직접적인 열매라고 할 수 있는
웨슬레의 감리교 운동도 그의 사후 소달리티 성격을 상실하고 교단화 되어버린 사실을 지적했습니다. 미국의 이스턴 침례교 신학교의 사무엘 에스코바(Samuel
Escoba)는 미국의 학생자원자 운동의 역사를 평가하는 글에서 오늘날 너무나 흔히 교회화 하고 싶어 하는 유혹에 빠지는
선교단체의 문제를 지적한 바 있습니다. 안타깝게 UBF도 이미 이런
유혹에 빠져들고 있는 징후가 있는데, 이는 그들도 상당수가 목사로서 안수를 받고 ‘경희문 교회’,
‘신수 선교교회’와 같이 교회라는 간판을 달고 있는 데서 나타납니다.
이 상의 내용을 요약 정리해 보면 선교단체는 그 소달리티 구조가 갖는 역동성에 의해 거의 모든 기독교 운동에서 주요 동력이
되어 왔지만 그것이 실제로 교회와 동일한 기능으로 작동한다고 볼 만한 성경적 신학적 교회사적 뒷받침을 찾기는 어려운 것으로 보입니다. 도 리어 대부분의 선교단체는 소달리티 구조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역교회를 설립하는 목표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교회화의 유혹에 시달리다가 결국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지역교회로 전환하는 경향이
있음을 교회 역사는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러므로 이러한 유혹을 이기고 시간의 테스트에서 살아남아 선교회의
소달리티적 역동성을 계속 지켜나가려면 지역교회를 설립하는 목표가 아니라 동일한 소달리티 구조를 세우는 목표를 명확히 설정하고 모달리티 구조를 제거
분리하는 작업을 지속적으로 이루어 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2.
UBF와 CMI 13년의 구조에 대한 평가
앞에서는 큰 틀에서 선교단체의 구조 문제를 교회와 관련하여 말씀드렸는데 이제는 CMI가 왜 UBF에서
개혁을 하게 되었는지, 그 개혁의 목표에 어느 정도 부합하는 열매를 맺었는지, 구조적 측면을 중심으로 평가해 보고자 합니다.
CMI가 UBF 내에서 개혁을 시도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구조와 관련해서 중요한 것 두 가지만 말씀드리면 먼저 우리 모임의 자율성을 회복함으로 학생 복음운동의 본질에 충실하기 위해서입니다.
김요한 목자님은 대학생 선교운동의 여러 특징 중 자발적인 결단과 조직의 민주적인 특성을 강조했습니다. “일곱째, 자발적인 결단이다. 대학생 운동은 학생들이
스스로 선택하고 결단하게 해야 한다. 획일적인 명령에 복종만 하는 권위주의적이고 하향식의 리더십은 안 된다...
열째 대학생 선교운동은 민주적이고 예언자적이어야 한다. 조직이 민주적이라는 것은
학생들의 자발성
91
을 많이 살려준다는 의미이다. 선교단체 운영을 민주화하지 않으면 지도자 훈련은 실패하고 만다.”19)김요한 목자님이 같은 특징을 다른 말로 두 번 반복한
것은 자발성, 자율성이 선교단체, 특히 학생복음운동의 핵심적인 특징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20,500명의 선교사를 해외로 파송한 미국의
SVM운동의 이름이 학생 ‘자원자’ 운동입니다. 브루스 바우어(Bruce
Bauer)가 선교단체 구조를 지역교회와 차별하는 핵심 특징으로써 높은 정도의 헌신도를 말했는데20)그런 높은 헌신도 역시 자발성과 자율성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UBF 2000년 개혁이 있을 때 개혁 UBF(CMI)는 “자율적 협의체”라는 점을 특별히 강조했던 것입니다.
과거 UBF 시절에는 권위주의적 하향적 리더십 때문에 시니어, 주니어, 개척목자 ABCDE 등 등급이 있어서 전체 스탭
중 일부만 UBF의 회원이었고, 모세와 같은 레벨의 하나님의 종과 그
옆에 시종 드는 여호수아 레벨의 종들이 있었는데 여기 계신 모든 종들은 그 등급에 들지 못하는 종들이었습니다. 저도 풀타임으로 부름 받은 하나님의 종이지만 내가 발견한 하나님의 뜻이 있더라도 상위 등급의 종들의 뜻에 무조건 복종해야 했습니다.
