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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을도 2018년 4월 월례치성 도훈
“시천주(侍天主) 봉태을(奉太乙)”
2018. 4. 26(음력 3. 13)
종장님:
내 양심에 목숨을 걸고 속육임을 구성하자
오늘 4월 월례치성에 다들 올라오셔서 반갑습니다. 우리가 속육임 체제로 시작하면서, 박공우 성도가 상제님과 합심해 가졌던 그 혈심과 일심을 가져야 되겠다. 그래서, 이훈오한테 목숨을 걸 수 있냐. 이훈오한테 목숨을 걸고 속육임으로서 역할을 할 수 있냐. 그런 다짐을 했었습니다.
그 결연한 의지를 가지고 지금까지 공부를 하고 수행을 하고 도훈도 해 왔는데, 이제 어느 정도 속육임으로서의 공부도 된 것 같고 자세도 갖춰진 것 같아서, 속육임 출범할 때 이훈오한테 걸었던 그 목숨을 오늘부로 여러분에게 회향(回向)을 하려 합니다.
누구한테 목숨을 건다고 하는 것은 그 사람과 한마음 한뜻이 되는 거거든요. 상제님이 박공우 성도한테 속육임을 정하라고 한 의미는, 상제님과 한마음 한뜻이 돼서 천하창생을 구하는 길에 나설 수가 있겠냐, 이것을 물어본 것이지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속육임으로서 이훈오한테 목숨을 걸고 치열하게 공부도 하고 수행을 했기 때문에, 저하고 어느 정도 한마음 한뜻이 된 것 같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여러분들이 그 결연한 의지를 다시 점검해서, 이제는 여러분 스스로가 이훈오가 돼서, 스스로 자기 양심에 목숨을 걸고 각자 속육임을 구성해서, 천하 방방곡곡에 또 다른 이훈오, 또 다른 강증산, 고판례, 이런 태을도인들을 만들어내시기를 간곡히 당부드립니다.
오늘 주제가 시천주 봉태을인데, 인간은 누구나 시천주 봉태을의 존재이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 시천주 봉태을을 일깨우기만 하면 누구나 다 상제님 고수부님과 같은 인격과 도격을 갖출 수 있습니다. 본인이 노력하기에 따라서, 동물의 성정으로 살아가는 하등인간이 될 수도 있고 진리의 사랑으로 살아가는 상등의 인간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인간이란 본래 무극의 존재이고 무한한 가능성이 열려있는 존재이지만, 내가 내 앞길을 막아 방해하고 훼손하기 때문에 내가 나를 찾지를 못하고 진정한 나의 완성을 이루지 못하는 것입니다.
선천 상극세상에서는 천지환경 자체가 상극의 운이기 때문에, 웬만한 노력을 해서는 인간 본래의 실체, 기본엑기스인 시천주 봉태을을 찾기가 힘들었지요. 후천개벽기가 되어 상제님이 오시고 고수부님이 오셔서 천지의 환경을 상생으로 돌려놓으셨기 때문에, 내가 노력만 하면 누구나 다 시천주 봉태을의 태을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노력을 안 하고 정성을 안 들여서 내가 나를 못 찾는 것이지, 노력하고 정성을 들이는데 내가 나를 못 찾을 리는 없습니다.
이제 우리 태을도인들이 또 다른 이훈오, 또 다른 강증산, 또 다른 고판례가 돼서, 명실상부하게 시천주 봉태을 하는 태을도인이 되시길 바랍니다.
태을궁의 짐을 지고 이 세상 끝까지
오늘 충덕도인이 태을궁에 오셔서 월례치성을 집전하셨는데, 이제는 우리 태을도인들 스스로, 속육임들 스스로, 태을궁을 짊어지고 이 세상 끝까지라도 갈 수 있는 그런 배포와 용기와 일심혈심이 있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에 나 혼자 있더라도 시천주 봉태을의 태을도인을 양성하는데 이 한 목숨을 바치겠다는 그런 결연한 의지를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상제님 고수부님의 대행자로서 상제님 고수부님의 심법과 마음씀을 온전히 이 세상에 드러내는데 이 한 목숨을 바치겠다고 하는 엄중한 책임감을 갖기를 바랍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와서 한 번 죽지 두 번 죽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100년 가까이 인생을 살아도 기억해 주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39년을 살아도 이 세상 모두가 기억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얼마나 오래 사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고 무슨 일을 하면서 사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태을도 속육임이라 하는 것은 증산상제님과 같이 목숨이 다하는 그날까지 천하창생들을 위해서 이 한 몸 바치는 사람들입니다.
하늘과 땅을 진동시키고 신명을 감동시키고 인간들이 감읍하는, 명실상부한 태을도인의 길을 가시기를 간곡히 당부드리겠습니다. 오늘 주제가 시천주 봉태을인데, 돌아가면서 간단히 한 마디씩 하기로 하겠습니다.
