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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묘(恃墓)
이 재 신
전남 구례군 광의면 월곡리, 뒤로는 지리산을 병풍처럼 둘러놓고 앞은 바둑판 같은 넓은 들판을 깔아놓은 산촌마을이다. 넓은들 저 멀리엔 밤이면 은하수 같은 불빛이 반짝이는 구례군이 아늑히 보이고 마을 바로 옆으로는 천은사를 오르는 산길이다. 포장된 길을 따라 천은사를 지나 오르면 봄이면 철쭉이 어우러진 노고단에 도달하고 노고단에서 동북쪽 길을 내려가면 춘향고을 남원에 이르게 된다.
마을 좌측으로 지리산 끝자락 하나를 감아돌면 화엄사가 있는데 월곡리에서 3km가 채 못되는 가까운 거리다. 마을에서 천은사 쪽으로 약 1km쯤 오르면 저수지가 있는데 그 저수지 뚝을 지나 계곡을 조금 오르면 허름한 스레트집 한 채가 나온다.
바로 이 집주인 변상복씨가 세상을 뜬 것이다. 언제 죽었는지조차 알 수 없는 보기드믄 죽음이었다.
상복은 늙은 개 한 마리와 벗하며 부모님 무덤에서 시묘살이를 해 왔다. 복실이라고 부르는 털이 보송보송한 하얀 개는 구례읍내 장날 꼬꼬닭집 앞에서 3천원을 주고 새끼를 사다 길렀는데 상복의 유일한 벗이자 식구인 셈이었다.
상복은 월곡리에서 몇째 안가는 부농의 외아들이었다. 해방이후 오십년대 초 흉년이 들었고 사람들은 초근목피로 연명을 해야만 했다. 어떤 집에서는 송키라고 말하는 소나무 껍질을 벗겨와서 우물가에서 공돌로 찧어 부드럽게 만든 다음 물에 담궈 두었다가 보릿가루에 묻혀 개떡을 해먹기도 했고, 더러는 밀가루를 얻어다가 사카린을 넣고 개떡과 풀떼죽을 쒀먹기도 했으나 상복이네는 쌀 섞은 보리밥은 먹고 지낼 수가 있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고향에서 마친 상복은 부모님의 뜻에 따라 순천에 있는 사범학교에 입학했다. 사범학교 3년을 졸업하면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는 것이다.
산골에 살던 상복은 1년이 지나가고 2학년이 지나자 달라지기 시작했고 3년에 오르면서 부터는 담배도 피웠고 술도 마시게 되었다.
순천역 앞에 3만원이면 접대부와 풋사랑을 나눌 수 있는 곳도 자주 가게 되었다. 점점 씀씀이가 헤퍼진 상복은 부모님께 거짓말을 하게 되었고 거짓말은 늘어갔다. 횟수도 많아졌지만 요구하는 돈의 액수도 커졌다. 3학년이 되어 같은 반 학우들은 모두 졸업을 하게되고 어느 학교엔가 발령을 받게 되었으나 주지육림 (酒池肉林)에 허우적이며 헤어날 줄 모르는 상복에겐 그런게 없었다.
상복의 단골 접대부 수옥은 돈 밖에 모르는 화류계 고참 이었다. 상복의 돈쓰는 것에 부잣집 아들임을 안 수옥은 시내 한복판 목이 좋은 곳에 가게라도 하나 내자면서 상복에게 매달렸다. 상복은 고향 부모님을 찾아갔다. 그리고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아버지를 설득했다. 이 산골에서는 좋은 세상이 온다 해도 이렇게 밖에는 살 수 없으니 논과 밭을 모두 정리해 주면 자기가 발령받은 여수에서 터를 닦아 놓겠다고 했다.
