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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언약은 지성소의 믿음이다
(히9 하늘의 것으로 땅의 것을 폐할 수 없다)
1 첫 장막은 세상에 속한 성소이다 (첫 언약)
첫 언약은 원어로는 첫째것이라는 뜻이다. 첫째것은 세상에 속한 성소이고 등잔대, 상과 진설병이 있는 성소이다.
그리고 둘째 것은 지성소로 금향로, 언약궤, 싹난 지팡이 두 돌판, 영광의 그룹이 있는 곳이다. 히브리서는 이렇게 첫째 것과 둘째 것을 비교하고 있다. (히9:1~5)
2 둘째 것은 하늘에 속한 성소이다 (새 언약)
둘째 것은 대제사장만 홀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즉 그외에는 어느 누구도 들어갈 수 없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첫 장막이 있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로 갈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히9:6~8)
성소는 이와 같이 땅에 속한 부분과 하늘에 속한 부분 두가지를 모두 가지고 있다.
바로 이 성소는 하늘 성소를 보고 그대로 만든 곳이다(출25:8,9)
3 세상에 속한 성소를 알아보자
# 분향단 (기도를 상징한다)
아론이 아침 저녁으로 향기로운 향을 여호와께 드리는 곳이다. 이 제단은 여호와께 지극히 거룩하다 (출30:7~10)
그리고 이 향기는 성도들의 기도를 상징한다 (계5:8)
# 금촛대 (교회, 성령을 상징한다)
금촛대에 불을 켜기 위해서는 순결한 올리브 기름만 사용할 수 있다. 저녁부터 아침까지 불을 켜 놓는데 대대로 영원한 규례이다. (레24:2,3)
금 촛대는 교회를 의미하고(계1:20) 여호와의 일곱 영 즉, 성령을 의미한다.(사11:2) 성령과 교회는 땅에 속한 것이다.
# 진설병 (이스라엘을 상징한다)
떡 열두개의 빵을 구워 안식일마다 진설하는 것은 이스라엘을 위한 영원한 언약을 말한다. 이 빵들은 지극히 거룩하며 영원한 규례이다. (레24:5~9)
이와 같이 땅의 성소, 첫 언약에 속한 것은 교회와 성령, 기도, 이스라엘이다.
4 하늘에 속한 지성소
지성소는 오직 대제사장만 성소를 통해 들어갈 수 있다.
# 대제사장(예슈아를 상징한다)
대 제사장은 판결 흉배 즉, 이스라엘 열두지파를 흉패에 붙이고 그 안에 우림과 둠밈을 넣어 판결하는 일을 한다. 또한 이마에 여호와께 성결이라 쓰고 모든 이스라엘 자손의 거룩함에 대한 책임을 지는 자이다. (출28:15~38) 그래서 예슈아께서 온 세상의 죄를 구속하기 위해 생명을 드리신 것이 이해된다.
또한, 모세가 여호와의 음성을 들은 곳은 증거궤 위 속죄소 위의 두 그룹 사이에서이다.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은 성소중에 가장 거룩한 지성소이며 그 중에 언약궤이다. 그러므로 언약궤는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보좌라고 할 수 있다 (민7:89)
# 금향로: 대제사장은 금향로 위해 속죄의 향을 피움으로 하나님의 임재 가까이 갈 수 있었다. 즉, 속죄 사역이 새 언약(하늘)에 속함을 알 수 있다.
# 언약궤: 언약궤는 하나님의 거룩하고 영원한 보좌이므로 여호와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새 언약(하늘)에 속함을 알 수 있다.
# 만나를 담은 항아리
만나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을 상징하며 예슈아의 살, 자기 자신을 의미하기도 한다. 또한 이기는 자에게 감추었던 만나를 먹이실 거라 말씀하셨으므로 영원한 생명에 대한 감추어진 말씀과 예슈아 자신이 새 언약(하늘)에 속함을 알 수 있다.
# 싹난 지팡이: 아론의 지팡이는 아론 제사장직의 영원한 규례를 상징한다. 놀랍게도 새 언약 안(하늘)에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들어있다. 이를 통해 새 언약에서도 아론 제사장직이 여전히 계속될 뿐아니라 부활도 함께 내포되었음을 알 수 있다.
# 십계명의 두 돌판: 두 돌판은 토라 전체를 대표한다. 토라가 새 언약(하늘)에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 영광의 그룹들: 천사들은 하나님의 보좌를 에워싸고 있다. 또한 두 그룹은 에덴 동산의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막고 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보좌로 이르는 길이 새 언약(하늘)에 들어있음을 알 수 있다.