충덕도인님:
태을도의 핵심교리, 시천주 봉태을
시천주(侍天主) 봉태을(奉太乙)이라 하면 말 그대로 천주님을 모시고 태을을 받든다는 의미인데요. 이런 표현으로는 그것의 깊은 뜻을 알 수 없지만, 이 시천주 봉태을은 태을도의 핵심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은 시천주 봉태을을 통해서 우리 자신이 상생인간 태을인간으로 재생신되어야, 우리가 원하는 후천의 상생세상ㆍ인간완성ㆍ진리적인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시천주는 인간의 본래 마음인 천주의 품성을 밝히는 것이고, 봉태을은 태을을 받들어서 내 마음속의 태을신성(太乙神性)ㆍ태을생명력을 회복하는 것이라 볼 수 있는데,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상제님ㆍ천주님이나 태을천상원군도 중요하지만, 이 객관적인 존재에 대한 시천주 봉태을을 통해서 내 마음속에 내재되어 있는 천주의 품성과 태을의 신성을 끄집어내고 밝힐 수 있다는 거죠.
지금 현재 인간은 선천의 상극생활로 인한 독기 살기로 인해서 천주의 품성과 태을신성을 잃어버렸는데, 결국은 상제님을 모심으로 인해서 즉 상제님의 언행을 따라 하고 상제님의 마음을 닮아가는 과정을 통하여 내 마음속에 있는 천주의 품성이 회복된다는 얘기죠. 봉태을 같은 경우는 증산신앙을 하는 사람 중에서도 태을의 존재와 위격에 대해서 정확히 아는 신앙단체는 태을도 밖에 없다고 생각이 드는데, 만약에 증산신앙을 하면서 태을을 정확히 알지 못한다면 결국은 태을을 깨달을 수가 없는 거죠.
증산상제님께서는 태을의 위격이라든가 권능에 대해서 여러 가지 말씀을 해주셨는데, 우리도 상제님에 대한 신앙 즉 시천주를 통해서 태을 천상원군으로부터 받은 태을(신성)이 우리 마음속에 들어있고 우주의 마음자리가 태을(천상원군)이라는 것을 믿고 태을(천상원군)을 항상 공경함으로써 결국 우리 마음속에 들어 있는 태을(신성)을 밝힐 수 있게 되는 거죠. 그래서 결국은 시천주 봉태을의 마음을 가져야, 아까도 제가 말씀드렸지만, 자유롭게 되고 행복하게 되고 또 영생하게 됩니다. 시천주 봉태을을 떠나면 우리 생명을 영원히 유지할 수 없기 때문에, 시천주 봉태을은 우리의 생명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천의 말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은 시천주(侍天呪) 주문을 통해서 시천주(侍天主)를 완성하고 태을주(太乙呪)를 통해서 봉태을(奉太乙)을 완성하면, 모든 사람이 후천 상생인간이 되어서 자유와 행복을 누리고 또 천지와 더불어 영생하는 길을 가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상입니다
충일도인님:
시천주를 한다는 것은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
봉태을은 뿌리자리에 대한 존경과 효를 다하는 것
시천주 봉태을이라는 것은 천주의 마음ㆍ천주를 내 마음 속에 모시고 태을을 받든다는 뜻입니다. 제일 우선하는 것이 마음입니다. 마음이 관건이고 자기의 마음을 바꾸는 것이 중요합니다. 상극의 마음을 돌려서 상생의 마음으로 바뀌어서 시천주를 한다는 것은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이라 생각합니다. 내가 천지부모님과 같은 마음씀을 배운다는 것은 내가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집안의 부모가 되어가는 그 마음을 배우고 실천한다는 뜻이고, 이 공부가 시천주의 공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집니다.
봉태을은 천지의 근본자리․ 뿌리자리에 대한 존경과 효를 다하는 것이라 생각을 합니다. 내가 어른이 되어 자식을 놓고 돌아가신 조상님이나 부모님을 기리며 정성껏 제사를 잘 지내는 것처럼 내 생명의 근본과 진리의 뿌리인 태을을 잘 받드는 것이 봉태을이라 생각을 합니다.
천지에 대한 보은하는 길이 대도통이라는 말씀을 증산상제님께서 하셨습니다. 천지가 곧 태을입니다. 태을 천상원군님의 진리에 입각하여 음양의 조화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천지에 보답하는 것이 도통이라 할 수 있습니다. 태을에서 진리가 나오고 만물이 생성되어 왔습니다.
상극의 분열 발전을 통해 길러진 인간들이 가을을 맞아 성숙되고 완성되어 천지의 열매가 되는 것이, 즉 후천 가을시대에 도통하여 완성되는 것이, 근본인 태을에 대한 예의이자 바르게 봉태을을 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후천이라는 곳으로 넘어가는 사람들은 다 도통을 하게 됩니다. 상ㆍ중ㆍ하의 도통을 하게 되고 일반 백성들도 도통을 하여 자기 일은 자기가 알아서 하도록 하셨습니다. 인간이 궁극적으로 완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천지의 진액인 태을을 깨쳐서 완성이 되기 때문에, 태을을 받드는 것은 내 조상과 뿌리를 받들며 살아가는 것과 같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이상입니다.
