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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때 6진 개척한 명장, 단종의 충신 ??- 삭풍은 나무 끝에 불고 명월은 눈 속에 찬데 ????만리변성에 일장검 짚고 서서 ????긴파람 큰 한소리에 거칠 것이 없어라. - ??이 시조는 김종서(金宗瑞) 장군이 조선 세종(世宗) 때 함경도 지방에 6진을 개척할 당시에 읊은 것으로 <해동가요>에 실려 전해온다. 김종서 장군은 두만강 연안의 6진(六鎭)을 개척함으로써 최윤덕(崔潤德) 장군의 4군(四郡) 개척과 더불어 우리나라와 중국의 국경이 오늘의 두만강과 압록강을 경계로 한 현재의 위치로 확정짓는데 큰 공을 세웠다. 김종서 장군과 최윤덕 장군 등이 두만강과 압록강 주변의 여진족을 몰아내고 이 땅을 우리 영토로 개척하기 전까지는 북쪽 국경이 명확하지 않은 상태였으니 후손된 도리로서 어찌 이들의 위업을 잊을 수 있겠는가. ??세종대왕도 “김종서가 없었다면 어찌 6진을 성공적으로 개척할 수 있었으랴!”하는 찬사와 더불어 그를 더욱 신임했지만, 한 가지 아쉬움도 남는다. 만일 그 당시 우리의 국력과 군사력이 조금만 더 강했더라면 고구려와 발해의 옛 터전인 만주 대륙을 온전히 수복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하지만 역사에 가정은 아무 소용도 없는 노릇이니 어쩔 수 없다. ??김종서는 세종 때에 6진을 개척하고 조정에 돌아와 형조판서?예조판서?호조판서?병조판서 등을 거쳐 문종(文宗) 때에는 벼슬이 좌의정까지 올랐다. 그러나 병약했던 문종이 일찍 죽고 어린 단종(端宗)이 즉위하자, 야심 많은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마각을 드러내 유혈 쿠데타를 일으켰고, 그때 가장 먼저 제거된 사람이 바로 김종서였다. 그의 일생은 이처럼 3대 임금에 걸친 충성으로 일관했다.??? ??흔히 김종서를 장군이라고 부르고, 또한 그의 별명이 ‘대호(大虎)’요 ‘백두산 호랑이’였지만, 사실 그는 처음부터 무관이 아니라 문관 출신이었다. 이는 고려조의 서희(徐熙)?강감찬(姜邯贊)?윤관(尹瓘) 장군 등의 경우와도 같다고 하겠다. ??지략이 탁월하고 성격이 강직했던 김종서는 고려조가 기울어가던 공민왕(恭愍王) 2년(1390년)에 충남 공주시 의당면 월곡리에서 도총 벼슬을 하던 김제추(金制錘)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국경(國卿), 호는 절재(節齋), 시호는 충익공(忠翼公)이다. ??그는 태종(太宗) 5년(1405년) 16세 때에 문과에 급제하여 태종 15년(1415년)에 상서원지장을 지냈다. 그러나 태종 때에는 이른바 혁명 주체인 공신들의 득세로 벼슬다운 벼슬을 못하다가, 세종 1년(1419년)에 사간원 우정언이 되었으며, 그 뒤 지평?집의?우부대언?광주판관 등 여러 관직을 거쳐 세종 16년(1434년)에 함길도절제사가 되었다. 과거 급제 29년 만에 45세의 나이로 오늘날의 도지사가 된 것인데, 이는 그의 능력에 비추어보면 한참 늦은 셈이었다. 김종서의 출세길이 이처럼 늦은 까닭은 그가 본래부터 윗사람에게 듣기 좋은 말이나 하는 성품이 아닌데다가 뒤를 봐주는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영명한 군주인 세종대왕은 일찍부터 그의 강직한 성품과 출중한 능력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당시의 절제사는 관찰사 또는 감사라고도 불렀으며, 그 지역의 행정?사법권 및 군사권까지? 행사했으므로 문관이면서도 무관의 임무를 겸한 막중한 자리였다. 