90년대 월요일 한국의 스탭 미팅에 참석하면 매주 주일예배 숫자와 일대일 숫자가 지난주보다 떨어진
지부는 전요한 목자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아야 했습니다. 전요한 목자님은 시카고에 보고를 해야 했고 저희 스탭들은
전요한 목자님에게 보고해야 했기 때문에 지부에 가면 역시 인턴들과 리더목자들을 들볶아야 했습니다. 자발성과
자율성은 사라지고 책망과 훈련이 두려워 형식적으로 숫자만 채우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종로 센터의 스탭이었던
안암골 출신 김다니엘 목자는 리더들을 데리고 기도원에 가서 기도하고 방언의 은사를 추구했다는 죄목으로 시카고에 훈련받으러 가야 했고,
러시아의 어거스틴 송 선교사는 하라는 일대일을 안 하고 신학교에 들어가 공부했다는 죄목으로 시카고 훈련을 받아야 했습니다.
인도의 윌리암 킴 선교사님은 당시 인도 지부장인 지미리 선교사에게 불순종했다는 이유로 UBF에서 제명을 당했는데, 그가 지부장의 명을 따를 수 없었던 것은 타지부의 물자와 사람을 국가
대표 지부장이라고 마음대로 징발해서 미국에 보냈는데 그것이 인도선교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저에게도 미국에 훈련받으러 오라는 방향이 떨어졌는데 이유는 편집장으로 시카고에서 허락하지 않은 한국판 UBF신문을 냈다는 죄목이었습니다. 과거 우리는 이처럼 공포와 두려움으로 학생 자원 운동이 아니라
타율 운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개혁 후 지난 13년의 세월은 평화와 자유와 자율을 회복하는 기간이었습니다. 한국의 풀타임 스탭 목자들이 다 신학공부를 자유롭게 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선교지의 선교사님들도 원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신학공부도
하고 안수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기도원을 가든, 성령 사역을
하든, 어떤 신학을 채택하든, 일대일 말고 다른 어떤 사역을 하든 개인의
은사와 부르심에 따라 무엇이든 자율적으로 공부하고 일하고 사역할 수 있는 환경이 이뤄지게 되었습니다. 저는
CMI선교사로서 인도의 뿌네 CMI의 리더들도 도왔지만 신학교에서 인도인 목회자
후보생들과 선교사들을 가르치는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인도에 있는 동안 『인도선교사 매뉴얼』과 『인도선교의
이해』란 책을 펴냈고 지금도 책 쓰는 일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역의 다양성, 자유, 그리고 평화는 13년간 CMI 역사가 우리에게 준 선물입니다.
둘째로,
2000년 UBF의 개혁은 교회론 문제를 바로 잡기 위해서였습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기존
UBF의 교회관으로는 지역교회 그리고 여타 선교단체와의 마찰과 갈등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편으로 한국 CMI는 교회화를 선택했습니다.
92
그러나 사실
UBF의 교회화는 2000년 이전부터 일부 스탭을 빼고 전요한 목자님 이하 대부분이
동의하에 점진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던 이슈였습니다. 그래서 2000년
이전에 안암골 선교회는 교회 간판을 안암골 선교교회로 바꾸었고, 커다란 신축 부지 확보를 했는데 이는 미래의
신학교를 짓기 위한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비밀리에 진행되던 이 일이 시카고에 알려지면서 갑자기 모든 것이
중단되었고 교회화에 책임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 양마가 목자님은 시카고 훈련을 받으러 가야 했습니다. 이런
배경이 있었기 때문에 2000년 개혁이 일어나게 되었을 때 교회화는 자연스럽게 개혁 의제의 핵심에 올랐고,
2003년 출범한 CMI는 CMI 간판과 함께
열방선교교회 또는 로뎀나무교회와 같은 식으로 지역교회의 이름을 달고 지역교회의 범주 내에서 학생복음 운동을 병행하고자 시도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한남 센타의 안스테반 목자와 함께 개혁 이전 1998년 전요한 목자님과 이사들의 허락으로 주니어 스탭목자 중에 신학공부를 시작한 첫 번째
케이스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타단체와의 교류 및 학자양성을 위해 제한적으로 허락한 것일 뿐 모든 목자들이
이런 혜택을 받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CMI가 출범하면서 한국의
모든 스탭 목자들은 순차적으로 모두 신학공부를 할 수 있었고 교회 간판을 달 수 있었습니다. 그동안 전임사역을
하며 목회자와 똑같은 기능을 수행하고 있었지만 아무런 타이틀이 없었던 풀타임 스탭들에게는 축복된 일이었습니다. 이제야 자녀들의 학교 가정조사서에 아빠 직업을 목사라고 제대로 그럴듯하게 써넣을 수가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또 늘 똑같은 성경공부만 20년, 30년 씩 해오다가
신학공부를 하니 꿀맛이었습니다. 목회 전문가로서 제대로 프로페셔널하게 교육받을 수 있었고, 우리 모임의 범위를 벗어나서 다양한 세미나를 통해 목회의 다양한 노하우를 배우는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석 박사 공부도 할 수 있었고 그리하여 김빌리, 강대훈 목자님 같이 신학교 교수도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2003년 영국에 유학을 가서 석 박사 공부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에딘버러의 고색 찬란한 아름다운 거리를 걸으면서 저는 오랫동안 이게 꿈인가 생신가 그랬습니다.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신학공부를 하고 안수를 받은 많은 선교사님들도 동일한 경험을 했으리라 믿습니다.