충희도인님:
시천주ㆍ봉태을은 태을도 신앙의 기본이자 결론
시천주ㆍ봉태을은 태을도 신앙의 기본이고 결론이라고 생각합니다. 천주는 하늘 천(天), 주인 주(主), 하늘의 주재자라는 뜻입니다.
마테오리치 신부님이 동양에까지 와서 지상천국을 건설하고자 하여 기독교 포교에 앞장섰을 때, 유생들이 마테오리치 신부에게 “당신이 신앙하는 천주님은 어떤 분입니까?”라고 물으니, 마테오리치 신부님이 “제가 믿는 천주님은 동양에서 말하는 상제님과 같은 분입니다”라고 했답니다. 그래서 마테오리치 신부님은 동서양의 신에 대한 인식을 통일하신 분이라는 평가를 받는 것 같습니다.
이렇듯 선천 종교는 천주님을 믿고 우러른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습니다.
인간이 상극의 환경에서 살다 보면, 고통을 당하면서 ‘인생이란 이런 것일까?’ 한탄을 하고 ‘이렇게 살 수 밖에 없는 것일까?’ 고뇌를 하다가 폭력과 전쟁으로 나가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천주님을 찾는 사람들이 나타나는데, 그것이 종교라고 생각합니다.
인류는 천주님을 찾아왔고, 천주님을 찾는다는 점에서 시천주는 선천종교와 닮아 있습니다. 그런데 선천 종교에서 천주님은 추상적인 존재였거든요. 과연 그 분이 존재하신 것일까? 이 우주 만유 속에 깃들어 계신 것일까? 아니면 이 우주를 초월해 계신 것일까? 아니면 둘 다일까? 이렇게 추상적이었어요.
하지만 태을도의 시천주는 후천개벽기를 맞이해서 인간으로 강림하신 천주님을 모신다는 점에서 선천의 천주님 신앙과는 다릅니다. 후천 가을개벽의 때를 맞이해서 천주님이 인간으로 강림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모든 것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거예요. 추상적인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 만난 하느님을 모시는 신앙이기 때문에, 천주님에 대한 인식이 아주 구체적입니다. 심지어는 하느님이 하신 말씀과 행적의 기록도 수두룩하게 남아 있습니다.
천주님은 우주를 다스리는 분으로 음과 양을 조화로써 다스리는 분이기 때문에, 남자 천주님과 여자 천주님으로 계십니다. 남자 천주님을 옥황상제라고 부르고, 여자 천주님을 옥황후비라고 합니다. 이렇게 천주님이 인간으로 강림하시는 이유는 후천개벽기를 맞이하여 인간이 완성될 수 있는 길을 내어주시기 위함인데, 우리가 시천주를 잘하게 되면 인류구원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지금까지의 증산신앙은 시천주를 하는 길로 들어오는 과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시천주 신앙의 어느 지점에 증산신앙인들이 여러 곳에 많이 모여 있는데, 시천주 신앙이 궁극으로 가면 봉태을의 과정에 로그인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시천주는 인간이 태극을 드러내는 것이라면, 봉태을은 인간이 무극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상제님은 우리들에게 천주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천주를 통해서 무극으로까지 나아가라고 하시는 겁니다.
우리 증산신앙인들이 시천주까지는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해왔는데, 봉태을로 들어가서 인간을 무극의 존재로 도약시키는 길에까지는 잘 들어서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길을 태을도인들이 개척한다고 생각합니다.
천주님께서 내려주신 인류구원의 법방이 무엇이냐? ‘원시반본’입니다. 삼계가 태어난 생명의 본래자리 즉, ‘태을(太乙)’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태을은 천상원군님이십니다. 하늘 으뜸가는 임금님이십니다. 태을로 원시반본해야 인간이 무극의 존재로 신령함이 나타나게 되고, 상생 환경에서 살 수 있는 존엄한 인간으로 거듭난다는 것입니다.
시천주ㆍ봉태을은 태을도 신앙의 기본이자 결론입니다. 시천주를 통해 태극이 완성되고, 봉태을을 통해 인간이 무극의 존재로까지 거듭납니다. 그렇게 해서 무극-태극-황극이 조화된 새 시대가 열립니다.
지금까지는 태극이 높고 황극이 태극의 대리인 역할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무극은 잘 인식이 안 되고, 그래서 삼극의 균형이 잘 안 맞았는데, 시천주ㆍ봉태을을 통해서 삼극의 균형을 맞추는 道가 바로 태을도입니다. 그래서 시천주ㆍ봉태을은 황극을 세우는 길이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이상입니다.
