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의 성선설을 지지합니다.
순자 성악설 비판
순자는 인간의 타고난 성정(性情)은 악하다고 보았다. 인간의 타고난 본성은 이기적 욕망과 욕구이다. 따라서 인간의 본래 타고난 본성은 악이다. 그러나 순자는 인간이 도덕을 배울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보았다. 인간은 도덕적 학습 능력을 지니고 있으므로 예를 배움으로써 본성을 변화시켜 도덕적 실천을 할 수 있다. 즉 예를 공부함으로 인간의 악한 본성을 변화, ‘교화’하는 것을 강조한다. 순자의 입장에서 사단과 사덕은 타고난 것이라 할 수 없는 것이며 스승과 예의 법도, 인간의 노력으로 습속을 바로잡아 성을 교화하는 화성기위(化性起僞)로서 인위적인 선을 이루는 것이다.
이에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면, 어떻게 ‘선’이 존재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든다. 인간의 본성이 선할 때 이기적 욕망을 다시금 되돌리고 회복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본래 악에서 어떻게 예가 파생되며 이를 통해 교화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든다. 인간 본성이 악하다면 이는 윤리적 이기주의 갈 가능성이 더욱 크다고 생각된다. 인간이 본래 악하다면 인간을 예로 교화시키고, 도덕적 행위를 위해 노력하는 것의 첫 시작점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든다.
고자 성무선악설 비판
고자는 인간의 타고난 본성은 생리적 욕망 그것이 전부라고 보았다. 인간이 타고나는 것은 오직 식욕과 성욕과 같은 욕망뿐이다. 따라서 인간 본성 자체는 선도 악도 아닌 것으로 보았다. 선과 악은 타고나는 것이 아닌 선택과 환경(교육)을 통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았다. 즉 선과 악은 인간의 선천적 요소가 아닌 후천적인 요소이며 인간의 고유한 속성이 아님을 제시한 것이다.
인간의 타고난 본성이 생리적 욕망이라는 것은 인간 존재의 의미를 제한하여 파악한 것이다. 고자는 타고난 것을 협소한 생물학적 영역에 국한하여 해석하였다. 본능과 본성은 다르며 인간은 동물과 구분되는 존재이다. 맹자는 본성과 본능 양자를 타고난 것으로 함께 받아들이며, 가치론적로 더 중요한 욕구와 덜 중요한 욕구를 구분하여 본성과 본능의 개념적 차이를 설명한다.
맹자에 의하면 사람은 본능과 본성을 겸(兼)하여 타고났다. 맹자가 말하는 겸하여 타고남이란 천함/귀함, 작은 것/큰 것, 소인/대인 등의 쌍으로 구성된 대비들이다. 귀함·작은 것·소인 등의 개념이 생리적 욕구(본능)의 의미 계열에 속한다면, 귀함·큰 것·대인 등의 개념은 도덕적 규범(본성)의 의미 계열에 속한다. 이와 같은 겸(兼)의 논리에서 보자면 본능과 본성은 모두 나면서부터 몸에 주어진 사실이므로 양자가 현실적으로는 같지만, 가치론으로는 본성이 가장 중요하다. 맹자는 생리적 욕구를 삶의 기본 조건으로서 취한다는 점에서 고자와 일치하지만, 대인이 실천해야 할 고귀한 가치로서의 본성을 개념적으로 독립시킨다는 점에서 인간 고유의 가치와 그 의의를 제시한다.
정약용 성기호설 비판
정약용에 의하면 인간은 2가지의 기호를 가지고 있다. 첫째는 영지 기호로 선을 좋아하고 악을 싫어하는 마음의 기호이다. 이는 도덕적 욕구로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기호이다. 둘째는 형구기호로 단것을 좋아하고 쓴 것을 싫어하는 것과 같이 육체의 기호, 인간과 동물 모두가 가지고 있는 기호이다. 즉 그에 따르면 인간의 본성은 선을 좋아하고 악을 싫어하는 마음의 기호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악한 행위를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인간은 선이나 악을 선택할 수 있는 자주지권이 부여된 존재로 선으로 마음이 기울지만, 스스로 선과 악의 행위를 선택할 수 있으므로 악한 행위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선을 선호하는 기질을 타고났다는 것이 성선설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인간이 선을 선호한다면, 그 안에는 본성은 선한다는 의미가 내재 되어 있다. 기질의 보편적인 요소로, 선을 좋아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은 인간이 본성적으로 선한 마음을 가지고 태어났기에 선을 좋아하고 선을 따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선과 악을 ‘기호’로 판단한다면, 우리는 선도 악도 기호로써 받아들여야 한다. 즉, 선도 악도 비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담배를 생각해보자. 담배가 몸에 해롭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러나 담배는 기호식품으로 담배를 피우거나 선택하는 사람을 욕하거나 해하지 않는다. 이와 비슷하게 도덕적 행동에 있어서 형구기호를 선택한다면 이 역시 기호로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성유선악설 비판
인간의 본성에는 선과 악이 모두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본성은 선악이 섞여 있으니, 그 선을 닦으면 선이 되고 악을 닦으면 악이 된다는 것이다. 이는 곧 후천적인 수양과 학습이 인간의 선과 악을 결정하는데, 큰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후천적인 경험을 통해 선한 본성을 드러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인간이 선과 악을 품고 있다면, 선과 악 중 무엇을 더 따라야 하는지에 대한 혼재가 일어날 것이다. 우리는 본성적으로 선을 가지고 있기에 악한 행동 시 선을 내재하고 있기에 선으로 회복하고자 하며 선을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선과 악을 동시에 내재하고 있다면 현실적인 상황에서 우리가 선한 행위를 하는 것, 도덕 교육을 이루는 것 등 선을 따르고자 하는 구체적인 장면이 나타나는지 의문이 든다. 선과 악이 모두 내재해 있다면 악한 행동도 선한 행동도 그저 본성이 발현한 그 자체로 보아야 하며 이에 대한 가치판단이 의미가 없어진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