유학을 공부하고 문과에 급제하여 문관 벼슬을 지내던 김종서가 무관으로 발탁된 것은 세종대왕이 그를 북방 개척의 적임자로 점찍었기 때문이었다. 여진족을 몰아내고 그 지역을 다스리려면 문무겸전의 탁월한 인재가 절실히 필요했는데 김종서 만한 적임자도 없었던 것이다. 또한 당시 조정에서 세종대왕을 보필하며 조선왕조 500년간 문민정치의 기틀을 다진 명재상 황희(黃喜)가 김종서를 강력히 천거하기도 했다. 황희가 북방을 시찰하고 돌아온 뒤 그곳 사정을 보고하자 세종대왕이 “그러면 여진족을 몰아내고 북방을 개척할 적임자가 누구냐?”고 물었고, 황희가 서슴없이 김종서를 추천했던 것이다.? ??김종서는 비록 키는 작았지만 무인 가문에서 태어나고 자랐기에 무술에도 능하고 담력도 컸으며, 불과 16세에 과거에 급제할 정도로 학문도 뛰어났다. 그가 뒷날 <고려사> 편찬 책임자로 임명된 이유도 그의 학문이 깊었기 때문이었다. 또 여러 관직을 거치며 정치적 식견과 행정적 능력도 갖출 만큼 갖추었기에 세종대왕이 그에게 함길도 방면을 맡겼던 것이다. 그러면 김종서가 함길도절제사로 임명될 당시 그곳의 사정은 어떠했는가. ??함길도 길주에 만호부가 설치된 것은 고려 말이었다. 이후 조선조 초기까지 함경도 방면 국경은 그 부근으로 인식되었는데, 이 두만강과 압록강 연안에는 오래 전부터 여진족이 살고 있었다. 여진족은 본래 만주에 뿌리를 둔 족속으로 고려 초에는 금나라를 세웠고, 고려 말에는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청나라를 세우기도 했다. 그런데 만주 남부에 살고 있던 여진족 여러 부족이 끊임없이 조선의 북쪽 국경을 침범하여 살인?방화?약탈을 자행해오고 있었다. 조선에서는 그들을 ‘오랑캐’ ‘되놈(胡人)’ 또는 ‘야인(野人)’이라고 부르며 때로는 교역을 통해 회유하기도 하고, 때로는 무력으로 정벌하기도 했지만 그들을 완전히 제압하지는 못했다. 뒷날 이순신(李舜臣) 장군도 임진왜란 전 초급장교 시절에 동구비보?건원보?조산보 같은 두만강 요새에서 복무하며 여진족과 쉴새없이 혈전을 벌인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 여진족이 세력이 강할 때에는 함경도 경성, 평안도 영변까지 침범해 노략질을 벌이기도 했다. 세종 9년(1427년)에는 최북단 방어선을 경원부에서 경성으로 후퇴했는데, 이곳도 위험하자 다시 더 남쪽인 용성으로 후퇴시키자는 주장이 나왔다. 참으로 얼빠진 자들이었다. 태종의 뒤를 이어 국내 정치를 안정시킨 뒤, 대마도정벌로 왜구의 소굴을 소탕한 세종대왕이 이따위 잠꼬대보다도 못한 얼빠진 소리를 용납할 턱이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동북방 함경도는 태조(太祖)가 개국의 첫발을 내디딘 창업의 발상지와 같은 일종의 성역이 아닌가. 세종대왕은 국경을 후퇴하자는 신하들의 멍청한 소리에 “조종(祖宗)으로부터 물려받은 강토를 단 한 치도 줄일 수 없다!”면서 영토 개척의 강력한 의지를 천명했다. ??세종대왕은 재위 14년(1432년) 6월에 경원부는 그대로 경성에 둔 채 여진족이 자주 침범하는 석막에 영북진을 설치하여 방어선을 다시 북쪽으로 이동시켰다. 그리고 그 이듬해에 여진족 내부에서 부족간의 분쟁이 일어났다는 정보 보고가 조정에 올라왔다. 경원 지역의 우디거 부족과 회령 지역의 오도리 부족 사이에 충돌이 벌어져 여진의 세력이 많이 약해졌다는 중요한 보고였다. 이에 세종대왕은 마침내 여진족을 몰아내고 영토를 회복할 호기가 왔다고 판단하여 김종서를 함길도절제사로 보낸 것이었다. ??이후 김종서는 세종 21년(1439년) 형조판서로 입각할 때까지 7년간에 걸쳐 북방 개척을 위해 전심전력을 다했다. 절제사로 부임한 김종서는 흐트러진 민심을 안정시키는 한편, 북방 변경에서 고생하는 군졸들의 처우를 획기적으로 개선했다. 