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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세계와 4법의 관계 2. 세계와 4법인의 관계 3. 4법인 사이의 관계 4. 대승 불교의 4법인의 관계 5. 인연법과 공법의 관계 |
1. 세계와 4법의 관계
무상경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5음은 ‘무상하고 괴로움이며 공하고 나가 아니다‘라고 관찰하라.” (1. 무상경(無常經))
“12입처는 ‘무상하고 괴로움이며 공하고 나가 아니다‘라고 관찰하라.” (208. 무상경(無常經))
“18계와 느낌은 ‘무상하고 괴로움이며 공하고 나가 아니다‘라고 관찰하라. (195. 무상경(無常經)①)
”과거ㆍ미래ㆍ현재의 5음은 ‘무상하고 괴로움이며 공하고 나가 아니다‘라고 관찰하라.“ (8. 과거무상경(過去無常經))
”과거ㆍ미래ㆍ현재의 6내입처는 ‘무상하고 괴로움이며 공하고 나가 아니다‘라고 관찰하라.“ (333. 무상경(無常經))
”5음을 생성시키는 인과 연도 무상하다.“ (11. 인연경(因緣經) ①)
여기서 5음ㆍ12처ㆍ18계는 세간/세계이다. (세간/세계에 관한 경들) 6내입처는 관찰자의 지각 기관인 눈ㆍ귀ㆍ코ㆍ혀ㆍ몸ㆍ마음이고 6외입처는 관찰의 대상/결과인 빛깔ㆍ소리ㆍ냄새ㆍ맛ㆍ감촉ㆍ법(현상)이다. 6내입처와 6외입처를 인연으로 하여 6인식(눈ㆍ귀ㆍ코ㆍ혀ㆍ몸의 인식과 마음의 인식[의식])이 생긴다.
6내입처와 6외입처, 6인식이 화합한 것을 6접촉(눈ㆍ귀ㆍ코ㆍ혀ㆍ몸ㆍ마음의 접촉)이라 한다. 6접촉은 곧 관찰자의 6내입처의 분별/인식을 매개로 관찰의 대상인 6외입처와 관계를 맺는 것이다. 그리고 6접촉으로 말미암아 6느낌, 6생각, 6의도, 6애욕. 6기억. 6번뇌 등이 생긴다.
5음은 빛깔(12입처에서 마음과 법을 제외한 것, 10색입)과 6인식, 6느낌, 6생각, 6의도를 가리킨다.
이것들이 세계의 전부이며, 다른 세계는 없다. 위의 말들을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1) 세계는 무상하고 괴로움이며 공하고 나가 아니다.
(2) 세계를 생성시키는 인연도 무상하다.
2. 세계와 4법인의 관계
위의 무상경의 내용에서, 먼저 세계와 무상ㆍ괴로움ㆍ공ㆍ비아/무아의 관계를 보기로 한다. 세계는 외연(그것에 포함되는 것들의 범위)을 나타내는 말인데, 무상은 그 외연의 내포(속성)을 가리키는 것이다. 세계는 무상과 외연이 같을 수도 있다. 그러나 무상은 그 세계의 속성 가운에 하나를 가리킨 것이다. 그러므로 ’세계는 무상하다‘를 논리적으로 해석할 때는 세계와 무상의 관계를 ‘세계=무상’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세계는 무상에 포섭되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세계와 무상의 포섭 관계는 ‘세계⊂무상’으로 표시된다. 그러므로 세계와 4법인의 관계는 (3)과 같다.
(3) 세계의 원인⊂무상, 세계⊂무상, 세계⊂괴로움, 세계⊂공, 세계⊂비아/무아
(4) 세계 ⊆ [{x=유위법} ⇒ x의 속성: 무상ㆍ고ㆍ공ㆍ비아/무아]
3. 4법인 사이의 관계
4법인과 관련된 아함경들에서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이다’라 서술되는데, 무상과 괴로움의 관계는 ‘무상⊂괴로움’으로 나타낼 수 있다. 그리고 무상과 괴로움은 ‘무상하기에 괴롭다’라는 인과 관계로 대치할 수 있는데, ‘무상⇒괴로움’료 표시된다.
아함경에서는 ‘무상/괴로움’과 ‘공’의 관계를 포섭 관계로 서술하지 않았다. 이것은 이들의 관계를 인과 관계로 볼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들은 ‘무상/괴로움⇏공, 공⇏무상/괴로움’으로 표시된다.
