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
2025 3 5 2시 30분. 이런 날은 특별하게 기록되어야 한다. 일흔이 다 된 나이에 처음으로 세종문화회관 대관으로 향하니 말이다. 조선말기 일본인들에게 시해당한 비운의 명성황후 뮤지컬을 보러가니 말이다. 가격이 한 두푼이 아니다. 내 스스로 티켓을 구입하지는 못하였다. 젊어서야 자식 기르고 집 장만하느라 문화 생활에 돈을 쓰지 못하였지만, 여유로워진 지금에도 그 절약하는 습관이 몸에 배어 연극이든 뮤지컬이든 항상 마음은 끌리지만 선뜻 돈을 들이지 못한다. 무조건 절약하며 살아온 우리 세대 대부분이 마찬가지일 것이다.
셋째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큰아들이 명성황후 뮤지컬 VIP표를 예매했으니 우리 부부와 큰언니와 함께 가자고 말이다. 세상에! 조카가 이모들을 위해! 뮤지컬 표를 예매하다니! 나와 보시라 이모를 위해 기꺼이 지갑을 여는 조카가 있다면 나와 보시라. 물론 셋째 언니 큰아들은 누구보다 열심히 잘 살고 있다. 돈이 많다고 잘 살고 있다고 이모들을 위해 뮤지컬 티켓을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제 어머니, 셋째언니에 대한 마음 씀씀이가 극진해서이고 그 어머니의 자매들, 이모들에게까지 그 사랑이 닿아서다. 가끔 밥을 사주는 것도 그 조카다. 나누고 베푸는 그 마음이 누구를 닮겠는가.
큰언니와 셋째언니는 연세가 있으니 나는 두 분을 편하게 모셔갈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내 남편이 위례에서 한남동을 거쳐 세종문화회관을 거쳐 다시 한남동과 상도동을 거쳐 위례로 돌아오는 방법은 있었지만 빙빙 도는 먼 거리였다. 다행히 큰언니네 막내딸이 상도동에 살고 있고 상도동에서 셋째언니와 함께 출발해서 한남동에서 큰언니를 모시고 세종문화회관을 거쳐 한남동을 거쳐 상도동으로 돌아가는 편이 두 언니를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내 남편은 뮤지컬이나 연극을 좋아하지 않기도 했다. 여조카에게 표를 양보하고 싶었다. 나는 위례에서 버스 한 번으로 세종문화회관에 당도할 수 있으니 말이다.
큰언니와 셋째언니와 나와 조카가 뮤지컬을 보러 가기로 결정이 되었는데, 셋째언니의 마음이 불편하단다. 음악과 춤을 좋아하는 익산 둘째언니를 모시고 가고 싶단다. 둘째언니에게 전화를 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익산에서 올라오신단다. 여든셋의 둘째언니께서 만사 제쳐두고 올라오신단다. 와우 대단한 저력의 소유자. 부랴사랴 조카에게 양해를 구하고 둘째언니가 가시기로 했다. 작은오빠는 론볼로 늘 바쁘시다. 그날도 훈련팀들과 강원도에서 스키를 타셨다. 큰언니네로 모여서 함께 택시를 타고 가신단다.
나는 사실 세종문화회관에 가 본 경험도 없고 예매번호를 가지고 티켓을 받아본 적도 없다. 여행이건 영화관이건 남편만 따라다닐 줄 알았지 무엇 하나 스스로 해 보지 못한 답답한 사람이다. 큰언니와 둘째언니는 여든이 넘으셨으니 그렇고 그나마 똑똑한 일흔중반 셋째언니도 막내인 네가 해 보라고 넘기셨다. 사실 해 보지 않은 일이니 속으로는 살짝 걱정이 되기는 했다. 그럼에도 나는 큰소리를 쳤다. 걱정 마세요 이 나이 먹으니 모르는 것은 무조건 물어보면 다들 친절하게 알려줘요 저에게 예매번호 보내주세요 제가 할께요
뮤지컬을 보러 가는 날 조카에게 감사의 카톡을 보냈다. 감사한 아침이로구나 멋진 조카가 있어서 명성황후를 보게 되었네. 두근대는 아침이야 늘 궁금하고 보고싶은 뮤지컬이었구나. 고맙다. 이모라고 해준거 없이 받기만 하네 늘 건강하고 행복하렴. 바로 답장이 왔다. 네 이모 좋은 아침이예요 즐겁게 관람하세요. 좋은 말씀 주셔서 감사합니다. 역시 예의바른 조카다.
