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쾌적한 사회의 불쾌함>
구마시로 도루, 생각지도
하지만 어딘가 부족하고 의사소통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들에게 이 사회는 결코 일하기 쉬운 세상이 아니다.
물론 그런 사람들도 일정한 수입을 얻는다면 질 높은 서비스를 누릴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돈을 벌기 위한 일자리를 찾는 일이다.
이 사회 안에서, 그들이 마음 편히 일할 수 있는 곳은 과연 어디에, 얼마나 남아 있을까?
내가 기억하기로는 쇼와 시대의 일본에서는 오늘날 일 잘하는 사람들이 차지하는 일자리 중
적지 않은 비율이 어딘가 부족하고 의사소통이 서툰 사람들로 채워져 있었다.
레스토랑 종업원, 역무원, 공무원과 같은 직업군과 그들이 제공하는 서비스의 질 역시 들쑥날쑥했고,
회사 운영도 지금보다 훨씬 비효율적이었다.
‘일을 잘하지 못해도, 의사소통 능력이 떨어져도 일할 수 있는 자리의 다양성’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1900년대 초중반의 일본과 지금의 다른 나라가 오히려 더 살기 좋은 사회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34
어린 시절 발달장애로 진단받고 적절한 치료와 교육을 받은 뒤,
성인이 되어 자신의 특성에 딱 맞는 일을 찾아 배려받는 환경에서 일하게 되는 경우다.
이는 분명히 한 개인을 구제한 일이며,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의료와 복지 서비스는 대체로 이와 같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하지만 이런 구제 방식에는 적어도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이러한 구제의 방향성 자체가 근로자에게 매우 높은 수준의 능력을 요구하는 사회,
즉 ‘누구나 활약해야만 하는 사회’를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 정신장애를 앓는 사람이나 거리에 나앉은 노숙자 등 어떤 경우든,
현재의 구제는 사회가 추구하는 기본 노선과 같은 방향으로만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가능한 한 경제적으로 자립하고,
현대 사회인이 지향해야 할 바람직한 모습으로 자신의 장애와 생활을 조정하도록 구제자에게 기대하는 것이다.
실제로 의료나 복지제도에는 ‘자립 지원’이라는 말이 자주 따라붙는데,
이를 뒤집어보면 의료와 복지제도가 개인에게 기대하는 바가 명확히 드러난다.
즉, 경제적으로 자립하며, 현대의 질서에 융화되는 인간이 되는 것. 그 외의 방향은 제도 안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의료와 복지제도는 분명 많은 사람을 구제하고 있다. 39
우리는 틀림없이 건강하고 청결하며 질서 정연한 사회에서 태어나,
20세기 이전 세대보다 훨씬 자유롭고 수준 높은 생활을 누리고 있다.
하지만 그 '수준 높은 삶'이 진보의 상징에서 일상의 표준으로 바뀌고,
더 나아가 마땅히 지켜야 할 도덕으로 내면화되면서,
오히려 우리의 인식과 행동을 속박하기 시작한 것은 아닐까?
동시에 그 수준 높은 삶을 유지하기 위한 거리와 인터넷 인프라가 우리의 인식과 행동을 통제하고,
은밀히 우리를 관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58
20세기에는, 지금이라면 ADHD로 진단받아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아이가 우리 주변에 무수히 존재했다.
수업에 집중하지 못하는 아이, 가만히 있지 못하는 아이는 어디에나 있었고,
그러한 아이에게는 체벌이 내려지기도 했다.
ASD도 마찬가지다. 교실에서는 바보라 놀림받거나 분위기 파악을 못 하는 아이를 흔히 볼 수 있었고,
때때로 문제가 일어나기도 했지만 이를 치료해야 할 병으로 보는 사람은 없었다.
어른들의 세계에서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눈치가 없는 점원, 성미가 까다로운 장인이나 직공, 꾸지람을 자주 듣는 가족과 친척 중에 발달장애는 널려 있었다.
이런 사람들은 때때로 불평을 듣거나 무시당하긴 했어도, 그들이 사회에 존재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는 않았다.
이들에게 적합한 일자리도 아직 그런대로 남아 있었다.
지금의 발달장애와 비슷한 특징을 지닌 사람들이 사회에 두루두루 존재하고,
이들에게 적합한 직업군도 꽤 다양하게 있던 사회에서는 굳이 '발달장애'라고 진단 내리고 치료할 필요성이 적었다.
또 그런 사회에서는 발달장애를 의료의 문제라고 인식하는 통념과 습관이 퍼지기 어려웠다.
1960~70년대에 연구자들이 아무리 애써도 발달장애가 사회적 붐을 일으키지 못했던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20세기 말부터 상황은 급변하기 시작했다.
인적 유동성이 높아지면서 대부분의 직업군에서 의사소통 능력이 중요해졌고,
1·2차 산업이 3차 산업에 밀리고 IT화가 진행되자 사회에서는
ADHD와 ASD의 특징이 장점으로 활용될 만한 영역이 좁아졌다.