충정도인님:
태을에 감사하는 마음이 있어야 세상이 안정된다
요즘 나라가 위급한데, 보면서 이게 왜 이렇게 되었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지금 시대의 사람들이, 저도 그랬었습니다마는,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까? 어떻게 보면 나라는 존재가 먹고 입고 살아가는데, 부모님이 나한테 해준 게 뭐 있냐 그러고, 회사에서 주는 급여로 먹고 살면서도 회사를 힐난하고, 또 이렇게 번영된 국가에 살면서도 내 권리와 내 주장만 하고 국가에 대해서 비난을 하면서도, 나를 이렇게 살게 해준 지금의 국가를 만들어준 사람들, 또 나를 지켜주는 이 국가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지 못하고 살기 때문에 나라가 이렇게 위험에 처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수많은 베풂을 받았기에 이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부모가 이 몸을 태워내고 직장이 먹여 살려주고 국가가 지켜주고 하기 때문에 살고 있는 것인데 그런 내가 받은 것은 인식하지 못하고, 다만 나라는 존재로부터 시작해서 나의 권리를 주장하면서 사소한 모자란 것을 가지고서 부모와 사회와 국가를 비난하고, 물론 그렇게 오도(誤導)한 사람들도 있겠지만, 어쨌든 각자의 그런 마음이 문제라는 거죠. 감사할 줄 모르고, 그리고 나의 근원적인 부분에 대해서 내가 받고 있는 은혜나 베풂에 대한 생각을 못하는 것이지요. 근원적으로. 그런 것이 제일 큰 문제다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관자(管子)」라는 책에 보면, 조개 관자(貫子)는 아니고, 관포지교(管鮑之交)로 잘 알려진 그 관중(管仲)이라는 사람의 언행을 기록한 책인데, 관중은 제나라 환공때 재상을 맡아서 제나라를 오패(五覇: 중국 춘추시대 5대 강국)의 하나로 크게 번창시킨 사람입니다. 기원전 7세기경의 일인데, 이 관자라는 책을 보면 오늘날에 적용해도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부국강병의 실용적인 경세의 책략을 잘 설하고 있습니다. 그 책에서 저에게 의외로 하나 와닿는 문구가 있었습니다. 그 문구가 뭐냐 하면 이렇습니다.
“귀신을 높이지 않으면 어리석은 백성은 깨닫지 못하고
산천의 신을 받들지 않으면 군주의 위엄과 명령이 두루 알려지지 않는다.
종묘를 공경하지 않으면 백성은 (그런 공경하지 않는) 윗사람을 본받고,
조상을 경모하지 않으면 효도와 우애가 갖추어지지 않는다.
예의염치가 베풀어지지 않으면 나라는 곧 멸망한다.”
이런 내용이 참 와닿았습니다. 예전 같으면 저도 귀신을 받들고 하는 미신스러운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지금 대부분의 사람들도 아마 그렇게 받아 들일 텐데, 결국은 우리 사람을 비롯한 모든 생명에 대한 베풂의 존재이며 감사함의 원천은 결국은 자연이고, 자연을 주재하는 천주이고, 그 천주를 비롯한 모든 생명의 근원은 태을이거든요. 결국 세상이 안정되기 위해서는 그 천주를 모시고 우리 존재의 근원인 태을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갖지 않으면, 그런 마음이 기둥으로 서지 않으면, 세상이 안정될 수 없겠다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상입니다.
충익도인님:
골고다 언덕에서 절두산 양화진까지
얼마 전에 종장님에게서 같이 가보지 않겠냐는 한 통의 카톡 문자을 받고,마침 시간적 여유도 있고 별 일도 없고 해서, 종장님과 함께 서울 마포구 합정동에 있는, 절두산 순교 성지와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을 찾아볼 기회를 갖게 됐습니다. 예전에 일 관계로 이곳을 지나치거나 부근에서 일을 보면서도 별 관심이 없었기에, 그저 무심히 지나쳤던 생각이 나네요.
방문에 앞서, 양화진 선교사 묘원과 절두산 성지에 대한 개략적인 내용을 종장님에게 미리 듣기도 했지만, 그래도 의미있는 장소를 처음 방문하는 터라 방문지에 대한 내용을 조금 더 알고 가는 게 좋겠다 싶어서, 관련 자료를 찾아보았습니다. 이역만리 물 설고 낯 설은 타국에서 하나님을 증거하고 복음을 전하는 선교활동과 더불어, 그 다난했던 시기에 다양한 사회사업의 헌신적인 결과로,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의 기초동량으로서 당시에 척박했던 우리사회의 이곳저곳을 개간하고 밑거름이 되어준 사실도 알게 됐습니다. 이분들의 행적을 보면서, 우리 토속문화 경시(輕視) 조장자(助長者)라는 근대사 기독교를 바라보는 사선의 시각을 바로잡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종교 문화적 반감을 가졌던 단편적 인식을 해소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원래 절두산(切頭山)의 지명은 누에가 머리를 치켜세운 모양새와 닮았다 해서 잠두봉(蠶頭峰)이라 불렸고, 용머리 형상을 하고 있다 해서 용두봉(龍頭峰)이라 불려지기도 했다더군요, 조선시대 당시 한양 한강변 하류에 있는 잠두봉 양화진 일대의 비경이 얼마나 좋았으면, 중국에까지 소문이 날 정도로, 조선에 청나라 사신이 오며는 한강유람의 백미로 이곳을 빼먹지 않고 들러서, 여행의 유희와 경치를 즐기곤 했다 합니다.