지성소는 하늘로 가는 길이라 볼 수 있다. 하늘과 땅을 연결해주는 곳이라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옛언약과 새언약을 나누는 것은 의미가 없다. 오히려 믿음의 단계라 볼 수 있다.
5 개혁할 때가 언제인가?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이다. 육체의 예법이 개혁할 때까지 있는 것이고 개혁이후에는 창조에 속하지 않은 장막에 예슈아께서 대제사장이시다. 메시아 왕국 때에는 예슈아께서 왕으로 오시고 여전히 아론 자손이 제사장 역할을 하므로 이 개혁의 때는 새 하늘과 새 땅의 때임을 알 수 있다. (히9:9~12) 이것을 통해 지성소는 예슈아의 죽으심과 새하늘과 새땅이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6 칼봐호메르의 논증법 (점증법)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저것은 얼마나 더 사실이겠느냐'의 논증법이다.
예슈아께서 하나님께 점(죄)이 없는 자신을 성령을 통해 드리셨으므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위해 일하지 않던 우리를 일 할 수 있도록 우리의 양심을 씻으실 수 있다. 이것이 사실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희생제물의 피가 우리의 육체를 정결하고 깨끗하게 하는 것이 사실이어야 한다. 바로 이것이 사실이라면 저것은 얼마나 더 사실이겠는가 말이다.(히9:13~15)
성소가 사실이라면 지성소는 얼마나 더 사실이겠는가?
옛언약이 사실이라면 새언약은 얼마나 더 사실이겠는가?
이땅이 사실이라면 새하늘과 새땅은 얼마나 더 사실이겠는가?
즉, 결코 전자와 후자는 대립될 수 없다 점증될 뿐이다.
후자는 반드시 전자를 내포해야 한다. 전자가 없이 후자는 있을 수 없다. 성소가 없이 지성소만 있을 수 없는 것과 같다.
랍비들은 이렇게 말한다. "오는 세상에서의 모든 삶보다 현 세상에서의 회개와 선행의 한 시간이 더욱 아름답다" 왜 이렇게 말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현 세상이 우리에게 더욱 실제처럼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이 땅에서 회개하고 선행한다면 반드시 더욱 놀라운 결과로 다가올 것이다. 우리의 결과를 바꾸는 키는 이 땅에 있기 때문이다.
7 첫 언약 때 범한 죄를 사하려고 죽으셨다.
예슈아께서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다. 바로 첫 언약때 지은 죄를 사하시려고 죽으셨다. 즉, 지성소의 신앙이 아닌 아직, 성소의 신앙, 어린 아이의 신앙으로 지은 죄를 사하시기 위해 죽으셨고 믿음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 영원한 기업을 얻는 자가 되게 하시려고 죽으셨다. (히9:15~17) 어린 아이 신앙은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못하는 단계를 말한다. 토라의 깊은 의미를 깨닭아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는 단계로, 지성소의 믿음으로 성장하지 못한 것이다.(히5:13,14)
새 언약의 중보자로서 아버지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길을 열어놓으셨다. 그러므로 휘장이 찟어진 표적을 보이신 것이다. 이와 같이 새언약은 영원한 나라로 연결된다.
8 예슈아께서 단번에 제물이 되셨다
예슈아께서 죽으시고 당연히 그림자 성소에 들어가신 것이 아니라 대제사장으로서 바로 하늘 성소로 들어가셨다. 그리고 자신을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다. 이를 통해 예슈아의 속죄는 구약과 신약을 모두 포함하는 온 세상 죄를 대속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죄를 없이 하려고 오셨기 때문에 다시 오실 때는 죄가 없는 예슈아를 바라는 자들을 위해 오실 것이다. (히9:24~28)
단번에 드리신 것은 사람이 한번 죽는 것은 정해진 것이기 때문이다
9 지식을 받은 후 고의로 짓는 죄는 속죄함이 없다
알지 못해서 짓는 죄는 속죄함이 있으나 고의로 죄를 짓는 사람을 여호와를 비방하는 자이고 말씀을 멸시하고 토라를 파괴하는 자이므로 속죄함이 없다.(민15:28~31)
마찬가지로 신약에서도 성령과 진리와 예슈아를 알면서 고의로 죄를 짓는 자들의 형벌은 예슈아를 짓밟고 그 언약의 피를 부정하게 생각하고 성령을 모욕하는 것이므로 얼마나 더 큰 형벌이 있겠는가? 예슈아께서 죽으셨으므로 무조건 죄가 씻어진다고 가르치는 것은 죄를 기만하게 하는 무서운 죄이다. (히10:26~29)
10 정말로 예슈아께서는 성경적 희생 제물이 될 수 있는가?