목사와 선교사 개인적으로 뿐만 아니라 교회화는 각 지구별로 지역 교회 및 타 선교단체와 의 정상적 관계를 가져다주었고 교인들에게
균형 잡힌 신학, 균형 잡힌 교회론을 선물해 줄 수 있었습니다. 2002년 12월에 크리스천 투데이지에 청주선교교회 박갈렙 목사님과의 인터뷰 기사가 나갔는데 거기에서 갈렙 목자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전에는 선교단체의 정체성을 살렸다면 지금은 같은 주님의 몸 된 교회로써의 교제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보편성과 호환성을 가지고 학원선교를 해나가는 것이지요. 청주선교교회를 균형 잡힌 교회로 세우길
바랍니다. 성령역사 기도 찬양에 있어서도 또한 더불어 균형 잡힌 교회관을 정착시켜 나가고 싶습니다.”21)개혁과 더불어 시작된 CMI는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 주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지난 13년간 CMI 역사의 축복이었습니다.
개혁은 우리 모두에게 축복이었습니다. 과정에는 이런 저런 어려움도 있었지만 아브라함팀 목자님들의 아름다운 헌신과 희생,
그리고 완전한 세대교체와 자율의 보장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많은 축복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한 가지만 예외로. CMI가 학생선교단체로서의 정체성을 거의 상실한 것 한 가지는 안타깝게도
부족한 점입니다. 이 한 가지 문제는 누가 무엇을 잘 못 해서라기보다는
93
우리가 미래를 내다볼 예지가 없었고, 선교단체의 구조와 교회와의 관계에 대한 이해의 불충분에서 나온 것으로 보입니다.
CMI가 출범할 때는 교회를 하면서도 학생선교를 둘 다 잘 수행할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실제로 대학부 차원에서 개혁 이전보다 더 열심히 일해서 많은 열매를 맺은 CMI 교회도 일부
있는 줄 압니다. 그러나 열매를 잘 맺든 못 맺든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것은 모두 부산선교 ‘교회’,
경주선교 ‘교회’, 로뎀나무 ‘교회’, 모두
‘교회’이지 CMI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간판에
CMI도 같이 넣었지만 이제는 그 이름도 사라지고 교회 이름만 남게 되었습니다. 이는 해외도 별반 다를 바 없는 현상인 줄 압니다. 인도를 비롯한 몇몇 지부는 지금도
CMI 이름만 붙이는 곳도 있고, CMI와 교회 이름을 병기하는 곳도 있지만 대부분의
지역은 어느 교단 소속 교회로 바뀌어 지고 말았습니다. UBF 목자, 선교사, 또는 CMI 선교사로 부름 받았고,
CMI에 미련이 남아 있는 사람들은 이렇게 수양회로도 모이고 개인적인 친분관계로 교제할 수 있겠지만 나이든 우리가 얼마
지나지 않아 은퇴하고, 이 세상을 떠나고 난 후 우리 뒤에는 과연 CMI가 남을까요? 교회가 남게 될까요? 이는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고 현재 한국과 해외 CMI의 현주소입니다. CMI가 살 길은
CMI의 정체성을 갖고 CMI의 이름으로 캠퍼스 제자양성을 해서 훈련된 선교사를
해외에 파송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대학부 전도사나 부목사가 아니라 CMI 스탭으로서 캠퍼스 제자 양성에 전념할 전임간사를 반드시 세워야 할 터인데 현재 열 명 내외의 간사 가운데 단 한 명도 생활비를 절반이나
절반의 절반의 절반도 지원하고 있지 못합니다. CMI 관련 교회가 많지만 이제 그들은 지역 교회로서 그들의
교인들을 돌보기에도 벅차 CMI를 위한 헌신과 희생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목사들은 몰라도 상당수 교인들은 CMI와 상관없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때 늦은 지혜이지만 우리는 개혁 초창기, CMI 출범할 때부터 우리 모임의 구조에 대해 심도 깊은 연구를 통해 처음부터 교회화를 피했어야
했습니다. 교회로 전환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교회를 하는 자유를 주되 학생선교 단체로서