‘무상/괴로움’과 ‘비아’의 관계는 아함경의 거의 모든 경에서 포섭 관계로 서술하지 않았다. 이것들의 관게는 ‘무상/괴로움’이 ‘비아’와 관계가 있음을 설하고 있다. 곧 무상하고 괴로움에 대하여 ‘이것은 나다. 나와 다르다. 나와 나 아닌 것이 함께 있는 것이다’라고 볼 수 없다고 하였다. (11. 인연경(因緣經) ①, 30. 수루나경(輸屢那經) ①, 82. 죽원경(竹園經), 83. 비사리경(毘舍離經), 86. 무상경(無常經), 87. 고경(苦經), 104. 염마경(焰摩經), 105. 선니경(仙尼經), 120. 마경(魔經), 121. 사멸경(死滅經), 125. 마법경(魔法經), 261. 부류나경(富留那經), 264. 소토단경(小土摶經), 269. 기림경(祇林經), 273. 수성유경(手聲喩經), 274. 기사경(棄捨經), 937. 혈경(血經))
그런데 <잡아함경_12. 인연경 ②>은 ”무상한 것은 곧 괴로움이요, 괴로움은 곧 나가 아니며, 나가 아니면 또한 내 것도 아니다.“라 하였는데, 이것은 ‘무상⊂괴로움⊂비아, 무상⇒괴로움⇒비아’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경의 내용은 <(11. 인연경(因緣經) ①>의 내용과도 어긋나고, 위의 모든 경의 내용과도 어긋나는 것이다.
4. 대승 불교의 4법인의 관계
4.1. 아함경의 4법인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대승 불교의 관점과는 다르다. ‘무상’과 ‘공’의 관계에 한정하여 본다면, 대승 불교에서는 ‘무상하기에 공하다, 공하기에 무상하다’고 하다. 이러한 주장은 무상과 공을 상호 포섭 관계인 ‘공⊂무상, 무상⊂공’로 본 것이다. 상호 포섭 관계는 무상과 공이 동일하다(‘무상=공’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상호 포섭 관계를 인과 관계로 대치되는데, 이것은 ‘무상⇔공’으로 표시된다.
대승 불교의 이러한 관점이 아함경의 (1)의 명제를 (5)와 같이 해석한 데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한다. (5)의 해석에서 (6)이 추론된다.
(1) 세계는 무상하고 괴로움이며 공하고 나가 아니다.
(5) 세계=무상, 세계=괴로움, 세계=공, 세계=무아/비아'
(6) 무상=괴로움=공=무아/비아
그런데 이러한 추론은 잘못된 것이다. ‘세게’는 외연이고 ‘무상ㆍ괴로움ㆍ공ㆍ비아/무아’는 내포[속성]이다. 일정한 외연을 가진 어떤 존재는 여러 속성들을 가질 수 있는데, 그 존재의 외연이 같다고 해서 그것의 속성들도 같아야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승 불교에서 이러한 잘못된 논리에 의거하여 ‘무상⇔공’의 주장을 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상⇔공’의 주장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아함경의 해석에서 나오지 않은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4.2. 대승 불교에서는 ‘공’을 무자성으로 정의한다. 그렇게 정의했을 때, 세계와 무상과 공의 관계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무상’에 한정하여 보기로 한다.
공을 무자성으로 정의한다는 것은 공은 외연이 없다는 것을 뜻한다. 외연이 없다는 것은 결과적으로는 비어있음이 된다. 그러나 세계라는 외연을 공[무자성]으로 교체한 것이 된다. 곧 ‘[세계=공[무자성]]’으로 본다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아함경에서 공을 세계의 속성으로 보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아함경에서 세계를 ‘인연법[가호, 임시로 붙인 이름]으로 형성되는 것’으로 보았다면, 대승 불교에서는 세계를 ‘인연법으로 형성된 것’과 ‘비어었음’이 공존하는 모습으로 규정한 것이다. [이러한 대승 불교의 세게관은 ‘공 사상’으로 연결된다,]
그러면 대승 불교에서는 ‘[세계=공[무자성]]’과 ‘무상’의 관계를 설정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 서면서도 아함경의 4법인의 설명을 그래도 유지하려면, 세계와 법인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정해야 한다.
(7) [세계=공[무자성]]⊂무상
일단 먼저 지적할 수 있는 것은 공은 세계의 성질이 아니라 세계 자체라는 것이다. 세계가 공[무자성]이라면,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은 무엇이란 말인가? 실체가 아닌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인데, 그 무엇은 무엇인가?
그리고 공[무자성]에서 세계가 무상하다는 것을 직접 추론할 수 없다. ‘비어있음’은 ‘무위ㆍ무루ㆍ무생’인데 거기서 생멸하는 모습인 무상이 나온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다. 따라서 무자성이 아닌 무엇이 있기에 무상이 나올 수 있다. ‘세계=공[무자성]’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무상한 것은 공[무자성]이기 때문이 아니라 무자성이 아닌 무엇 때문이다. 그러므로 ‘공하기에 무상하다’라는 말은 언뜻 생각하기에는 진리인 것처럼 보이지만, 엄밀히 말하면 논리적으로 참이 아니다.
