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가산산성 성곽길에서 본 가산바위 옆모습. 윗부분이 평평한 너럭바위인 이곳 위에 서면 팔공산 비슬산 가야산 금오산 등 대구권 명산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
모든 경계에는 긴장이 흐른다. 이해관계가 맞부딪치는 까닭이다. 이해충돌이 가장 첨예한 경계 중 하나가 성이다. 성은 그것을 점유한 집단의 수성 의지를 표출하는 동시에 대립하는 집단의 공성 의지를 자극한다. 험준한 산성에서의 쟁투는 특히 처절하다.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이나 임진왜란 시절 행주산성이 그 대표적인 예다.
국토의 70%가 산지인 우리나라에는 산성이 많다. 반도의 중부 이남에만 1200여 곳의 산성터가 있다. 산성에 얽힌 역사적 상흔도 숱하다. 경북 칠곡군 가산면의 가산산성은 현대사의 상처가 얼룩진 곳이다.
| |
| 산행의 출발점인 가산산성 진남문 |
'우군기의 폭격이 시작된 데 이어 미군과 국군 야전포병의 일제 사격이 집중되자 가산산성 안은 피비린내 나는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아름드리 낙엽송이 순식간에 벌거숭이가 되고, 성벽 위에 웅크린 적병들이 밤송이 떨어지듯 아래로 곤두박질하였다. 가장 치열한 교전을 치른 제4 중대는 180명이던 병력 중 몸이 성한 자는 장교 한 명과 병사 열 명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감소되어 있었다. 가산산성에 침투한 북한군은 제14 연대로, 1950년 8월 27일 전투에서 와해되어 400여 명만 탈출했다고 한다'.
'한국전쟁사'에 기록된 6·25전쟁 초기 가산산성에서 벌어진 전투 모습이다. 사람뿐 아니라 가산의 피해도 극심했다. 그로부터 65년이 지난 현재, 상처는 많이 아물었다. 무차별 포격에 벌거숭이가 됐던 가산에는 다시 나무가 우거져 숲을 이루고, 쓰러진 나무와 허물어진 성곽에는 짙푸른 이끼가 더께더께 끼었다. 세월은 그렇게 가산산성에서 조금씩 끔찍한 전쟁의 상흔을 지우고 자연의 얼굴을 늘려가고 있다.
| |
| 성벽 밑부분에 비상문으로 뚫어 놓은 암문 |
그런 가산을 보러 칠곡으로 떠났다. 산행은 가산산성 진남문에서 시작해 성곽을 따라 일주하는 코스다. 총길이는 약 10㎞, 소요시간은 4시간30분가량. 가산산성은 산 정상에서부터 계곡 아래까지 감싸 안은 '포곡식(包谷式)' 축성법과 산 정상부를 테로 두른 것 같은 '테뫼식' 축성법을 섞어 만든 곳이라 성을 순환하면 자연스레 정상을 거치게 된다.
길은 호젓하고 중간중간 전설이 담긴 기묘한 형상의 바위와 전망대가 많아 걷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진남문을 지나 곧바로 왼쪽 성곽길로 접어든다. 25분쯤 후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꺾어 조금 가면 전망대가 나온다. 오른쪽으로 도덕산, 왼쪽으론 백운산과 6·25전쟁 때 대구 사수를 위해 격전을 치렀던 다부동으로 넘어가는 고개가 보인다. 여기서 20분쯤 더 걸으면 만나는 쌍바위에도 전망대가 있다. 이어 35분쯤 걷다 낮은 성가퀴를 넘어 왼쪽으로 20m가량 가면 사람 옆얼굴을 닮은 바위와 함께 전망대가 또 나온다. 바위 앞은 벼랑이고 뒤로는 멀리 대구 팔공산 정상이 눈에 들어온다.
전망대에서 되돌아 나와 직진하면 10분쯤 지나 남포루 이정표에 이른다. 가산바위 쪽으로 5분쯤 가면 암문(暗門·성벽 밑부분에 만들어 놓은 비상문)이 나온다. 이를 통과한 뒤 곧바로 왼쪽 성곽 위로 올라가 길을 이어간다. 흐드러지게 핀 보랏빛 닭의장풀꽃이 산행팀을 반겨준다. 굽이진 산세를 따라 울퉁불퉁 투박하게 쌓은 산성은 고목들과 어우러져 고졸한 정취를 자아낸다.