# 코셔 동물이 아니시다
토라는 레위기에서 희생 제물이 반드시 소나 양, 염소, 비둘기 등 흠이 없는 정결한 동물이어야 한다. 이것은 분명 토라의 문자적인 요구사항이다. 하나님께 드리는 희생제물은 반드시 흠이 없어야 하고, 코셔여야 하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동물이어야 한다. 인간은 굽이 갈라지지도 않았고 되새김질을 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희생제사 규례에 의해 인간은 희생제물이 될 수 없다
# 성전에서 드려지지 않았다.
토라는 성경적 희생제사가 반드시 성전 안에서 드려져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예슈아께서는 예루살렘 성문 밖에서 고난 받으시고 죽으셨다.
토라에서는 수소의 고기와 가죽과 똥을 진 밖에서 불사르고 그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로 들어가는 것처럼 예슈아께서도 성문 밖에서 고난을 당하셨다고 말한다. (출29:14 히13:11,12)
그러나 예슈아께서는 어린 양이라고 말한다. 붉은 암소를 제외하고는 모든 희생제사는 성전에서 드리라고 말씀하셨다.
# 코셔법으로 도축되지 않으셨다
희생제물은 반드시 적합한 방법으로 도축되야 한다. 토라는 구체적인 도축 방법을 기록하고 있는데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희생 동물의 목을 베고 대야에 피를 받아서 제단에 그 피를 뿌린다.
도축자는 최대한 동물의 고통을 없애려고 애쓰고, 그 동물이 고통이나 불안을 겪지 않도록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유대법에는 만약 동물이 적합하지 않은 도축(야만적인 도살, 칼이 미끄러짐)으로 인해 고통을 당한다면, 그 희생제사는 무효로 선언된다.
희생제사를 드리기 전이나 드리는 동안의 어떤 손상이나 고통, 아픔, 상처 혹은 기타 상해를 입어도 그 희생제사는 무효가 된다. 만약 제사장이 양을 잡고 그 털을 잡아 뜯고, 채찍으로 때리고, 못을 박고, 고통스럽게 매달아 놓는다면, 그 양은 더 이상 희생 제물로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 될 것이다.
할랄 도축의 잔인성(무슬림)
동맥, 정맥, 식도와 기도는 자르되 척수는 자르지 않는다. 몸의 피가 전부 빠져나갈 때까지 목이 몸에 붙어있어야 한다는 규율 때문이다. 공포심에 질린 소는 목에 칼이 들어오는 순간부터 마지막 피가 몸에서 빠져나가는 순간까지 고정틀에 묶여 살기 위한 발버둥을 쳐야 한다.
목을 베는 과정에서 피부, 근육, 기도, 식도, 동맥, 정맥, 신경원, 작은 신경들이 전부 절단되면서 엄청난 고통을 느낀다는 것이다. 연구에서 위원회는 평균적으로 양은 5초에서 7초, 성체 소의 경우 22초에서 40초 가량, 길게는 2분까지 고통을 느낀다는 결과를 내놓았다.
2009년 뉴질랜드에서 행해진 실험에서는 송아지의 경우 목이 잘린 2분 후까지 고통을 느끼는 것이 뇌파를 통해 감지되었다.
# 제단에서 드려지지 않았다.
성경적인 희생제사는 반드시 아론 제사장들에 의해 수행되야 한다.(레5~7장)
예슈아의 십자가 처형은 하나님의 제사장들에 의해서가 아닌, 심지어 유대인도 아니고, 우상숭배자들인 로마인들의 손에 의해 일어났다.
그들은 주님을 처형한 것이지 희생제사로 드린 것이 아니었다.
# 인신 제사를 금하셨다
여호와께서는 인신 제사를 가증한 것으로 여기신다. 토라는 이것을 금한다. 인신제사는 아버지께서 명령하시지도 심지어 생각조차 하지 않은 가증한 일이라고 말씀하신다(렘7:31)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의 아들을 희생 번제로 드리라고 명하셨다. 그러나 결론은 하나님께서 이삭을 대신하여 희생제물로 적합한 양을 준비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을 통해 첫 아들은 하나님의 것이며 동물로 대속해야 함을 실질적으로 가르쳐주셨다.
11 문자적인가 비유적인가?
