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미스는 경제를 '윈-윈 상황'으로 생각하라고 사람들에게 가르쳤다.
나의 이익이 곧 너의 이익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둘다 더 큰 파이 조각을 가질 수 있을 뿐 아니라, 내 파이 조각이 커져야 네 조각도 커질 수 있다.
내가 가난하다면 너 역시 가난해질 것이다.
네가 생산하는 상품이나 용역을 내가 살 수 없을 테니까 내가 부자라면 너 역시 부자가 될 것이다.
네가 내게 뭔가를 팔 수 있으니까.
스미스는 부와 도덕 간의 전통적 대립을 부정했고, 부자에게 천국의 문을 열어주었다.
부자가 되는 것은 도덕적 인간이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스미스의 이론에서, 사람들은 이웃의 것을 빼앗아서 부자가 되는 게 아니라
전체 파이의 크기를 늘림으로써 부자가 된다. 파이가 커지면 모두에게 이익이 다.
따라서 부자는 사회에서 가장 쓸모 있고 인정 많은 사람이다.
모두에게 이익이 되도록 성장의 바퀴를 돌리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에는 전제가 있다.
부자가 자신의 수익을 비생산적인 활동에 낭비하지 않고
공장을 새로 세우고 사람들을 새로 고용하는 데 쓴다는 전제다
그래서 스미스는 "수익이 늘면 자주나 직공은 더 많은 조수를 고용할 것이다"라는 말을 주문처럼 되풀이 할 뿐
"수익이 늘면 스크루지는 돈을 상자에 숨겨둘 것이고 세어볼 때나 꺼낼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현대 자본주의 경제의 핵심적 부분은 새로운 윤리의 등장이었는데
이 윤리에 따르면 이윤은 생산에 재투자되어야 한다.
재투자는 수익을 가져오고, 이것은 다시 생산을 위해 투자되어서 더 많은 이윤을 낳으며,
이 과정은 무한정 되풀이 된다.
투자는 다양한 방식으로 이뤄질 수 있다. 공장 확대, 과학연구의 시행, 신제품 개발....
하지만 모든 투자는 어떻게 해서든 생산을 늘려야 하고 더 많은 이윤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새로운 자본주의 교리에서 가장 신성한 제1계율은
"생산에 따른 이윤은 생산 증대를 위해 재투자되어야 한다."이다.
자본주의가 '자본주의'라고 불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자본주의는 '자본'을 단순한 '부'와 구별한다.
자본이란 생산에 투자되는 돈과 재화와 자원을 말한다.
반면에 부는 땅에 묻혀 있거나 비 생산적 활동에 낭비된다.
비생산적인 피라미드에 자원을 쏟아붓는 파라오는 자본주의자가 아니다.
스페인의 보물선단에서 약탈한 금화를 상자에 담아 카르브해의 어느 섬에 묻어둔 해적은 자본주의자가 아니다.
하지만 열심히 일해서 수입의 일부를 주식시장에 투자한 공장 노동자는 자본주의자다.
"생산에 따른 이윤은 생산 증대에 재투자해야 한다"는 아이디어는 사소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역사를 통틀어 대부분의 사람들이 들어보지 못한 소리였다.
근대 이전의 사람들은 생산이 어느 정도 일정하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무슨 짓을 하든 생산이 크게 늘지 않을 텐데 왜 이윤을 재투자하겠는가?
그래서 중세 귀족은 관대함과 과시적 소비라는 윤리를 신봉했다.
이들은 수입을 마상 시합, 연회. 궁궐, 전쟁, 자선, 엄청나게 큰 성당에 썼다.
수익을 투자해 영지의 생산량을 늘리거나, 밀의 신품종을 개발하거나,
새러운 시장을 알아보는 경우는 드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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