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의 휘는 덕룡(德龍), 자는 여중(汝中)이며, 성은 강씨(姜氏)이고, 관향은 진양이다. 휘 민첨(民瞻)이 공에게 시조가 되는데, 은청흥록대부 사자금어대 태복경 상주국(銀靑興祿大夫賜紫金魚袋太僕卿上柱國)이며, 시호는 은렬(殷烈)이다. 고려 현종(顯宗) 때 강감찬(姜邯贊)의 부장(副將)으로 거란을 정벌하고 돌아오니, 임금이 시 한 수를 지어 두 장수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그 시는 다음과 같다.
경술 연간에 오랑캐 난리가 있어 / 庚戌年間有虜塵
적병이 한강 가에 깊이 들어왔네 / 干戈深入漢江濱
당시 강공의 계책을 쓰지 않았다면 / 當時不用姜公策
온 나라가 모두 오랑캐가 될 뻔했네 / 舉國皆爲左袵人
그리고 초상을 그려 고을의 관리에게 제사지내게 하였다.그 후손들이 서로 이어 창성하게 드러났는데, 휘 보충(輔忠)에 이르러 병조 판서를 지냈다. 이분이 공의 8대조이다. 7대조 휘 용리(用鯉)는 순천 부사를 지냈고, 6대조 휘 희려(希呂)는 광양 감무(光陽監務)를 지냈고, 5세조 휘 취(就)는 영등 만호(永登萬戶)이고, 4세조 휘 지(持)는 호군이 되었다. 증조 휘 세호(世豪)는 처음엔 어천 찰방(魚川察訪)을 지냈고, 의주 전사(義州典事)를 거쳐 흥양(興陽)ㆍ상원(祥原)ㆍ평산(平山)ㆍ회양(淮陽) 등 모두 아홉 고을의 판관을 지냈다. 청렴하고 근신하여 자신을 지켜서 항아리에는 한 섬의 쌀도 없었다. 사람들이 청백리로 일컬었다. 조부 휘 오수(鰲壽)는 선무랑(宣務郞)이다. 부친 휘 심(深)은 자는 태함(太涵)이고, 통정대부 공조 참의에 추증되었다. 기품과 도량이 뛰어나고 크며 재예가 남보다 탁월하여 여러 번 향시에 합격하고 연달아 삼장(三場)을 통과했으나 끝내 대과에 합격하지 못하자 사람들이 모두 애석해 하였다. 향리의 신점(申霑)ㆍ정몽규(鄭夢虬)와 더불어 온 고을의 부역을 의논하여 정하니, 고을 사람들이 편안히 여겨 ‘진양삼로(晉陽三老)’라고 일컬었다.만년에 시냇가에 초정(草亭)을 짓고 절구 한 수를 지었는데 다음과 같다.
감암산 아래에 있는 설매촌 / 紺巖山下雪梅村
시냇가 띳집은 대나무로 문을 만들었네 / 茅屋臨溪竹作門
병이 많아 근래에는 인적마저 끊기고 / 多病年來人跡絶
아침 내내 홀로 앉아 있는데 어느덧 황혼이네 / 終朝獨坐到黃昏
재상경차관(災傷敬差官) 김행(金行)이 그 집을 지나다 보고서 매우 칭송하고 감탄하면서 그 시에 차운하였는데 다음과 같다.
산이 에워싸고 골짜기가 품어 절로 형성된 마을 / 山圍谷抱自成村
이곳은 인간세상 화복의 문이 아니로세 / 不是人間禍福門
대숲을 마주하여 앉으니 맑은 생각 넉넉하여 / 坐對竹林淸意足
한바탕 봄잠에 곤히 취하고 싶네 / 一塲春睡任昏昏
모친 단양 우씨(丹陽禹氏)는 숙부인에 추증되었으며, 선무랑 우세걸(禹世傑)의 딸이자 고려조 성균 좨주(成均祭酒) 우탁(禹倬)의 후예이다.공은 가정 경신년(1560, 명종15)에 태어났다. 10세에 비로소 글을 배웠고, 15세에 혼례를 하였으며, 18세에 글공부를 중단하고 무예를 익혔다. 신사년(1581, 선조14) 고성(固城)의 향시에 나아가 높은 점수로 장원을 차지하였고, 계미년(1583, 선조16) 무과에 급제하였다. 당시 정기룡(鄭起龍)ㆍ주몽룡(朱夢龍)과 함께 모두 무예로 명성이 있었는데, 한양 사람들이 일컫기를 “영남의 세 용은 두려워할 만한데, 용맹과 기력은 강덕룡이 두 사람보다 낫다.”라고 하였다. 다음 해 봄에 신방(新榜)으로 북관(北關)의 변방을 지키는 자리에 부임했다. 임기를 마치고 돌아와서는 경상 우수사 박현(朴玹)의 비장(禆將)이 되었고, 원균(元均)이 박현을 대신함에 그대로 막하에 머물렀다.임진년 여름에 왜구가 갑자기 들이닥치자 원균이 미처 배를 무장하지 못했고, 수군도 많이 부족하여 계책이 나올 바가 없었다. 공이 계책을 올리고, 밤중에 도보로 사천ㆍ고성ㆍ곤양 등지에 가서 군인을 소집하여 기일에 맞추어 정렬하였다. 