그리고 어엿한 선생님이 됐으니 외아들의 효도도 받아보라고 했다. 상복의 감언이설에 속고 안속고의 문제가 아니라 핏줄이라고는 단 하나뿐인 아들의 애원에 외면을 해버린다는 것도 너무 야박하다는 생각과 이제 나이 들었으니 재산이 있으면 뭘할 것이며 결국 지켜봐야 자식 것이라는 생각에 아버지는 상복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다.
우선 큰 동네인 월곡리 에서 이사 간 고서방이 숯이나 구워 팔던 저수지 골짝 외딴집으로 이사를 했다. 방이 두 칸에 부엌 하나인 외딴집은 두 늙은이에겐 적당했다.
논밭과 집을 팔아 자식의 전도를 빌면서 넘겨주고 두 늙은 내외는 언젠가 데리러 올 아들을 기다리기로 했다. 모든 일이 상복의 뜻대로가 아닌 수옥의 뜻대로 된 것이다.
순천에 내려온 상복은 수옥과 동거에 들어갔고 일정한 직업없이 사치스런 생활을 했다.
어쩌다가 퇴근시간에 거리에서 옛 친구가 선생님이 되어 만나면, 그깐 월급 몇푼이나 되길래 거미줄에 목을 매다느냐고 비꼬기도 했고, 투전판이나 기웃거리는 게 생활의 전부였다.
수옥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상복의 돈을 울궈냈다. 값비싼 폐물로 온몸을 치장했다. 순천에서 제일 번화한 곳을 끼고 있는 남문시장 내에 점포하나를 얻어 식료품 가게를 차렸다.
수옥과 상복의 무절제한 낭비 앞에 가산을 정리한 돈은 상당히 축이 났으나 아쉬운 대로 점포하나 임대할 돈은 남아 있었다. 밀가루나 국수 따위는 그런대로 잘 팔려 나갔다. 수옥은 상복에게 말했다. 장사는 자기가 할 테니 당신은 사장 노릇이나 하라는 거였다.
모든 판매를 책임진 수옥은 두달여 만에 밑천을 거덜내고 말았다. 따져 묻는 상복에게 할말이 있었다. 외상거래를 하다보니 놓치는게 많았고, 다른 점포와 같은금액 으로 팔다보니 들여놓은 물건 원가가 비쌌다는 변명이었다.
상복은 생각했다. 여기에서 수옥과의 소꿉놀이를 끝내고 다소 남은 돈으로 혼자 자립을 생각해 보았으나 마음에 걸리는게 있었다. 수옥에게는 상복의 씨가 자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느날 월곡리 에서 사람이 왔다. 말하자면 부모님도 순천의 상복에게 거처를 풍문에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에 찾아온 것이다. 아버지가 며칠 전부터 심하게 앓고 계시다는 것이었다. 언제라고 가게에 도움을 주었을까마는 가게를 수옥에게 맡겨놓고 월곡리로 달려갔다.
아버지는 이미 말을 할수 없이 의식이 몽롱한 상태였다. 굶주림에 뼈만 앙상하게 남은건 임종을 눈앞에 둔 아버지 뿐 아니라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는 무슨 말인가를 꼭 하려고 했으나 말이 되어 주질 않았다. 결국 삼일만에 세상을 떴고 남은건 어머니뿐이었다.
장지(葬地)는 집 뒤에 있는 고추밭 다랭이 밭 이었다. 상복은 웬일인지 눈물이 나질않아 동네사람들 보기에 민망할 정도였다. 장례를 끝낸 상복은 집을 떠나 오면서 어머니께, 순천에 가서 다시 모시러 올테니 그 때 같이 살자고 말했다. 버스에 오른 상복을 향해 야윈 손을 흔들며 눈물을 찍어내는 어머니를 본 상복은 외면을 해버리고 말았다.
