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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투와 축복의 마음
사무엘상 18:6~16
오늘 본문의 말씀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은 겸손하였던 왕입니다. 제비가 뽑혀서 하나님께서 지명한 이스라엘의 왕 사울을 찾았을 때 그는 도리어 부끄러워하며 숨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왕위에 오르자 곧장 권력이 가져다주는 달콤한 맛에 도취하면서 교만해졌습니다. 포악해졌습니다. 그리고 권력을 사유화하였습니다. 권력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은혜요 선물이며 사명인데, 사울은 어느틈엔가 권력을 자기의 것으로 삼았고 자기 가문의 것으로 삼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자기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신 하나님까지도 안중에 두지 않았습니다. 그 누구라도 자기의 권력에 티끌만큼이라도 흠집을 내려는 자는 누구도 용서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울의 뒤틀려진 마음에 비수를 들이대는 일이 하나님의 섭리적 손길에 의하여 다가왔습니다. 그 계기는 베들레헴의 양치는 집안인 이새의 가정에서 태어난 소년 다윗이 블레셋 군대와의 전쟁에서 큰 공훈을 세운 것이었습니다. 어린 소년 다윗은 전쟁터 계곡에서 매끄러운 조약돌 다섯 개를 주어서 주머니에 챙겨 넣고 물매에 먹여 던져 구척 장신으로서 3미터에 가까운 거인 골리앗 장수를 단번에 쓰러뜨려버렸습니다. 골리앗 때문에 패색이 짙어 다들 도망칠 때만 엿보던 이스라엘 군대는 그 순간 사기가 올라서 다 함성을 지르며 일어나 블레셋 군대를 향하여 돌진하였습니다. 블레셋 군대는 다들 도망치면서 자빠지고 코가 깨지고 이스라엘 군사들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리하여 대 승리를 거둔 이스라엘 군대가 금의환향을 할 때에 온 백성들이 다 거리에 나와 환영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승리의 내막을 전해들은 백성들 중 여인들이 춤을 추면서 이렇게 노래하였습니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그 날 다윗이 적장 골리앗을 죽인 일이 결정적인 승리의 기폭제가 되었고 전세를 역전시킨 대 사건이기 때문에 백성들이 그 날에 다윗을 크게 칭송한다고 해서 문제가 될 것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권력에 맛들린 권력의 화신 사울은 이 말을 듣는 순간 심히 불쾌하고 분노하였습니다.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가 더 얻을 것이 나라 말고 무엇이냐”
사울 왕은 아직도 솜털이 가시지 않은 홍안 소년을 자기 권력 왕권의 경쟁자로 생각하였습니다. 왕직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는 그 순진한 아이가 어떻게 감히 왕위를 노리는 자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권력을 사유화한 사울은 질투의 화신으로 변질되어 그 어린 소년 다윗을 그 때부터 어떻게 해서든지 잡아 죽이려는 생각만이 마음에 가득차 버렸습니다. 밤이나 낮이나 다윗이 자기를 밀어내고 왕위에 오를 줄 모르는다는 생각에 조바심이 나서 잠도 오지 않고 그의 마음은 온통 불안감으로 가득차버렸습니다. 그리하여 밥맛도 없어지고 눈에는 핏발이 서고 입술이 마르고 손이 떨립니다. 그리하여 다윗을 죽이기 위하여 자기 딸까지도 희생합니다. 평안하고 살기 좋은 안정된 집안에 딸을 시집 보내서 행복하게 살게 하면 좋았을 뻔했으나 그는 딸을 볼모 삼아 다윗을 죽이려고 덫을 놓습니다. 만일 다윗이 블레셋 군인들을 죽이고 그 양피를 백 개만 가져오면 부마의 자리를 주겠다고 사람을 시켜 넌지시 제안합니다. 그것은 다윗이 블레셋 군인들에게 칼에 죽게 하려는 의도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부하 몇 사람 데리고 블레셋에 가서 블레셋 군사들 이백 명을 죽이고 그 양피를 바쳤습니다. 할 수 없이 사울은 자기 딸 미갈을 다윗에게 주어 다윗을 사위로 삼습니다. 그러나 다윗을 자기의 사위로 삼자 사울은 가까이에서 다윗을 죽일 기회를 엿보았습니다. 더욱더 속이 타서 다윗에게 단도를 던지기도 하고 집을 포위하여 죽이려 들기도 하고 도망친 다윗을 잡아 죽이려고 자기 군인들 삼천 명이나 동원하여 산이나 들이나 굴을 이잡듯이 뒤져서 죽이려 들기도 하였습니다. 사울 왕은 국정은 뒷전이요 다윗을 잡아 죽이기까지는 아무 것도 평안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습니다. 사울 왕의 마음은 온통 다윗에 대한 질투심으로 가득차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사울은 정신병자처럼 살다가 결국 자기 집안 전체와 나라를 망가뜨리고 블레셋 군대의 침공을 받아 길보아 산에서 비참하게 죽고 맙니다.