노량(露梁)을 건널 적에 노량 만호가 그의 첩을 태우고 먼저 건너기에, 공이 마음속으로 비루하다 여겨 그와 함께 배를 타지 않았는데, 바다를 반도 건너지 않아 풍랑에 침몰하고 말았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공이 건너지 않은 것은 하늘이 도운 것이다.”라고 하였다. 원균과 더불어 한마음으로 힘을 합하여 방어 태세를 갖추고 연거푸 열두 번을 싸워 전투에서 모두 크게 이겼다. 이 때문에 원균이 애지중지하였으며 장계를 올려 공적을 논하였는데, 조정에서 정3품의 품계를 내리니 당시 사람들이 원통하게 여겼다.왜적이 육지에 내려 온 도내에 더욱 가득하니, 장수와 수령, 군사와 백성들이 풍문만 듣고서도 무너져 흩어졌다. 함창(咸昌)은 영남의 요충지인데, 왜적이 당교(唐橋)에 진지를 구축하니, 함창 군수가 산중으로 도망가 숨어 경내가 텅 비게 되었다. 초유사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이 공의 명성을 듣고 장계를 올려 공을 함창 군수로 제수하게 하였다. 공이 군민(軍民)을 어루만지고 깨우쳐 충의로써 면려하니, 흩어진 자들이 모두 돌아와 모였다.계사년(1593, 선조26)에 왜적들이 물러나 울산의 연해 등지에 진을 치고, 명나라 장수 10여 명도 대구ㆍ팔거(八莒) 및 상주 등에 진을 쳤다. 방백이 평소 공의 현명함을 듣고 공을 명나라 군대의 방량차사원(放糧差使貟)으로 삼았다. 공이 충청ㆍ전라ㆍ경상 삼도의 군량을 총괄하여 매우 균등하게 배포하니, 각 도의 사람이 모두 기뻐하였고, 명나라 군사도 공경하고 사랑하였다. 이해에 크게 기근이 들어 백성들이 모두 떼를 지어 도적질을 하여 도로를 통행할 수 없었다. 공이 상주 목사 정기룡 및 문경 현감 변혼(卞渾)과 함께 힘을 합하여 토벌하니, 도적들이 무너져 흩어졌다.고을 백성들을 구휼할 물자가 탕진되어 남은 것이 없게 되자, 본가에 저장해 둔 곡식을 운반하여 계속해서 구휼하였다. 군량을 나누어 줄 적에는 인근의 남녀들이 빗자루와 바가지를 가지고 와 좌우에 줄지어 앉았으며, 뜰에서 받는 곡식은 고르게 나누어 주었다. 또 자기가 먹는 것의 반을 덜어서 그들을 먹였다. 또 길들인 매 두 마리를 얻어 날마다 꿩을 사냥해 명나라 장수의 진지에 넣어주고 곡식과 바꾸는 등 다방면으로 구휼하니, 고을 백성들이 감읍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도적의 무리들도 또한 감복하여 몇 말의 쌀과 몇 덩어리의 고기를 보내며 말하기를 “군수께서 지성으로 백성들을 구휼하신다고 들었기 때문에 감히 와서 사례합니다.”라고 하였다. 그러고 나서 도적을 잡을 술책을 진술하였는데, 그 계책을 써서 마침내 도적의 우두머리를 잡아 대장에게 보냈다. 대장이 자기의 공적이라 거짓으로 꾸며 상과 품직을 대신 받았다. 길에서 버려진 아이를 만나면 자식 없는 사람을 모집해 어미로 삼아 기르게 하고, 또 부하로 삼아 어루만져 보살피며 살려준 자들이 또한 많았다.갑오년(1594, 선조27) 7월, 마음이 갑자기 놀라고 동요되어 곧바로 벼슬을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갔다. 참의공(參議公)이 이질에 걸려 오래도록 낫지 않다가 집에 온 지 5일 만에 세상을 떠나니, 사람들이 유검루(庾黔婁)의 효성과 다름이 없다고 하였다. 상을 마치자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 상국 이원익(李元翼)이 체찰사로서 호남에 관부를 개설하고, 격문을 보내 공을 체찰부의 영장(營將)으로 불러 크고 작은 일을 더불어 의논하였다. 얼마 뒤 진주의 영장(營將)으로 옮겨 군졸들을 어루만져 보살피기를 어린 아이 보호하듯 하니, 군중에서 자애로운 어머니라 일컬었다. 병사(兵使) 정기룡과 성주의 화원현(花園縣)에서 왜적을 만나 싸워 크게 이겼고, 고령 안림역(安林驛)에서 왜적을 만나 또 이겼다. 