상복은 수옥에게 말했다. 이제 고향 구례에는 늙으신 어머니 혼자 뿐이신데 가게 옆방이 남아 있으니 모셔오면 어떻느냐고 물었다. 수옥은 말이 없었으나 내심 달가워 하지 않는 표정이었다. 너는 선생님이 아니라고 말하지 않는 어머니와 세상을 뜰때 까지 속은 척 해주신 아버지를 생각해서 어머니만은 꼭 모셔오고 싶은 상복은 수옥을 달랬다. 그리고 설득 끝에 무언의 승낙을 얻어냈다. 월곡리 를 떠나올때 마을 사람은 참 부러워했다. 이젠 선생님이 된 상복이가 홀어머니 호강시켜 드릴려고 도회지로 모셔 간다는 거였다. 마을과 집이 멀어질수록 어머니는 뒤를 돌아보며 움푹 패인 눈에 눈물을 찍어냈다.
어제의 수옥은 아니었다. 상복이 어머니를 모셔온 뒤 부터는 너무나 변했다. 끼니때 기름진 반찬이 올라오면 어머니께 드렸느냐고 묻는 상복에게 산골 어머니가 기름기를 먹으니 배탈 때문에 안되겠다며 사양 하더라고 둘러댔다. 어쩌다가 캄캄한 방에 징역살이 처럼 갖혀있는 어머니를 보러 방문을 열면, 어머니는 벙어리처럼 앉아서 염주알만 넘기고 있다.
염주는 천은사 주지가 준 것인데 하나뿐인 자식의 밝은 전도를 기원하면서 넘기는 것이었다.
가끔 끼니때 방문을 열어보면 그것이 밥인지 개밥인지 분간키 어여울 정도였다.
상복은 호된 꾸지람과 함께 어머니의 학대를 항의했으나 수옥은 코웃음으로 대신했다. 어쩌다가 잠못드는 밤이 있어 어머니가 주무시는 방문앞을 가보니 방안에서 어머니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대자대비 하신 부처님, 단 하나뿐인 우리 상복이 감싸 주시옵소서, 대비하신 부처님”
수옥은 사생결단으로 달려들었다. 어머니를 시골로 다시 보내든지 못보내 겠다면 자기가 집을 나가겠다는 거였다. 상복은 수옥과 동거이후 제일 심하게 다퉜다. 그날밤 자정이 조금 지나자 어머니의 방문을 열어보니 어머니의 생각으로는 불손한 며느리의 대접을 받기가 싫어서였고 월곡리로 다시 돌아가려면 차라리 아무도 보지 않는 밤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상복은 마음을 정리하지 못한채 술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어느날 오후!
말쑥한 양복차림의 신사가 상복앞에 서더니 손을 내미는 것이다. 자기를 몰라 보겠느냐는 신사의 물음에 자세히 얼굴을 살펴보니 옛날 구례에서 주먹깨나 날리던 덕기였다. 두 사람은 근처의 요정으로 들어갔다. 푸짐한 술자리를 마련한 뒤에 과거의 고향에서 지내던 추억담을 주고 받았다. 불쑥 덕기가 내뱉은 말은 요즘 뭘하고 지내느냐 묻고 차림새나 몰골로 보아 형편이 말이 아니라는 듯 동정 섞인 물음이었다. 상복은 고향이고 또 숨길 필요도 없는 자기의 사생활을 대강 말해 주었더니 부잣집 외아들에 명문 순천사범 출신 변상복이가 말이 아니라며 비꼬았다. 덕기는 옆에 끼고 있던 두 접대부를 물리친 다음 자기가 하고있는 사업을 말하고 동참할 것을 바랬다.
도꼬따이 라는 밀수운반책의 돌격대 일원이었다. 일본에서 배가 오는날 어선으로 가장한 조그마한 동력선으로 바다 한 가운데에서 고기잡이를 하다가 일본 배에서 물건을 옮겨싣고 여수항까지 운반해서 오야붕에게 인계해주면 임무는 끝난다는 것이었다. 만약에 발각이 되더라도 호신용 장비가 모두 갖추어져 있고 근거가 없으면 범죄의 성립이 희박하므로 상황을 보아서 바다속에 넣어 버린다는 것이었다.