이로써 ADHD와 ASD가 핸디캡으로 인식되기 쉬운 상황이 온 것이다.
제일 먼저 반응한 이들은 정신과 의사들이었다.
새로운 사회의 새로운 부적응에 '발달장애'라는 개념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정신과 의사들은 강연을 듣고 전문 서적을 읽으며 발달장애를 열심히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마음의 병으로는 잘 설명되지 않던 환자들이 발달장애라는 이름 아래 설명되기 시작했고 관련 자료도 점차 쌓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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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라면 발달장애라고 진단받아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사람이 학교와 직장에 무수히 존재했지만,
어느 누구도 이에 위화감을 갖지 않았다.
그러나 지난 30년 사이 사회는 점점 더 질서 정연하고 효율적으로 바뀌었다.
어딜 가든 수준 높은 의사소통 능력이 요구되었고,
1장에서 다루었듯 학생과 사회인이 넘어야 하는 벽 또한 매우 높아졌다.
발달장애가 주목받기 시작한 이유는 이러한 사회 변화 속에서
높아진 질서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제도적으로 다뤄야 할 필요성이 커졌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70
지난 30년 사이 사회는 점점 더 도덕적이 되었다.
사람들은 사소한 법규를 어기는 일에 주저하게 되었고,
타인의 작은 무례함과 불쾌한 행동에도 매우 민감해졌다.
동시에 자신의 실수나 남에게 폐를 끼치는 일을 수치스럽게 여기게 되었다.
습관과 통념이 이렇게 바뀌면서 부모와 교사는 아이를 더없이 예의 바르고 차분한 존재로 길러야 하는 책임을 지게 되었다.
그것도 체벌에 의존하지 않고 말이다.
요즘 아이들은 반드시 예의 바르게 행동해야 한다.
초등학생만 되어도 학교나 공원, 아동센터에서 어른들이 기대하는 대로 도덕적이고 비폭력적이며, 어디서나 튀지 않는 태도를 취한다.
그러나 모든 아이가 이런 고도화된 질서에 완벽히 적응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른들이 기대하는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아이들도 분명 있다.
이런 아이들이 질서 정연한 세계의 울타리 밖으로 밀려날 때,
현대의 부모나 교사가 대응하기 어려운 아이들을 다시 질서 안으로 돌려보내야 할 때,
다시 그들을 사회의 틀 안으로 되돌려놓는 역할을 담당하는 곳이 오늘날의 의료와 복지 서비스인 것이다.
예전에는 아이가 잘못을 저지르면 경찰이 출동하는 일이 많았지만,
지금은 앞서 살펴본 것처럼 미성년자의 범죄가 현저히 감소했다.
그 대신 발달장애 선별 검사가 충실히 시행되고 이에 따른 진단 및 치료를 받는 아이가 늘어났다.
의료와 복지 서비스가 감당해야 할 범위는 확대되고 있다. 73
이러한 흐름의 연장선상에서 2000년대 후반부터는 '성인 발달장애'가 부각되기 시작했고, 사회적 인식도 빠르게 확산되었다. 고도화된 질서에 적응해야 하는 것은 아이들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인 역시 일상과 직장에서 그 질서에 맞지 않으면 의료와 복지의 개입 대상으로 자연스럽게 편입된다.
아름다운 거리, 쾌적한 직장, 안전하고 편안한 삶은 모두가 질서를 지켜야만 유지된다. 이 질서의 벽이 높아질수록 행동과 태도를 그 틀에 맞추기 어려운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생겨난다. 그렇게 질서 밖으로 밀려난 사람들을 다시 재배치하는 일, 바로 그것이 현대의 의료와 복지 서비스가 짊어진 새로운 역할이다. 75
질서와 도덕이 완벽하게 내면화될수록 개인은 ‘실수하면 안 된다’, ‘남에게 폐를 끼치면 안 된다’는
강박과 자기검열에 시달립니다.
조금만 궤도에서 벗어나도 심한 열등감과 고독에 빠지게 됩니다.
이런 사회가 쾌적한 사회, 표백 사회입니다.
오늘날 ADHD나 ASD(자폐) 진단이 급증한 것은 인간의 뇌가 갑자기 변해서가 아니라,
사회가 요구하는 '정상성의 기준'이 지나치게 높아졌기 때문입니다.
과거에는 '약간 산만하거나 독특한 개성'으로 공동체 안에서 흡수되던 기질이,
고도의 소통과 멀티를 요구하는 현대 자본주의 환경에서는 '치료해야 할 기능 결함'으로 전환된 겁니다.
첫댓글 청년학교 최예지 선생님 추천으로 읽은 책.
2장까지만 읽었는데, 책을 반납해야 하는 날짜가 되었습니다.
다시 빌려 마저 읽겠습니다.
연휴 덕에, 미뤘던 이 책을, 2장까지라도 간신히 얽었습니다.
목차를 보면, 과거의 무질서로 돌아가는 게 아닐 겁니다.
과거가 지니고 있던 여백과 관용의 원리를 지금 우리 사회 안에 재통합하자는 주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