팔계(八溪)와 덕곡(德谷)의 경계에서 왜적을 만나 전투가 불리해져 퇴각하여 돌아오는데, 한 늙은 장교가 왜적과 대치하여 형세가 매우 급하였다. 공이 말을 돌려 적을 쏘아 죽였다. 그러자 왜적들이 추격하여 자신이 또한 위급하게 되었는데, 마침 석굴이 있어서 말을 탄 채로 그 아래에 엎드려 있다가 나와서 죽음을 면하였다. 집에 돌아오자 모부인이 말을 타고 엎드려 있다가 나왔다는 말을 듣고서 말의 등을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말아, 네가 아니었다면 우리 모자가 어찌 오늘 상봉할 수 있었겠느냐.”라고 하였다. 뒤에 또 별장 우배선(禹拜善)과 삼가(三嘉)에서 왜적을 만나 함께 싸워서 크게 이겼다. 그 나머지 접전한 곳은 몇 곳인지 이루 다 알 수가 없다.매번 적을 토벌할 때 노모가 살아 계셨기 때문에 스스로 자기 몸을 아끼며 적을 죽일 뿐, 목을 베지는 않았다. 전공(戰功)을 논할 때에는 겸손하게 물러나 자랑하지 않았으니, 사람들이 대수장군(大樹將軍)에 비유하기도 하였다. 진주의 서쪽 고산촌(孤山村)에서 적정을 살필 때, 고을 사람 정계원(鄭繼元)의 아내가 왜적에게 사로잡히자, 공이 그 왜적을 끝까지 쫓아가 군인 강두명(姜斗明)의 말에 태워 돌아왔다. 또 진주의 동쪽 진성리(晉城里)에서 적을 정탐할 때는 마을 뒤에 깊고 넓은 석굴이 있어 인근의 30여 명이 아내와 자식을 거느리고 그 안에 숨어 있었다. 왜적이 이를 알고 굴 안에 불을 질러 거의 모두 타 죽게 되자, 공이 병사를 거느리고 달려와서 왜적을 모두 쫓아내어 굴 안의 사람들이 죽음을 면하였다. 또 송대사(松臺寺)에 이르니, 진주 고을의 남녀 수백 명이 모여 있었는데, 왜적이 사방을 포위하여 양식이 끊겨 굶주림이 심하였다. 정명진(鄭明晉)이 일찍이 군율을 어긴 일이 있어 소 한 마리를 바치는 것으로 속죄를 해주었는데, 또 왜적에게서 소 한 마리를 빼앗아 잡아서 그들을 먹였다. 그러고 나서 적병을 피하는 방향을 알려주며 보내니, 모두 은혜에 감사하며 오래 살기를 송축하였다.경자년(1600, 선조33)에 장기 현감(長鬐縣監)이 되어 정사를 깨끗하게 하고 백성을 편하게 하니, 열 번의 고과에서 열 번 모두 상(上)을 받았다. 당시 새로 궁궐을 지었는데, 공을 청토굴취차사원(靑土掘取差使貟)으로 삼았다. 공이 흙을 파는 곳으로 달려가니, 군인 40여 명이 모두 나와 줄지어 절을 하였다. 그때 토굴이 갑자기 무너져 막히자, 군인들이 손을 모으고 감사하며 말하기를 “지금 죽음을 면하였는데, 이는 큰 덕을 지닌 당신이 이르러 그런 것이지, 우리들이 모두 명이 길어서 그러한 것이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 일을 들은 사람들이 매우 기이하게 여겼다.임기를 마친 뒤 예빈시 주부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군기시 주부로 옮겨 제수되었는데 나아가지 않으며 말하기를 “노모가 계시니 멀리 가서 벼슬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모부인이 일찍이 병환이 있어 민물고기를 드시고 싶어 했으나, 마침 강물이 불어서 그물을 칠 곳이 없었다. 공이 강 가운데 배를 띄우고 뱃전을 두드리며 슬피 우니, 문득 큰 물고기가 배 안으로 뛰어 들었다. 사람들이 모두 지성이 감동시킨 바라고 하였다. 모부인 연세가 93세에 이르자, 공이 흰 머리로 노래자(老萊子)의 춤을 추며, 날마다 어머니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을 일삼았다. 향리의 부로(父老)들이 소를 잡고 술을 준비하여 수연(壽宴)을 베풀어 각자 잔을 들어 헌수(獻壽)하였다.장수 현감(長水縣監) 하성(河惺)이 증서(贈序)를 지어 기록하기를 “아! 만력 40년(1612, 광해군4)은 장기 현감 강공의 대부인이 89세 되는 해이다. 