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질에 집중하면 길이 보인다(왕상2:1-4)
2018.9.23. 김상수목사(안흥교회)
“그게……. 저도 잘하고 싶은데 잘 안돼요.”
오래 전 손에 붕대를 감고 있던 어떤 청년과 대화를 하던 중에 그 청년이 무심결에 내뱉은 말이다. 그 청년은 부모님께 잘해드리고 싶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에 합격해서 부모님의 어깨를 으쓱하게 해드리고 싶었지만 뜻대로 되지는 못했다. 수능을 본 후에 가까스로 어떤 대학에 들어갔지만, 그 기쁨도 잠시 뿐이었고, 졸업이 가까워 오면서 진로문제로 마음이 많이 약해졌다. 그냥 막연히 ‘난 잘 될 거야. 잘되겠지’라고 말은 하지만, 그 속마음은 언제 밑이 빠질지 모르는 교수대에 앉은 사형수와 같이 불안감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래서 매사에 느는 게 짜증이었다.
그러다 보니 부모는 부모대로 아들의 진로가 늘 궁금하고 걱정되기만 했다. 일반적으로 부모에게 자녀들은 나이가 들었어도 늘 어린애처럼 느껴지기 마련이다. 어떤 할머니가 쉰 살이 다 된 아들과 함께 버스표를 구입하면서, 무의식중에 이렇게 말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매표구에 돈을 쑥 내밀면서) “어른 하나, 애 하나 주세유~”
이것이 부모의 마음이다. 이런 마음은 청년의 부모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처럼 조급하고 간절한 마음과는 달리 실제로 그 청년의 부모의 입으로는 퉁명스러운 말들을 자주 나왔다(“야 인마! 너 왜 공부 안해? 너 대체 어쪄려고 그래?” 등). 그러면 아들은 아들대로 눈에 힘을 잔뜩 주고 “상관 하지마세요! 내 일 내가 알아서 한다구요!”라고 하면서 맞받아치기 일쑤였다. 그리고 청년은 방에서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괴로워 하면서 AC~ IC~를 연발하면서 주먹으로 벽을 내리치다가 손을 다쳤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부모나 그 청년이나 뭔가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하다고는 느끼기는 하는데, 정작 그 방법이 무엇인지는 모른다는 것이었다. 어쩌며 이 청년과 그 부모의 모습이 지금 우리들의 가정에서 유사하게 벌어지고 있는 모습들일 수 있고, 우리들 자신의 심각한 고민일 수 있다. 그러면 잘하고 싶은데 잘 안될 때 또는 실타래처럼 복잡한 문제들이 꼬였을 때, 인생의 길을 잃었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것일까? 그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 원인과 해결책을 깨닫고 싶다면,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사울 왕이 버림받았던 이유와 다윗이 하나님께 쓰임 받았던 차이를 묵상해볼 필요가 있다.
사무엘상 15장에 보면 사울 왕이 하나님께 버림받게 되는 결정적인 장면이 나온다. 다 함께 읽자 .
“22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23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니 24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말을 청종하였음이니이다 .... 27 사무엘이 가려고 돌아설 때에 사울이 그의 겉옷자락을 붙잡으매 찢어진지라”(삼상 15:22-27)
이 말씀은 이미 여러 번 하나님을 배신했던 사울 왕에게 하나님께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던 아말렉과의 전투상황을 기록한 말씀이다. 하나님은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아멜렉의 모든 것을 남기지 말고 다 소멸시키라고 명령하셨다(삼상15:3). 그러나 사울왕은 양과 소와 각종 기름진 좋은 것들은 남기고 하찮은 것들만 진멸시켰다. 그러고도 사무엘에게는 하나님께 제사하려고 남겼다고 천연덕스럽게 거짓말까지 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무엘은 통해서 그를 버리신다는 최후통첩을 하셨다. 그때서야 사울왕은 사무엘의 겉옷자락이 찢어질 정도로 매달렸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삼상15:22-27).
