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⑫얼마 후에, 유다의 아내, 수아의 딸이 죽은지라. 유다가 위로를 받은 후에, 그의 친구 아둘람 사람 히라와 함께 딤나로 올라가서 자기의 양털 깎는 자에게 이르렀더니, ⑬어떤 사람이 다말에게 말하되, “네 시아버지가 자기의 양털을 깎으려고 딤나에 올라왔다.”한지라. ⑭그가 그 과부의 의복을 벗고, 너울로 얼굴을 가리고, 몸을 휩싸고, 딤나 길 곁 에나임 문에 앉으니, 이는 셀라가 장성함을 보았어도, 자기를 그의 아내로 주지 않음으로 말미암음이라. ⑮그가 얼굴을 가리었으므로, 유다가 그를 보고, 창녀로 여겨, ⑯길 곁으로 그에게 나아가 이르되, “청하건대, 나로 네게 들어가게 하라.” 하니, 그의 며느리인 줄을 알지 못하였음이라. 그가 이르되, “당신이 무엇을 주고, 내게 들어오려느냐?” ⑰유다가 이르되, “내가 내 떼에서 염소 새끼를 주리라.”그가 이르되, “당신이 그것을 줄 때까지 담보물을 주겠느냐?” ⑱유다가 이르되, “무슨 담보물을 네게 주랴?”그가 이르되, “당신의 도장과 그 끈과 당신의 손에 있는 지팡이로 하라.”유다가 그것들을 그에게 주고,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그가 유다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더라. ⑲그가 일어나 떠나가서, 그 너울을 벗고, 과부의 의복을 도로 입으니라.”
유다는 아들 둘을 자신보다 먼저 앞세웠다. 슬픔에서 벗어나기도 전, 이번에는 아내마저 세상을 떠났다.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위로를 받은 후”는 아내의 슬픔을 애도하는 기간이 공식적으로 끝났음을 의미한다. 야속하게도 시간은 흐른다. 분명한 것은, 큰 슬픔이 있지만, 이것도 지나간다는 사실이다.
이스라엘의 양 치는 사람에게 있어서, 털 깎는 행사는 일 년 중 가장 큰 축제이다. 농사짓는 사람의 추수와 같은 의미이다. 이 날만큼은 한 번도 먹을 수 없었던 음식물을 준비하여 마음껏 먹고 마신다. 양털은 순결을 상징한다. 그래서 양털과 다른 재료를 섞어서 옷을 만들지 못하도록 율법에서 정해놓았다(신 22:9~11).
간만에 유다도 바쁘게 되었다. 털 깎는 행사로 인해 딤나까지 이동하였다. 누군가가 그곳에서 유다의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다말에게 이야기해주었다. 당신의 시아버지가 딤나에 왔다고.
딤나는‘과부의 의복’을 벗었다. 고대에는 과부가 늘 골칫거리였다. 돌보기는 돌보아야 하는데, 늘 재정이 넉넉지 않기 때문이다.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거류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신 14:29) 하나님께서 ‘유독’ 관심을 두시는 대상이다. 그래서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사람에게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딤나가 무슨 생각을 한 것일까? ‘과부의 의복’이 아닌 ‘창녀의 의복’을 입었다. 과부의 의복이 따로 있는 것처럼, 너울로 얼굴을 가리는 행위는 창녀임을 말해준다. 부끄러운 일이기에, 스스로 얼굴을 가리는 행위였다.
딤다는‘딤나 길 곁 에나임 문’ 곁에 앉았다. 누가 보아도 창녀의 행색이다. 유다가 이 길을 지나리라는 사실을 알고는, 그 곁에 앉은 것이다. 유다가 다말을 보았다. 설마 자신의 며느리가 창녀의 복장을 하고 앉아있으리라고, 그리고 자신을 유혹하기 위하여 앉았으리라고 상상이나 했겠는가.