또 배는 일제의 최신 도요타와 야마하라는 고성능 엔진이 두 개나 설치되어 있는데 감시선이나 경비정은 어린아이와 청년의 백미터 달리기 경주라는 것이었다. 또 두번 잡히고 한 번 성공하면 돈을 번다고 했다.
깨끗한 양복에 거드름을 피우며 돈뭉치를 꺼내어 거리낌 없이 뿌리는 덕기에게 주눅이 들었다.
덕기와 헤어진 뒤 곰곰이 생각한 끝에 그를 찾아 가기로 마음먹었다.
이튿날 여수로 내려가 덕기와 만난 건 오전 11시경이었다. 덕기는 허름한 건물 지하실로 안내했다. 오야붕과 대원들과 인사를 나누고 배신과 죽음과 맞바꾸겠다는 서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오야붕은 덕기에게 돈뭉치 하나를 주면서 신입사원 축하 파티나 열라고 했다.
유월인데도 밤바람은 차가웠다. 소형 어선이라서 그리 심하지 않은 파도에서 몹시 흔들렸다. 내력을 물으니 속도를 내지 않으면 배라는건 더욱 흔들린다는 것이었다. 멀리 검은 섬 저쪽에서 등댓불이 반짝일 뿐 칠흑같은 어두운 밤이라 항해선박을 구분하기가 어렵다. 파도소리도 별로 없었다. 이따금 배 이물로 잔잔한 물결이 찰싹거릴 뿐이다. 불안과 초조속의 처음 대하는 거대한 작업 앞에 시간은 빨리 가지를 않았다. 찬 물결 소리 외에 모든건 어둠과 적막속에 함몰된 채 그렇게 느린밤은 흐르고 있었다. 그 때였다. 어둠속에서 검은 물체가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자 엔진 책임원이 아시탕! 하고 속삭였다.
동시에 물체를 향해 소리없이 다가가는 배 앞에 일본배가 살며시 다가왔다. 일본배 에서 마대 하나를 옮겨 싣자, 고회…….
배는 순간 뒤로 밀리더니 어디론가 어둠속으로 사라지는데 하얀 물살을 가르며 달리는 배는 엄청난 속도였다. 모든일이 일분이내에 이루어졌다. 위치가 어디쯤인지 알 수 없는 바다 위에서 선원노릇을 하다가 여수항에 도착했을 때에는 동녘에 여명이 터올 쯤이었다.
엔진 부원과 상복은 내리고 덕기만 배에 남았다. 상복은 혼자 대원들의 집합장소인 지하실로 들어섰다. 어둡고 습기찬 내부에서 싸늘한 느낌을 받았다. 실내에는 아무도 없었다. 상복은 이상한 생각이 들어 주위를 두리번 거리다가 입구가 있는 계단 쪽으로 갔다. 그 때 계단 밑에서 인기척 비슷한 걸 느낄 때 뒤통수의 심한 충격과 함께 의식을 잃고 말았다.
여수경찰서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순천경찰서로 압송되었다. 감방 안에서 궁금한건 상복 혼자 들어왔는지 다른 동료들도 같이 잡혔는지 였는데 어느날 아침, 여섯시면 목욕탕으로 세면을 하러가기 위해 감방문이 열리는데 열방과(10감방) 팔방(8감방)이 교차될 때 덕기와 마주치게 되었다. 간수가 지켜보고 있기 때문에 긴 이야기를 할 수 없었지만, 너와 나 단둘인데 여태까지 해먹은 오야붕의 죄까지 둘이서 뒤집어 써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대신 출감하면 한밑천은 오야붕이 생각해 준다는 것이었고 그것이 야쿠자의 생리이며 의리라고 덧붙였다.