이를 위해 군사들을 늘 배불리 먹이는 등 파격적인 최고의 대우를 하여 사기를 높이고자 했다. 김종서가 사기 진작을 위해 거의 날마다 잔치를 베풀다시피 하자 이를 보고받은 조정 대신들이 ‘좋은 건수를 잡았다’고 여기고 “김종서가 날마다 잔치판을 벌여 국고를 낭비한다”고 중상?모략했다. 그렇게 해서 임금의 신임을 잃게 만들자는 의도였으니, 재주라고는 남을 시기하고 헐뜯는 재주밖에 없는 인간은 예나 이제나 이처럼 언제나 존재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 김종서는 이렇게 당당히 항변했다. ???“이곳 군사들은 국경을 지키기 위해 10년이나 집을 떠나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렇??? 게 고생하는 군사들을 후히 대접하고 위로하지 않는다면 누가 목숨을 걸고 오랑캐를 막???? 아낼 것인가! 지금은 이들에게 소다리를 먹이지만 국경이 정비된 뒤에는 닭다리를 주어도??? 충분할 것이다!” ??그래도 김종서를 시기하고 헐뜯는 조정 공론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성격이 불같은 김종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자 임금에게 이런 상소문을 올려 자신의 괴로움을 털어놓았다. ??- 모든 일에는 그 자취가 있으므로 아무리 흔적을 감추려고 해도 숨길 수가 없사옵니다. 어떤 것이 충(忠)이고 어떤 것이 사(邪)인지, 어떤 것이 공(公)이며 어떤 것이 사(私)인지 신처럼 어리석은 사람은 알 수가 없사옵니다. 공사(公私)의 분간이나 충사(忠邪)의 판별은 오로지 밝고 어지신 성상(聖上)께서 하실 따름이옵니다. 예부터 먼 외방에서 일을 보는 신하는 반드시 갖은 비난과 모략을 당해 화를 면치 못하기 일쑤였사옵니다. 고려조의 윤관도 그 좋은 본보기였나이다. 윤관은 명문가 출신으로 큰 공이 많았지만 그래도 참소와 비방을 면치 못했는데, 신이 조그만 공로도 없사옵고, 또 일을 이룰 만한 능력도 없사옵고, 오로지 잘못한 것만 많사오니 한심할 다름이옵니다. -? ??반면 김종서는 군사훈련을 강화하여 언제 오랑캐들이 침범해도 물리칠 수 있는 준비를 갖추는 한편, 영토 확장의 실질적 효과를 위해 함길도 남부 지방의 농가 2천 200호를 경원부와 영북진으로 이주시켜 이들의 세금을 감면해주었다. 뿐만 아니라 이들 이주민 정착에 공이 큰 향리(鄕吏)들에게는 중앙으로 진출할 수 있는 길을 터주기도 하는 등 적극적인 영토 개척과 안정화 정책을 펼쳤다. 그 뒤에는 멀리 삼남 지방에서도 이주민을 모집하여 북계 지역의 인구를 늘렸는데, 여기에는 천민을 양인으로 승격시키고, 양인은 토관(土官)으로 임용하는 등 파격적인 대우가 뒤따랐다. ??김종서가 문무를 겸전한 출중한 인재라는 사실을 일러주는 일화가 있다. 어느 날 그가 군사들을 위해 밤늦도록 잔치를 베풀고 있었는데 갑자기 화살 하나가 날아와 김종서의 앞에 놓여 있던 술통에 박혔다. 장졸들이 모두 놀랐지만 김종서는 눈도 깜빡하지 않고 태연히 앉아 술을 마셨다. 김종서의 담대함에 사람들이 다시 한 번 놀라자 그는 껄껄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어떤 놈인지는 모르지만 나를 시험해보려는 수작이거나 오랑캐의 소행일 것이다. 그러??? 나 우리 군사들이 이렇게 든든히 버티고 있는데 내가 두려워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더구??? 나 장수인 내가 그만한 일에 겁을 먹는다면 어찌 군사들이 나를 믿고 따르랴.” ??뒷날 세종과 문종의 부탁을 저버린 채 수양대군에게 붙은 변절자 신숙주(申叔舟)도 한동안 김종서의 막하에 종사관으로 있었다. 