아파트에서 2분거리에 버스정류장이 있고 운 좋게도 그곳에서 바로 세종문화회관으로 가는 버스가 있다. 한 시간 거리란다. 양재동을 거쳐 도시 고속도로를 달려 남산1호 터널을 지나 명동과 을지로를 지나 조계사를 지나 종로를 거쳐 세종문화회관을 간다. 돌아올 때는 서울역을 거쳐 숭례문을 지나 명동으로 을지로로 남산1호터널을 지난다. 처녀 때 자주 돌아다녔던 지역을 순회하는 버스가 아닌가. 을지로에서 롯데백화점을 지나는데 어찌나 반갑던지 오랜만에 처녀 시절로 돌아가는 시간이 되었다.
제가 할께요 큰소리는 쳤지만 사실 나는 새가슴이다. 소극적이다. 거기다가 남편에게 의지하고 살아온 세월이 하도 길어서 스스로 독립적으로 무언가 하는 일이 어렵다. 일단 컴퓨터를 키고 세종문화회관 주변과 내부를 샅샅이 구경했다. 뮤지컬을 시작하는 시간보다 한시간 일찍 세종문화회관에 도착하여 여기저기 탐색하였다. 화장실이며 카페며 선물코너며 우리가 입장할 문까지 확인하였다. 티켓창구에 가서 예매번호를 들이미니 담당자가 말했다. 어디를 통해서 예매하셨는지 아세요? 네이버인지 인터파크인지. 조카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이버란다. 네이버 창구가 따로 있어서 그곳에 가서 예매번호를 알려주니 바로 티켓을 뽑아주었다. 성공! 쉽구먼! 쾌재를 불렀다.
전날 큰언니네로 오셔서 함께 가기로 했던 둘째언니가 사정이 생겨 당일날 익산에서 올라오신단다. 12시에 용산역에 도착하여 한남동 큰언니네로 간단다. 미리 오시면 여유롭게 쉬시다가 함께 점심을 먹고 편하게 출발하련만은 여든 셋이나 되신 분이 익산에서 용산으로 다시 한남동으로 오시기로 했다니. 이래저래 걱정이 앞서는 셋째언니의 마음이 편치 않은 것은 사실이다. 나도 걱정이 되었으니까.
큰언니와 둘째언니와 셋째언니와 그리고 내가 세종문화회관 로비에서 만났다. 다행하게도 큰언니의 큰사위가 모셔다 주었단다. 명성황후 앞에서, 일월오봉도 병풍이 드리워진 근정전 어좌에서, 뮤지컬에 나오는 고종과 대원군등 인물들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큰언니는 변함없이 복사꽃 얼굴이시고, 익산에서 올라오신 둘째언니는 피곤한 기색이 없으시고 셋째언니는 얼굴도 좋아지고 풍성한 머리를 우아하게 매만지고 우아한 옷을 입으셔서 참 보기 좋았다. 뮤지컬에 나오는 인물들 앞에서 사진을 찍을 때였다.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인물들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냥 구경하는 사람들인 줄 알고 나는 언니들을 향해 말했다. 얼른 저 앞에 나란히 서세요 사진을 찍으려는 순간 어느 여자가 말했다. 여기 줄 서 있는데요 줄서세요. 나는 미안하고 무안하여 언니들을 향해 말했다. 줄서야 된대요 얼른 나오세요. 나중에 찍어요.
