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나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돌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아무리 적이라지만 그들도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하고 무겁습니다. 어머니, 전쟁은 왜 해야 하나요? 어쩌면 오늘 죽을지도 모릅니다. 상추쌈이 먹고 싶습니다." 64년 전, 포항전투에서 숨져간 한 소년병의 편지다. 끝내 부치지 못한 그의 문장은 절절하고 참담하다.
"세계의 그 어느 사람보다도 비참한 사람이 되리라는 나의 욕망과 철학이 나에게 있었다면 그것을 만족시켜준 것이 이 포로생활이었다." 김수영 시인은 1953년 한 잡지에서 그렇게 적고 있다. 저마다 저대로의 까닭으로 살인했던 포로수용소는 인간지옥이었다.
유월이 또 찾아왔다. 유난히 길었던 그해 여름을 더듬는 일은 늘 무겁다. 논밭에 널브러진, 삶이 끊긴 주검을 기억하는 건 고통이다. 그러나 그건 2014년 유월을 살아가는 자의 몫일 게다. 죽어간 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
유적공원 초입 흥남철수작전 기념비 아래
'위대한' 구조 선박 메리디스 빅토리아호 모형
이념의 광기 속 수용소는 또 다른 전쟁터
박물관 전시된 무기들 녹슬어도 '섬뜩'거제포로수용소 유적공원은 그해 여름인 양 무더웠고 전쟁을 왜 해야 하느냐던 소년병의 외침은 서늘했다.
■굳세어라 금순아유적공원 초입의 '한국전쟁'은 흥남철수작전기념비다.
1950년 12월 한국전쟁 최대 규모의 철수작전이 이뤄진다. 사람은 많고 배는 적었다. 당시 흥남항엔 군인 10만 5천 명뿐 아니라 피란민 10만 명이 몰려들었고 전쟁 중 민간인은 언제나 후순위였다. 흥남항을 떠나는 마지막 상선은 메리디스 빅토리아호. 정원은 불과 60명, 그나마 선원 47명을 제하니 남은 건 13자리. 메리디스 빅토리아호가 결단을 내렸다. 싣고 있던 모든 무기를 바다에 던졌다. 가벼워진 그만큼이 피란민의 자리였다. 그렇게 해서 승선한 피란민은 모두 1만 4천 명. 12월 23일 메리디스 빅토리아호는 닻을 올렸고 28시간 항해 끝에 부산항에 닿았다. 그러나 부산항은 입항을 거절한다. 이미 꽉 찼다는 게 이유였다. 또 하루의 항해. 배는 마침내 거제도 장승포항에 도착했다. 그날은 12월 25일 성탄절이었고 그 무렵 흥남항은 폭격에 주저앉았다.
메리디스 빅토리아호엔 음식물과 이불, 의약품이 모자랐다. 그러나 한 명의 희생자도 없었다. 승선한 자들은 혹한을 체온으로 버텼고 여성과 아이를 우선 보호했다. 남자들이 이로 탯줄을 끊어 다섯 명의 생명을 받기도 했다.
메리디스 빅토리아호는 1996년 고철로 팔려 해체됐다. 그러나 그 배의 휴머니즘은 2004년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구조 선박'으로 기네스북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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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남철수작전기념비에 있는 피란민 군상. |
기념비 아래엔 메리디스 빅토리아호의 축소 모형물이 있다. 측면으로 그물망이 걸렸고 죽기살기로 그물망에 매달린 피란민 군상을 볼 수 있다. 그들의 눈빛은 애틋하고 손끝은 간절하다. 가요 '굳세어라 금순아'의 금순이 오빠의 통곡 소리도 들린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부두에 목 놓았던 금순이 오빠의 피눈물은 여름볕보다 뜨겁다.
■포로수용소장 납치 사건유적공원을 돌다 보면 포로수용소장 납치 사건을 다룬 기록물과 조형물이 적잖다. 디오라마관, 포로생활관, 포로폭동체험관 여기저기에서 목격된다. "거제포로수용소를 전 세계에 알린 전대미문의 폭동이었죠." 문화해설사 반효금 씨의 설명이다.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 성공 후 포로가 기하급수로 늘자 유엔군은 이들을 통제하기 위해 거제도에 포로수용소를 설치했다. 섬이라 포로 관리가 용이했고 물과 토지가 넉넉한 데다 기온이 따뜻해 동사 위험이 적어서였다. 위치는 고현만에 인접한 독봉산 주변, 규모는 약 360만 평. 한국전쟁 중 만든 포로수용소 중 가장 컸다.