김종서 자신도 16세에 문과에 급제했을 정도로 글을 잘하고 학문이 깊었지만 중책을 맡은 절제사가 일일이 보고서를 쓸 수 없었으므로 젊고 똑똑한 문관을 한 명 보내달라고 했더니 조정에서 집현전학사 신숙주를 보내주었던 것이다. 김종서는 자신이 부르는 대로 금세 받아쓰는 신숙주의 문장력에 감탄하여 그를 매우 아꼈다고 한다. 하지만 나중에는 충신과 변절자로 갈라져 원수지간이 될 줄을 그때야 어찌 알았으랴.??? ??한편, <국조보감>에 따르면 김종서가 북방 경영에 임하며 세종대왕에게 이런 내용의 상소문을 올렸다고 전한다. ??- 용성으로 국경을 삼으면 선조(先祖)의 땅이 줄어들고, 산천의 험함이 없어 방비가 어려울 것이옵니다. 하오나 두만강을 국경으로 삼는다면 곧 임금의 땅을 다시 일으키는 것이 한 가지 대의요, 긴 강의 험함을 이용하면 적으로부터 수비가 편할 것이옵니다. - ??이런 상소문을 받은 세종대왕이 내시를 보내 위로하며 이런 말을 전하도록 했다고 한다. ???“이번에 경의 글을 보니 장차 북쪽의 일은 걱정할 것이 없겠구려.” ??군사들의 정신 무장도 튼튼히 다지고 민심도 안정되자 김종서는 석막에 있던 영북진을 경원부 북쪽의 백안수소로 옮겨 종성군이라 하고 북방 경영의 의지를 더욱 굳게 했으며, 이어서 두만강 연안에 있어 여진족의 침략이 잦은 알목하 지역을 집중 공략하여 이곳에 회령진을 설치해 영토를 더욱 확장했다. 회령진은 군사적?경제적 가치가 높은 요충이므로 곧 도호부로 승격시켰다. ??그리고 영북진의 북상으로 후방이 된 경원부도 더 북쪽인 지금의 경원으로 옮기고, 경원부가 있던 지역에는 200명의 수비군과 300호의 농민을 이주시켜 공성현을 설치했다. 이 공성현은 세종 19년(1437년)에 경흥읍이 되었다가, 세종 25년에는 경흥성을 확장?수축하고 역시 도호부로 승격시켰다. 다시 말해서 김종서는 절제사로 부임한 뒤 오늘의 회령에서부터 종성?경원을 거쳐 경흥에 이르는 동북면 지역을 완전히 평정하고 그 지역의 국경을 확정한 것이었다. ??6진을 개척한 김종서는 내킨 김에 고구려와 발해의 고토인 만주 대륙 수복의 꿈까지 꾸었으나 문약한 조정의 반대로 좌절되자 이런 비분강개의 시조를 읊어 심사를 달랬다. 이 시조는 <청구영언>에 실려 전해온다. 여기에서 ‘인각화상을 누가 먼저…’ 란 구절은 누가 먼저 공신이 되어 기린각에 초상화가 걸리랴 하는 뜻이다. ??- 장백산에 기를 꽂고 두만강에 말을 씻겨 ????썩은 저 선비야 우리 아니 사나이냐 ????엇덧타 인각화상(麟閣畵像)을 누가 먼저 하리오. - ??김종서의 이 시조를 읽어보면 그가 문관 출신이지만 참으로 기개가 드높은 천부적 장수였다는 사실을 새삼 느낄 수 있다. 이야기가 본 줄거리에서 약간 벗어나지만 이 대목에서 조선왕조 초기의 무장 가운데 또 한 사람의 호기가 빼어났던 대장부 남이(南怡) 장군의 이야기도 잠시 하고 넘어가기로 하자. ??남이는 세종 23년(1441년), 그러니까 김종서가 함길도절제사를 지내고 조정으로 돌아온 지 2년 뒤에 태종의 외손자, 즉 태종의 사위 남휘(南暉)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의령. 그는 세조 3년(1457년) 17세 때 무과에 급제한 뒤,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토벌하고, 건주위 여진족을 정벌한 공으로 일등공신이 되어 세조의 총애를 받으며 청년 장군으로 명성을 떨쳤다. 또 그는 세조 13년(1467년)에 불과 27세 나이로 병조판서가 되어 조선왕조 역사상 가장 젊은 장관의 기록도 남겼다. 그러나 그 이듬해에 세조가 재위 14년 만에 죽고, 전부터 남이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예종(睿宗)이 즉위하자 외척에게 병권을 맡겨서는 안 된다는 조정 공론에 따라 물러났다. ??