동안(童顔)은 더욱 젊어지고, 참된 기운은 더욱 왕성하시다. 슬하에 벼슬한 자식이 있고 현손과 증손이 눈앞에 있으니, 어찌 우리 마을만의 드문 경사일 뿐이겠는가. 실로 인간 세상에 듣기 드문 일이다. 주인 장기공은 벼슬하는 것을 일삼지 않고 집에서 지내며 어머니를 봉양한다. 매일 모친 앞에 색동옷을 입고 매번 남산(南山)의 축수(祝壽)를 올리니, 이것이 진실로 우리들이 감탄하는 것이다. 이에 우리 마을의 부로와 자제들은 다함이 없는 공의 효에 감복하여 급노(及老)의 의리를 미루었다. 모두 모여 술자리를 마련해 풍악을 울리고, 당에 올라 춤을 추며 잔을 잡고 축수할 것을 약속하니, 때는 2월 26일이다. 자리에 참석한 사람의 성명은 아래에 기록한다.”라고 하였다. 뒤에 병사(兵使) 김태허(金太虛)와 우후(虞侯) 신응담(申應澹)이 와서 헌수하였고, 병사(兵使) 윤선정(尹先正)도 와서 헌수하였으며, 함양 군수 이대기(李大期)는 시를 지어 읊었다.병진년(1616, 광해군8) 3월 초나흗날에 모친상을 당하여 참의공(參議公)의 묘를 옮겨 의령의 경계에 있는 태산(兌山)의 남쪽에 합장하고, 묘 곁에 여막을 지어 3년 동안 피눈물을 삼키며 여묘살이를 하였다. 상복을 벗고 또 우병영(右兵營)의 중군장(中軍將)이 되었는데, 군사들이 마음으로 사랑하고 기뻐하여 비석을 세워 덕을 칭송하였다. 유지신(柳止信) 공은 동년의 벗으로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겸 진주 목사였는데, 그가 낮은 직위에 있음을 애석히 여겨 공로를 포상하는 계를 올렸다. 뒤에 절충장군 중추부사에 가자(加資)되었고, 선무공신(宣武功臣)으로 녹훈되자 부모의 관작도 추증되었다.천계 7년 정묘년(1627, 인조5) 10월 25일에 병환으로 집에서 일생을 마치니, 향년 68세였다. 친척들이 달려와 슬피 곡하고, 원근의 사람들이 탄식하며 애석해 하지 않는 이가 없었는데, 모두 말하기를 “훌륭한 사람이 죽었다.”라고 하였다.공의 성품은 청렴하고 순후하였으며, 일을 할 적에는 규각을 드러내지 않았고, 마음가짐은 겉과 안이 다름없기를 힘썼다. 어떤 사람이 전답과 집을 사기를 권하면, 양 옆에 있던 사람들이 반드시 그렇게 하려고 하여도 ‘나는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고서, 자제들을 훈계하기를 “진실로 마음을 전답 사는 데에 두면 원망이 많게 된다.”라고 하였다.집안의 일을 처리할 적에 노복을 부리는 것은 어짊과 용서를 위주로 하여 노복들이 사랑하면서도 두려워하였고, 자제를 가르치는 것은 엄함을 위주로 하여 자제들이 의관을 갖추지 않으면 감히 곁에 있지 못하였다. 동네와 향리에서 처신할 적에는 관대하고 너그러우면서도 온화하고 유순했으며, 군중(軍中)에서 처신할 적에는 공정하고 정직하면서도 청렴하고 공평하였다. 관직에 있을 때는 청렴하고 검소했으며, 윗사람 섬기는 것은 공손하고 신중했고, 아래 사람 부리는 것은 충심과 후덕함으로 하여 사람들 중에 공을 거스르는 자가 없었다. 참의공이 임종 때에 말씀하시기를 “내 아들은 성품이 본래 선량하니, 내가 재산을 나누어 주지 않더라도 그가 반드시 균일하게 할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공이 뒤에 과연 삼등분 하여 그중에 하나를 취하였다.아내 숙부인 밀양 박씨는 정략장군(定略將軍) 용매 만호(龍媒萬戶) 박사신(朴士信)의 딸이며, 병조 판서를 지내고 좌의정에 추증된 박익(朴翊)의 6대손이다. 3남 1녀를 낳았는데, 장남 석윤(錫胤)은 진양 하씨 사인(士人) 하항(河恒)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나 일찍 죽었다. 차남 득윤(得胤)은 울산 김씨 사인 김운익(金雲翼)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 1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오(墺)ㆍ채(埰)ㆍ준(埈)이고, 딸은 사인 하자온(河自溫)에게 시집갔다. 