절두산과 양화진은 서로 맞닿아있는 지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절두산이라는 지명이 말해주듯, 그 당시 천주교도란 이유로 머리가 잘려져 나가는 참수형의 잔혹함에 처절했을 공포와 고통의 여운들은, 시간의 기억 속으로 흩어지고, 몇몇의 유물과 기록만이 그때의 참상을 대변하는 듯합니다.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넘실대는 제국주의의 담쟁이넝쿨 같은 국제정세에 눈이 틔지 못한 조선 조정의 쇄국정책이 빚은 정치ㆍ종교적 사문난적의 칼바람에 수많은 천주교도들이 처형당한 장소로서, 잠두봉이란 정감 가는 지명에 절두산이라는 섬뜩한 지명이 덧씌워진 채, 오늘날 카톨릭의 성지로서 천주교인들의 신앙을 기리고 다지는 성지순례의 명소가 되어 있다는 것에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현재 이곳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였던 김대건 신부 동상이 세워져 있고, 서양과의 통상수교를 거부하는 쇄국의 상징물인 되어버린 척화비(斥和碑)도 한강을 등지고 서있네요. 전체적으로 다 관람하진 못했지만, 성지 내에 있는 기념성당 지하에는 순교자 28위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고, 기념관에는 천주교사에 관련된 유물도 전시되어 있다더군요.
절두산 순교성지와 맞닿아있는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는, 개신교 선교사 외에 외교관 군인 언론인 교육자 기술자 등, 각 분야에 대표되는 인물들과 그밖에 일부 선교사 가족과 어린아이 묘, 체백이 없는 가묘와 신원미상의 무명의 묘들도 있고, 유일하게 일본인으로 ‘소다 가이치’라는 분과 그의 아내인 ‘우에노’씨의 묘역도 조성되어 있답니다. 소다 가이치씨는 당시 암울한 시대에, 신원미상의 조선인과의 특별한 인연으로 우리나라에 건너와 고아의 대부라 불릴 정도로 천여 명에 달하는 고아들을 헌신적으로 돌보고 길러내기도 했고, 또 한편으로는 독립운동에도 관여하는 등, 조선을 위해서 모든 것을 다 바쳤다 합니다. 해방 후 한국정부로부터 그 공로가 인정돼서 일본인 최초로 문화훈장을 수여받기도 했습니다.
양화진 선교사 묘역에 묻혀있는 선교사들은 종교적 측면에서 보면 순교라 할 수 있겠지만 탄압에 의한 것은 아니고, 대부분 사망원인이 자연사나 병사 사고사로 유명을 달리했습니다. 조약에 의해서 기독교의 종교활동이 자유스러운 시기에 개신교 선교가 들어와, 정착하는 과정에 문화적 이질감과 생활에 불편함은 어쩔 수 없더라도, 당국의 탄압없이 비교적 자유로이 선교활동을 한 것 같습니다.
오늘날 양화진과 절두산이 갖는 의의는 일반 사람들에게는 역사적 의미가 있는 곳으로, 기독교인들에게는 신앙의 의미를 새기고 다지는 장소로서 자기신앙의 대상자와 위대한 믿음의 족적을 기리는 메카로서의 상징적 의미가 있는 곳이라 보여집니다. 절두산 성지와 양화진 선교사 묘원을 둘러보는 내내 종교는 달라도 자기 신앙의 근간인 하늘에 대한 믿음의 본질은 일맥상통한데, 순교지와 선교사 묘원이라는 장소의 엄숙함에서 오는 반사적 경건함 보다는 마치 유적지를 탐방하듯 그저 담담한 마음으로 이곳저곳을 돌아보게 됩니다.
지금의 기독교가 만화방창한 꽃을 피울 수 있었던 것은, 이천 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의 지난했던 순교의 희생 속에서 피어난 순교적 믿음의 결과가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믿음이 때로는 깨우침보다 위대하다는' 말이 있듯이, 그들이 목숨으로 증거하고자 했던 그들의 하느님에 대한 믿음은 시천주(侍天主, 섬김)신앙이라는 절대적 믿음에서 나오는, 예수에서 절두산 양화진에 이르기까지의 사신공양(捨身供養)적 믿음에 있는 것입니다. 즉 믿음의 요체인 섬김(侍天主)을 통해서, 기독교 신앙의 본질인 사랑(太乙)으로 승화시킨 것이라 하겠습니다.