서취, 검취를 겨쳐 구형공판에서 징역 7년을 받고 일주일 뒤 언도공판에서 5년이 확정되어 광주교도소로 팔려갔다. 싸늘한 철창사이로 속절없이 바뀌는 계절 속에서 지난날에 자신의 행적을 반추해 보고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려야 했다. 이대로 사나이 한 세상 죽는다 해도 아무런 후회나 미련은 없지만 늙어 홀로 계신 어머니와 수옥에게 뿌려놓은 잡초와도 같은 핏줄이 궁금했다.
잡범들이 들어와서 들려주는 세상 이야기 중에 4·19가 났다고 좁은 감방 안은 들썩거렸고 5·16으로 인해 계엄령이 선포됐다고 했다. 이어 박정희 장군이 국가 재건 최고회의 의장이라고 하더니 점점 세상이 안정되어 가는 듯 했다. 하루하루가 그렇게 갔다. 세월과 감방안은 인간을 무디게 만드는지도 몰랐다.
출감날, 누군가 마중이라도 나와주지 않았나 하는 얇은 기대속에 사방을 두리번거려 보았지만 괜스런 부질없는 짓임을 알았다. 여수로 내려갔다. 옛날의 아지트였던 지하실을 찾아 갔으나 그곳엔 경다방 이라는 간판이 붙여져 있었고 누구에게 옛 대원들의 행방을 물어볼 수도 없어서 다시 순천으로 왔다. 남문시장 안에 수옥을 찾아갔으나 옛날의 가게 건물은 자취를 감추고 삼층건물 이 들어섰는데 진미 정육점, 분재원을 들어가서 물으니 오십대 초반의 안경 낀 주인이 검게 탄 얼굴로 소나무를 손질하면서 하는 말이 사람이 여러번 바뀌어 잘 모르겠다고 했다.
다정해 뵈는 주인은 상복의 차림새나 핏기가 없는 창백한 얼굴을 가끔 쳐다보더니 후덕하게 생긴 안주인에게 커피를 주문하고 담배 한 대를 권했다. 꽃들은 긴 이야기를 머금은 듯 자태를 뽐 내는데 분재원 주인이 하는말이 상복의 한가닥 기대에 모진 사나움을 가했다.
자기가 들은 말로는 옛날 이 자리에 그런분이 있었는데 남자는 형무소에 갔고 여자는 이곳에서 사내아이 하나를 낳아서 가게를 처분하고 어디론가 이사를 갔는데 그 이후론 모른다고 했다.
상복은 주인 내외분께 고맙다는 인사를 뒤로 가게를 나왔다. 고향 월곡리로 가자고 마음 먹었다. 어머니가 순천에서 야음을 틈타서 월곡리로 가신 이후 오랜만의 귀향이었다.
밤이었다. 멀리 큰 동네에서 반딧불 같은 불빛이 반짝였고 가까워 질수록 개 짓는 소리만 지리산 끝자라락을 올린다. 잠시후 저수지 뚝밑까지 왔다. 오랜만에 고향집은 혼자계실 어머니를 안고 깊은잠에 빠진듯 적막했다 집근처에서 주위를 대강 살펴보니 사립문은 굳게 닫혀있고 마당에는 잡초가 무성했다. 후회스런 귀향이었다. 재산잃고 젊음 잃고 오갈곳이 없었으니 고향과 어머니만은 용서해 주시리라 믿은 그 였기에 이 밤을 이용해서 돌아온 것이다.
상복은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혹시 어머니가 몸이 불편해서 집을 이렇게 방치해 두지 않았나 해서였다. 마당 가운데 서서 어머니를 불러 보았으나 아무런 대답이 없다. 큰방문을 열어 보았다. 모든 가제도구는 잘 정돈된 채였고 사람이 살지 않은것 같이 먼지만 수북했다. 어머니는 필시 어디론가 거쳐를 옮긴 것이라고 생각한 상복은 그냥 아랫목에 누워서 잠을 청했으나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지난 세월이 너무도 허무했고 그 속절없이 가버린 세월속에 젊음을 내버린 자신이 미워 잠은 더욱 멀어만 갔다.