셋째 유윤(有胤)은 선산 김씨(善山金氏) 사인 김영(金瑛)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공보다 먼저 요절하였고, 1녀를 낳았는데 사인 노게(盧垍)에게 시집갔다. 딸은 직장 윤우벽(尹右辟)에게 시집가서 2남 1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윤재(尹載)이고 차남은 윤요(尹垚)이며, 딸은 사인 송명(宋明)에게 시집갔다.공이 돌아가신 지 석 달 28일 만에 선영의 왼쪽 기슭에 장사를 지냈다. 공은 평생 가업을 신중하게 지켜 생산(生産)을 일삼지 않고, 거문고를 타면서 스스로 즐겁게 지냈다. 돌아가신 후에는 단지 긴 칼 한 자루와 짧은 거문고 한 벌 뿐이었다. 또 공은 어릴 때부터 야외에서 대소변을 보면 즉시 묻어서 더러운 물건으로 하여금 하늘의 해 아래에 드러나 보이지 않게 하였으니, 이는 공이 하늘을 공경히 하는 정성이었다.아! 공의 신중한 몸가짐, 어버이 섬기는 효도, 나라를 위하는 충성, 관직에 임하는 청렴함, 적을 토벌한 공적, 사람을 살리는 어짊, 사물을 대하는 후덕함, 하늘을 공경하는 정성은 옛 사람에게서 구하더라도 많지 않을 것이다. 나는 공에게 혼인의 친함 뿐만 아니라, 어렸을 적에 참의공에게 학업을 익혔으니, 정의(情誼)가 두터워 일가 형제의 정과 다름이 없었다. 공의 매부인 함양 군수 이대기(李大期)와 자굴사(闍崛寺)에서 나와 함께 공부할 적에 공도 따라와서 학문을 하였으니, 서로 아는 친구가 된 지도 오래 되었다. 더구나 남의 선한 점을 말하기 좋아하는 것이 나의 마음이고, 또 선행이 매몰되어 전해지지 않을까 두려워 이에 공의 사적을 기록한다.숭정 5년 임신년(1632, 인조10) 7월 그믐에 창산후인(昌山後人) 진사 성여신(成汝信)이 기록하다.
公諱德龍。字汝中。姜其姓。晉其鄕。有諱民瞻。於公爲始祖。銀靑興祿大夫賜紫金魚袋。太僕卿,上柱國。諡殷烈。麗顯宗朝。副姜邯贊伐契丹還。御製一詩。分賜兩將曰。庚戌年間有虜塵。干戈深入漢江濱。當時不用姜公策。舉國皆爲在袵人。畫像祀于州司。其後相繼昌顯。至諱輔忠。爲兵曹判書。於公八代祖也。七代祖諱用鯉。順天府使。六代祖諱希呂。光陽監務。五世祖諱就。永登萬戶。四世祖諱持。護軍曾王父諱世豪。初以魚川察訪。歷典義州。判官興陽,祥原,平山,淮陽凡九邑。而廉謹自守。家無甔石。人以淸白稱之。祖諱鰲壽。宣務郞。考諱深。字太涵。贈通政大夫工曹參議。氣度雋偉。才藝超卓。屢中鄕選。連貫三塲。竟未成名。人皆惜之。與鄕人申霑,鄭夢虬。議定一州差役。州人便之。稱爲晉陽三老焉。晩年。臨溪作草亭。題一絶曰。紺巖山下雪梅村。茅屋臨溪竹作門。多病年來人跡絶。終朝獨坐到黃昏。灾傷敬差官金行。過其家見之。極加稱歎。次其題曰。山圍谷抱自成村。不是人間禍福門。坐對竹林淸意足。一塲春睡任昏昏。妣丹陽禹氏。贈淑夫人。宣務郞世傑之女。麗朝成均祭酒倬之後也。公生嘉靖庚申。十歲。始學書。十五。成聘禮。十八投筆。辛巳。赴固城鄕試。高點榜頭。癸未歲。登虎榜。一時與鄭起龍,朱夢龍。皆以武藝名。京城人稱之曰。嶺南三龍可畏。而勇力則姜優於二人。明年春。以新榜赴戍北關。及還。爲慶尙右水使朴玹禆將。及元均代玹。仍留幕下。壬辰夏。倭寇卒至。元均未及裝船。水稍亦多闕。計無所出。公獻策。星夜步行。召募軍人於泗川,固城,昆陽等地。及期整齊焉。渡露梁時。露梁萬戶載其妾先渡。公心鄙之。不與同舟。未及半洋。爲風濤所揜沒。人曰。公之不渡。天也。與元均同心戮力。防禦備至。連戰十二。戰皆大捷。以此元均愛而重之。論功狀啓而朝廷給三品正。時人寃之。倭賊下陸。彌浦一道。帥守軍民。望風潰散。咸昌。嶺外要衝之地。倭賊結陣於唐橋。咸昌守逃竄山中。境內空虗。招諭使金鶴峯誠一。聞公風聲。馳啓。以公除咸昌守。公撫諭軍民。勉以忠義。散者皆還集。癸巳。賊退陣於蔚山沿海等處。天將十餘。亦結陣於大丘八莒及尙州等地。方伯素聞公賢。以公爲天軍放糧差使貟。公總攝忠淸,全羅,慶尙三道軍糧。分俵甚均。道人皆嘉。天軍亦敬愛之。是年大饑。民皆屯聚爲賊。行路不通。公與尙州牧使鄭起龍,聞慶縣監卞渾。同力討之。賊潰散。縣民賑資。蕩盡無餘。載運本家所藏米穀。連續救活。軍糧散料時。