토라는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희생 제사가 무엇인지, 알려주시기 위해 엄격한 법들을 재정하셨다.
정확하고 분명한 답은 예슈아는 결단코 성경의 문자 그대로의 속죄제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번제, 소제, 화목제도 아니고 속건제물도 아니다. 황소도 어린 암소도 숫양도 암양도 염소도 아니고 산비둘기도 아니다.
그분은 제사장에 의해서 도축되지도 않았고 성전에서 죽으신 것도 아니며, 신체적으로 흠이 없지도 않으셨고 죽음의 방식 또한 자비롭지 못했다.
그러나 여기서 핵심 단어는 ‘문자적으로’이다.
성경의 문자적인 해석과 비유적인 해석의 차이점을 배워야한다.
세례 요한은 예슈아를 보고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비유들이 필요한 이유는 하늘의 것을 땅에서 표현하기 위함이다. 마치 거룩한 영혼을 위해 거룩한 삶을 육체가 살아야 하는 것 처럼 말이다. 이는 절제를 통해 영혼의 경건을 훈련하기 위해 육체적으로 과식하지 않는 것과 같다.
12 왜 예슈아께서 죽으셔야 했을까? 왜 의인이고통을 당하는가?
성경은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이며 눈에는 눈, 이에는 이와 같은 되갚음의 원칙 즉 하나님 자신의 엄격한 법의 기준에 따라 공의를 집행하신다는 개념 위에 세워져 있다. 이 공의 시스템에 따라서 의인은 보상을 받고 악인은 벌을 받는다. 하나님은 선한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상을 주시고 죄를 짓는 사람들에게는 벌을 내리신다. 이러한 권선징악의 논리는 토라와 선지서와 성문서에 분명하게 보여진다.
그러나 문제는 인생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것이다 ~~
예레미야는 악인이 형통하고 반역자들이 모두 평안한 이유에 대해 여호와께 묻고 있다(렘12:1)
또한 시편기자는 악인이 형통하여 질투하다고 실족할 뻔했다고 말하며 악인은 항상 평안하고 부유해지는데 자신은 종일 재난당하고 아침마다 벌을 받는다고 하소연한다. (시73:2~14)
어떻게 공의로운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두시는 걸까? 그렇다면 과연 누가 의롭게 살고 죄를 끊으려 하겠는가?
이것만 보아도 하나님은 우리가 이 땅에서 잘먹고 잘살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공의 자체를 사랑해서 사는 사람이 되길 원하시는 것 같다. 그렇지 않으면 다윗의 말대로 실족할 수 있을 것이다.
13 죽음이 인생의 끝이 아니다.
이에 대한 바리새인의 가르침은 죽음이 인생의 끝이 아니라는 것이다
죽은 자는 사후에 행한대로 벌을 받는다. 의인은 보상을 받는 반면 악인은 게헨나(지옥)에서 벌을 받는다.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후에 모든 것을 공평하게 만드실 것이다
탈무드는 “여호와께서 앞으로 오는 세상에서 유업을 주시기 위해 의인들에게 현 세상에서 고난을 주신다”고 말한다.
14 의인은 자신의 죄로 고난받지 않는다
현인들은 고난이 죄로부터 말미암는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의인은 누구의 죄로 고통을 받는가?
의인은 자신의 죄로 고난 받지 않는다. 그들은 의인이기 때문이다.
만약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면, 분명 다른 사람의 죄일 것이다.
죄의 값은 사망이다.
만약 의인이 죽어야 한다면 다른 사람들의 죄 때문일 것이다.
15 의인의 고난
비느하스는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을 가짐으로 이스라엘 자손을 속죄하였다. 즉, 그의 의로운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이 속죄를 얻게 된 것이다. (민25:13)
이와 같이 예슈아께서는 우리의 죄로인해 슬퍼했고 고난당했고 찔리셨고 상하셨다. 그분의 고난으로 인해 우린 나음을 입고 회복했다. 의로운 예슈아께서 속건제물로 드려지셨기에 그 후손들은 정결함을 입었다. 이와 같이 의로운 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속죄할 수 있다면 전혀 죄가 없이 완전히 의로우신 예슈아의 죽으심은 얼마나 더 많은 속죄를 가져오겠는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정결케 되며 의롭게 되겠는가? 이것이 바로 예슈아께서 죽으신 이유이시다. 예슈아 메시아를 바라는 자를 정결케하고 거룩케하고 살아계신 아버지를 위해 일하게 해서 영원한 기업을 얻게 하는 것 말이다.(사53:4~11)
샤밧 예배:토요일 오전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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