CMI 캠퍼스 사역에만 헌신할 간사를 세워 적극적으로 지원하도록 했다면 당시는 스탭과 리더들 대부분 학생복음 운동에 대한
부르심이 살아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많은 사람들이 우리는 교회라는 이름을 달아도
여전히 학생복음 운동에 초점을 두고 계속 헌신할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교회라는 이름을 다는 순간
이미 소달리티는 모달리티화 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소달리티적 성격이 많이 남아 있을 지라도 시간문제일 뿐
서서히 소달리티의 초점과 헌신은 사라지고 모달리티 구조가 대세로 자리 잡게 되는 것입니다. 소달리티로 시작한
단체들이 교회를 세우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경향이 있다는 랄프 윈터의 이야기가 다른 단체가 아닌 우리의 이야기였습니다. 모라비안 선교회가 선교회로 시작했지만 교회 체제를 받아들였을 때 그 생명이 다했고, 웨슬레의
감리교 운동이 그러했습니다. 선교단체가 끊임없이 교회화에 대한 유혹을 받아 그 길을 떠나는 역사가 바로 다른
사람들의 역사가 아니라 우리의 역사가 될 뻔했습니다.
우리는 캠퍼스선교 협의회, 교회협의회와 선교사협의회 세 축의 유기적 결합으로 교회가 캠퍼스 선교와 세계 선교를 적극 지원할
것을 기대했으나 지역 교회는 결코 CMI와 세계 선교를 돕기 위해 높은 헌신도를 가진 소달리티가 아닙니다.
교회는 교회의 유지와 교회 자체의 성장이 가장 중요하지 CMI는 부차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지난 13년 동안 교회의 생존과 성장을 위해서는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각각의 교회는 나름대로 잘 살아 남았지만 교회 대학부가 아니라 CMI의 학생 선교는 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거의 다 죽었고 그러기에 해외 선교지에 새로운 선교사
를 보낼 수도 없었습니다. 남아 있는 우리의 열정의 불씨가 다 꺼지기 전에, 그리고
아직도 캠퍼스 선교에 헌신하겠다고 나서는 몇 사람의 남은 자 간사가 있을 때 우리는 다시 불을 지펴야 합니다.
3.
이 시대의 하나님의 뜻, CMI
94
사도행전
13:36을 보면 “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섬기다가 잠들었다”고 합니다. 다윗이 당시에 하나님 뜻을 따라 섬긴 것처럼 우리 각자 각자는 이 시대 우리에게 두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섬겨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에 수많은 교회와 선교단체 중에서 UBF 그리고 CMI를 통해 구원받고 전임 사역자와 선교사로 부름 받았습니다. CMI도 역사 속에 나타났다가 사라진
다른 선교단체들처럼 그 역할을 다 하면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라지는 원인이 우리가 이 시대에 하나님의
뜻을 성취해서가 아니라 그 뜻을 따르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사라지는 것이라면 그것은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께 충성되지 못한 것이며 그러기에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입니다.
저는 영국에서 5년, 인도에서 5년 살고 사역하면서 우리 모임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더 깊이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영국이나 한국이나 인도나 목회자와 선교사를 양성하는 신학교
그 어느 곳을 가도 성경말씀을 배우고 말씀대로 살며 가르치고 사람을 제자로 기르는 곳을 찾지 못하였습니다. 영국은 이란이나 인도 같은 나라에서 볼 때는 기독교 나라 같지만 교회를 다니는 사람은 10% 미만이며 그중에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복음주의 신자는 2%도 안 됩니다.