隣近士女。執箒操瓢。列坐左右。收庭之米。均分以給。又除所食之半饋之。又得才鷹二坐。日日獵雉。入天將陣換粟。多方救活。無不感泣。賊徒亦感服。以斗米塊肉投遺之曰。聞主倅至誠救民。故敢來謝。因陳捕賊之術。用其計。竟捕賊魁。送于大將。大將冒稱己功。代受賞職。道遇遺棄兒。募人無子者。令母育之。及留置部下。撫存生活者亦多。甲午七月。心忽驚動。卽棄官歸家。參議公得水痢。久而不瘳。還家第五日。仍至不救。人以爲與黔婁之孝無異云。喪畢。完平李相國元翼以體察使。開府于湖南。檄召公體府營將。大小與議。俄改本州營將。撫恤軍卒如赤子。軍中稱之以慈母。與兵使鄭起龍。遇賊於星州花園縣。與戰大捿。遇賊於高靈安林驛又捿。遇賊於八溪德谷之境。戰不利。退還。有一老校。與賊相持。勢甚急。公回馬。射賊殺之。諸賊追至。身亦危急。適有石穴。所騎馬伏出其下。得免。及還。母夫人聞騎馬伏出。撫馬背曰。馬乎非汝。吾母子豈有今日相逢之理乎。後又與別將禹拜善。遇賊於三嘉。共戰大捿。其餘接戰。不知其幾處也。每於討賊。以老母故。自愛其身。只殺賊而已。不爲斬首。及其論功之日。謙退不伐。人或比於大樹將軍。覘賊於州西孤山村。州人鄭繼元妻子。爲賊所擄。公盡逐其賊。載之軍人姜斗明馬以還。又探賊於州東晉城里。里後有石窟深闊。傍近三十餘人。率妻孥隱其中。倭賊知之。燃火窟中。殆將盡燒。公率兵馳到盡逐之。窟中人得免。又到松臺寺。本州士女數百人屯聚。倭賊四圍。糧絶飢甚。鄭明晉嘗犯軍律。贖納一牛。又得賊牛一隻。盡殺而餉之。因指送避兵之方。皆感恩祝壽焉。庚子。監長鬐縣。政淸民安。十考十上。時新作宮闕。以公爲靑土掘取差使貟。公馳到掘土處。軍人四十餘皆出羅拜。土穴忽崩塞。軍人攢手而謝曰。今之免死。此乃大德所致。吾輩皆盡長命而然。聞者大奇之。秩滿。遷禮賓主簿不就。遷軍器主簿不就曰。老母在。未可以從仕遠遊。母夫人甞有疾。思江魚。時江水漲溢。施罟無地。公泛舟中流。叩舷悲泣。忽有大魚躍入舟中。人皆謂至誠所感。母夫人年至九十三歲。公白首萊舞。日以娛悅親心爲事。鄕父老備牛酒設壽宴。各執爵以獻。河長水性爲序以記曰。於萬曆四十年。卽姜長鬐大夫人之八十九歲也。童顏益春。眞氣愈茂。冠冕膝下。高曾眼前。豈但吾鄕之稀慶。實是人世之罕聞。主人長鬐公。不事遊宦。家食是養。日彩北堂。每獻南山。此誠吾儕之所感歎者也。玆我一鄕父老子弟。服不貴之孝。推及老之義。約與咸集。陳酒張樂。升堂而舞。執爵而祝。時二月二十六日也。在座姓名。錄之于下云。後兵使金太虛,虞侯申應澹來獻壽。兵使尹先正亦來獻壽。咸陽郡守李大期賦詩以詠之。丙辰三月初四日。丁內憂。遷參議公墓。合葬於宜春界兌山之陽。結廬墓側。泣血三年。服闋。又爲右兵營中軍。軍情愛悅。立石頌德。柳公止信。同年友也。節度晉州。惜其淪滯。褒功以啓。後加折衝將軍中樞府事。以宣武功。追贈父母爵。天啓七年丁卯十月二十五日。以病卒于家。享年六十八。親戚奔走悲號。遠近莫不嗟惜。皆曰善人亡矣。公性廉潔淳厚。作事不露圭角。處心務去表裏。有人勸買田宅。則兩傍之人必欲之。吾不爲也。戒子弟曰。苟有心於買田。多怨。處家事。使奴僕。以仁恕爲主。奴僕愛而畏之。敎子弟則以嚴爲主。子弟非冠服。不敢在側。處洞處鄕。寬裕而溫柔。處軍中。公直而廉平。居官淸儉。事上恭謹。使下忠厚。人無有忤之者。參議公臨終曰。吾兒性本良善。吾雖不分財産。渠必均一。公後果三分而取其一。配淑夫人密陽朴氏。定略將軍龍媒萬戶士信之女。兵曹判書。贈左議政翊之六代孫也。生三男一女。曰錫胤。娶晉陽河氏士人恒之女。早夭。曰得胤。娶蔚山金氏士人雲翼之女。生三男一女。曰墺,埰,埈。女適士人河自溫。曰有胤。娶善山金氏士人瑛之女。先公夭。生一女。適士人盧垍。女適直長尹右羣。生二男一女。長曰載。次曰垚。女適士人宋明。公卒之三月二十八日。葬于先隴之左麓。公平生謹守世業。不事生産。彈琴自娛。身歿之後。只一長劍一短琴而已。且公自少時。於野次便屎。卽埋之。不使穢物露見天日。此則公敬天之誠也。嗚呼。公持身之謹。事親之孝。爲國之忠。莅官之淸。討賊之功。活人之仁。待物之厚。敬天之誠。雖求諸古人。不多得也。汝信於公。非徒姻婭之親。少時肄業於參議公。情誼篤厚。無異一家兄弟之情。而與公妹夫李咸陽大期。同榻於闍寺之時。公亦隨而學焉。則相知之舊。盖有年矣。况樂道人之善。吾心也。而又恐善行之埋沒而無傳也。於是乎誌。崇禎五年歲在壬申七月之晦。昌山後人進士成汝信。誌。