그리고 얼마 뒤 남이가 궁중에서 숙직할 때 혜성이 나타난 것을 보고 “이는 묵은 것이 가고 새 것이 올 징조”라고 한 말이 빌미가 되어 간신 유자광(柳子光)의 참소를 당해 억울한 역모 누명을 뒤집어쓰고 28세 아까운 나이로 처형당했다. 다음 시조는 그가 건주위 오랑캐를 정벌하고 개선할 때 읊은 시조로서 <청구영언>에 실려 있다. ??- 장검을 빼어들고 백두산에 올라보니 ????대명천지에 성진(腥塵)이 잠겼어라 ????언제나 남북풍진을 헤쳐볼까 하노라. - ??남이 장군의 호방함은 다음과 같은 한시에서도 잘 나타났다. 유자광 등은 이 시도 뒷날 남이의 역모 증거라며 무고를 했는데, 그 시는 다음과 같다. ??- 백두산 돌은 칼 가는데 다 닳아버렸고 ????두만강 물은 말이 마셔 다 말라버렸네 ????사나이 스물에 나라를 평정하지 못하면 ????후세에 그 누가 대장부라 일컬으랴. -??? ????(白頭山石磨刀盡 / 豆滿江水飮馬無 ?????男兒二十未平國 / 後世誰稱大丈夫) ??이렇게 아까운 나이로 억울한 죽음을 당한 남이 장군은 순조(純祖) 15년(1815년)에야 신원이 되어 관작이 복구되고 시호도 받았는데, 공교롭게도 그 공신호가 이순신 장군과 마찬가지로 충무공(忠武公)이다. 본편의 주인공 김종서와 사육신(死六臣)도 그렇고, 뒷날 임진왜란 때의 의병대장 김덕령(金德齡) 등도 마찬가지 경우이지만 아까운 인재를 죽여 놓고 수백 년이 지난 뒤에야 관작을 복구합네 공신호를 내립네 하는 짓이 다 무슨 소용인가! ??함길도절제사로 있는 동안 김종서는 모친상을 당했다. 노모가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자 절제사의 직책을 순검사 하경복(河敬復)에게 겸임토록 하고 급히 고향으로 돌아가 침식을 잊고 간호했지만 두 달 뒤에 노모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세종은 역마와 종이와 관 등을 보내 장례를 치르도록 해주었다. 김종서가 유교의 예법에 따라 3년상을 치르고자 사직을 청했지만, 세종대왕은 100일이 지나자 함길도로 돌아가도록 명했다. 몇 차례 사양했지만 세종은 김종서가 꼭 필요하기에 이를 허락지 않았고, 김종서는 할 수 없이 임지로 돌아갔다.? ??그렇게 7년 동안에 걸쳐 두만강 연안의 북방을 개척하고 안정시킨 김종서는 세종 21년(1439년)에 형조판서로 승진하여 조정에 입각했다. 그러나 그가 북방 경영에서 완전히 손을 뗀 것은 아니었다. 세종 25년(1443년)에 종성과 온성을 도호부로 격상시키고, 그 이듬해에는 경원 북쪽에서 회령 서쪽에 이르는 지역에 두만강을 따라 성을 쌓아 여진족에 대한 방비를 강화했으며, 세종 31년(1449년)에는 전에 영북진이 있던 석막에 부령부를 설치함으로써 마침내 경흥?경원?온성?종성?회령?부령 등 6진을 완성했다. 이는 신라가 외세인 당의 힘을 빌어 이른바 삼국통일을 한 뒤 중국에게 빼앗겼던 두만강 연안을 거의 800년 만에 수복한 빛나는 위업이었다. ??김종서는 6진 개척 과정에서 느끼고 연구한 군사적 방략을 정리한 <제승방략(制勝方略)>이란 군사 이론서를 저술했는데, 이는 북변의 오랑캐들이 침범했을 때 그 지역은 물론 인근 전 지역의 장정을 포함한 모든 병력을 집결시켜 일거에 섬멸한다는 내용이다. ??조정으로 들어온 김종서는 형조판서?예조판서?병조판서 등을 지냈는데,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예의주시하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김종서를 함길도절제사로 천거했던 황희 정승이었다. 황희는 나이든 자신과 맹사성(孟思誠)에 이어 나라를 이끌어갈 으뜸가는 재목으로 김종서를 첫손꼽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황희가 보기에 김종서가 큰 그릇은 틀림없는데 성격이 너무나 급하고 자만심도 지나칠 정도로 강한 것이 흠이라면 흠이었다. 