영국인 중에 훌륭한 성경학자는 많지만 성경말씀대로 살고 가르쳐서 제자를 기르는 사람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인도에는 대한민국보다 많은 수 천만 명의 신자들이 있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신학교가 있지만 그들 가운데 신학을 가르치는
것 외에는 성경을 가르치고 사람을 제자 삼는 법을 훈련하는 곳이 없습니다. 또한 인도의 기독교인들은
95% 이상이 불가촉 천민에 가난한 저학력자들입니다. 그래서 인도에서는 기독교 인구가
아무리 많이 늘어도 천민만 늘 뿐 중산층과 엘리트 계층 가운데 기독교인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을 대상으로
사역하는 단체가 거의 전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저는 대학생 가운데 성경을 가르치고 불신자를 제자로 삼는
사역을 하는 윌리암 킴 선교사님이 인도에서 가장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저는
CMI에게 두신 이 시대 하나님의 뜻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믿습니다. 한국과 미국과
유럽과 인도와 전 세계 지성인들 가운데 성경 말씀을 가르쳐 제자를 삼는 일, 이것이 우리에게 두신 하나님의
뜻이며 이 일은 이제 겨우 시작한 것에 불과하고 우리의 과업을 완수하는 일은 아직도 멀고도 멀었다고 봅니다. 인도에만 13억 영혼이 우상숭배와 영적 무지로 죽어가고 있는데 이제 겨우 천 몇 백 명 제자를
얻었습니다. 저는 지난 5년 동안 인도 신학교의 학생들과 한인선교사들을
도와서 상층 카스트 선교, 중산층 선교에 참여하도록 도전해 보았지만 가난한 천민이 다수인 인도인 기독교인과
영어가 안 되며 제자양성을 해 본적인 없는 한인선교사들 중에 이 일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결국 이 일은 UBF와 CMI에게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은사요 이 시대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두신 뜻은 크고 제대로 일할 사람은 우리밖에
없는데 한국에서 이 일을 할 사람이 5병2어밖에 남지 않았고 그들을
먹일 재정 또한 없어서 CMI 캠퍼스 사역이 다시 일어설지, 아니면
여기서 끝이 나버릴지 하는 기로에 서 있는 형편입니다.
그러나 눈을 돌려 해외를 보면 중국과 유럽과 미국과 인도의 여기저기에서 남은 자의 사역이 있는 것을 봅니다. 과거에는 한국이 세계에 선교사를 보내어 먹였다면 지금은
선교사가 한국을 도와 한국 캠퍼스를 살려야 할 상황입니다. 이 시대 CMI에게 두신 크신 뜻을 성취하는 역사에 부족하지만 우리의 사역자들과 선교사님들을 하나님께서 귀히 사용해주시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폐회예배
더욱 튼튼히 서게 될 것입니다
이진화
95
본문/에베소서 4:15-16
하나님의
때에 CMI 국제선교사 수양회를 갖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이를 통해 선교사님들이 조금이라도 쉼과 휴식을 얻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또 세계 각 곳의 선교지와 본국에서 이루신 하나님의 역사를 돌아보며, 앞으로의 새로운
방향 가운데 사랑의 그릇을 이루게 하신 줄 믿습니다.
교회의
머리되신 주님께서 우리
CMI 공동체를 세우시고 이 날까지 우리 모임을 새롭게 하시며 성장하게 해 주셨습니다. 지금까지 우리와 함께 하셔서 선한 역사를 시작하셔서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어 오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의 박수를 드립시다.
그리고 머나먼 타국 해외에서 수십 년간 언어와 문화의 장벽을 극복해 가면서 이름도 빛도 없이 헌신해 오신 우리 선교사님들께
감사드립니다. 특히 국제 수양회 준비를 위해 땀과 수고를 아끼지 않으신 선교총무 박중용 목사님과 임원들께
깊이 감사를 드립니다.
에베소서의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공동체입니다. 교회 공동체가 무엇이며 또 어떻게 세워져 가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주님께서 이 땅에 교회를 세우셨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택하게 된 것은
신앙 공동체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다시 한 번 되새기기 위해서입니다.
