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대 뒷산의 명칭을 놓고 정병산, 봉림산 논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창원대 뒷산 정상에는 정병산이라는 표지석이 있다. 박동백 창원문화원장은 정병산이라는 명칭은 일제가 붙인 것으로 본래의 이름인 봉림산으로 고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논쟁은 박 원장이 지난해 8월 문화원 박물신문에 ‘봉림산과 정병산 명칭의 배경’이란 글을 올리면서 시작됐다.
이에 김정대 경남대 국문학과 교수는 “정병산은 그 이전부터 있어 왔다”며 박 원장의 주장을 반박하는 글을 본지에 보내왔으며 지난해 9월 24일 여론마당을 통해 소개됐다. 박 원장이 같은 해 10월 31일 김 교수의 주장에 재반박하는 글을 본지에 보내와 실었다. 최근에는 창원문화와역사바로세우기위한시민모임이 주최한 토론회에서 김 교수가 다시 박 원장의 주장을 반박하면서 공방을 벌이고 있다.
본지는 정병산-봉림산 명칭 논쟁을 매듭짓자는 취지에서 두 사람의 주장을 소개한다. 동시에 경남신문 홈페이지(www.knnews.co.kr)를 통해 시민의견 수렴과 함께 전문가 의견을 들어 해결점을 찾고자 한다.
박동백 창원문화원장은 정병산의 옛 이름이 봉림산이라는 근거를 옛 지리지에서 든다. 그는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 대동여지도, 창원읍지 모두 ‘봉림산은 부남(府南) 15리 지점에 있고 전단산은 부동(府東) 25리 지점에 있다’고 표시돼 있다. 여기서 부는 창원도호부가 있었던 소답동이 기준이다”며 부남 15리 위치를 찾아간다. 창원도호부 관아는 지금의 창원초등학교에 있었다.
박 원장은 “창원읍지에 ‘용지제(龍池堤) 부남 15리’라고 돼 있고 못 주변 길이가 1744보, 물 깊이가 5척으로 써 있다. 용지는 현재 창원대 뒤편 창원중앙역 자리다”며 바로 봉림산의 위치를 이곳으로 본다.
또 창원읍지 제언(堤堰: 물을 가두는 제방)조에 지이포(智耳浦) 10리라 하고 염전이 있다고 했다. 박 원장은 이 부분과 관련, 지이포는 유목정(儒木亭)이 있었다면서 오늘날 상북초등교와 유목초등교 등이 있는 언저리라고 했다. 그곳에서 남으로 5리를 더 가면 오늘의 중앙역이 된다는 설명이다.
봉림산의 이수(里數)를 왜 15리 지점으로 했느냐는 의문에 대해 박 원장은 “당시 모든 지도에 비음산 동 25리 김해계(金海界)라 했다”면서 “당시 비음산은 지금의 비음산이 아니라 김해지역의 산 이름이다”고 했다. 박 원장은 따라서 봉림산은 오늘의 정병산과 법원 뒷산을 아울러 봉림산으로 보았기 때문에 그 이수를 중간지점인 남 15리라 한 것이다고 했다.
박 원장은 “용지 못 위치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창원시청 뒤 용지호수를 말한다”면서 “하지만 창원 마산 진해에서 제일 크고 수심이 깊은 못이 용지라 하였는데 오늘의 시청 뒤 못이 될 수 없음이 분명하다”고 했다. 용지호수는 원래 절반 규모는 해병대 훈련장이었고 못의 규모가 작아 조선시대 제언조에는 나오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박 원장은 “옛 지리지 어디에도 정병산은 안 나온다”면서 “일제시대 조선총독부가 5만분의 1 실측지도를 작성하면서 봉림산이 정병산, 반룡산이 팔용산, 두척산이 무학산, 전단산이 대암산으로 바뀌었다”고 주장했다.
김정대 교수는 정병산은 일제시대 이전부터 등장했다고 반박한다. 그는 가락왕릉기(駕洛王陵記)를 예로 들었다. ‘왕릉은 가야산으로부터 내려와 정병산을 이루고 부 경계에 이른다(王陵…自伽倻山轉上拍換中作精兵山至宇府界)’는 기록으로 보아 김해도호부를 경계로 하는 정병산은 창원대 뒷산인 정병산이 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창원 출신으로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켰던 노경종 선생의 묘비에도 정병산이 나온다고 예를 들었다.
김 교수는 정병산 명칭이 18세기에 이미 지역인들에 회자되고 있었지만, 문헌의 보수성 때문에 전통적인 지리서에는 여전히 전단산으로 기록했다고 설명한다.
그는 창원중앙역에 있다는 못은 이전의 ‘용동못’이 아니라 ‘신리못’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박 원장의 주장대로 창원시청 뒤의 못이 보잘것없는 못이었다면 일제가 1916년에 만든 군사지도에 왜 나오느냐”면서 “이에 반해 신리못 또는 용동못이 이전 용지제이고 인근에서 가장 큰 못이었다면 왜 이 지도에는 나오지 않는가”라고 되묻는다. 그는 “신리못은 애초 ‘용동못’으로 1947년 만들어졌고, 지금은 거의 사라진 ‘용동못’은 1968년에 만들어졌다. 이전 지리서에 이름을 올릴 수 없는 못이었음이 분명하다. 유목정에서 ‘남쪽’으로 5리를 더 가면 있다고 한 용지제는 오늘날 창원시청 뒤에 있는 바로 그 용지호수 위치이다”고 못박았다.
박 원장은 지금의 대암산을 이전의 전단산에서 바뀐 이름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김 교수는 “창원대 뒷산이 부에서 남쪽 방향이라고 하면, 대암산은 부에서 볼 때 더욱 더 남쪽 방향이다. 어찌 그것이 동쪽이 될 수 있는가”라고 반박한다.
그는 “문헌에 따르면 전단산은 염산에서 왔고 불모산과 봉림산은 전단산에서 왔다고 돼 있다. 창원도호부에서 볼 때 전단산은 동쪽 25리, 불모산은 남쪽 30리, 봉림산은 남쪽 15리가 맞다. 박 원장 주장대로라면 봉림산은 염산에서 왔고, 전단산은 봉림산에서 왔으며, 불모산은 전단산에서 왔다고 해야 하는데 이는 지리서의 기록과 다르다”고 말했다. 이학수 기자
※박 원장과 김 교수의 재반론은 13일 게재될 예정입니다. 인터넷 의견은 오는 21일까지 경남신문 인터넷 홈페이지(www.knnews.co.kr) 메인화면 ‘진단’ 배너를 클릭하고 기사를 읽은 후 댓글 형식으로 달면 됩니다. 독자 여러분의 참여를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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