어느 날 영의정 황희가 병조판서가 된 김종서를 만나러 병조를 찾았다. 그때 황희와 마주앉은 김종서의 자세가 삐딱한 것이 황희의 눈에 거슬렸다. 황희가 병조의 관리들에게 호통쳤다. ???“너희 대감의 의자 다리 한 쪽이 짧은데 고쳐드리지 않고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 ??김종서가 무슨 뜻인지 알아듣고 얼른 의자에서 일어나 무릎을 꿇고 자신의 잘못을 사죄했다. 또 한 번은 황희가 맹사성과 더불어 의정부에서 국사를 논하고 있는데 난데없이 푸짐한 점심상이 들어왔다. 점심상에 뒤따라 호조판서 김종서가 들어왔다. 김종서가 생각하기에는 나이 많은 정승들이 점심도 굶으며 나랏일을 하는 것이 고마워 예빈시에 일러 특별히 마련한 것이었다. 모두 시장했던지라 수저를 들고 음식상에 달려들려고 하는 순간 황 정승이 벼락같이 소리쳤다. ???“이보시오 호판! 예빈시는 나라의 행사와 왕실에 쓰이는 음식을 마련하는 곳이오! 그런??? 데 이런 사사로운 일에 국고를 낭비하다니, 이래도 될 일이오?” ??무안해진 김종서는 도망치듯 그 자리를 벗어났다. 이처럼 황희가 김종서의 조그만 잘못도 용서하지 않고 꾸짖자 어느 날 맹사성이 황희에게 이렇게 물었다. ???“김종서는 당대의 인물인데 대감은 어찌 그렇게 허물만 잡으시오?” ??그러자 황희가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김종서를 미워해서 그랬겠소? 누구보다도 김종서를 아껴서 그렇다오. 뒷날 우리???? 자리에 앉을 인재인데, 그의 성미가 워낙 과격하고 기운이 넘쳐서 걱정이란 말이오. 신중??? 히 처결해야 할 일도 경솔히 처결하면 일을 그르칠 염려가 있소. 그런 까닭에 미리 그 기??? 운을 꺾어 신중한 사람을 만들자는 거라오.” ??나중에 맹사성을 통해 황희의 진심을 알게 된 김종서가 황희에게 찾아가 잘못을 빌었다. 김종서는 성격이 급한 결점도 있었지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깨끗이 승복할 줄도 아는 멋진 사나이였다. 김종서가 용서를 빌자 황희가 부드럽게 타일렀다, ???“김 판서의 패기는 장수로서는 필요한 것이지만 국정을 맡은 대신으로서는 불필요한 것??? 이오. 앞으로 무슨 일을 처리하든지 언제나 자신을 억제하고 신중을 기하도록 하오. 모름??? 지기 큰일을 위해서는 작은 일 하나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법이오.” ??나중에 김종서는 다른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북방에서 오랑캐와 싸울 때는 오랑캐의 화살이 날아와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는??? 데 황 정승의 호통에는 등에서 식은땀이 흐를 정도로 무서웠다네!”? ??뒷날 김종서를 우의정으로 추천한 사람도 황희였는데, 과연 황희의 사람 보는 안목은 남다른 데가 있었다. 수양대군의 거사 때 김종서의 성격이 보다 신중하고 치밀했다면 그렇게 쉽사리 당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 ??이렇게 각조 판서를 거쳐 우참찬에 있던 김종서가 세종대왕의 명을 받아 <고려사> 편찬을 맡은 것은 세종 31년(1449년)에 지춘추관사로 임명되어서였다. <고려사>는 태조 4년(1395년) 4월에 정도전(鄭道傳)과 조준(趙浚) 등의 편찬으로 총 37권이 나온 것이 처음이었다. 그런데 이 <고려사>는 조선 건국을 합리화하고 미화하기 위해 사실을 왜곡한 점도 많았고 여러 모로 실록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한 것이었다. 