⑳부여지역학살사건 종합
[제공; 진실화해위원회 ]
<국민보도연맹사건>
부여에서는 예비검속된 주민들이 7월 14일 백마강 구드레나루터에서 살해당했다. 당시 현장에서 살아난 사람(이봉규)이 있어 이 사실이 유족들에게 알려졌다.
사건 전 부여경찰서 유치장에는 50여 명이 갇혀 있었는데, 몇 명은 대전으로 이송되었고 남아 있던 주민들은 백마강기슭으로 실려 간 것이었다. 목격자들에 의하면, 백마강 현장에는 육지에서 총을 쏴서 죽이는 사람, 강으로 시신을 던지는 사람이 따로 있었다고 한다.
<인민군 측에 의한 피해>
인민군이 후퇴하던 시기인 1950년 9월 28일 부여내무서로 연행되었던 주민들이 내무서 마당에서 집단희생되었다.
<부역혐의 피해>
이어 복귀한 부여경찰서는 각 지서를 통해 부역혐의 주민들을 연행하여 유치장과 경찰서 뒤 창고, 의용소방대 창고에 감금했다. 이 안에서 앓다가 죽은 사람들도 있었는데, 염창리 성장수가 부여경찰서로 잡혀간 뒤 1951년 1월 1일 사망하여 마을 주민 3명이 찾아와 공동묘지에 매장하기도 했다.
1950년 12월 6일에는 중정리 류인철이 부여경찰서 유치장에서 희생되었고, 류종열은 1951년 1월 10일 풀려난 후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류인혁은 부여경찰서 연행 후 희생되었는데 시신을 발견하지 못했는데, 논산 두계면에서 살해되었다는 소문이 있었다.
같은 마을 권태갑과 원용만도 부여경찰서로 연행되어 희생되었다. 규암면의 유승열도 1950년 10월 18일 규암지서에 자수한 후 부여경찰서로 이송되어 행방불명되었다. 은산면 내지리 이희영, 임영규, 임병규가 부여경찰서로 끌려간 뒤 임병규는 형무소에서 병사했으며 이희영, 임영규는 어디선가 희생되었다. 장암면에서는 1950년 11월 25일 부여경찰서로 연행되었던 북고리 강순구가 살해되었다.
장암지서는 국군 수복 후 북고리와 장하리에 진입하여 마을 성년들을 모두 연행하여 장암지서 밑 굴속에 감금하였다. 이 과정에서 장하리의 강정기가 고문사당했고 13명이 군법회의로 넘겨져 재판을 받았다. 다른 40여 명의 주민들은 새끼줄에 묶여 부여경찰서로 이송되었다.
이상 부여지역에서 확인된 피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