[주D-001]삼장(三場) : 초시(初試)ㆍ복시(覆試)ㆍ전시(殿試)를 말한다.[주D-002]신점(申霑) :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군흡(君洽), 호는 조계(槽溪)이다. 신숙주(申叔舟)의 증손이며, 성여신의 이모부이다. 진주의 조동(槽洞)에 살았다고 전한다. 강심(姜深)ㆍ정몽규(鄭夢虬)와 함께 ‘진양삼로(晉陽三老)’라고 일컬어졌다.[주D-003]정몽규(鄭夢虬) : 본관은 장기(長鬐), 자는 중상(仲祥)이다. 강심(姜深)ㆍ신점(申霑)과 함께 ‘진양삼로(晉陽三老)’라고 일컬어졌다.[주D-004]초정(草亭) : 임계정(臨溪亭)으로, 경상남도 진주시 대곡면 설매리에 있었다.[주D-005]정기룡(鄭起龍) : 1562~1622. 초명은 무수(茂壽), 본관은 곤양(昆陽), 자는 경운(景雲), 호는 매헌(梅軒),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곤양 정씨(昆陽 鄭氏)의 시조이다. 1580년(선조13) 고성에서 향시에 합격하고, 1586년(선조19) 무과에 급제한 뒤 왕명에 따라 기룡으로 이름을 고쳤다. 경상우도 병마절도사ㆍ경상좌도 병마절도사, 김해 부사, 밀양 부사 등을 지냈다. 1590년(선조23)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신립(申砬)의 휘하에 들어가고 다음해 훈련원 봉사가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별장으로 승진하여 경상우도 방어사 조경(趙儆)의 휘하에서 종군하면서 방어의 계책을 말하고, 거창전투에서 왜군 500여 명을 격파하고, 김산(金山) 전투에서 포로가 된 조경을 구출하였고, 곤양 수성장(守城將)이 되어 왜군의 호남 진출을 막았다. 상주 목사 김해(金澥)의 요청으로 상주 판관이 되어 왜군과 대치, 격전 끝에 물리치고 상주성을 탈환하였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토왜대장(討倭大將)이 되어 고령에서 왜군을 대파하고, 적장을 생포하는 등 큰 전과를 올렸다. 이어 성주ㆍ합천ㆍ초계ㆍ의령 등 여러 성을 탈환하고 절충장군으로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에 승진하여, 경주ㆍ울산을 수복하였다.[주D-006]주몽룡(朱夢龍) : 1561~1633. 본관은 능성(綾城), 자는 운중(雲仲), 호는 용암(龍巖), 시호는 무열(武烈)이다. 무과에 급제한 뒤 선전관을 거쳐 금산 군수가 되었다. 임진왜란 때 곽재우(郭再祐)와 강덕룡(姜德龍)ㆍ정기룡(鄭起龍) 등 경상도지역에서 용맹을 떨치던 의병장들과 힘을 합하여 여러 곳을 전전하면서 많은 전과를 올렸다. 그중에서도 강덕룡ㆍ정기룡과 자주 영남 산간지대를 중심으로 유격전을 전개하여 적을 격파하였기 때문에 주민들로부터 삼룡장군(三龍將軍)으로 불리기도 하였다.[주D-007]신방(新榜) : 과거에 새로 급제한 사람의 성명을 써서 게시하는 방목(榜目)이다.[주D-008]유검루(庾黔婁)의 효성 : 유검루는 남조(南朝)의 양(梁)나라 때 인물이다. 유검루가 잔릉 영(孱陵令)에 부임한 지 10일도 채 안 되었을 때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리고 온몸에 식은땀이 나기에 그날로 관직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가 보니, 그의 아버지가 설사병을 앓고 있었다. 치료를 극진히 하였으나 어쩔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의원의 말에 따라 대변을 맛보았다. 즉 대변이 달면 쉬 죽고 쓰면 산다는 것이었는데, 대변이 달았다. 이에 하늘에 기도를 드렸는데 그달 그믐까지 아버지의 수명을 하늘이 연장시켜 주었다고 한다. 《梁書 卷47 庾黔婁列傳》[주D-009]우배선(禹拜善) : 1569~1621. 본관은 단양(丹陽), 자는 사성(師聖), 호는 월곡(月谷)이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집안살림을 도맡아 하다가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가재를 털어 의병을 모집하여 화원ㆍ달성ㆍ최항산(最項山)에서 왜군과 싸워 연전연승하여 그 위용을 떨쳤다.