이를테면 고려는 원나라의 지배를 받을 때를 제외하고는 황제를 칭하고 연호를 세운 자주성 강한 당당한 제국(帝國)이어서 임금은 자신을 짐(朕)이라 하고 신하들은 폐하(陛下)라고 불렀다. 또 왕비는 황후, 왕자는 태자, 황제의 지시는 조서(詔書)라고 했는데 이를 사대주의 필법에 따라 짐은 여(予), 폐하는 전하, 황후는 왕비, 태자는 왕세자, 조서는 교서(敎書) 등으로 낮추어 기술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정몽주(鄭夢周)같은 충신은 깎아내린 반면 별다른 공도 없는 정도전의 아비는 청백리로 추켜세운 대목도 있었다. ??세종대왕이 이것을 보고 그 잘못을 지적하고 “차라리 없는 것만도 못하다!”면서 세종 14년(1432년)에 윤회(尹淮) 등에게 시켜 다시 편찬하게 했다. 그러나 이 또한 <삼국사기>처럼 편년체로 기술하여 너무나 간단하고 조잡하고 엉성했다. 그래서 다시 신개(申?) 등에게 명해 또다시 고쳐 쓰도록 했다. 그렇게 개수된 <고려사>는 지난 번 것들보다는 나았으나 그래도 사실과 다른 점이 많아 김종서에게 지춘추관사를 맡겨 이를 고쳐 쓰게 했던 것이다. 김종서는 당대의 학자?명문들을 모아 <고려사> 편찬 작업에 들어갔다. 하지만 이 <고려사>는 그 이듬해인 1450년 2월에 세종대왕이 재위 32년 만에 세상을 뜨는 바람에 완성을 못 보고, 문종 1년(1451년) 8월에야 총 139권으로 완성되었다. 김종서는 또 그 이듬해에는 <고려사절요>도 편찬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이 <고려사>는 편찬 책임자가 지춘추관사 김종서가 아니라 이조판서였던 정인지(鄭麟趾)로 되어 있다. 그 이유는 쿠데타에 성공해 왕위에 오른 수양대군이 자신의 반대편에 섰던 사람들의 이름을 모두 빼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문종이 즉위하자 김종서는 우의정으로 승진했다. 61세에 마침내 정승의 반열에 오른 것이었다. 그러나 본래부터 병약했던 문종이 1452년 5월 재위 2년 3개월 만에 39세 한창 나이로 죽고 불과 12세의 철부지 외아들이 뒤를 이으니 곧 비운의 소년 왕 단종(端宗)이다. 문종은 어린 아들이 걱정되어 임종할 때 영의정 황보인(皇甫仁), 좌의정 남지(南智), 우의정 김종서 등 10여 명의 중신을 불러 뒷일을 간곡히 당부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지가 중풍으로 사직함에 따라 김종서가 좌의정이 되고 정분(鄭?)이 우의정이 되었다. 이들은 세종과 문종의 당부대로 어린 단종을 정성껏 보필했다. 김종서는 독단적으로 국사를 처리한다는 일부의 비난도 받고 오해도 샀지만, 그것은 어린 임금을 보좌하여 국정의 안정을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지 그가 권력을 남용했다고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역사의 흐름은 어쩔 수 없었다. 천성이 호방하고 문무를 겸한 세종의 둘째아들 수양대군의 야욕을 미리 알아채고 방비를 못한 것이 화근이었다.? ??문종이 일찍 죽고 어린 단종이 즉위하여 왕권이 약화되자 야심만만한 수양대군이 주변에 사람들을 불러 모으기 시작했다. 마각을 드러낸 것이었다. 그의 곁에는 눈치 빠른 신숙주?정인지?한명회(韓明澮)?홍윤성(洪允成)을 비롯해 홍달손(洪達孫)?양정(楊汀) 등 힘깨나 쓰는 장사들이 계속 모여들었다. 이들이 마침내 거사한 것은 단종 1년(1453년) 10월 10일이었다. 수양대군은 가장 무서운 인물인 김종서부터 제거하기로 했다. 날이 저물자 그는 양정?임운(林芸)?유수(柳洙) 등 무사 세 명과 하인을 데리고 서대문 밖 김종서의 집으로 찾아갔다. ??