종교는 달리해도 절두산과 양화진을 돌아보면서, 그들의 사랑과 섬김이 내 믿음의 근간인 시천주 봉태을 신앙의 본질과 일맥상통한 것을 새삼 깨eke게 됩니다. 상제님이 밝혀주셨듯이, 지금은 인존시대를 열어가는 성사재인의 시기입니다. 천지와 더불어 인간도 성공하는 시대에 접어들었다는 말이지요. 시천주(侍天主) 봉태을(奉太乙)이 일상의 우리들에 삶에 착근해 열어가는 세상이 태을세상입니다. 상제님께서 많이 외워두라는 대학경 일장 장하에 있는 '정심 수신 제가'의 덕목이 우리의 일상에서 온전히 실천되어지는 삶과 신앙이 바로 '시천주 봉태을'입니다. 진리의 생명인 태을로 가는 길은 시천주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말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관건이고, 시천이 중심이며, 태을이 핵심입니다. 태을도의 마음줄을 꼭 잡아, 오는 태을세상을 다 같이 맞이하시기를 기원드립니다.
종부님:
하느님의 공변된 마음으로 자연스러움을 온전히 드러내는 시천주 봉태을
제가 교회를 떠나기 직전 아직 기독교 신앙에 머물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연세대 루스채플 건물에서 강연을 들은 적이 있는데, 강연이 끝나고 나오는 데 로비에 ‘4영리(靈理, 하느님과 사람사이의 영적인 원리)’를 전도하는 홍보물이 세워져있는 것을 봤어요. 4영리가 뭐냐 하면, 첫째 하느님은 인간을 사랑하시며, 둘째 그런데 인간이 죄를 지어 하느님을 떠났고, 셋째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고, 넷째 나를 버리고 하느님을 나의 주인으로 영접하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기독교 전도논리입니다. 이번에 5분 도훈을 준비하면서 다시 한번 4영리를 들여다보니, 하느님이 예수님으로 바뀌었더라고요. 이제 예수님이 기독교 안에서 완전히 하느님의 위치로 자리잡은 것 같습니다.
그때 4영리를 보면서 더는 기독교신앙을 할 수 없겠다. 나는 내가 나의 주인이고자 하는데, 여기서는 자꾸 나의 주인자리에서 나를 끄집어내고 그 자리에 하느님을 맞이해 앉히라고 하니까 나는 이 종교를 계속할 수가 없겠다. 그렇게 해서, 어찌 보면 4영리가 저를 기독교를 정리하게 만든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는데요, 우리가 얘기하는 시천주는 그것과는 좀 다릅니다.
기독교 천주교신앙에서는 하느님을 자신의 주인으로 영접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천주의 ‘주’는 ‘주인 주(主)’자입니다. 그런데 우리 증산신앙인들은 천주의 주를 ‘주재자’의 개념으로 받아들인다는 말이지요. 나의 주인이 아니고 그냥 삼계 우주를 주재하시는 분. 그리고 상제님께서는 우리에게 뭐라 하시냐 하면 “네가 너의 주인이 되어야 된다. 네가 너를 구원하지 못하면 하느님인 나도 너를 구원하지 못한다.” 해서 그 경계를 분명히 해주셨거든요.
그래서 우리 태을도에서 얘기하는 시천주는 뭐냐. 우리 모두 다 마음 속에 천주의 품성을 가지고는 있는데, 상극지리인 선천을 윤회환생해왔기에 이것을 온전히 가지고 있지는 못하지요. 그런데 우리의 천주이신 강증산상제님 고판례후비님을 바라보면서 두 분의 마음을 받아서, 우리 또한 그 마음씀씀이를 닮아서 삶 속에서 그대로 실천하고자 하는 것에 시천주의 의미가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럼 그 마음씀씀이가 어떠해야 시천주가 될까요.
