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무어란 “아무것도 진리가 아니다. 모든 것은 허용되어 있다”라는 것이었다.----진실로 그것은 정신의 자유이었다. 이 말에 의하면 진리 그 자체에 대한 신앙마저 파괴되었다.
----니체, {도덕의 계보}에서 159면
홍해바다가 쩍 갈라졌다. 예수가 부활했다.
모세가 죽었다. 예수가 종적을 감췄다.
동정녀 마리아가 애를 낳았다. 단 한 번도 결혼한 적이 없는 예수가 모든 인류의 아버지가 되었다.
모든 것이 다 허용되고 있었다.
신도 악마 없이는 살지 못한다. 악마도 신 없이는 살지 못한다.
모든 것이 다 허용되고 있었다.
신은 전지전능하다. 교회에 안 가도 천당간다.
목사가 여신도를 겁탈했다. 목사가 혼외자식을 낳았다.
모든 것이 다 허용되고 있었다.
신이 전지전능하다는 것은 아무 것도 진리가 아니다라는 말과도 같다. 신이 무지무능하다는 것은 아무 것도 진리가 아니다라는 말과도 같다.
모든 것이 다 허용되고 있었다.
진리는 참으로 맛 없는 음식이며, 그 영양가도 없다. 진리가 있으면 이 세상의 희로애락喜怒哀樂이 없어지고, 삶의 의미가 사라진다.
진리가 허위의 탈을 쓰고, 허위가 진리의 탈을 쓴다. 진리가 허위의 멱살을 잡으면 허위가 진리의 멱살을 잡고, 언제, 어느 때나 서로 크게 싸운다.
오늘도, 지금 이 순간에도 진리와 허위의 싸움은 끝이 없다.
허위 그 자체가 신성화되고, 거짓에의 의지가 양심이 될 수 있는 예술이야말로 과학보다 훨씬 근본적으로 금욕주의적 이상과 반대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플라톤에 의해 본능적으로 감지되었는데, 플라톤은 유럽이 낳은 예술의 최대의 적이다. 플라톤 대 호머. 이 관계가 진정하고도 완전한 적대 관계이다. 후자는 삶의 무심한 찬양자이며 황금의 자연이다. 그러므로 예술가가 금욕주의적 이상을 위해 봉사하는 위치에 선다는 것은 예술가의 부패 중에서도 가장 흔한 부패의 하나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이러한 현상은 가장 흔한 부패의 하나이다. 그 이유는 예술가가 가장 부패하기 쉬운 것이기 때문이다.
생리학적으로 과학은 금욕주의적 이상과 같은 지반 위에 근거를 두고 있다. 즉, 삶의 빈곤화가 이들 모두에게 전제되어 있다. 거기에는 정서가 메말라 있고, 삶의 속도가 느리고, 변증법이 본능적으로 되어 있으며, 얼굴 모습이나 몸짓에는 진지함이 새겨져 있다. 이러한 진지함이 표현하고 있는 명백한 징조는 신진대사의 곤란, 생활의 고통이라는 징조이다. 학자가 중시되는 민족사를 관찰해 보라. 그 시대는 피로의 시대이며, 황혼의 시대이며, 쇠망의 시대이다. 거기에는 흘러넘치는 정력, 삶과미래 대한 확신이 흘러가버린 과거의 것이 되어 있다. 중국의 고관이 지배하던 시대는 잘못된 시대이다. 민주주의의 옹호, 전쟁을 대신하는 국제재판, 남녀동등권, 동정同情의 종교, 그밖의 삶의 쇠망의 징조인 모든 것도 역시 뭔가 잘못된 것이다
----니체, {도덕의 계보}에서 162.