유다가 다말에게 말을 건넨다. “청하건대, 나로 네게 들어가게 하라.”(16절) 다말은 유다에게 화대를 요구하였다. 마침 지나가던 길이라, 유다의 수중에는 한 푼도 들어있지 않았다. 대신 약속했다. 후에 염소 새끼를 주겠다고. 당시 염소 새끼를 화대로 준다는 것은 지나치게 비싼 가격이었다고들 한다. 다말은 담보물로 유다의 도장과 지팡이를 요구하였다. 유다는 그러겠다고 약속했다.
다말은, 자신이 창녀의 복장을 하면, 유다가 자신에게 접근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을까?다말이 이렇게 예상하는 것은 너무 쉬운 일이다. 왜? 평상시의 삶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저 사람이 어떻게 행동할지 알고 싶다고? 저 사람이 살아온 과거를 보면 된다. 그 사람의 미래는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유다라고 해서 다르겠는가?
“㊸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 ㊹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 ㊺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눅 6:43~45)
도덕은 사람들에게 도리(道理)를 다하라고 가르치고, 유교는 자기 수양을 잘하여 수기치인(修己治人)을 하라고 가르친다. 우리는 어릴 적부터 유치원과 가정과 학교와 사회에서 윤리도덕을 끊임없이 배운다. 부모들이나 선생들은 자신들도 그렇게 못 살면서 어린 사람들에게 잔소리를 해댄다. 거기다가 교회에 다니거나, 종교라도 가지고 있다면, 더 많은 고급 잔소리를 들어야 한다.
목사님들은 교인들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난 사람들 같다. 강단에서 열불을 토한다. 그리고 한탄을 한다. “교인들이 변하지 않아요…….” 설교자 자신도 변하지 않는데, 교인들이 변할 리 없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그것이 본질이다. 아무리 윤리 도덕과 유교와 종교들이 사람들을 의인(선한, 착한, 도덕적인)으로 만들려고 해도, 그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이야기이다. 본질상 타락한 죄인인 인간은 아무리 선을 행하고, 윤리, 도덕, 규범을 잘 지켜도, 죄를 지어야 하는 유혹 앞에서 한방에 무너진다.
유다는 원래 그런 사람이다. 물론 그의 아버지 야곱도 원래 그런 사람이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원래 그런 사람이다. 안 그런 척하고 살 수는 있다. 그런다고 달라지지 않는다. 유다가 처음부터 성적으로 방탕한 사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 유다가 사는 곳이 가나안이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가나안 문화에 동화된 것이다. 아니, 자신의 본성이 드러난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항변한다. 그 날은 안식일이었다. 아무것도 하면 안 된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밀 이삭을 따서, 손으로 비벼 먹는다. 어떻게 감히 안식일 율법을 어길 수 있다는 말인가! 바리새인들은 충격에 사로잡혔다. 겉으로 그런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충격에 사로잡힌 것이다.
예수님 눈에는 바리새인들의 이런 모습들이 너무 가증스러워 보인다. 실제로는 더한 죄도 저지르면서, 들키지 않는 죄를 저지르면서, 자신들도 잘 모르는 죄 가운데 살아가면서 스스로 거룩한 척하는 모습들이란…….
성경은 사람들의 본질에 대해서 기대하지 않는다.원래 죄인인 것을, 원래 약하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가치 없는 나무에는 아무리 좋은 거름을 주어도 소용없다. 자라면 가치 없는 나무라는 사실을 증명할 뿐이다. 차라리 가치 없는 나무를 뽑고, 더 좋은, 더 가치 있는 나무를 심는 것이 좋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자본주의 사상에 의하면 말이다. 더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질문을 해보자. 거룩하지 않은 사람이 목사가 될 수 있을까? 회개하지 않은 사람이 목사가 될 수 있을까? 영적인 체험을 하지 않은 사람이 목사가 될 수 있을까? 물론이다. 얼마든지 목사가 될 수 있고, 목회를 할 수 있다. 사도 바울도 그러하였다. 율법으로는 자신이 흠 없는 자라고 자신 있게 주장했다.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너무나도 형편없는 사람이라고 고백한다.
교회를 다닌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사건이다. 교회 문턱을 넘기가 쉽지 않다. 예배를 드린다는것은 가히 혁명적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그런다고 예수쟁이가 될까? 세례를 받았다. 집사, 권사, 장로가 되었다. 그런다고 예수쟁이가 될까? 눈물 콧물 다 쏟으며 회개했다. 그런다고 예수쟁이가 될까?