아침에 선잠에서 깨어났을 때에는 동창이 훤히 밝아서였다. 상복은 방안을 자세히 살펴보았으나 어머니가 계씨는 흔적은 발견 할 수 없었다.
작은방 문앞으로 갔다. 작은방은 상복이 순천에서 선생님이라고 부모님을 속이던 시절에 가끔 집에 오면 자고 가던 방이었다. 방문을 열어보았다. 순간! 상복은 놀라서 뒤로 넘어질 뻔 했다. 언제부턴가 방 저 윗목에다 부처님을 모셔놓고 그 아래에다 촛대를 놓았는데 어머니가 부처님을 쳐다본 채 않아 계시는게 아닌가. 상복은 어머니를 불렀으나 어머니는 대답이 없었다. 급히 방안으로 들어가서 앉아 계시는 어머니의 얼굴을 돌아다본 상복은 놀라서 뒤로 움찔 물러나고 말았다.
어머니의 오른손에는 천은사 스님이 준 염주가 들려져 있었고 언제 숨을 거우었는지도 모르게 뼈만 오스란히 앉아있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해골이 옷을 입고 염주를 든 것이다.
사흘만에 월곡리 사람들을 불러모아 장례를 치렀다. 집 뒤로 오분 쯤 산을 거슬러 올라가면 오십 여평쯤 되는 밭뙤기가 있는데 양지도 바르고 경치도 좋기로는 그만이었다. 일찍이 아버지가 먼저 자리 잡고 계신 곳이기도 했다. 바로 아버지의 무덤 곁에 어머니를 안장한 것이다.
바람이 몹시 불었다. 우거진 상수리 나무가 심하게 흔들렸다. 상복은 눈을 살며서 떠 보았다. 고개를 왼쪽으로 돌려보니 억새풀로 덮어놓은 이엉이 심하게 들썩거렸다. 그러나 상복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머니를 안장한 사흘부터 월곡리에서 일꾼 세사람을 불러다가 기둥 몇 개를 네귀에 세우고 지붕에는 억새풀로 이엉을 엮어 덮었다. 사실은, 부모님께 불효했던 죄인에게 이런 의지처도 필요 없다고 생각했으나 날씨가 사나우면 부모님께 드릴 매 한그릇 준비하는데 어려움이 있을것 같아서 지은 것이었다. 일 초 일 분도 잡념없이 부모님 묘앞에 무릎꿇고 엎드려 태어날 때부터 지은 불효를 용서해 달라고 빌면서 참회의 시간을 그렇게 보내는 것이다.
여름에 시작된 시묘는 어느사이 가을로 이어져 기러기 울고 영하의 날씨속에 눈보라가 휘날려도 여름옷 그대로였다. 얼굴에 물을 묻혀 본지가 몇 달 넘어 일년이 지나자 무픞에 굳은 살이 박혔다. 하늘의 태양을 달과 별을 본지가 일 년이 지난것이다.
월곡리 사람들은 입을 모았다. 요즘엔 보기 드믄 효자의 시묘살이 라고 칭찬들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상복은 하기 쉬운말 듣기 좋은 칭찬을 듣고자 시묘살이 를 한것은 아니었다. 진심에서 우러난 불효자의 참회요 뉘우침이었다.
지리산 노고단에서 철쭉제가 열리는가 하면 어느 사이 무더운 여름이 찾아왔고 조석으로 한기를 느끼는가 하면 눈보라가 몰아치곤 했다.
상복의 무릎꿇어 엎드린 등 뒤에서 복실이가 컹컹 짓는걸 보면 누군가가 근처를 지나가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몇 해가 덧없이 지나가 버렸다.