김종서의 맏아들 승규(承珪)가 친구 두 명과 함께 대문 밖에서 이야기를 하다가 수양대군이 찾아왔다고 전하니 김종서가 나와 맞았다. 평소 수양대군을 경계하고 있던 김종서였으나 설마 자기 집 앞에서 무슨 일을 당하랴 하고 방심했던 것이 오산이요 결국은 천추의 한이 되었다. 그 자리에서 김종서는 수양대군의 종이 내려치는 철퇴에 머리를 맞고 쓰러졌고, 승규가 아버지를 보호하려고 그 위에 엎드려 감싸자 수양대군을 따라온 무사가 사정없이 칼질을 했다. ??김종서 부자를 처치한 수양대군은 그 이튿날 김종서가 대역죄를 저질러 처단했다면서 왕명을 빙자해 대신들을 소집한 뒤 한명회가 미리 만들어 놓은 생살부(生殺簿)에 따라 영의정 황보인을 비롯한 반대파는 모조리 죽여버리고 정권을 장악했다. 이것이 바로 이른바 계유정난(癸酉靖難)이다. 수양대군은 라이벌인 친동생 안평대군(安平大君) 부자도 각각 강화도와 진도로 귀양을 보냈다가 곧 죽여 없앴다. ??그런데 죽은 줄 알았던 김종서는 다시 소생해 상처를 싸매고 부인의 가마를 타고 성내로 들어가려고 서대문?서소문?남대문 등을 두루 돌아다녔으나 모든 성문은 이미 수양대군의 심복들이 장악하고 있어서 들어갈 수가 없었다. 나라를 위한 김종서의 마지막 충성은 이처럼 물거품으로 돌아가고, 그는 이튿날 수양대군이 보낸 자객의 칼에 맞아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의 맏아들 승규에 이어 둘째아들 승벽(承璧)도 같이 죽임을 당했다. ??정권을 장악한 수양대군은 그것으로도 만족할 수 없어서 이태가 지난 단종 3년(1455년) 6월에 양위라는 형식으로 조카를 내쫓고 마침내 왕위를 찬탈하니 그가 바로 세조(世祖)이다. 그리고 2년 뒤에는 단종을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시켜 강원도 영월로 귀양을 보냈다가 사육신사건 등이 일어나자 후환을 없애기 위해 참혹하게 죽여버리고 말았다. 단종의 능인 장릉이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영월 땅에 있게 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세조도 겨우 13년 동안 임금노릇을 하다가 죽었는데 사인은 문둥병이라고 전한다. ??한편, 김종서의 시신은 누군가가 목숨을 걸고 수습하여 고향인 공주로 모셔다 장사를 지냈다. 김종서의 묘는 처음에는 그의 탄생지인 공주시 의당면 월곡리에 있었는데 후손들이 현재의 장소인 국사봉 기슭로 이장했다고 한다. 경부고속도로 청주IC를 빠져나와 36번 국도를 타고 조치원과 연기군 남면을 지나 공주시 경계로 들어서면 바로 장기면 도계리이다. 도계리에서 오른쪽으로 꺾어져 산 쪽으로 올라가면 대교리가 나오는데, 1980년에 정부에서 예산을 들여 정비한 김종서의 묘는 대교천 옆 신도비를 지난 국사봉 산중턱에 있다. 묘 앞에는 비석 2기가 서 있는데, 영조 24년(1748년)에 세운 오래된 비석에는 ‘朝鮮左議政節齋金先生宗瑞之墓’라고 새겨져 있고, 1945년 광복 이후 후손들이 세운 비석에는 ‘大匡輔國崇祿大夫左議政諡忠翼節齋順天金公宗瑞之墓’라고 새겨져 있다. ??대역모반죄로 두 아들과 함께 참살당한 뒤 효수되었던 북방 개척의 명장이요 만고 충신인 김종서에게는 영조 22년(1746년)에 관작이 복구되고 충익이란 공신호도 내렸지만, 지하의 김종서가 그 따위 것들로 어찌 천추의 통한을 풀었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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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平海居士 원문보기 글쓴이: 평해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