북한군, 중국군, 피난민, 민간억류자 등 17만 6천 명이 그곳에서 생활했다. 300명가량은 여자였다. 포로수용소는 먹을 것, 입을 것이 충분했다. 그곳은 의식주가 해결되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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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렬했던 친공계·반공계 포로 간 전쟁 모형. |
그러나 포로수용소는 비극의 무대였다. 유엔군이 포로의 이념 성향을 엄격히 구분하지 않은 데서 비롯됐다. 친공계와 반공계가 한 막사에서 생활하고 이념 무장한 자와 끌려온 자, 생존을 위해 눈치 본 자가 한데 섞였다. 막사 주도권 전쟁이 밤낮으로 벌어졌고 습격과 린치가 일상이었다. 토막난 시체는 변소에 던져졌다. 거제포로수용소 생활을 했던 김수영 시인은 한 시에서 '그것은 본 사람만이 아는 일'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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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로의 생활상을 알 수 있는 야외막사. |
1951년 여름이 되자 친공계 '해방동맹'과 반공계 '대한반공청년단' 조직이 결성돼 전쟁은 유혈극으로 치달았다. 그리고 1952년 5월 도드 포로수용소장 납치 사건이 발생했다. 친공계 포로들은 포로수용소장을 사흘간 구금한 후 '야만적인 포로 대우 시인' 각서를 받았다. 미군은 이후 각서를 번복한다.
"포로들이 고현만에 인분을 버리기 위해 들었던 '똥통'을 '허니 바께스'라 불렀어요. 바깥 공기를 쐬는 달콤한 창구였겠죠. 그 '허니 바께스'에 인육이 얼마나 많았던지 고현만에 고기떼가 몰렸답니다." 문화해설사의 설명이다.
반공계는 자유를 위해, 친공계는 그들의 이념을 위해 싸운 그 전쟁의 승자는 결국 없었다. 이념이 사람을 잡아먹는 광기의 시대에 이념 없는 자는 들러리였고 포로수용소는 또 다른 한국전쟁이었다. 박물관과 포로폭동체험관에 전시된 무기는 녹슬어도 섬뜩했다.
■MP다리유적공원 위쪽엔 MP다리란 게 있다. 깍지 낀 두 손 머리에 얹은 포로와 총 든 헌병이 눈에 띈다. 포로 등짝엔 PW(전쟁포로) 페인트가 선명하다.
MP다리는 도드 준장 납치 사건 후 포로수용소 인근에 설치된 헌병검문소다. 원래는 지금의 연초삼거리 조금 못미처, 수양동과 연초면을 가르는 작은 하천에 설치된 다리였다. 이제는 흔적을 찾아보기도 힘들다. 그 기억을 유적공원으로 옮겨놨다.
MP다리는 포로와 피란민을 구분 짓는 경계였다. 연초면 쪽은 마을로 가는 길이었고 반대쪽은 수용소 가는 길이었다. 포로 출입 관문을 지나는 발걸음이 적잖이 묘하다. MP다리는 또 하나의 38선이었다.
'6·25' 역사관 주변에 조성된 대동강 철교 조형물은 애처롭다. 끊어진 철교 위의 위태로운 피란민 행렬. 철교가 끊긴 그날은 추위가 혹독했다. 강물에 떨어져 죽어가고, 건너지 못해 절망하는 피란민들을 당시 AP통신 기자가 사진을 찍었다. 그 사진은 퓰리처상을 받았다. 조형물은 이 사진에 근거한다. 그 기자가 방한해 이런 얘기를 남겼단다. "난생처음 본 처참한 광경이었다. 나는 이 사진으로 영예를 누렸지만 사진 속 많은 한국인들은 아직도 큰 상처를 갖고 있다."
여름이 오고 있다. 그해 여름의 무더위로 거제포로수용소가 푹푹 찐다. 글·사진=임태섭 기자 tslim@busan.com
TIP
■거제포로수용소 유적공원
1999년 포로수용소유적관, 2002년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에 이어 지난해 10월 평화파크 개관. 평화파크는 평화전시관, 4DFX 씨어터, 평화수호대, 평화탐험체험관 등으로 구성. 4DFX 씨어터에서는 '접속'의 장윤현 감독이 만든 35분짜리 영화 '거제도'를 상영한다. 포로생활상을 소재로 한 휴먼스토리로 CG 입체영상으로 제작. 평화탐험체험관에선 평화시절부터 전쟁, 포로생활의 상황을 관객이 직접 체험하는 공간. 이동거리는 120m.
이밖에 지난해 7월 준공한 '1950체험관'과 지난 3월 개장한 '아바타 포'도 즐길 거리다. '1950체험관'은 거울미로, 착시미술, 스크린사격장으로 구성. '아바타 포'는 아시아 최초로 롤러코스터와 짚라인을 결합한 놀이기구.
이용 요금은 4DFX 씨어터 4천 원, 평화수호대 2천 원, 평화탐험체험관 4천 원, 아바타 포 9천 원.
■교통
자가용:거가대로~거제대로~42번 국도~한양훼밀리 맨션 좌회전~세림빌라 우회전~고현서점 좌회전~현대차 거제영업소 좌회전~거제포로수용소 유적공원.
대중교통:부산서부시외버스터미널(1577-8301)에서 고현시외버스터미널(055-632-1920)까지 1시간 20분 걸림. 오전 6시 10분~오후 10시 출발, 요금 7천 200원. 부산 하단~거제도 연초를 운행하는 2000번 버스를 타도 된다. 요금 4천 500원, 1시간 30분 걸림. 거제도에서 10·11·100번 등의 버스 승차 후 거제포로수용소 유적공원 하차, 요금 1천 200원.
■문의
시설물 이용은 거제포로수용소 유적공원 홈페이지(www.pow.or.kr) 참조. 전화 055-639-0625. 임태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