20분쯤 후 나오는 갈림길에서 중문 쪽으로, 다시 15분쯤 후 만나는 갈림길에선 가산바위 쪽으로 향한다. 15분쯤 가면 우람한 가산바위(해발 860m)가 버티고 서 있다.
| |
| 중문 |
가산바위는 윗부분 면적이 약 270㎡에 달하는 너럭바위다. 바위 상부 중앙에 큰 구멍이 나 있는데, 신라 고승 도선(827~898)이 지기를 누르기 위해 쇠로 만든 소와 말을 이곳에 묻었다는 전설이 있다. 바위 위에 서면 팔공산과 비슬산, 합천 가야산, 구미 금오산 등 대구권 명산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바위 아래 갈림길에서 동문 쪽으로 가면 10분쯤 후 복수초 군락지가 나온다. 복수초는 4, 5월 누런색 꽃이 피는데 황금색 잔을 닮았다 해서 금잔화라고도 불린다. 가산의 복수초 군락지는 세계 최대 규모로 알려져 있다. 직진해 중문을 지나 갈림길에서 동문 쪽으로 걷는다. 10분쯤 후 또 만나는 갈림길에서 용바위 쪽으로 가면 정상(902m)에 닿는다. 정상에서는 현재 가산산성 발굴조사가 진행되고 있다. 정상에서 오른쪽으로 15분쯤 내려가면 용바위가 큰 덩치를 산비탈에 아슬하게 기대고 있다.
| |
| 가산바위에서 내려다본 성곽길 |
정상으로 되돌아와 동문 쪽으로 간다. 30분쯤 후 갈림길에서 한티재 쪽으로, 다시 10분쯤 후 나오는 갈림길에서도 한티재 쪽으로 길을 잡는다. 15분쯤 더 가면 할아버지·할머니바위가 산행팀을 맞는다. 크기가 약간 차이 나는 두 바위는 마치 정겹게 이야기를 나누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연상케 한다. 20분쯤 더 가면 갈림길이 나오는데, 여기서 오른쪽으로 하산한다. 이정표가 없으니 국제신문 리본을 확인해야 한다. 20분쯤 후 갈림길에서 진남문 쪽으로 방향을 잡아 걷다가 해원정사를 거쳐 출발지로 돌아온다.
# 떠나기 전에
- 3겹의 城…축성 때 가혹한 징발로 민심 동요
■ 가산산성 알아야 알찬 산행
| |
| 해발 860m에 위치한 가산바위. 윗부분 면적이 270㎡에 달하고 주변 경관 조망이 뛰어나다. |
아는 만큼 보이듯, 가산산성의 역사적 내력에 대해 알고 가면 보다 알찬 산행을 즐길 수 있다.가산면 가산리와 동명면 남원리에 걸쳐 있는 이 산성은 내·중·외성 3성 구조의 성이다. 가산산성은 인조 17년(1639년) 9월 경상감사 이명웅의 지휘로 쌓기 시작했다. 그는 인근 고을의 많은 남정(男丁·15살 넘은 사내)을 징발해 공사를 벌여 이듬해 4월 둘레 약 4㎞의 내성을 준공했다. 성에는 동·서·북문 등 3개의 대문과 함께 8개의 암문이 설치됐다. 또 4곳의 포루와 1곳의 장대, 21개의 샘과 우물을 조성했다. 그러나 이 공사에 10만여 명의 막대한 인력과 자금이 동원되고 공사 도중 많은 사람이 죽어 민심이 동요하자, 이명웅은 여러 차례 탄핵을 받고 임기를 못 채운 채 체직되고 말았다.
내성이 완성된 지 60년이 지난 숙종 26년(1700년), 경상감사 이세재가 외성을 쌓았다. 외성은 둘레 약 3㎞로, 남문과 암문 3개가 설치됐다. 이듬해에는 외성 안에 천주사(天柱寺)를 짓고 여기에 승창미(僧倉米)를 보관했다고 한다. 이 무렵 가산산성에서 승려를 모집해 훈련을 시켜 승장(僧將)을 뽑는 제도가 있었으며, 이렇게 선발된 승장과 승병들이 성 일부의 수비를 담당했다는 기록이 '증보문헌비고'에 나와 있다.
중성은 영조 17년(1741) 경상감사 정익하의 주도로 축성됐는데, 길이 460m에 중문과 문루 1개가 만들어졌다. 중성은 비축미를 보관하는 데 사용했으며, 중요 시설은 대부분 내성 안에 있었다.
가산산성은 행정 중심지이기도 했다. 내성이 완공되던 해 이곳에 종3품 도호부사가 다스리는 칠곡도호부를 설치하고 군위·의흥·신녕·하양 네 현을 관장케 했다. 그러나 불편한 점이 많아 순조 19년(1819년) 당시 경상감사로 있던 추사 김정희의 아버지 김노경의 건의로 도호부가 팔거현으로 옮겨졌다.
# 교통편
- 무궁화호 타고 신동역서 하차
- 버스 세 번 환승해 남원2리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