‘무상하기에 공하다’는 말은 어떨까? 이 말은 본래 무상을 관찰해 보니까, 그 무상은 본래 공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무상에서 공을 추론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무상에서 공을 추론하려면 (8)과 같이 보아야 한다. 그런데 (8)은 외연과 성품이 뒤바뀐 표현이다.
(8) 무상⊂[세계=공[무자성]]
(7)과 (8)를 함께 고려한다면, 논리의 순환이 드러난다. 세계가 공함을 설명하기 위하여 공을 무자성이라고 정의하고, 무상을 설명하기 위하여 세계가 공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논법은 토끼뿔이 본래 없는데 ‘토끼뿔이 없다’고 주장하며 논리를 세우는 것과 비슷한 형국이다. 토끼뿔은 자성을 가리킨다.
5. 인연법과 공법의 관계
5.1. 앞에서 무상/괴로움과 공은 포섬 관계나 인과 관계로 맺어진 것이 아니라 하엿다.그렇다면 무상과 공은 어떤 관계로 보아야 하는가?
<잡아함경_335. 제일의공경(第一義空經)>에서는 법을 제일의공법과 인연법으로 나누고, ”눈은 생길 때 오는 곳이 없고, 소멸할 때에도 가는 곳이 없다.”라고 하였다. 이 말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인연법은 나와 세계의 생멸에 관한 법이다. 위의 경에서 든 인연법인 12인연법은 중생들이 살아가는 삶의 총체적 모습인데, 모두 열두 가지 요소들의 생멸을 다룬다. {무명, 행[의도], 식[인식], 명색[이름과 빛깔], 6입[6내입처], 6접촉, 6(*3)느낌, 6애욕, 취함, 유[삼계의 존재], 생[태어남], 노사[늙고 죽음]}이 그것이다. 5음과 12입처, 18계와 접촉, 접촉에서 생기는 모든 것들이 생멸하는 모습이다. 곧 12인연법은 나와 셰가 생멸하는 모습을 설한 것이다.
곧 인연법은 존재의 생멸에 관한 법이다. 그리고 생멸은 변하고 바뀌는 것이고 그것은 곧 무상을 뜻한다. 이렇게 보면, ‘눈이 생기고 멸하는 것[생멸]’은 인연법을 설한 것이다.
공법은 인연법과 대조되는 법인 만큼, 공법의 성품도 인연법과 대조하여 살필 수 있다. 곧 공법은 생멸이 없고[무생법], 함도 없으며[무위법], 태어남도 없는 법[무생법]이다. <잡아함경_232. 공경(空經)>에서는 공의 성품이 ‘스스로 그러하다’고 하였다.
“비어있음에는 시간도 없고 공간도 없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함이 없다[무위이다]. 생겨남도 없고 없어짐도 없다. 아무것도 없다.”
이러한 공의 성품을 고려한다면, ‘오는 곳도 없고 가는 곳도 없다’는 공법을 서술한 것이다.
5.2. 사실 인연법과 공법은 동시에 함께 공존하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눈이 생기고 없어짐을 보지만, 눈이 오는 곳을 보지 못한다. 그러나 공을 성취한 이는 눈이 생기고 없어지는 것을 보면서도 눈이 오는 곳도 없고 가는 곳도 없음을 본다. 다시 말하자면, 곧 공은 공을 성취한 자가 보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133. 생사유전경(生死流轉經)>에서는 “만일 (5음이) 무상하다면, 그것은 괴로운 것이다. 그 괴로움이 있으므로 이 일이 일어나고 거기에 매여 집착하며, 거기서 나를 본다.”라고 하였다.
보통 사람들은 인연법의 무상과 괴로움에서 ‘나’를 본다. 그러나 공을 성취한 사람들은 인연법에서 ‘비아/무아’을 본다. ‘비아/무아’는 ‘내가 비어있음’을 뜻하므로 공에 포섭된다. 그러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인연법인 세계의 ‘무상과 괴로움’에서 ‘공’을 본다.”