하느님은 삼라만상을 주재하시기 때문에 어디에 치우칠 수가 없지요. 개인적일 수가 없는 거지요.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의 마음을 받아서 그 마음씀씀이를 닮아가려고 하면 저 또한 이기심을 버리고 공변(公邊)된 마음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고, 그 공변된 마음이 천지공심(天地公心)이 됩니다. 그 공심은 한 마디로 덕이라고 하겠습니다. 상제님께서 후천공사를 보라 하셨을 때, 무엇보다 먼저 과부 홀아비를 맺어주어야 한다고 해서 칭찬받은 박공우 성도가 우쭐해져서 그 다음으로 “표리부동한 도인은 다 죽어야겠습니다.” 했더니, 상제님께서 “그러면 나의 덕이 너무 박하지 않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웬만하면 살리자고 하는 게 상제님의 생각이고, 또 그렇기 때문에 진멸지경에 처한 인류를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서 상제님과 고수부님께서 인간의 몸으로 오셨거든요. 결국은 덕(德), 천주님의 덕성을 온전히 발현하고자 하는 것에 시천주의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또 상제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냐 하면 “금하는 바를 비록 날렵하게 다한다 할지라도 언제나 자연스러운 생활을 떠나지 말라.” 그 자연스러움, 우리가 아까 천지개벽경 서문도 봉독했지만, 자연스러움 그 자체가 이치로 보면 자연지리(自然之理)인 거고, 그 속에 모든 생명이 존재하는 거지요. 그래서 이 우주의 원천ㆍ우주가 비롯되는 그 자리가 태을이고, 그것이 삼라만상으로 벌려져 나오면서 그 속에 갊아있는 자연스런 질서를 가지고 존재하는 모든 모습들을 우리가 자연스럽다고 얘기하기에, 자연이 자연스러운 것을 우리 인간이 또한 온전히 구현해내는 것, 그것이 봉태을이다, 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치성이 끝난 후에 양화진 선교사 묘원도 가보겠지만, 그동안 하느님나라를 동양이든 서양이든 사실 구현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닌데요, 이제 하느님나라를 지상에 구현함에 있어서 인간의 위치가 어디에 있느냐, 즉 후천개벽기의 의미를 온전히 드러내기 위해 경위를 밝히는 정명작업을 지금까지 태을도가 해왔습니다. 또 앞으로 후천세상을 열어가는 시발점, 그것은 우리 태을도인들이 세상에 나가서 일상생활 속에서 모범 보여서 만들어나가는 시공간이 그것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까 충정도인님이 지금 이 시점ㆍ이 상황에 대한 중대한 의미를 짚어주셨는데, 정말 우리 태을도인들이 이 상극의 끝자락에서 상생 후천을 열어가야 하는 그 역할이 너무나 크고, 결국은 시천주 봉태을이 우리 속에서 체화가 된 만큼 후천이 열려나갈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상입니다.
종장님:
하느님 일에 죽음을 각오하고 뛰어들어야
우리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뭘 추진하다가 잘 안될 때가 있어요. 잘 안되거나 힘들면 포기할까 생각하게 되고, 또 어떤 일을 해나가는 과정에서 누구하고 부딪치거나 그러면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되거든요. 몸뚱이를 갖고 있기 때문에 생각을 현실로 옮겨가는데 많은 애로가 있어요. 근데 꿈속에서는 현실보다는 수월스럽게 일이 달성되거든요. 내가 지극하게 어떤 생각을 생각하고 뭘 해야 되겠다 하는 의지를 강력하게 갖고 있으면, 꿈속에서 수월스럽게 일이 이루어지는 경우를 볼 수 있다고요.
현실에서는 안 이루어졌는데 꿈속에서는 이루어진 거예요. 꿈속에서는 이루어졌으니까 “아, 드디어 내가 계획하고 추진했던 것이 완성이 되었구나!” 환호를 하는 순간에 꿈을 딱 깨어 현실로 돌아오면 ‘아, 오늘도 어떻게 사람을 만나고 어떻게 일을 추진하지?’ 이런 현실의 벽에 부딪친단 말이에요.
이 세상의 일 중에서 가장 고결하고 순수하면서도 가장 힘들고 어려운 일이 하느님의 일을 하는 거예요. 하느님이란 존재는, 천주라는 존재는, 옥황상제란 존재는, 미륵불이란 존재는, 모든 유형ㆍ무형이 정화된 순수한 실체이기 때문에, 하느님이 하시는 일에 동참한다고 하는 것은 죽음을 각오하지 않으면 본격적으로 뛰어들 수도 없고 진행할 수도 없고 매듭을 지을 수도 없어요.
그런데 이제까지 하느님을 찾아서 하느님의 일을 하겠다는 사람들은 거의 자기 목숨과의 투쟁과정이었어요, 어떻게 보면. 나와 나와의 갈등의 과정이었지요. 그래서 하느님의 일을 하는, 하느님의 마음과 마음씀을 닮아가는 신앙인들은 누구보다도 처절할 수밖에 없고, 치열할 수밖에 없고, 또 어떻게 보면 매 순간순간 생사의 고비를 넘을 수밖에 없어요.
그렇게 선천 오만 년 동안 동서양의 신성ㆍ불ㆍ보살들이 하느님의 일을 해왔고, 미륵불의 일을 해왔고, 상제님의 일을 해온 거지요. 그런 신성ㆍ불ㆍ보살들의 일심혈심이 있었어도 이루지 못한 하느님의 일을, 상제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이룰 수 있게 만들어 놓으셨다고요. 왜냐하면 상제님은 말 그대로 하느님이기 때문에, 미륵부처이기 때문에, 옥황상제이기 때문에, 당신이 선천 오만,년 동안 그토록 찾았던 그 존재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일을 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서 당신이 인간의 몸을 입고서 모범을 보이셨어요.