[주D-010]대수장군(大樹將軍) : 자신의 전공(戰功)을 자랑하지 않는 장군을 이르는 말이다. 후한(後漢)의 개국 공신(開國功臣)인 풍이(馮異)는 광무제(光武帝)를 섬겨 많은 전공을 세웠으나 사람됨이 겸양하여 논공행상(論功行賞)할 즈음이면 언제나 자신의 공로를 발표하지 않고 큰 나무 아래에서 한가로이 쉬고 있었으므로 대수장군이라는 별칭이 있게 되었다. 《後漢書 卷17 馮異列傳》[주D-011]정계원(鄭繼元)의 아내 : 정유재란 당시 항절하다가 죽임을 당하였다. 그가 피란했을 때에 그의 남편에게 말하기를 “적을 만나 정절을 잃게 되면 나는 반드시 죽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선조 때 정려되었다.[주D-012]강두명(姜斗明) : 1567~?. 자는 명지(明之), 호는 낙성헌(樂聖軒)이다. 진주에 거주하였다.[주D-013]진성리(晉城里) : 경상남도 진주시 진성면이다.[주D-014]노래자(老萊子)의 춤 : 지극한 효성으로 부모를 섬기는 것을 뜻한다. 《소학》 〈계고(稽古)〉에 “춘추 시대 초나라의 노래자(老萊子)가 효성으로 어버이를 받들어 일흔의 나이에 색동옷을 입고 어린아이의 놀이를 하여 어버이를 기쁘게 하였다.”라고 하였다.[주D-015]하성(河惺) : 1571~1640. 본관은 진양(晉陽), 자는 자경(子敬), 호는 죽헌(竹軒)이다. 아버지는 하위보(河魏寶)이며, 뒤에 하진보(河晉寶)에게 입양되었다. 최영경(崔永慶)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92년(선조25) 왜란이 일어나자 화왕산성(火旺山城)으로 곽재우(郭再祐)를 찾아가서 군무를 도와 공을 세웠다. 1603년(선조36)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가 효행으로 추천되어 효경전 참봉(孝敬殿參奉)에 제수되고 이어 사옹원 직장, 장수 현감을 지냈다. 저술로 《죽헌집》이 있다.[주D-016]남산(南山)의 축수(祝壽) : 《시경》 소아(小雅) 〈천보(天保)〉에 “변함없는 달과 같고 떠오르는 해와 같으며, 언제나 버티고 있는 남산과 같아 무너지지 않고 이지러지지 않는다.〔如月之恒, 如日之升, 如南山之壽, 不騫不崩.〕”라고 하였다. 원래는 국가의 기업(基業)이 장구하여 공고함을 기원하는 내용이었으나, 일반적으로 장수(長壽)를 축원하는 말로 쓰인다.[주D-017]급노(及老) : 《맹자》 〈양혜왕 상(梁惠王上)〉에 “내 노인을 노인으로 섬겨서 남의 노인에게까지 미친다.〔老吾老, 以及人之老.〕”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주D-018]김태허(金太虛) : 1555~1620.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여보(汝寶), 호는 박연정(博淵亭), 시호는 양무(襄武)이다. 1580년(선조13) 무과에 급제하여 성주 목사,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등을 지냈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 때 밀양성이 함락된 뒤 밀양 부사로 임명되어 분전하였고, 울산 군수로 울산성 전투에서 도원수 권율(權慄)을 도와 큰 전공을 세웠다.[주D-019]윤선정(尹先正) : 본관은 파평, 자는 은로(殷老)이다. 1611년(광해군3)부터 1613년까지 진주 병사(晉州兵使)를 지냈다.[주D-020]혼인의 친함 : 성여신과 강덕룡은 서로 동서지간이다.[주D-021]공의 …… 적에 : 1582년(선조15) 여름에 곽재우, 이대기 등과 함께 겨울까지 자굴사에서 학업을 익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