그런데 이 말씀을 다시 한 번 잘 보라. 하나님이 사울을 버린 것이 아니라, 사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던 이유는, 하찮은 양과 소 몇 마리에 대한 끊임없는 욕심과 사람들의 음성을 하나님의 음성(말씀, 명령)보다 더 무겁게 여겼기 때문이다. 이런 행동을 빗대어서 소탐대실(小貪大失, 작은 것을 탐하면 큰 것을 잃는다)이라고 한다. 생각해 보면 사울왕의 바로 이런 모습들이 우리들도 평상시에 가장 실수하기 쉬운 것들이다.
그런데 이와는 완전히 대조적으로 하나님께 인정받고 크게 쓰임 받았던 왕이 있다. 이스라엘의 제2대왕이었던 다윗이 바로 그 사람이다. 다윗은 자기 자신이 한평생 동안 하나님께 인정받고 형통한 삶을 살 수 있었던 중요한 원인에 대해서 스스로 이렇게 증언했다(왕상2:2-3). 이 말씀은 다윗이 그 아들 솔로몬에게 유언했던 내용이다. 이 시간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믿고, 다함께 믿음으로 읽어보자.
“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의 가는 길로 가게 되었노니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무릇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 할지라”(왕상2:2-3).
다윗이 솔로몬에게 이렇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이 이 말씀처럼 살았기 때문이다. 사울 왕과 다윗 왕, 이 두 사람에 대한 차이를 비교해 보라. 한 사람은 세상적인 욕심에 끌려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고, 또 한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힘썼다. 다윗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은 어둔 밤에 등대와 같았고, 기도는 배의 엔진과도 같았다. 바로 이러한 사울 왕과 다윗의 차이가 바로 오늘 우리들이 길을 잃었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 성경이 주는 혜안(慧眼)이다.
우리의 모든 인생사는 다윗처럼 본질적인 것에 집중하면 보이지 않던 길이 보이기 마련이다. 우리의 가장 중요한 본질은 십자가 복음이다. 자꾸 십자가가 아닌 다른 것들(상황, 돈, 바람과 파도 등)에 시선을 뺏기니까 주님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길이 없는 것이 아니고, 길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다윗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고, 그 말씀대로 사랑하고, 순종하고, 섬김의 손을 내밀면, 주님이 예비하신 길이 비로소 보인다.
이것은 개인적인 신앙생활뿐만 아니라 가정생활이나 사회생활이나 심지어 목회나 선교사역에서도 동일하다. 예를 들어 부부사이에 서로의 이익을 추구하면 길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말씀대로 사랑에 집중하면 길이 보인다. 서두에 언급한 청년과 부모도 취직이나 점수보다 가족의 본질적인 것에 집중했으면, 그 어려움은 오히려 하나되는 계기가 될 수 있었다.
예전 신학교에 다닐 때, 지금은 전라도 어느 큰 교회의 사모가 된 후배와 이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질문) “선배님은 어느 때 가장 살기 힘드세요?”
(대답) “음… 나는 생각해 보면 돈이나 다른 어떤 것보다 기도하지 않을 때가 가장 살기 힘들었던 것 같아”
그랬더니 그 후배가 “선배님, 맞습니다! 제가 힘든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 깨달았습니다!”라고 말했다. 정말 그렇다! 그 후배나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우리들 모두다 마찬가지다. 우리들이 인생의 길을 잃어버리고, 마음을 힘들어지게 되는 진짜 이유는 단지 돈 몇 푼이나 어떤 특정한 사람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나와 하나님과의 신뢰관계가 금이 가 있고, 하나님과 나 사이를 지탱해 주는 기본적인 것들(참된 예배, 묵상, 기도 등)이 약해져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오랫동안 습관적으로 교회에 나오기는 하지만, 그 마음의 한쪽은 금이 가고 무너져 있을 수 있다. 이런 틈으로 염려, 근심, 정죄와 낙심의 빗물이 스며들고, 마음의 정원을 헤치는 영적인 여우나 쥐새끼 같은 것들이 함부로 나의 심령에 들락거린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지역 주민 여러분이여, 그러므로 십자가 앞에 나의 모든 욕심과 불신앙을 내려놓자. 자신의 앞가림도 제대로 못하는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의 음성에도 흔들리지 말고, 하나님의 음성에 집중하자. 이를 위해 내 생활 속에 영적으로 무너진 본질들을 회복하자. 그러면 그 말씀 속에서 나의 갈 길이 보인다. 이러한 은혜를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자.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