강증산이란 분이 인간세상에 오시기 전까지는 추상적이고, 관념적이고, 어떻게 보면 형이상학적인 것에만 머물러 있었어요. 검증할래야 검증할 수 있는 근거가 없었어요. 어떤 게 진정한 하느님 일이냐? 어떤 게 진정한 미륵부처님 일이냐? 어떤 게 진정한 옥황상제님 일이냐? 이거에 대해서 푯대가 없었던 거지요. 물론 유불선서도에서 나름대로 푯대를 놓는다고 놨지만, 유불선서도를 창도한 예수ㆍ석가ㆍ공자ㆍ노자가 하느님이 아니고 미륵불이 아니고 옥황상제가 아니기 때문에 정확한 푯대를 알 수가 없었던 거지요.
증산상제님이 세우신 하느님 일의 푯대, 시천주 봉태을
하느님을 어떻게 모시고 어떻게 하느님 일을 할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푯대가 눈에 보이게 없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상제님이 오셔서 하느님의 일을 하는 푯대를 구체적으로 세워주셨어요. 그것을 우리가 그대로 따라하기만 하면 된다고요. 하느님의 일ㆍ미륵부처의 일ㆍ옥황상제의 일을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시천주 봉태을’이란 말이에요.
제가 전에도 한두 번 얘기한 것 같은데, 모든 일이라고 하는 것은 중심을 잡고 핵심을 알아야 일이 정확하게 진행될 수 있어요. 핵심을 알고 중심을 잡으면 지극정성으로 내가 모실 수가 있어요. 지극정성으로 받들 수가 있다고요. 모시고 받드는 속에서 일이 이루어진다고요. 아까 하느님을 모시는 일을 선천 오만 년 동안 해왔는데, 푯대가 없어서 제대로 못해왔다는 말씀을 드렸는데, 상제님이 인간으로 오셔서 하느님 일의 푯대ㆍ미륵부처 일의 푯대ㆍ옥황상제 일의 푯대를 내놓으셨어요.
당신 스스로가 지극정성으로 일심을 다해서 일상생활에서 사셨어요. 그러니까 진리가 생활이고 생활이 진리가 되는, 시천주 봉태을의 길을 가셨단 말이에요. 모시는데 왜 모시느냐 이거예요. 천주님을 모시는데 왜 모시느냐 이거예요. 태을을 받드는데 왜 받드느냐 이거예요. 상제님 고수님은 우리한테 말씀하시는 게 뭐냐 하면, 너희들 스스로 마음속에 시천과 태을을 받아나왔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너희들도 시천주 봉태을을 스스로한테 하게 되면 결국은 본래의 시천주 봉태을의 대상을 위해서도 할 수가 있다는 거지요. 내가 천주의 대행자가 되고 내가 태을체가 되면, 내가 시천주 봉태을 하는 존재 자체가 된다는 거예요.
우리가 정성을 드리고 효도를 하는데, 시천주는 어떻게 보면 모시는 거고 봉태을은 크게 보면 효도를 하는 거라고요. 모시고 효도를 하는데 정성과 믿음을 다해서 혼신을 다하다 보면, 결국은 내가 나를 모시는 길이요 내가 나를 받드는 길로 통하게 돼 있어요.
우리 태을도인들이 시천주 봉태을 하는 태을도인이 되어서 상제님을 모시고 태을 천상원군을 받들지만, 더 생각이 깊어지고 공부가 깊어지고 수행이 더 깊어지면, 시천주 봉태을이 결국은 내가 나를 모시고 내가 나를 받드는 걸로 간다고요. 모든 사람이 상제님과 같고 모든 사람이 고수부님과 같고 모든 사람이 태을이 된다고 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자기 자신을 잘 모시고 자기 자신을 잘 받들고, 또 모든 사람이 남을 잘 모시고 남을 잘 받들고, 모든 사람이 천주님을 잘 모시고 태을을 잘 받들게 되는 거예요. 이렇게 해서 시천주 일맥ㆍ봉태을 일맥, 천주와 태을일맥으로 하나가 되는 세상, 그 세상이 후천 태을세상이에요.
오늘 월례치성을 맞아서, 이를 계기로 우리 태을도인들이 속육임을 구성해서 급살병을 극복하고 세계일가 대시국을 세우게 되면, 천주이신 상제님과 하늘 으뜸가는 임금이신 태을 천상원군을 모시고 받들듯이, 모든 사람을 모시고 받들고 또 나도 모시고 받들어서, 모심의 시대ㆍ받듦의 시대가 만개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인제 열심히 자기 양심에 목숨을 걸고 모든 사람을 모시고 받드는데 혼신의 노력을 다할 것을 다짐합시다. 이상으로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