플라톤이 그의 ‘이상국가’에서 시인을 추방했고, 이것으로 인하여 그는 ‘예술의 말살자’라는 오명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그러나, 플라톤이 그처럼 시와 예술을 이해하지도 못했던 문외한도 아니고, 진정으로 이 세상에서 시인과 예술가를 추방하려고 했던 것도 아니다. 그의 {국가}는 그의 ‘국가론’의 산물이면서도 ‘교육론’의 산물일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그는 이상국가를 설계하고, 그 이상국가를 이끌어나갈 수 있는 백만 두뇌를 양성하고자 했었기 때문이다. 지옥을 무섭게 그리거나 죽음 앞에서 그것이 두려워 벌벌벌 떨게 만든다면, 그 어느 누구도 천하무적의 용사가 될 수 없다는 것----, 바로 이것이 “시는 아녀자와 노예에게 읽도록 해야 한다”라는 플라톤의 시인추방의 근거가 되어주었던 것이다. 플라톤의 ‘시인추방’은 이러한 청소년 교육과 관련된 말에 지나지 않으며, 그의 에로스의 찬가인 [향연]이나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읽다가 보면, 플라톤의 시와 예술에 대한 사랑을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원전을 읽고 그것을 제대로 살펴보지 않은 죄처럼 무서운 것도 없고, 다른 사람들의 명예와 명성, 그리고 그 권위만을 믿고 또다시 낙인을 찍어버리는 범죄처럼 무서운 것도 없다. 무식하기 때문에 사람을 함부로 죽이고, 뜬소문에 근거를 두고 수많은 사람들을 몰살시킨다. 모든 낙인은 잔혹극이며, 아르토의 말대로 “너무나도 끔찍해서 재앙과도 같은 필연성”을 띨 수밖에 없다.
“허위 그 자체가 신성화되고, 거짓에의 의지가 양심이 될 수 있는 예술이야말로 과학보다 훨씬 근본적으로 금욕주의적 이상과 반대되는 것이다”라는 니체의 말은 반쯤은 맞고 반쯤은 틀린다. 예술에서는 허위 자체가 신성화되고, 거짓에의 의지가 양심이 될 수도 있지만, 그러나 그 허위 자체가 진리가 되고, 거짓에의 의지가 진실에의 의지도 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진리와 허위가 둘이 아닌 하나이듯이, 진실과 거짓도 둘이 아닌 하나이다. 그 모든 것은 선과 악, 진리와 허위, 진실과 거짓의 경계를 초월해 있고, 따지고 보면, 과학과 예술, 플라톤과 호머도 그렇게 적대적인 관계도 아니다.
플라톤도 머나먼 이상의 찬양자이며, 황금의 자연이다. 호머도 머나먼 이상(신화)의 찬양자이며, 황금의 자연이다.
하지만, 그러나 이 이상의 찬양자, 또는 황금의 자연들이 “금욕주의적 이상을 위해 봉사하는 위치에 선다는 것은 예술가(철학자)의 부패 중에서도 가장 흔한 부패의 하나”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예술가(철학자)가 금욕의 탈을 쓰고 만인들 위에 군림하고자 하고 있기 때문이다.
금욕이 금욕의 순수함을 짓밟고, 절대권력자, 혹은 인신人神의 탈을 쓰게 되면, 거기에는 삶의 정서가 메말라가고 신진대사의 촉진이 어렵게 되어 있다. 모든 관계는 상하의 계급적 관계로 변질되고, 모든 가치판단은 선악의 이분법에 종속된다. ‘나는 옳고 너는 나쁘다’가 절대적인 가치기준표가 되고, 이 상명하복의 관계 속에서 언어도 그 힘을 잃고, 그와 함께 모든 예술가들과 그 설자리를 잃게 된다.
황금왕관이 로마교황을 지배하고, 로마교황이 황금왕관 앞에 무릎을 꿇는다. 금욕주의 시대는 피로의 시대이며, 황혼의 시대이며, 쇠망의 시대이다.
금욕주의의 꽃이 중세의 암흑기로 만발했었고, 이 중세의 암흑기에는 성직자라는 악마들만이 득시글대고 있었을 뿐, 그 어떤 학자도, 예술가도, 정치인도 그 숨을 쉴 수가 없었던 것이다.
금욕주의 시대, 혹은 신의 시대는 인간의 죽음의 시대이다.
인간이 있고 신이 있는 것이지, 신이 있고 인간이 있는 것이 아니다.
황금의 자연,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고 위대한 것은 인간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