이처럼 질투심은 그 질투하는 사람 자신을 철저하게 파괴시키고 맙니다. 이처럼 질투의 감정만큼 자기 파괴적인 것은 없습니다. 정상적인 판단을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파괴적인 행동을 멈출 수 없습니다. 끝까지 그 감정에 끌려다니다가 결국은 죽어야 끝이 나는 것입니다.
그러한 예를 들자면, 저 몽골 제국을 이룬 징기스칸의 의형제였던 자무카라는 인물입니다. 자무카는 어린 시절 몽골 부족의 한 부족장의 아들이었던 테무친을 만나 도와주고 그와 의형제를 맺었습니다. 자무카 역시 한 부족장의 아들로서 포부가 컸던 소년이었습니다. 자무카는 테무친과 피로써 의형제를 맺고 아버지를 잃고 죽을 고비를 여러번 지내는 테무진을 도우면서 그를 일으켜주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점점 테무진이 사람들의 인망을 얻고 그의 세력이 커지자 돌변하여 테무진을 죽이려고 온갖 노력을 다 기울입니다. 그래서 결국 상당한 세력으로 커가던 테무진의 군대를 쳐서 무너뜨립니다. 그러나 그 승리 후에 자기 수하에 있다가 테무진에게 넘어갔던 자기 부하들을 용서하지 않고 그들을 큰 기름가마에 던져 튀겨 죽이는 악랄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자무카는 잔인한 사람이라는 인상이 더 퍼지게 되었습니다. 자무카는 자기 부하들을 기름 가마에 던져 죽일 만큼 테무진과의 경쟁심에 불타 올랐던 것입니다. 그는 사람들의 관심이 테무진에게 쏠리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며 싫어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테무진은 절치부심하고 다시 얼마 남지 않은 사람들을 이끌고 세력을 재건하여 자무카와 싸워 승리하고 온 몽골 부족을 다 통합하여 칸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칸은 모든 몽골 부족의 수장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자무카는 테무진에게 굴복하지 않고 먼 나라까지 가서 왕들을 부추겨서 테무진과 싸우게 합니다. 그러면 테무진은 그 나라와 싸워 승리합니다. 그러면 자무카는 또 다른 나라로 도망쳐서 그 나라의 왕에게 부추겨서 또 다시 테무진과 싸우게 합니다. 결국은 나중에 테무진 곧 징기스칸에게 체포되어 왔을 때 징기스칸은 옛 정을 생각하여 이제 모든 것 내려놓고 평안히 지내자고 그를 용서하고자 하였으나 자무카는 고개를 젓고 거부합니다. 그래서 결국 징기스칸은 자기 친구 자무카를 정중하게 멍석에 말아 말에 밟혀 죽게 하였습니다. 그것이 몽골부족에서 귀족을 명예스럽게 죽이는 사형 방법이라고 합니다. 자무카는 참으로 질투에 잡혀서 그 험하고 악한 삶을 살다가 그렇게 질투 때문에 최후에도 평안히 살 수 있는 길보다 죽기를 자처하여 말에 밟혀 죽는 길을 택하고 말았습니다. 의형제가 잘 되면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 일입니까? 그러나 그 의형제가 자기보다 더 잘나고 더 사람들이 추종하게 되니 가장 무서운 질투의 대상이 되어 짓밟고자 하다가 결국 자기를 철저하게 파멸시키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번 휴가 때에 강소이 전도사님이 추천하여 보았던 영화 한편이 있습니다. 아카데미 상을 수상한 ‘아마데우스’라는 영화인데, 그 영화는 질투심을 주제로 한 영화입니다. 음악의 도시 비엔나에서 궁정음악가로 활동하던 안토니오 살리에르가 혜성처럼 그곳에 나타난 음악의 신동 아마데우스 볼프강 모차르트를 곁에서 보면서 그의 천재성을 인하여 질투심을 느끼고 괴로워하면서 그 질투심 때문에 하나님도 버리고 모차르트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것을 내용으로 한 영화입니다. 그로 인하여 살리에르는 나중에 정신병원에 갇히고 피폐한 모습으로 노년에 흉측한 모습으로 늙어갑니다. 그래서 질투심으로 인하여 괴로워하면서 경쟁 상대를 미워하며 자신을 망가뜨려가는 증세를 살리에르 증후군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 영화는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는 허구로 만든 영화입니다. 그러나 모차르트의 천재적 재능을 보면서 그 곁에서 노력하고 애쓰면서도 졸렬한 음악을 만드는 자신과 비교하면서 절망하고 또 그렇게 만들어놓은 하나님에게까지도 반감을 가지고 대들고 상대방을 죽음으로 몰아갈 만큼 만드는 인간의 내면 세계 속의 질투의 감정을 잘 표현한 영화입니다.