첫째로, 그에게까지 자라가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참된 것을
말한다는 것은 진리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예수님 자신이 진리이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교회의 기본 요소는 사랑과 진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죄 가운데 멸망하지 않도록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랑 없는 기독교가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랑 없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라,
바리새인 집단일 것입니다. 사랑은 용서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진리를 떠난 사랑이 있을 수 없습니다. 진리의 말씀에 기초하지 않은 교회는 모래 위에 세워진 집처럼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위에 신앙공동체가 견고하게 세워져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진리가 분명하게
선포되어져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사랑과 진리가 조화되어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가 교회의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과
진리 가운데 세워진 주님의 몸된 교회는 성장하게 됩니다.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모든 면에서 그리스도의 수준에 이르기까지 성장해 가야 합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성장해 가듯이, 교회는 주님의 기뻐하시는 공동체로 자라가야 합니다. 교회의
표본이라 할 수 있는 초대교회를 보십시오. 진리와 사랑에 근거한 초대교회는 날마다 새롭게 성장해 갔습니다.
그리고 주위와 세상에 큰 영적 영향을 미쳤습니다. 어두운 세상에서 소금과 빛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96
우리 CMI는 역사가 짧습니다. 2003년에 창립되어 이제 13년째가 되었습니다. 그동안 정체성
혼란과 내외적인 시련을 많이 겪기도 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 모임이 사랑과 진리에 기초하도록 인도해 주셨습니다.
또 우리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지도자가 되도록 많이 겸손케 하셨습니다. 이제
조금씩 정체성을 확립해가고 있습니다. 또 본국의 경우를 보더라도 초대교회를 본받아 성장해 가는 교회 공동체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물론
얼마나 교회 공동체의 숫자가 많고 큰가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얼마큼 주님의 기뻐하시는 교회 공동체로 성장해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장해 가는 것은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생명이 있는 공동체라는 표시입니다.
둘째, 각 지체들의 역할과 협력
16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사도 바울은 신앙 공동체를
몸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몸의 머리가 되십니다. 또 우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는 각 지체입니다.
지체들이
얼마나 다양합니까? 듣는 귀, 냄새 맡는 코, 사물을 보게 하는 눈 그리고
음식을 맛있게 씹게 하는 치아가 얼마나 귀합니까? 또 컴퓨터를 다루는 손과 걸음을 걷게 해 주는 발과 다리가
얼마나 든든합니까? 이렇게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보이지 않지만
우리 몸 안에는 숨 쉬게 해 주는 허파, 쉬지 않고 펌프질을 해서 온 몸의 피를 순환하게 해 주는 심장,
소화하게 하는 위와 대장 등 우리 몸의 각 지체들이 제 역할을 수행하므로, 우리
몸의 건강이 유지되고 또 튼튼하게 자랍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다양한 은사를 가진 분들, 직분자들을 세우셔서 주님의 몸된 교회가 세워져 가게 하십니다.
특히 CMI는 전국과 전 세계에서 다양한 사역을 감당하는 지체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먼저 각 지체가 자기가 맡은 역할을 잘 감당하는 것입니다.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라”고 합니다. 선교사님들은 선교지에서 최선을 다해 노력하셨습니다.
본국 각 교회에서는 주님의 기뻐하시는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많은 기도와 노력을 했습니다. 특히 캠퍼스 선교를 일으키기 위해서 많은 분들이 헌신하며 수고하셨습니다. 목자학교와 여름 바이블캠프를
하면서 어찌하든지 캠퍼스 젊은이들을 돕고 세우는 일을 감당해 왔습니다.
다양한
지체들이 각자의 역할을 감당하게 될 때, 그 몸을 자라게 합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과 제가 각 자 맡은 역할을 잘 감당할 때
CMI라는 공동체를 자라게 하는 것입니다. 각 지체의 역할을
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자기 자신을 성장시키는데 있지 않고, 전체적인 몸의 성장과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이루어가는 데 있습니다.
97
우리
몸의 지체들이 서로 다투거나 혹은 무시하는 일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서로를 존중하고 인정하며 협력합니다.
우리가 자기가 맡은 일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은사가 무엇인지 잘 알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자기의 직분과 은사를 따라 충성하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해서 해외의 선교지와 본국의 교회와 캠퍼스 미션이 유기적인 연합과 역동적인 일치를 이루어 갈 때, 사랑 안에서 우리 모임이 더욱 튼튼히 서게 될 것을 믿습니다.
98
연세대학교 국제캠퍼스 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