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임 신부님 강론
공동체란 평상시에는 공동체의 도움이 필요함을 잘 느끼지 못한다. 그런데 무슨 일이 생기면 그 힘을 엄청나게 받게 된다. 이런저런 이유로 도움을 받게 될 때 내가 공동체에 속해 있음을 느끼게 되며 고마운 감정들이 생기게 되는 것 같다. 오늘 복음의 성모님과 엘리사벳 안에서도 공동체의 필요성과 소중함이 드러나는 것 같다.
성모님이 예수님의 잉태를 믿음으로 받아들였지만 불안하고 걱정되는 일들이 있었을 것이다. 아마 제일 마음에 걸렸던 게 요셉 성인이었을 것 같다. 성모님은 예수님의 잉태가 하느님의 뜻을 따른 일이지만 요셉 성인이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줄지 괴로웠을 것이다. 하느님께 기도하며 의탁하려고 했음에도 걱정과 두려움은 쉽게 가시지 않았을 것이다.
성모님은 걱정하다 엘리사벳을 찾아가게 된다. 그런데 전혀 뜻밖의 일이 벌어진다. 예수님의 잉태에 대해 일언반구도 안 했는데 엘리사벳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성모님을 맞아들인다. 성모님은 엘리사벳의 방문을 통해 큰 위안을 받고 내가 선택한 일이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 섭리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새롭게 깨닫게 된다.
우리의 삶도 그런 거 같다. 내가 닥친 일 속에서 걱정하고 두려워했던 것들이 공동체와 함께 하고 있을 때 쓸데없는 걱정들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혼자였으면 아마 어떤 것도 이겨내지 못하고 중심을 못 잡는 삶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 함께여서 안 해도 되는 걱정이었고, 그냥 하느님께 맡기면 되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함께라는 것은 되게 소중한 것 같다. 우리는 늘 나라는 인간의 한계에 부딪치고 있기 때문에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주는 것이 바로 이웃이고 동료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우리 서로가 힘이 되어 주는 동료, 옆에서 같이 보살펴 주는 이웃이 되어 줄 수 있을 때 우리 공동체는 하느님 나라를 담고 있을 것이다. 이제 귀찮은 일을 찾아다녀야 한다. 공동체 안에 같이 머문다는 것은 귀찮음을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일일 것이다.
이탈리아 성지 순례하면서 얻은 새로운 것이 있다. ‘이웃’을 우리말로 번역하면 내가 아는 사람이다. 그러나 이탈리아 성경은 어느 순간 누군가가 되었든 내가 다음에 만나게 될 사람이 이웃이다. 그러니까 이제 내가 만나는 이웃을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귀찮은 일을 해야 된다. 주님으로 받아들이면 나의 모든 것을 내어줄 수 있어야 된다. 귀찮고 불편한 일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사랑이란 이름으로 하느님이 이미 내게 다가와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 모든 것을 잘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의 크신 사랑이 없다면 그 모든 것은 의미가 없다. 우리는 아버지 사랑 안에 머물고 있고 그 사랑을 통해서 이웃에게 다가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서로를 아껴주고 서로를 위한 사랑의 삶에 나아가는 사랑의 공동체를 이룰 수 있으면 좋겠다. 귀찮음이 기쁨이고 불편함이 행복임을 깨닫게 되는 그런 축복의 공동체가 되도록 노력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