그렇습니다. 질투의 감정은 가장 강렬한 자기 파괴적인 감정입니다. 이 질투의 감정은 너무나 강렬하여 질투의 감정을 따라 행동하면 자기가 망할 줄 압니다만 그 길로 계속 갈 수밖에 없게 만듭니다. 그 길로 가게 되면 결국은 자기의 인간성에 큰 흠결이 나고 그래서 사람들도 알아채고 자기를 외면할 줄 압니다. 그런데도 그 길로 가게 되는 감정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질투의 감정을 느낄 때 정말 두려워하며 그 질투의 감정을 버리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 마음을 만져 달라고 간절히 청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령의 사람들이 본을 보인 본보기를 깊이 묵상하여야 합니다.
질투를 너끈히 이긴 아름다운 성품을 보여준 아름다운 본보기로 사울 왕의 아들 요나단을 들 수 있습니다. 다윗을 죽이려 들었던 사울 왕의 큰 아들 요나단이 보여준 아름다운 마음을 묵상하는 것은 질투의 강력한 힘을 무력화시키는 성령의 강력한 감화력을 줍니다. 요나단은 황태자입니다. 아버지 사울은 육십세 정도요 곧 돌아가실 나이입니다. 요나단이 홍안 소년 다윗을 만난 때는 나이가 사십 세입니다. 그는 이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를 가장 좋은 조건을 갖춘 사람입니다. 요나단은 사람들이 다 좋아하고 따르는 아름다운 인품과 용기와 지도력을 갖춘 황태자였습니다. 그런데 나이 사십에 만난 어린 소년 다윗을 보고서 깊은 우애와 사랑을 느낍니다. 다윗의 순수함,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강렬함, 이스라엘을 대적하며 하나님을 모욕하는 구척 장신 골리앗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용기 이 모든 것들을 보면서 요나단은 소년 다윗이 너무나 사랑스럽습니다. 그래서 그를 아버지 사울로부터 지켜주고 보호해주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사무엘 선지자가 그를 차기 왕으로 기름부었다는 이야기를 누군가로부터 전해 듣고는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아버지 다음에 이스라엘을 이끌어줄 기둥으로 여깁니다.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것을 알고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을 존중하여 그가 왕에 오르도록 돕고 자기는 그의 다음이 되고자 작정합니다. 그리하여 요나단은 아버지 사울과 함께 블레셋 군대와 싸우다가 죽는 그 날까지 다윗을 변함없이 사랑하고 축복하며 살았습니다. 그리하여 그의 아들 므비보셋은 후일에 다윗이 자기의 아들처럼 여기고 왕의 식사 자리에 늘 동석하도록 대우해주고 요나단의 후손들을 축복하고 보호해주었습니다. 요나단은 인간적으로 보면 경쟁 상대였던 소년 다윗을 지극히 사랑하고 축복함으로써 그의 후손이 다 복을 받은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선구자였던 세례 요한 역시 질투를 이긴 승리자입니다. 요한은 어린 시절 뱃속에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어린 시절부터 광야에서 고행하면서도 하나님께 오랫동안 기도하였던 사람입니다. 오랜 영적 훈련 끝에 하나님의 은혜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때가 차매 세상에 나타나 회개를 외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세례 요한의 음성을 듣고 마음이 크게 찔림을 받고 회개의 길로 들어었습니다. 참으로 세례 요한은 구약의 수많은 선지자들보다 더 귀한 자요 그리스도의 길을 닦는 전령사로서 수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인도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얼마나 그 영향력이 컸는지 당대 사람들은 그를 그리스도라고 오해할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세례 요한이 사역의 절정에 도달하여 사람들이 몰려들었을 때에, 나사렛 예수 우리 구주께서 그에게 나아와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공적 생애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세례 요한에게 몰려들던 군중들이 이제 달라져서 예수님께 다들 몰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던 사람들이 이제는 예수님께 가서 세례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사람들의 변한 인심을 보고서 너무나 속이 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스승인 세례 요한에게 와서 이제 사람들이 다 예수님께 몰려간다고 고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자 세례 요한은 제자들에게 이르기를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내가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한복음 3:27~30)