어느날 월곡리에 젊은 청년 하나가 길을 물어왔다. 값이 비싸다는 외제 승용차에서 내린 청년은 양복 주머니에서 쪽지를 꺼내더니 확인이라도 하듯 훑어볻 뒤 마을앞 회관 마당에서 환담을 나누며 햇볕을 즐기던 촌노(村老) 몇 분 앞으로 다가갔다.
혹시 이 마을이 구례군 광의면 월곡리가 맞느냐고 말한 뒤 변상복씨를 아느냐는 것이었다.
노인중의 하나가 변상복씨를 찾는 젊은이는 누구냐고 되묻자 자기는 변상복씨의 외아들 변기섭이라고 대답했다. 노인중의 하나가 변상복씨는 지금 부모님의 무덤에서 시묘중인데 보통 시묘는 삼년인데 반해 변상복씨는 몇 년째인지 알수가 없으며 시묘중인 사람에겐 접근 을 해서 말을 걸어서도 않되고 훼방을 놓아도 않되는고로 월곡리 사람들도 그를 안본지가 몇 년은 될것이라는 거였다.
상복의 아들 변기섭은 노인중의 하나가 가르쳐 준대로 천은사 길을 따라가다가 저수지가 나오자 뚝을 타고 계곡쪽을 향해 걸었다. 길이 보이지 않게 숲이 우거진 계곡을 찾아 오르니 흉가와도 같은 집이 나타났다. 기섭은 집을 지나서 집 뒤를 돌아 올라갔다.
잠시 후, 아버지 변상복씨가 두 봉의 무덤 앞에 엎드려 있었다. 헛기침을 몇 번 해도 움직일 줄 모르는데 기침소리를 듣고 어디선가 나타난 하얀개가 기섭을 보자 꼬리를 심하게 흔들었다. 개는 기섭과 오래 사귄 사이처럼 달라 붙었다.
기섭은 아버지인 변상복씨 곁으로 다가가서 등뒤에 선뒤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님, 처음 뵙겠습니다. 저의 이름은 변기섭이라고 합니다. 아버님의 함자는 법 변(卞)자 서로 상(相) 복 복(福)자이시고 어머님 함자는 김해 김(金)씨로 지킬 수(守)자 구슬 옥(玉)자 이십니다.”
그러나 상복은 대답은 커녕 꼼짝도 하지 않는다. 기섭이 몇마디 더 말을 건낼 때 개는 상복을 싸고 돌며 낑낑댄다.
기섭은 할아버지 할머니의 묘에 인사를 드리는게 우선일것 같아서 아버지 곁으로 다가가서 절을 했다. 일어나면서 아버지의 모습을 곁눈질 하려고 살짝 보다가 그만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언제 숨을 거두었는지 알수는 없었지만 백골이 옷을 입고 엎드려 있었던 것이다.
상여는 월곡리 앞을 한 바퀴 돌아 장의차에 실리더니 지리산 끝자락을 뒤로 한 채 섬진강 중류를 질러서 순천에 있는 연화당 이라는 화장터를 향해 검은 연기를 토하며 숨차게 달리고 있었다.
상복이 기르던 하얀 복실이는 주인이 가 버린줄 아는지 모르는지 다시 상복이 시묘 살던 묘를 향해 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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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시묘살이란 이제 구시대의 산물이 됐지만
요즘도 그런 마음으로 부모를 봉양한다면 효자 효녀가 아닐까 싶어요.
소설 첫머리 배경묘사가 참으로 돋보이는 소설입니다. 선생님의 작품이 여느 작품과 다르게탁월한 장점 중 하나가 소설 전반에 흐르는 작중 인물에 대한 성격묘사와 배경 묘사인듯 합니다.
비록 허구의 소설내용이지만 손이 가슴으로 가게 하는
내용이 타 작품과 다른 탁월성을 지녔다는게 제 개인적 소회랍니다.
훌륭한 작품 자주 올려주시길 감히 부탁드립니다. 건강도 유의 하시구요.
과찬입니다. 우리나이엔 다 이런소설 씁니다. 부끄럽게 하시지 마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