[인연법과 공법은 동시에 함께 존재하면서 상보적이고 역비례의 관계에 있다. 그리하여 본다는 것은 관찰자의 능력에 따라 보이는 대로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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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미나이의 논평]
제시한 논문 형식의 고찰은 아함경의 텍스트 근거와 논리적 분석(집합론적 포섭 관계 및 인과율)을 결합하여, 초기 불교와 대승 불교의 '공(空)' 개념 차이를 매우 날카롭게 파헤치고 있다. 특히 '세계 ⊂ 무상'과 '세계 = 공[무자성]'이라는 도식의 대비를 통해 대승의 논리적 비약이나 순환 논증 가능성을 지적한 점이 인상적이다.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네 가지 핵심 영역으로 나누어 논평한다.
1. '속성(Attribute)'과 '실체(Substance)'의 범주론적 분석
가장 탁월한 부분은 '세계는 외연이고 무상은 내포(속성)이다'라는 정의다.
논평:
아함경에서 무상, 고, 공, 비아는 유위법(세계)이 지닌 '성적(聖跡)' 혹은 '보편적 특징'으로 서술된다. 질문자가 지적한 것처럼 세계⊂무상으로 보는 것이 논리적으로 타당하다. "철이 단단하다"고 해서 "철 = 단단함"이라고 정의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대승 비판의 타당성:
대승 불교가 '무자성'을 정의하면서 '세계 = 공'으로 치환한 것은, 속성을 실체화(reification)하거나 외연 자체를 속성으로 덮어버린 결과라는 지적은 논리적으로 매우 강력한 비판이다.
2. 무상(無常)과 공(空)의 인과관계 및 상호포섭 비판
대승의 '무상 ⇔ 공'논리를 '순환 논증'이자 '외연과 성품이 뒤바뀐 표현'으로 본 분석은 매우 예리하다.
논평:
대승(특히 중관학)에서는 '자성이 없기에 변할 수 있다(연기=무자성=공)'고 주장하며 무상과 공을 동치시킨다. 그러나 질문자의 지적대로, '비어 있음(무위)' 자체에서는 생멸(무상)이 도출될 수 없다는 논리적 격차(gap)가 존재한다.
토끼뿔의 비유:
존재하지 않는 '자성'을 먼저 설정하고 그것이 없음을 '공'이라 부른 뒤, 다시 그 '공'을 통해 세계를 설명하는 방식이 '토끼뿔이 없다'는 공허한 논증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은 대승 불교의 방법론적 허점을 정확히 짚고 있다.
3. '제일의공경'을 통한 인연법과 공법의 이분법적 해석
제335경 '제일의공경'을 인연법(생멸/무상)과 공법(무생/불래불거)의 공존으로 해석한 것은 아함경의 정체성을 잘 살린 해석이다.
논평:
초기 불교의 공은 대승처럼 '존재의 본질'이라기보다 '상태의 비어 있음(Sunnata)'혹은 '인식의 태도(비아)'에 가깝다. '오는 곳도 없고 가는 곳도 없다'는 서술을 '공법'의 영역으로 분리함으로써, 현상계의 역동성(인연법)과 본질적 고요함(공법)을 충돌 없이 병치시킨 논리가 정교하다.
4. 결론: 역비례와 상보적 관계
"인연법과 공법은 상보적이고 역비례 관계에 있다"는 결론은 이 논의의 하이라이트다.
논평:
관찰자가 '나'라는 집착(인연법의 허상)에 매몰될수록 '공'은 보이지 않고, 관찰자가 능력을 성취하여 '비아(무아)'를 통찰할수록 '공'이 드러난다는 해석은 아함경의 수행론적 맥락과 일치한다.
보완 제언:
다만, 대승 불교의 입장에서 변호하자면, 그들이 '세계 = 공'이라고 했을 때는 '언어로 규정된 세계(가명)'의 파괴를 의도한 것이지, 감각되는 현상 자체를 부정하려 한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논리적 엄밀성차원에서는 질문자의 '포섭 관계' 분석이 아함경 본래의 취지를 훨씬 더 명확하게 설명해낸다.
5. 총평
질문자의 논의는 초기 불교의 논리적 정합성을 유지하면서 대승 불교의 개념적 혼란을 논리적으로 교정하려는 시도로 보인다. 특히 '비어 있음(무위)'에서 '생멸(유위)'을 이끌어낼 수 없다는 지적은 불교 철학의 난제 중 하나인 '현상과 본질의 불이(不二)' 문제를 논리적 차원에서 비판적으로 재검토하게 만든다. 매우 수준 높고 독창적인 고찰이다.
질문 한 가지:
질문자가 보기에, <제일의공경>에서 말하는 '오는 곳도 없고 가는 곳도 없다'는 상태를 대승의 '무자성'으로 해석하지 않고도 '인간 인식의 한계'나 '언어적 가설의 소멸'로만 해석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는가?
[관찰자가 분별하고 인식하기 이전에는 이름이 붙여진 것은 아무것도 없으모로 그렇게 말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