고 말해주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육신적으로는 사촌지간이요 인간적으로는 육개월 정도 뒤늦게 태어나신 우리 구주 예수님에게 질투심을 느낄 만도 한데 요한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도리어 자기에게 몰려와 질투하는 말을 던지는 제자들에게 귀중한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가르친 말씀에 보면, 사람이 받은 모든 좋은 것들은 하늘에서 주신 바라는 것입니다. 하늘 곧 하나님께서 주신 바가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보다 더 나은 재능, 더 나은 은사, 더 나은 세상적인 축복까지도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의 주권적인 뜻을 따라 각 사람에게 달리 주신 것이므로, 거기에 대하여 불평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받은 모든 것도 하나님의 은혜로 얻은 것이요 내가 정말 바라고 원하는 것을 다른 사람이 받아 누리는 것도 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므로 그것을 우리가 보고 질투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도리어 하나님께서 그렇게 다른 사람에게 좋은 것을 맡기시고 많은 은혜를 주신 것에 대하여 세례 요한이 본을 보여준 대로 우리는 경쟁 상대를 축복하며 기뻐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만일 하나님의 영광이 더 드러나고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바를 이루어간다면, 우리는 세례 요한처럼 상대방이 더 흥하고 우리는 쇠하여가는 것조차 순종함으로 받고 기뻐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그 사람이 잘 되고 더 흥왕하도록 내 자리에서 도울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기쁜 마음으로 도와주어야 하겠습니다. 마치 다윗이 잘 설 수 있도록 힘을 다하여 도와주었던 요나단처럼 우리도 그렇게 돕고 섬겨야 하겠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결코 질투의 희생물이 되지 않습니다. 질투가 그 사람을 삼키지 못합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다는 것을 인식하고 그 사람에게 넘치는 축복과 은혜와 재능을 주신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를 축복하고 그를 잘 도와주고 그가 성공하도록 협조하는 사람은 질투가 결코 그 사람을 망하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하나님께서 우리 곁에 두신 천재들이 있습니다. 탁월한 장인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오랜 시간 준비하여 쉬운 일을 간신히 하나씩 해나가는데, 그 사람은 짧은 시간 준비하고 너무나 탁월하게 일을 처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볼진대 우리는 허탈할 수 있고 낙심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자칫하면 질투의 감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보통 질투의 감정은 나와 멀리 있는 사람에게는 잘 느끼지 않는다고 합니다. 질투의 감정은 나와 가까이 있는 사람, 내가 잘 아는 사람에게서 더 잘 느낀다고 합니다. 우리에게도 질투의 감정이 갑작스럽게 찾아올 수 있습니다. 그러할 때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요 우리의 타락의 본성에서 나온 육체에 속한 감정인 것을 명심합시다. 그래서 그 질투의 감정을 극복하고 승화시키어 더 인격적으로, 신앙적으로 성숙해지는 계기로 삼읍시다.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요한복음 3:27)
이 말씀을 마음에 늘 새깁시다. 그래서 우리가 질투를 느끼는 그 사람을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축복하셨다는 점을 기억합시다. 그래서 그가 더 잘되도록, 더 성장하도록, 더 크게 쓰임받도록, 더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인정받도록, 존중해주고 축복해주고 돕는 자가 됩시다. 그것이 우리가 육체의 본성을 이기는 길이요 성령이 우리를 감화하여 인격과 신앙을 성숙하게 하는 길이요 우리의 영혼과 삶이 하나님이 주시는 큰 복을 받는 길입니다.
우리 모두가 평생에 질투의 독화살이 우리 심장에 박히지 않도록 주의하고 또 잠시 박혔더라도 즉시 뽑아내버립시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도리어 성령의 사랑과 축복과 관용의 은혜가 흘러나오고 축복이 우리 삶 속에 부어지는 기회가 되게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