그래서 예수님께서 돌아가셨다. 세상에서 제일 좋은 것이 구원인데, 그것도 모르는 불쌍한 인생들! 구원이 제일 좋은 것인 줄 알아도, 자기 혼자서는 그 무엇도 할 수 없는 연약한 인간들! 우리에게 길을 보이시기 위하여 오셨다. 그리고 죽으심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다.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행 16:31)
다말 같은 과부에게는 계대결혼법이 아주 소중하다. 그런데 유다에게는 그 법으로 인해 둘째 아들 먼저 앞세우게 되었다. 그래서 셋째 아들 ‘셀라’를 보호하기 위해, 다말을 친정으로 보냈다. 너무 어려서 남자 구실을 할 수 없으니, ‘셀라’가 클 때까지 기다리라는 것이다. 그리고는 세월이 흘러 ‘셀라’가 장성하였지만,다말을 불러들이지 않았다. 혹시라도 ‘셀라’마저 앞세우는 일이 생길까 싶어서이다.
세상에서 제일 어색한 말 중의 하나가 ‘딸 같은 며느리’이다. 며느리는 며느리이다. 며느리가 아무리 잘한다 하더라도, 딸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시부모가 생각하는 ‘딸 같은 며느리’는 이런 모습이다. “어머니, 해외여행 시켜드릴게요.” “어머니, 밍크코트 사드릴게요.”
유다도 다르지 않다. ‘딸 같은 며느리’이다. 남편을 먼저 보내고, 얼마나 외로울까? 그러니 친정에 가서 수절하면서 살라는 것이다. 유다가 돌보아야 할 대상에는 물론 셋째 아들 ‘셀라’가 있다. 그러나 며느리 다말은 포함되지 않는다.
유다가 나쁜 사람이라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모든 부모가 그 상황에서는 유다와 같이 하지 않을까? 다말보다는 셀라를 더 위하려는 마음이리라. 다말도 그 사실을 너무 잘 안다. 유다가 자신에게 기다리라고 말하지만,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까? 아마도 그런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다말은 기다리지 않았다.
다말은 창녀 복장을 하고, 유다를 기다렸다. 아마도 털 깎는 축제 기간이라, 유다는 얼큰하게 취한 상태였을 것이다.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설마 자기 앞의 여성이 다말이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그렇게 유다와 다말은 동침한다.
다말에게는 세 가지의 죄가 있다. 참을성이 없고, 불신으로 가득하다는 것이 첫 번째이다. 속임수를 써서 시아버지를 유혹했다는 것이 두 번째이다. 유다로 하여금 죄를 범하게 만들었다는 것이 세 번째이다. 가증하기 짝이 없는 여자라는 말이다.
맞다. 다말은 죄인이다. 필요 없는 이야기지만, 유다와 다말 중에 누가 더 죄인일까? 책임을 이행하지 않아, 유다는 다말을 죄 짓는 자리로 내몰았다. 다말은 살고 싶었다. 여자 혼자만의 힘으로 살아갈 방법은 도무지 없었다. 그래서 자신의 생명을 걸었다. 시아버지를 유혹하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임신까지 한다.
다말을 변호하고 싶어서, 많은 목사님들의 설교를 찾아보았다. 그런데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누가 봐도 다말이 죄인임에는 틀림없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다말은 자신의 생명을 내걸었을까?모든 사람이 자신을 부도덕하다고 비난할 텐데, 분명 다 알았을 텐데…….
심판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다말, 죄인이다. 그러나 사랑 받아야 할 여인이다. 살고 싶어서 몸부림을 치는 여인이다.“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룻 4:12) 다말은 유다와의 사이에서 베레스를 낳았고 … 보아스를 낳았고 … 다윗을 낳았다. 하나님께서는 다말이 비록 죄인이지만, 죄인인 것이 분명하지만, 그녀를 축복하셨다. 다윗의 조상이 되었고, 메시아의 조상이 되었다. 그분께서 바로 나의 하나님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