의외의 대답이 날아왔다. 큰언니와 둘째언니가 합창하듯 말씀하셨다. 이왕 섰는데 얼른 찍어라. 언니들의 말이 내게 힘이 되었는가. 지팡이를 짚은 큰언니가 왔다갔다 하시는게 마음에 걸렸는가. 에라 모르겠다 라는 심정으로 나는 한 술 더 떴다. 앞에 서 있던 아가씨에게 말했다. 미안한데 이왕 섰으니 한 장 얼른 찍어주세요. 아가씨는 탐탁치않은 표정이 역력한데 늙은 사람들에게 무어라 말도 못하고 마지못해 울며겨자 먹기로 셔터를 눌러주었다. 만면에 미소를 띤 네 자매가 찍혔다. 무대뽀라는 말이 생각난다. 나이 먹은 사람들이니 그 정도는 봐줄 수 있을 것이라는 안이한 생각이었을까? 줄을 선 사람들이 따가운 눈초리로 쳐다보는데도 우리는 웃었다. 어쩔것인가. 미안해요 미안해요 우리는 그렇게 사죄하면서 돌아서서는 희희락락 즐거웠다.
VIP석이다. 무대가 가까워서 인물들 표정과 몸짓과 숨소리까지 들려온다. 명성황후와 고종의 개화정책과 대원군의 쇄국정책이 엇갈리는 사이에서 일본과 청나라와 네덜란드와 프랑스등 여러나라와의 복잡한 관계로 조선은 중심을 잃었다. 일본을 반대하는 명성황후를 시해함으로써 조선에서 입지를 굳히려는 일본의 만행을 어찌할꺼나. 거기에 동조한 조선인들을 어찌할거나. 명성황후역의 차지연 배우는 어깨와 팔과 가슴등 온 몸을 쥐어 짜 피를 토해내듯 노래를 불렀다. 망해가는 나라에 대한 한이며 또한 조선을 일으켜 세우고 싶어하는 희망의 노래였다. 그 감정선이 우리 모두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였다. 여기저기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내 옆에 셋째언니도 눈물을 닦아냈다.
5시30분이 돼서야 끝이 났다. 이럴 때 내가 운전이라도 하고 씩씩하게 나서서 언니들을 모시고 따스한 맛집으로 이동하여 함께 저녁밥이라도 대접할 수 있었다면 최고였을 것이다. 나는 그럴만한 인물이 못된다. 광화문이나 종로나 을지로는 처녀때 다녀보고는 결혼하고 나서는 거의 오지 않았다. 세종문화회관 뒤쪽이나 아니면 경복궁쪽으로 걸어가면 먹을만한 음식점들은 있을 것이다. 무작정 맛집을 찾아서 이동하기에는 모두 나이가 많다. 특히 큰언니는 지팡이를 짚고 걸으시니 무리였다. 익산에서 올라온 둘째언니는 헤어지는게 몹시도 섭섭하셔서 가던 길을 되돌아와 나를 끌어안으셨다. 퇴근시간이기도 하고 쌀쌀하기도 하니, 어머니 기일에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버스를 타고 오는 내내 마음이 불편하였다.
무대 위에서 여러 사람이 부르는 힘차거나 슬픈 노랫소리와 일사분란한 군무도 대단했지만 명성황후의 들썩이던 어깨가 눈앞에 어른거린다. 최선을 다하는 배우의 모습이기도 했지만 명성황후의 나라를 걱정하는 안타깝고 처절한 울부짖음이 아니었겠는가. 고종의 무능한 모습과 개화를 주장하는 명성황후를 배척하며 일본편에 선 대원군의 고집스런 쇄국정책 또한 슬픈 역사의 한 페이지다. 지금을 생각하게 한다. 지도자가 없는 나라, 나라를 위한 건지 권력을 위한 건지 알수 없는 정치가들의 빈말, 헛말 거짓말들을 생각하게 한다. 조선시대의 혼란과 무엇이 다른가. 국가와 국민을 위한 정치가와 권력자들의 화합을 기대해본다. 기도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